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여호수아 22:10~34 (구약 353쪽) 우리 사이에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
2025-06-15 · 설교 원고 · 9쪽 · 약 19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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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후 첫 번째 주일 [여호수아 강해 37]
여호수아 22:10~34 (구약 353쪽) 우리 사이에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
본문 34절의 ‘우리 사이에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 가나안의 모든 기업 분배가 마무리되고 마침
내 그 땅에 안식이 임했습니다. 형제들의 안식을 위해 자신의 안식을 잠시 내려놓았던 요단강 동
편의 두 지파 절반도, 형제들의 진심 어린 축복과 감사 속에 자신들의 기업으로 돌아갑니다.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완벽한 결말이고, 이제 여호수아서도 마지막 결론을 향해 빠르게 나아갑니다.
실로에서 출발해 요단강 동편, 길르앗 땅으로 향하던 두 지파 절반이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 강가
한 언덕에 이르렀습니다. 이 강을 마른 땅으로 밟고 건넌 것이 벌써 7년도 더 된 일입니다. 다시
그 강물을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에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칩니다. 그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벌써 마치 오래전 일인 듯 아련해집니다. 그간의 모든 일도 그렇게 세월
속에 잊히겠지요. 강은 세월과 망각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 강을 건너고 나면, 여기서 경험한
그 모든 하나님의 기적도, 저 멀리 흐르는 시간 속으로 사라져 갈 겁니다.
그런 상념이 잠시 그들의 발걸음을 붙잡습니다. 잊고 싶지 않은 마음, 잊히고 싶지 않은 마음들
이 모여, 기억할 뭔가를 남겨야 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요단강을 건너올 때 길갈에 세웠던 열
두 개의 돌도 생각났겠지요. 오늘은 그때처럼 요단강이 멈춰 서진 않을 테니, 그렇게는 안 되겠
고, 고민 끝에 자신들의 정체성이 담긴 성소 제단을 쌓기로 합니다. 곡식 거둘 때 강이 범람할
걸 생각하면 너무 작으면 곤란하고, 요단강 동쪽이 아닌 서쪽 강가에 세우는 것이니, 이왕이면
강 건너편에서도 보이게 크게 짓자고, 그렇게 두 지파 절반의 마음이 모여 큰 제단을 쌓기에 이
릅니다. 그리운 가족을 만나는 일도 잠시 뒤로할 만큼 그들에겐 중요한 일이었어요. 제단이 다
완성된 후에야 비로소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강가에 큰 제단이 세워졌다는 소식이,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전해집니다.
그들의 반응이 1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
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 분배받은 각자의 기업에서 한창 새로
운 삶을 시작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다시 다 실로에 모였습니다. 어떻게 하
자고 하지요? 네, 싸우러 가자, 전쟁도 불사합니다. 수많은 전리품을 나누며 서로 축복했던 분위
기가 한순간에 싸늘히 식고, 강렬한 적대감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분노한 이유에 대해 본문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네, 실로에 있는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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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외에 ‘다른’ 제단을 쌓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한 장소에서만 제단을 세워
예배할 수 있고, 다른 그 어디에도 사적으로 제단을 쌓아 제사할 수 없도록, 하나님이 율법을 통
해 엄히 금하신 것입니다(레 17:8~9, 신 12:5~14).
이걸 어기는 건 여타의 죄와는 다른 차원입니다. 본문에 자주 등장하는 ‘범죄’, ‘죄’라는 단어 [마
알]은 보통의 죄 [하마르티아]와는 조금 결이 다릅니다. 단순히 어떤 잘못된 행위를 뜻하는 게 아
니라,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는 걸 의미합니다. 부부가 서로 잘못도 하고 실수도 하지요. 하지
만 서로를 배신하는 불륜은 차원이 다른 것처럼, 다른 제단을 쌓고 제사하는 일이 그렇습니다.
사람의 필요에 따라 하나님을 수단화하는 행위로서, 그것 자체로 이미 우상숭배라고 규정하세요.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는 신앙적 타락의 시작이고, 민족의 분열을 조장하는 일이며,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여 다 같이 멸망의 길로 빠지는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그래도 다행히 곧바로 군대를 보내지는 않습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일단 자초지종을 듣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하지요. 열 지파의 지도자들과 함께 한 사람을 대표로 보내는데요, 그게 누구지요?
네, 비느하스입니다. 매우 중요하고 상징적인 인물이지요. 대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로 차기 대제
사장이고, 앞서 모압 여인들과의 음행과 우상숭배로 하나님의 진노를 샀던 바알브올 사건에서,
그 사건의 주범들을 창으로 찔러 죽여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게 했던, 그런 사람입니다. 이런 비
느하스를 대표로 보낸 의도가 보이지요. 단지 대화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강한 경계와 책망도 담
겼습니다. ‘비느하스’ 하면 ‘거룩한 분노’, ‘분노의 창’이 떠오르니까요. 이 사안을 가나안의 열
지파가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명확히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요단강 동편의 지파들도 적잖이 당황했겠지요? 이게 이렇게까지 문제
를 불러일으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세히 힘껏 설명해요. 이 제단은 결코 제
사를 위한 것이 아님을, 다른 목적이 있어서, 주의하고 만든 제단의 ‘모형’(28절)이라는 것을 강
조합니다. 어떤 다른 목적이지요? 네, 훗날 가나안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 동편 백성
들에게, “너희가 우리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나님이 요단강으로 경계를 삼아 너희와
우리를 구별하셨다. 너희는 하나님께 받을 분깃이 없다.” 이렇게 여호와 경외하기를, 예배하기를
그치게 할 수도 있지 않느냐, 지금이야 우리가 가나안 전쟁에 참여한 걸 모두가 알지만, 그것도
세월이 지나면 다 잊힐 일이고, 결국 우리를 공동체에서 소외시킬 수도 있지 않느냐? 그래서 ‘증
거의 제단’을 쌓았다. 요단강 동편과 서편이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 우리가 사는 길르앗 땅
도 하나님 주신 기업이라는 것, 우리도 가나안 전쟁에 참여했고, 비록 요단강으로 인해 지리적으
로는 분리되어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동과 서가 온전히 하나라는 사실을 증언하기
위해, 주의하고 세운 제단 모형(copy)임을 역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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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이 그렇다는 것은 잘 알겠고, 그럼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그 제단을 ‘주의해서’(24절) 세웠다
고 말하는 것일까요? … 만약 그들이 따로 제사를 드릴 거였다면, 그 제단을 요단강 기준으로 어
느 쪽에 세웠겠습니까? 네, 당연히 요단강 동편에, 자기들 기업 안에 세웠겠지요. 하지만 이 제
단은 가나안 땅,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쪽에 세웠거든요(11절). 제사가 목적이 아니라 ‘기념’이,
‘증거’가 목적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주의해서’ 세운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처음엔
오해를 불러일으키지요. 비느하스를 비롯한 서쪽 사람들은 이걸 그렇게 받아들인 게 아니라, 요
단강 동편 사람들이 길르앗 땅을 깨끗하지 않다고 여겨서, 이쪽 가나안 땅에 세운 거라고 해석했
음을 19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설명을 들어보니 충분히 납득이 가는 얘깁니다. 제사장 비느하스와 열 명의 지도자가 이
말을 듣고 좋게 여겼습니다. ‘우리가 오해했구나. 이들도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구나. 요단강
을 건너면서 지금 자기 기업 누리는 일에만 급급한 게 아니라, 나중에 있을지 모를 신앙적 위기,
공동체적 위기를 미리 숙고했구나, 주의했구나, 이런 갈등이 있을 걸 예상하고 나름 조심하려고
노력했구나.’ 그들의 마음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들의 보고를 전해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즐거워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33절). 함께 하나님
을 찬송했고, 길르앗 땅에 가서 싸우자는 말을 ‘다시는’ 하지 않게 됐습니다.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졌지요. 오해와 갈등이 있었지만, 그래서 더욱 하나가 됐습니다. 서로의 진심을 확인했고, 각
자 상대방을 배려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분노와 흥분을 가라앉
히고 먼저 듣고자 했던 것, 오해를 피하려고 강 서쪽에 제단을 쌓은 것을 알고, 서로를 더 신뢰
하게 됐습니다.
사람이 모이면 갈등은 어디나 있고, 어느 공동체든 그 갈등을 통해서 성장합니다. 교회도 마찬가
지지요.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주님만 함께 계신 게 아니라, 갈등도 함께 있
습니다. 좋은 일, 선한 일에도 갈등이 생기지요. 서로의 진심과 열정이 만날 때 더 큰 오해가 생
깁니다. 그러니 갈등 자체를 이상하게 여길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다른 사
람들이 모였으니, 갈등은 필연이구나.’ 받아들이고, ‘이 갈등을 통해 우리가 더 단단해지겠구나.’
기대하는 마음으로, 서로의 요단강을 건너면 됩니다. … 당장은 힘들어도 사실 갈등은 고마운 존
재지요. 건강에 이상이 생겼음을 알리는 어떤 증상처럼, 서로가 얼마나 다른지, 무엇을 조심해야
할지를 상기시켜 주고, 그래서 훗날 가래로도 막지 못할 큰 문제를 호미로 막게 해 줍니다. 갈등
을 분열의 씨앗이 아니라 연합의 씨앗으로 받아들이고, 두려움이 아니라 기대감으로 소통의 노력
을 기울일 수만 있다면, 공동체는 지금보다 훨씬 더 건강한 모습으로 자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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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땅을 정복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새로운 문제를 마주하게 됐습니다. 외부의 적으
로 인한 전쟁과 혼란은 당분간 사라지게 됐지만, 그동안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또 다른 문제
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공동체의 분열과 소외의 문제, 또 그로 인한 예배의 오염과 신
앙적 타락의 문제가, 기다렸다는 듯 수면 위로 떠오른 것입니다.
요단강이라는 물리적 경계가 결코 만만하게 볼 문제가 아님을, 이번에 양쪽 모두 제대로 알게 됐
습니다. 단지 왕래를 어렵게 하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요단강 동쪽과 서쪽의 지리적 환경이 다르
고, 그에 따른 삶의 모습도 달라서, 점점 더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워질 겁니다. 모든 지파가 섞
여서 살지 않고, 같은 지파끼리 모여 살기 때문에, 각자의 응집력은 더 강해지겠지요. 피는 물보
다 진한 법입니다. … 여기서 유일한 예외가 므낫세 지파인데요, 한 지파가 둘로 나뉘어, 가나안
땅과 길르앗 땅 모두에 거주하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분열의 위험이 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므낫세 지파 절반을 뺀 두 지파, 르우벤과 갓 지파 이름만 등장하는 곳이 자
주 발견됩니다(25, 32, 33, 34절). 므낫세는 어차피 분열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르우벤과 갓
두 지파를, 이번 사건의 핵심에 두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므낫세 지파의 역할이 중요하겠
지요. 동쪽과 서쪽의 가교역할을 하면서, 통합을 유도할 수 있습니다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요단강이라는 물리적 경계가 워낙 강력합
니다. 오죽하면 지금도 사람이 죽으면 요단강을 건넜다고 하겠습니까? 그만큼 동서, 좌우가 서로
다르고, 그걸 건너 연합하는 일이 힘들다는 뜻입니다. 요단강은 그 양쪽을 일종의 섬으로 만들어
요. ‘그 섬들을 어떻게 연결하고 신앙 안에서 연합할 것이냐?’, 그 어렵고 중요한 과제가 이스라
엘 공동체 안에 주어진 것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증거의 제단’을 쌓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실질적인 기능을 발휘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요단강 동쪽도 아니고, 서쪽에 있는데, 바쁜 일상에서 누가 굳이 강을 건너 거기까
지 가서 과거를 기억하고, 또 자녀들에게 그때 일을 설명하겠습니까? 실제로 오늘 세운 이 증거
의 제단은 이후로 성경 어디에도 다시 등장하지 않습니다. 처음 세울 때 의도했던 기능을 온전히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뜻입니다.
동서로 나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눈에 보이는 ‘증거의 제단’이 아닙니다. 그들
을 택하여 부르시고, 그들 가운데 함께하셔서 그들을 연결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함께
예배하며, 오늘처럼 끊임없이 서로를 향한 소통의 수고를 감내하는 것, 그것만이 그들을 ‘오해
넘어 이해’로 나아가게 합니다. 솟구치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먼저 사람을 보내 듣고자 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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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릴 어떻게 보고 그리 오해할 수 있느냐?’ 흥분하지 않고 차분히 진심을 이야기할 때, 거기서
부터 위기는 기회가 됐습니다. 믿음 안에서 우리가 하나임을 기억하고, 그렇게 서로에게 다가가
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을 때, 우린 비로소 요단강이 갈라놓은 섬이 아니라, 요단강을 품은 하
나의 기업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가 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합니다(엡 4:3).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아닙니다. 이미 하나가 되
게 하신 것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수많은 다름과 이해되지 않음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이
미 하나 되셨다는 사실을 굳게 붙잡고, 어떤 오해와 갈등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 됨을 지켜가기
위해, 그 하나 됨을 확인하기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첫 번째 비전이기도 하지요.
믿고 하나 되기보다 하나 되어 믿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 이미 하나가 되게 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그 부르심을 함께 살아내자고 했습니다.] 이미 하나인 줄 믿고 그것을 힘써 지켜내
는 것, 그것이 여호와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과 하나 된 것을 지키는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엄연히 다릅니다. 부부가
되고자 하는 것과 부부 된 것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가 ‘되고자’ 하
는 노력은 그 일이 어렵다고 판단됐을 때 쉽게 중지됩니다. ‘아, 달라도 너무 다르구나. 하나가
될 수 없겠구나. 나도 할 만큼 했고, 여기까지인가 보다.’ 자포자기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하나가
된 것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그 다름마저 견디고 기다리고 인내하게 합니다. 나에게 방법이
없다고 여겨질 때조차 포기하지 않고, 하나가 되게 하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지요. 서로의 그
다름이야말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계심을 증언하는 가장 분명한 증거임을 기쁘게 확인하고 누
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믿고 그것을 힘써 지켜낼 수 있을 뿐입니다. [아멘] … 그것을 어떻게 힘써 지켜내라고 성경이
계속 말하냐면, “…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 말
씀합니다(엡 4:1~2). 한 번 저를 따라 해 보실까요?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과 사
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라.’ 네, ‘모든 겸손과’, 완전히 낮은 자세와 온유함으로,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며, 참을성을 가지고 서로를 용납해 주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일입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를 일주일 앞두고, 저와 저희 처가 식구들이 다 같이 모여 있는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 장모님의 긴 글 하나가 올라왔습니다. ‘자식들에게 보내는 편지, 아버지의 간절한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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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는 제목의 글이었는데요, “사랑하는 아들, 딸 그리고 사위, 며느리에게, 오랜만에 이렇게 펜
을 든다.”로 시작해서, “부디, 이번 6월 3일. 부디 내 간절한 마음을 새겨다오. 우리 가정의 마지
막 기도가 되어다오.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로 끝나는 애절한 편지였습니다. 자녀들이 특정 후
보에게 꼭 투표하길 바라는 내용인데, 아마 신앙을 가진 부모님들 사이에 널리 퍼진 글이 아니었
나 싶습니다. 혹시 우리 성도님들 중에도 부모님께 그런 메시지를 받은 분이 계시는지 모르겠습
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런 문자를 받았다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장모님의 그 카톡에 자녀, 손자 중 네 사람이 반응을 보였습니다. 저와 조카, 그러니까 장모님의
손녀딸은 아무 말 없이 하트를 눌렀습니다. 솔직히 저도 할 말은 많았지만, 어머니의 진심을 알
기에 꾹 참고 하트로 대신했습니다. 제 아내는 세 글자로 짧은 답글을 달았는데요, “에라이.”라
고 쓰고 나중에 전화해서 따로 막 뭐라고 했습니다. ‘엄마’다 이거지요. … 그런데 아내의 오빠,
그러니까 저희 처남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어머니, 새겨듣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어떻
습니까, 대단하지요? 그리스도인의 어떤 품격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저는 그 문자를 보고 또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저는 어머니의 그 글을 보고 마음이
좀 어려워져서, 한글 프로그램을 열어 ‘사랑하고 존경하는 어머니께’로 시작되는 긴 글을 써 내
려가려던 참이었거든요. 만약 장모님이 아니라 저희 어머니가 그런 문자를 보내셨다면, 저도 “에
라이!”로 끝나지는 않았을 겁니다. … 저는 처남의 정치 성향이 어떤지 아내에게 들어 알고 있었
고, 결국 장모님의 뜻대로 투표하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처남의 그 말이 진심이고, 또
그 마음 안에 어떤 노력이 담겨 있는지, 그리고 그 노력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기에, 절로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그런 작은 노력이 모이고 쌓여서 ‘가족’을 ‘가족’ 되게 하는 거지요. 눈
에 보이는 ‘가족 증명서’가 아니고 말입니다. 장모님이 가족 중에 누구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
이시겠습니까? 네, 목사 사위나 사모인 딸의 이야기가 아니지요. ‘듣는 마음’으로 듣고 있는 그
아들의 말이, 마음에 더 깊이, 더 오래 머물 것입니다.
다 아시겠지만, 사람은 결코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각자 처한 자리가 다르고, 환경
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고, 두려움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이해할 수 없고, 자식도
부모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부부도, 친구도, 마찬가집니다. 사랑하지만, 이해는 안 되는 게 가족
입니다. 그래서 사랑과 이해는 별개입니다. 사랑하니까 이해가 되는 게 아닙니다. 이해가 안 되
지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해, 한 번 더 다가가는 그것이 곧 사
랑일 뿐입니다.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에서 기억나는 장면 중의 하나가, 애순의 딸 금명이가 결혼해서 딸 새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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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낳았는데, 그 딸이 아침에 옷도 여러 번 바꿔 입고, 밥도 천천히 먹고, 그래서 출근하는 엄
마를 너무 힘들게 합니다. 그래서 하루는 금명이가 딸의 머리를 빗겨주면서 물어보지요. 왜 이렇
게 아침마다 땡깡을 부려서 엄마를 힘들게 하냐고, 그랬더니 딸 새봄이가 그래요. 내가 밥 빨리
먹으면 엄마가 더 빨리 회사 간다고. 내가 밥 다 먹고 옷 다 입으면 엄마가 회사 가니까 그래서
땡깡을 부린다는 거예요. 최대한 엄마랑 오래 있고 싶어서. 엄마 최대한 회사 천천히 가라고. …
참 이해는 멀고, 오해는 가깝지요. 그건 사랑해도 마찬가집니다. 아니, 사랑해서 오해가 더 깊어
집니다. 표현하기 어려워서, 그걸 말하고 나면 상대가 더 힘들까 봐, 아플까 봐 걱정돼서, 그래서
마음을 감추고 엉뚱한 표현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줍니다.
그러니 이해되지 않는다고 두려워하거나 머뭇거리면 안 됩니다. 이해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이해받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두려워하며 서로에게 다가가길 멈추면 안 됩니다. 이해되지 않아
도 사랑할 수 있고,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끝까지 이해가 안 돼도 괜찮습니
다. 주님 다시 오셔서 모든 희미한 것이 사라지면, 다른 것들은 다 사라지고 사랑만 남게 되면,
그땐 서로를 온전히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 그때까진 이해하기 위해 다가가는 게
사랑입니다. 듣기 위해, 알기 위해,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기 위해, 한 번 더
요단강을 건너는 것, 따지고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듣기 위해서 강을 건너는 것, ‘칼’이 아니라
‘듣는 마음’을 가지고 건너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서로 나눌 수 있는 가장 귀한 사랑이고,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되시는 진정한 증거임을, 여러분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듣는 마음’의 가장 중요한 자세가 있다면, 그것은 그 들음으로 인하여 내 생각, 내 입장이 바
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반드시 열어두는 것입니다. ‘듣기는 하겠지만 달라지는 건 없어.’ 이게 아
니라, 대화를 통해 나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언제든 정정할 수 있다는 자세로 상대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일 때, 설사 그는 바뀌지 않아도 내가 바뀔 마음으로 대화할 때, 우리는 비로
소 누군가의 마음이 바뀌는 기적을 보게 되곤 합니다.
지난주에도 잠깐 말씀드렸던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 가나 혼인 잔치를 다시 기억해 보면요, 예
수님과 어머니 마리아의 대화를 통해 사건이 진행되지요. 포도주가 떨어지자, 마리아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다는 얘길 합니다. 그러자 주님이 뭐라고 하시지요? 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하십니다. 명백한 거절로 이해되는 말씀인데,
이상한 건 마리아의 그다음 반응입니다. 하인들을 향해,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져요. 주님이 마리아의 그 말을 외면하지 않으
시지요.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인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렇게 물을 포도주로 바꾸십니다. 분명
히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하셨지만, 말씀하신 그 ‘때’가 누군가의 믿음을 통해 ‘지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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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셨고, 그렇게 마리아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수용하는 과정을 통해
첫 번째 기적을 이루어 내십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입장을 바꾼 게 아니라, 주님이
마리아의 말에 바뀌시지요. 어쩌면 그것이 하나님의 진심이고,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죄로 인하여 원수 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먼저 당신을 바꾸셨습니다. 우리를 이해하
기 위해, 체휼하기 위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시지요. 우리와 하나가 되기 위해 우리를 먼
저 바꾸신 게 아니라 주님 자신을 먼저 바꾸셨고, 지금도 그렇게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변
화시켜 가고 계십니다. … 사랑이 결국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대단한 희생이나
그런 것이기 전에,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내가 더 낮은 자리에서 듣고자 하고, 단지 듣기만 하
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말로 인해 영향받고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듣는 것. ‘열
심히 말해 봐. 나는 끄떡도 하지 않을 거야. 들어는 줄게. 하지만 내 신념은 견고해.’ 이게 아니
라, 경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내 생각을 고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듣는 그런 모습이야말로, 성
경이 말하고 주님이 보여주시는 사랑이 아닌가, 그런 자세야말로 이 땅에서 복음을 살아내는 저
와 여러분이 가져야 할 성도의 겸비함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사람의 신념이나 생각이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것을 세상은 참 좋게 여깁니
다만, 역설적으로 그렇게 우리의 어떤 생각이나 신념, 또한 신앙의 내용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는 것, 내 관점이 늘 일관된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또 비신앙적일 수 있는 지도 우리
는 경계해야 합니다. … 과거에 하나님에 대해 알던 믿음의 고백과 지금의 고백이 동일하다면,
그건 단지 우리의 신앙이 견고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하나님 아는 일에 대해 그만큼 게을
렀다는 뜻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낯선 이야기는 들으려 하지 않고, 듣긴 들어도 내 관점을 고
집하고, 들은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고, 그저 내게 익숙한 이야기들만 날마다 듣고 생
각하고 축적하면서 살아온 결과인데, 그걸 우리는 변치 않는 신념이라고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것
은 아닙니까?
결혼한 부부의 사랑이, 친밀함이, 서로에 대한 앎이, 세월에 따라 변합니까, 변하지 않습니까? 당
연히 변합니다. 깊어지고 자라가지요. … 제가 아내에게 한 번 물어봤습니다. 결혼 전에 가졌던
사랑이 만약 100이라고 치면, 지금은 어느 정도 되냐고. 저는 한 200 정도 기대했는데, 아내는
1,000도 훨씬 넘는다고 하더군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지식도 마찬가지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서
로를 이해하는 게 똑같다면 심각한 문제일 겁니다. 그만큼 자기중심적으로 살았다는 뜻이지요.
…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집니다. 변하지 않는 게 좋은 신앙이 아닙니다. 변하는 게 좋은 신
앙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앎이, 친밀함이, 변하고, 깊어지고, 새로워지고, 자랐다는 뜻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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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입니다.
성도는 변하는 걸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변질은 두려워해야 하지만, 변화는 아닙니다. 오히려
변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고 근심해야 합니다. 변하지 않는 신념이 대단한 게 아닙니다. 변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게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 신앙만이 살아남고, 그런
신앙만이 세상 속에 영향을 끼치게 될 겁니다. …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늘 ‘듣는 마
음’을 가지고, 기꺼이 변할 각오로 대화해야 합니다. 그런 태도와 노력이 있을 때, 우린 비로소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킬 수 있게 되고, 세상과 하나님을 잇는 거룩한 통로로 쓰임
받게 될 겁니다.
교회든 성도든, 우리는 세상에서 또 하나의 섬이 아니라, 그 섬들을 연결하는 다리로, 평화의 끈
으로 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미 세상은 충분히 분열됐고, 충분히 고립됐습니다. 그런 세상
을 더 병들게 하는 일에 교회가, 성도가 앞장선다면, 결국 교회 홀로 고립된 것을 보게 될 겁니
다. 지금 대한민국의 교회처럼 말이지요.
기독교는 강물이 아니라 바다와 같습니다. 동과 서를 가르는 요단강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
을 나누고, 진보와 보수를 나누고, 부자와 가난한 자를 나누는 요단강이 아니라, 그런 강들을 다
품고 정화하는 대양이 우리의 신앙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다는 그 어떤
강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품이 아주 넓지요. 어떤 더러운 강물도 받아들이고, 정화하고, 융화시
켜서, 더 많은 생명으로 충만하게 합니다. 강물이 꿈꿀 수 없는 깊이와 거대함으로 존재하는 것,
그게 기독교라는 바다입니다. … 그런 바다를 기어이 강물로, 개울물로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고, 자신을 그 물에 가두는 사람들도 너무 많습니다만,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를 반
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라고 하신 주님 말씀(막 9:40)을 다시 한번 들려주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우리 사이에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는, 눈에 보이는 어떤
제단이나 형식, 제도가 아닙니다. 누군가 나로 인해 오해하고 괴로워하고 욕하고 죄짓지 않도록
미리 그 의도를 설명하고 소통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는 것, … 또한 누군가를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기 전에, 그의 이야기를 듣고자 애쓰고 그전에는 판단을 중지하는 것, … ‘뭔가 이유가 있
겠지.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을 거야. 그게 뭔지 한 번 들어 봐야겠다.’ 그렇게 먼저 듣고자 하는
것, … 내 처음 생각을 내려놓고 상대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 듣는 마음, … 이런 것들이야말
로 신앙의 참된 증거임을 기억하셔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며, 세상의 섬이 아
니라 그 섬들을 잇는 다리 되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우리고백교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