설교에서 길을 묻다
질문과 답변
믿음과 일상의 질문을 설교와 함께 읽습니다.
348개의 질문과 답변
공동체와 돌봄
사랑하는 사람의 부탁이라도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거절해도 될까요?
네, 사랑한다는 이유로 해로운 요구까지 들어줄 필요는 없습니다. 그 사람을 위하는 마음과 그 요구가 선한지를 분별하는 일은 함께 가야 합니다.
공동체와 돌봄
아직 봉사하거나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도 교회의 중요한 지체인가요?
그렇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사람의 자리는 당장 얼마나 일하고 설명할 수 있는지로만 정해지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자라서 쓸모 있어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지금 함께 믿음을 배워 갈 사람으로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공동체와 돌봄
아직 미숙하고 성과가 없는 사람도 먼저 존중해야 하나요?
존중을 잘해 낸 뒤 받는 보상으로만 둘 수는 없습니다. 지금의 미숙함만으로 그 사람의 가치를 닫아 버리지 않고, 하나님이 빚어 가시는 존재로 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도와 예배
부득이한 사정으로 중요한 예배나 절기에 참여하지 못하면 신앙의 기회를 놓친 건가요?
한 번 참석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공동체는 불가피한 사정을 살피고, 그 사람이 다시 함께 예배할 길을 찾는 데 마음을 써야 합니다.
공동체와 돌봄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은 과거 모습과 직업만 봐도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지 않나요?
익숙한 정보가 그 사람의 현재를 모두 알려 주지는 않습니다. 오래 알았다는 확신 때문에 지금의 생각과 고민, 변화에 귀를 닫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기도와 예배
제가 직접 쓴 고백이 아닌 찬송도 진실한 제 고백으로 부를 수 있나요?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노래를 직접 지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 노래가 어떤 하나님을 고백하는지 듣고 공감하며, 나의 마음과 삶을 그 고백에 함께 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의와 이웃
교회에 헌금하고 봉사하면 세금이나 일상의 법규는 조금 편법을 써도 괜찮을까요?
헌금과 봉사가 일상의 부정직을 대신 정당화해 주지는 않습니다. 복음을 말하는 삶과 세금·법규·이익을 대하는 태도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기도와 예배
성찬을 받을 때마다 제가 얼마나 못난 죄인인지 생각하는 데서 끝나도 될까요?
죄를 돌아보는 데서 멈추지 말고, 그럼에도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받아들이셨는지 기억하십시오. 성찬은 자신을 하찮게 만드는 자리가 아니라, 받은 사랑에 합당하게 살도록 부르는 자리입니다.
삶과 일
억울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면 제 진심을 더 분명히 전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이름을 내 결백을 입증하는 도구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사실을 정직하게 말하되, 신앙의 이름으로 상대에게 믿음을 강요하려는 마음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기도와 예배
성찬은 예수님의 과거 죽음만 기억하는 예식인가요?
성찬은 십자가를 기억하면서 다시 오실 주님과 함께할 잔치도 바라봅니다. 이미 받은 구원에 감사하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되새기는 식탁입니다.
삶과 일
급할 때 했던 약속은 형편이 괜찮아지면 그냥 넘어가도 될까요?
위기가 지나갔다는 이유만으로 그때의 말을 가볍게 지워서는 안 됩니다. 급한 상황을 벗어나는 수단으로 약속을 했는지 돌아보고, 말에 따르는 책임을 정직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공동체와 돌봄
예배 뒤 식사나 교제는 신앙과 별개인 친목 시간인가요?
함께 먹고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은 예배와 무관한 덤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이 실제 지체를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는 관계로 이어지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삶과 일
제가 쉬는 것만 챙기면 안식의 의미를 충분히 지키는 건가요?
안식은 나 혼자 누리는 자유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나의 생활과 일에 연결된 사람들도 쉴 수 있는지 함께 살피는 것이 그 의미에 포함됩니다.
공동체와 돌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교회에 먼저 찾아오기를 기다리기만 해도 될까요?
찾아올 수 없는 사람도 있으므로, 기다리는 것만으로 돌봄의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누가 오지 못하고 있는지 살피고, 그 사람의 형편을 존중하면서 먼저 다가갈 길을 찾아야 합니다.
삶과 일
하나님나라를 기다린다는 것은 세상이 바뀔 때까지 가만히 있으라는 뜻인가요?
그 기다림은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찾게 하는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나라를 바라보며 지금 주어진 자리에서 그 뜻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와 돌봄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해결해 주지 못하면 곁에 있어도 소용없을까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함께 있어 주는 사랑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할 수 있는 도움은 찾되, 결과를 바꾸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혼자 남겨 두지 않는 것도 소중한 돌봄입니다.
정의와 이웃
다들 받는 이익이라도 뇌물이나 부당한 대가라면 거절해야 하나요?
관행이 되었다는 이유가 부당한 이익을 정당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얻는 이익이 누구를 해치며 어떤 선택을 요구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공동체와 돌봄
성도끼리 안부를 묻고 축복하는 짧은 만남도 믿음에 도움이 될까요?
진심으로 서로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격려하는 만남은 믿음을 함께 붙드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대단한 가르침이나 긴 프로그램이 있어야만 서로를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정의와 이웃
다른 사람이 어려워진 덕분에 제게 유리한 기회가 생기면 이익만 생각해도 될까요?
나에게 유리하다는 사실만으로 그 선택의 책임이 끝나지는 않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그 고통을 키우면서 이익을 얻는 마음은 따로 돌아봐야 합니다.
교회와 증언
사람이 적은 교회는 누군가의 믿음을 세우는 일에도 한계가 큰가요?
규모가 작다는 사실만으로 사람을 세울 가능성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몇 명이 모이는지뿐 아니라, 그 안에서 말씀을 함께 배우고 삶으로 보여 주며 서로를 길러 가는지입니다.
삶과 일
일하며 수고하는 것 자체가 인간이 죄를 지어서 받은 벌인가요?
일 자체를 죄의 형벌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에덴에서도 사람에게 경작하고 지키는 일이 맡겨졌으며, 일은 생명을 돌보고 세상을 가꾸는 책임과 연결됩니다.
공동체와 돌봄
공동체의 물품이나 지원은 모든 팀에 똑같이 나누어야 공평한가요?
똑같은 몫이 언제나 알맞은 지원은 아닙니다. 각자가 맡은 일과 실제 필요한 도움을 살펴 나누어야 하며, 그 차이를 사람의 가치나 서열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과 성경
말씀의 뜻을 완전히 이해한 뒤에야 작은 실천을 시작해야 하나요?
이해와 실천은 한쪽이 모두 끝난 뒤 다른 쪽을 시작하는 관계만은 아닙니다. 분명히 알게 된 말씀에 응답하는 작은 실천을 통해 신뢰와 이해가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믿음과 성경
성경을 한 장씩 읽을 때 장이 끝나면 이야기의 뜻도 거기서 끝난다고 보면 되나요?
장 번호만으로 내용의 경계를 확정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다음 장의 첫 구절이 앞 이야기와 이어질 수도 있으므로, 실제 내용이 어디서 이어지고 바뀌는지 함께 살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