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에서 길을 묻다
질문과 답변
믿음과 일상의 질문을 설교와 함께 읽습니다.
348개의 질문과 답변
공동체와 돌봄
상대가 먼저 부당하게 굴었는데도 제가 잘못한 말은 인정해야 하나요?
상대의 부당함과 내가 한 말의 잘못은 구별해서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일이 상대의 모든 행동을 옳다고 받아들이는 뜻은 아닙니다.
믿음과 성경
성경에서 뒤에 기록된 이야기는 반드시 앞 이야기보다 나중에 일어난 일인가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앞서 일어난 일을 뒤에서 다시 설명하기도 하므로, 기록된 위치와 실제 사건의 시간을 구별하고 왜 그 자리에 놓였는지 살펴야 합니다.
삶과 일
진로나 다음 선택을 오래 정하지 못하는 시간은 낭비일까요?
아직 다음 길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그 시간을 낭비라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무엇을 위해 살고 어디로 향할지 하나님 앞에서 묻는 시간도 삶을 준비하는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과 성경
민수기의 똑같은 예물 목록이 여러 번 반복될 때는 무엇을 읽어야 하나요?
내용이 같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 예물을 드린 사람이 매번 다르다는 점도 보십시오. 반복은 각 지파의 감사와 헌신이 하나의 덩어리로 뭉개지지 않고 각각 기억되는 모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삶과 일
믿음 좋은 사람이라면 성격이나 삶의 모습도 비슷해져야 하나요?
모두가 같은 성격과 생활 모습이 되는 것이 신앙의 목표는 아닙니다. 세상이 정한 틀이나 교회 안의 획일적인 기준보다, 하나님 앞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빛깔과 책임을 살펴야 합니다.
믿음과 성경
성경을 읽고 바로 쓸 수 있는 교훈을 못 찾으면 잘못 읽은 건가요?
곧바로 쓸 교훈을 뽑지 못했다고 읽은 시간이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먼저 그 말씀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으로 드러나는지 살피고,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과 성경
같은 말씀을 들었으면 모두가 똑같은 행동을 해야 제대로 순종한 건가요?
같은 말씀에 응답하더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감당할 행동은 다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그대로 따라 하기보다 내 삶에서 어떤 정의와 사랑의 열매가 필요한지 물어야 합니다.
기도와 예배
예배가 끝난 뒤 잠깐 조용히 머무는 시간은 왜 필요한가요?
들은 말씀이 마음과 삶에 스며들도록 여백을 갖는 시간입니다. 순서를 마쳤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다음 일로 달려가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들었고 어떻게 살아갈지 잠시 돌아볼 수 있습니다.
삶과 일
약속한 일정이 바뀌면 그 사람을 불성실하다고 판단해도 되나요?
일정이 바뀌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의도를 모두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변경의 이유와 상대에게 미친 영향을 함께 살피되, 약속을 바꾼 사람도 설명과 관계의 책임을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고난과 소망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말씀은 지금까지 한 수고가 모두 헛되었다는 뜻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수고와 인내를 아시면서도 다시 돌아보아야 할 지점을 말씀하십니다. 회복의 권면을 과거 전체의 부정으로 듣기보다, 어디에서 사랑을 잃어 갔는지 살피는 초대로 받을 수 있습니다.
삶과 일
돈과 지위가 생겨 선택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면 더 자유로워지는 건가요?
선택의 폭은 넓어질 수 있지만 그것이 곧 참된 자유의 전부는 아닙니다. 얻은 힘을 잃을까 두려워 바른 선택을 하지 못한다면, 많은 선택권을 가지고도 얽매일 수 있습니다.
공동체와 돌봄
너무 지쳐 주저앉은 사람에게 더 열심히 믿으라고만 말해도 될까요?
믿음을 격려하는 말과 함께 그 사람이 견딜 힘을 얻도록 돌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지친 엘리야에게 사명만 다시 요구하지 않고, 먹이시고 일으키시며 홀로 남은 것이 아님을 알려 주셨습니다.
삶과 일
하나님께 감사하며 받은 것이 오히려 잃을까 봐 두려운 대상이 되면 어떻게 봐야 하나요?
좋은 것을 받은 감사와 그것에 삶을 붙들어 매는 마음은 구별해야 합니다. 선물의 가치를 부정하기보다, 내 생명과 소망을 그 선물 자체에 맡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때입니다.
고난과 소망
수많은 사람이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제 작은 사정도 기억하실까요?
하나님은 사람을 군중의 일부로만 보시지 않습니다. 흩어진 백성을 하나하나 모으신다는 말씀은, 나의 삶도 익명의 숫자 속에 사라지지 않는다는 신뢰로 초대합니다.
공동체와 돌봄
두 사람이 다투었다면 양쪽이 똑같이 잘못했다고 보면 공평한가요?
함께 다투었다는 사실만으로 책임의 성격과 무게까지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갈등을 단순히 반씩 나누기보다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고 어떤 문제가 더 본질적인지 살펴야 합니다.
고난과 소망
고난의 의미를 머리로 이해해도 마음이 계속 아프면 믿음이 없는 건가요?
의미를 이해했다는 것과 마음의 아픔이 사라졌다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믿음의 설명을 알고 있어도 위로와 도움이 필요할 수 있으며, 그 아픔을 숨기지 않고 하나님께 가져갈 수 있습니다.
믿음과 성경
설교를 들은 자리에서 바로 헌신을 약속하지 못하면 믿음이 약한 건가요?
그 자리에서 즉시 약속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믿음이 약하다고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들은 말씀을 생활 속에서 숙고하고, 내가 실제로 감당할 응답을 정해 실행하는 과정도 중요합니다.
공동체와 돌봄
내가 사는 동안만 평안하다면 다음 세대의 문제는 그들에게 맡겨도 될까요?
나의 생애가 평안한 것만으로 공동체의 앞날까지 괜찮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내 뒤에 살아갈 사람들의 삶도 기도와 책임의 범위 안에 두도록 부릅니다.
교회와 증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제 일이나 사역이 계속 커져야 하나요?
내 영향력이 커지는 것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처럼 내 역할이 줄어들 때에도, 하나님이 맡기신 것을 받아 충실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과 성경
문제가 해결됐다는 증거를 보기 전에 말씀을 믿고 움직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원하는 결과를 미리 확신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지 믿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다음 걸음을 내딛는 일입니다. 왕의 신하는 아들이 나았다는 소식을 듣기 전에 먼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삶과 일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일’은 교회 일을 더 많이 맡는 것인가요?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설교는 그 믿음을 종교 활동의 양을 늘리는 것보다, 이미 살아가는 일상 전체에서 예수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일로 설명합니다.
공동체와 돌봄
믿음의 고백은 개인만의 일인가요? 베드로는 왜 ‘우리’라고 고백했나요?
개인의 믿음은 공동체를 붙드는 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설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던 순간 베드로가 ‘우리’라고 고백한 것을, 흔들리는 제자들의 마음을 함께 모으는 행동으로 설명합니다.
고난과 소망
태어날 때부터 겪는 장애나 고통을 본인이나 부모의 죄 때문이라고 설명해도 되나요?
그렇게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보지 못한 사람을 두고 누구의 죄인지 묻는 질문을 거절하시고, 지금 그에게서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일로 관심을 옮기십니다.
믿음과 성경
예수님이 ‘양의 문’이시라는 말씀은 믿는 사람을 울타리 안에 가두라는 뜻인가요?
이 설교에서 문은 양이 갇히는 장치가 아니라 들어오고 나가며 생명과 쉼을 누리는 통로입니다. 예수님은 양을 다른 목적의 수단으로 삼지 않고 그 생명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시는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