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2026-05-17 · 설교 원고 · 9쪽 · 약 18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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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백교회 - 1 - 부활절 일곱 번째 주일 [요한복음 강해 33] 요한복음 9:1~12 (신약 160쪽)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본문 4절의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 돌을 들어서 치려고 하는 사람들을 피해, 성전에서 숨어서 빠져나오신 예수님께서,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셨습니다. 태어나서 단 한 번 도 뭔가를 눈으로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도, 아름다운 자연도, 심지어 자신의 모습도 보지 못한 채 살아온 그 막막함을, 감히 상상도 하기 어렵습니다. 무슨 일을 할 수도 없 고, 어디를 마음대로 다닐 수도 없었겠지요. 본문에 보면 사람들이 그를 향해,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8절)이라고 표현합니다만, ‘앉아서 구걸하는 사람’, 너무나 안타깝고 고달픈 삶이지요. 아무 소망도 없이 늘 같은 자리에 주저앉아, 그저 다른 사람의 은혜에 의존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너무나 무력한 삶입니다. 그런 그를 예수님이 ‘보셨다고’ 1절은 말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볼 수 없으니, 주님이 그를 보십 니다. 그가 주님에게 갈 수 없으니, 주님이 그에게 오십니다. 그런데 결에 있던 제자들이 그 모 습을 보고 얘기합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지, 자신의 죄 로 인함인지, 아니면 부모의 죄로 인함인지, 주님께 여쭤봅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하는 질문이지만, 이 사람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말이고, 아마 그가 평생 들 어왔던 말일 겁니다. 앞을 못 보는 것도 서러운데, 그게 내 부모나 내 죄 때문이라니, 억장이 무 너집니다. 사람은 각자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다는 신명기 말씀도 있습니다만(신 24:16), 부모가 지은 죄로 인해 왜 자녀가 맹인이 되어야겠습니까? 불교나 힌두교에서 말하는 것 처럼, 무슨 전생의 업보(karma)가 있는 것도 아니고, … 또 어떻게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죄 를 짓겠습니까? 엄마 뱃속에 있으면서도 죄를 짓는다는 말인지,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거의 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죽음과 고난이 결국 죄로 인한 타 락의 결과이기 때문에, 한 개인의 질병도 죄와 관계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각 사람이 자기 죄로 인해서만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도 있지만,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이셔서 아버지의 죄를 본인 에게만이 아니라 삼사 대까지 벌을 내린다는 말씀도 있습니다(출 20:5 등). 태어나기 전에, 엄마 뱃속에서도 죄를 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에서와 야곱이 리브가의 태 속에서 서로 ‘싸웠다 는’ 창세기의 말씀도 있는 것처럼(창 25:22), 태아가 형성되는 순간부터 사람은 악의 영향을 받는 다고 여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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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그건 쌍둥이니까 그렇다고 치고, 그럼 혼자서는 엄마 뱃속에서 무슨 죄를 지을 수 있을까요? 그 리고 설사 죄를 짓는다고 해도, 그게 사람을 나면서부터 맹인으로 만들 만큼 심각한 죄일 것 같 지는 않습니다만, 그럼에도 뒤에 가서 보면, 이 맹인이 눈을 뜬 이후에도 여전히 바리새인들은 이 사람을 향해,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태어났다고 단정하면서, 예수님에 관해 증언하는 그를 결국 유대교에서 출교시켜 버리는데요,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죄와 질병, 죄와 고난을 철저하게 인과적인 관계로만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 예수님이 전혀 예상치 못한 말씀으로 답하시지요. “그가 맹인으로 난 것은 이 사람의 죄로 인한 것도 아니고, 부모의 죄로 인한 것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나타내려 하실 뿐이다.” 말씀합니다. … 이 사람의 장애가 과거 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하십니다. 오히려 앞으로 그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실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초 점이 과거에 있지 않고, 미래에 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질병이나 고난에 대한 완전히 다른 패러다임이지요. 사람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사람 때 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 때문이다, 굳이 책임이나 원인이 있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물론 명확히 사람이 잘못해서 당하는 고난이나 질병도 있습니다. 술과 담배를 너무 좋아해서 몸 이 망가지기도 하고, 또 너무 많이 먹고 움직이지 않아서 생기는 질병이 나 자신은 물론 자녀들 에게까지 영향을 끼치기도 합니다. 모든 행동에는 결과가 뒤따르지요. 하지만 그 결과가 언제나 필연적인 것은 아닙니다. 일평생 술, 담배 하시면서도 백 세 넘게 장수하시는 어르신들도 많이 계시고,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 없이 절제하며 사신 분들이 오히려 그와 관련된 질병에 걸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태어나면서 가지게 된 질병이나 장애야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 그 원인을 다 찾을 수도 없을뿐더러, 설사 찾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일반화해서 적용할 수 도 없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그 원인에 따른 결과가 사람마다 다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입니 다. 여러분 욥의 고난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혹시 기억나십니까? 네, 죄를 지어서 당한 고난이 아니 라, 실은 그가 너무 의로워서 당한 고난이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이 사탄에게 말씀하시지요. “네가 나의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 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그랬더니 사탄이 반발합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시면, 그의 건강을 치시면, 틀림없이 하나님을 향해 욕하지 않겠나이까?” 거기서부터 욥의 고난이 시작됐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욥의 죄가 아니 라 의로움이 이유였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촉발하신 고난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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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나면서부터 가진 질병이나 장애의 궁극적인 원인이 하나님이라고 분명히 선언하는 성경 구절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려 하실 때, 자신은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 다고 하면서 모세가 자꾸 뒤로 물러서자 하나님이 말씀하시지요.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 냐?”(출 4:10~12) 하십니다. 그런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주권이 결국 하나님께 있음을, 직접 밝 혀주십니다. 다른 이유나 원인이 아니지요. 단지 하나님이 정하셨고, 하나님이 허락하십니다. 그 러니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는 우리로서는, 세상에 일어나는 고난과 재앙의 원인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비록 인간의 죄가 이 세상을 고난으로 가득하게 만들어 낸 건 분 명합니다만, 누군가의 고난이 항상 그 사람의 죄로 인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적어도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믿는 성도라면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왜’라는 질문을 참 좋아합니다. 어떻게든 이유를 알고 싶어 하고 그래야만 속이 시원합 니다. 아마 어떤 일의 이유를 생각하는 거의 유일한 피조물이 인간일 텐데요, 동물이 ‘어떻 게’(how) 살아남을까를 고민할 때, 인간은 ‘왜’(why) 살아야 하나를 고민합니다. 영화나 드라마에 가장 자주 나오는 대사 중의 하나가, “왜?”이지요. “나한테 왜 그랬어?”, “도대체 이유가 뭐 야?”, “왜 하필 나였어?”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했을 때도, 배신자를 향해 총을 겨누는 순간에도,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면서도, 인간은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곱씹습니다. 그게 그렇게도 중요하지요. 이유를 알아야 납득하게 되고, 납득이 되어야 견뎌집니다. 또다시 그런 고 난을 겪지 않기 위해서라도 원인을 알아야지요. 그래야 대비할 수 있고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은 누구나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일단 이유를 찾고, 결국 누군가의 ‘탓’을 하게 됩니다. 남 탓을 하든 내 탓을 하든, 이유를 아예 모르는 것보다는, 틀린 이유라도 알아야, 만들어야 마음이 놓이기 때문입니다. 설명할 수 있어야, 통제가 가능하지요. 그리고 통제할 수 있어야 불안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 이유가 그 사람의 죄이기 때문에, 그 런 맹인으로 태어나고 그런 고난을 당하는 거여야만 합니다. 그래야 그런 일이 부지불식간 나와 내 가족에게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그 ‘탓’의 대상을,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로 돌리면서 상황을 복잡하게 하십 니다. 그의 탓도 아니요, 부모 탓도 아니요,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 하심이다, 하나님의 주권 탓을 하시는데요, 이건 참 난감한 일입니다. 원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건, 사실상 우리가 그 원인을 알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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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주님은 심지어 ‘원인’이 아니라 ‘목적’을 말씀하시지요. 과거의 죄가 아니라, 지금, 그리고 미래에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에 대해 말씀하세요. 오늘 본문의 핵심이 그거지요.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 어난 ‘이유’를 찾고 그걸 설명하려고 하시는 게 아니라, 다만 그를 통해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 실 것인지, 주님은 거기에 집중하십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우리는 이 말씀을 다시 이 장애의 원인 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를 맹인으로 태어 나게 하셨다, 그런 뜻이 아니지요. 초점이 거기 있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맹인이 된 이유가 중 요한 게 아니라, 이제 그를 통해 나타날 ‘하나님의 일’이 중요하고, 더 중요한 것은, 그 일을 다 름이 아니라, 지금 주님과 ‘우리가’ 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부분입니다. 아울러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일’이란 단순히 그가 눈을 뜨는 것만을 말하지도 않습 니다.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에게 다 그렇게 기적적인 치유로 ‘하나님의 일’이 나타나는 게 아니 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있던 문제가 다 해결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 의 구원을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자신의 질병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세 번 기도했지 만, 그를 향한 ‘하나님의 일’은 그 질병이 치료되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약한 거기 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남을 깨닫고, 오히려 자신의 약함 가운데 나타날 주님의 능력 을 사모하는 것으로,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집니다. 단지 맹인이 눈을 뜨게 되는 그런 ‘하나님의 일’을 주님이 하려고 하셨다면, 주님은 그냥 그 자 리에서 즉시 그의 눈을 고쳐주셨을 것입니다. 이것저것 하실 것도 없이 그냥 말씀으로 고치셨겠 지요. 굳이 앞도 보이지 않는 사람을 먼 실로암까지 보내실 이유가 없습니다. 땅에 침을 뱉어 진 흙을 이기고, 그걸 눈에 바르셨는데요, 괜히 그렇게 번거롭고 약간은 위생적이지(?) 않은 방식으 로 고치실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주님은 지금 뭔가 다 른, 뭔가 더 중요한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심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앞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일’에 대해 뭐라고 하셨는지 기억나시지요? 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바로 그 일이 이 맹인에게서 이루어지도록, 주님이 일하고 계시 지요. 나중에 더 다루겠습니다만, 오늘 본문 이후에 계속되는 9장의 내용은, 그가 눈을 뜬 이후 에 어떻게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고 그래서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게 되는지, 그 믿음의 과정에 주목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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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예수님은 그를 실로암으로 ‘보내서’ 그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그렇게 그가 예수님을, ‘자신을 보내 는 분’으로 경험하고 믿게 하십니다. 여러분, ‘실로암’이 무슨 뜻이라고요? 네, 군대 다녀오신 분 들은 ‘실로암’ 그러면 신나게 박수하며 목이 터지라 불렀던 찬송이 생각나시겠습니다만, ‘실로암’ 은 ‘보냄을 받았다’라는 뜻이고, 결국 하나님께 보냄을 받아 오신 예수님을 상징하기도 합니다만, 주님은 그가, 자신을 보내시는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함으로 낫게 하십니다. 주님을 정말 로 믿게 하시지요.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데, 그 일이 그에게서 이루어 지도록 주님은 그를 ‘보냄 받았다’는 뜻의 실로암으로 ‘보내십니다’. ‘보냄’이라는 말로 본문이 정 말 겹겹이 싸여 있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세요.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인지를 묻는 그들에게,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하십니다. 맹인에게서 하나 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 일을 주님이 혼자 하시는 게 아니 라, ‘우리가’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한다’라는 이 표현 속에는 강한 의무의 뜻이 담긴 조동사 [δεῖ](데이)가 들어가 있어서, 영어로는 ‘must’에요. 우리가 반드시 그 일을 해야 한 다는 거지요. 고난의 원인에 대해 묻는 일을 멈추고, 그 상황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하는 일을 함께 감당하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빛’ 되신 주님이 세상에 계시니 때가 아직 낮인데, 그 밝음의 시간을 예수님은 ‘일할 수 있는 시 간’으로 규정하신다는 데, 우리는 주목하게 됩니다. 여러분 낮에 주로 뭐 하시지요? 네, ‘낮’은 어디 가서 뭘 구경하거나 가만히 앉아서 얘기나 하고 있을 시간이 아니라, 일할 때라고 하세요.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하자고 하시지요. 고난의 이유나 찾고, 누구 탓이나 하면서 그 귀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찾아올 테 니,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일을 해야만 한다고, … 도대체 제자들이 그 상황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혹시 그 맹인의 손을 잡고, 그가 실로암까지 가는 길을 함께 가 주고, 그가 실로암에 들어가는 일, 눈에서 진흙 씻어내는 일을 도와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행하자고, 제자들을 이끌어 격려하십니다. 그냥 옆에서 주님 하시는 일을 보고만 있는 존재가 아니지요. 구경꾼이 아니라 동역자로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부조리한 고난들, 이유를 알 수 없는 재앙과 장애와 그로 인한 고통에 대해, 주님을 믿는 성도가 어떤 모습, 어떤 태도여야 하는지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지요. 여러분, 우리는 그런 문제의 이유나 따지면서, 그게 누구 탓인지 밝히는 데 시간을 쏟도록 택함을 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물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원인을 알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만, 거기서 멈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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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게 아니지요. 그다음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고난 속에 있는 자들을 ‘주목하고’, 그들에게로 ‘(다가)가서’,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일이 나타날 수 있도록 주님과 동역하는 그런 하나님의 일꾼 이 저와 여러분임을, 꼭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바로 다음 단락에 보면, 예수님께서 진흙을 이겨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날이 안식일이라고 나옵니다(14절). 그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본문이 더 입체적으로 다가오는데 요, 맹인을 고치시기 위해 진흙을 이긴 그 행위가 안식일을 범하는 ‘일’이었다고 정죄하는 바리 새인들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맹인이 있던 곳에서 실로암까지의 거리를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보통 유대인들은 2천 규빗, 약 900m 이상은 안식일에 걷지 못하도록 정하고 있거든요. 만약 실로암까지의 거리가 그보다 더 멀었다고 한다면, 그것 또한 안식일을 범하는 ‘일’이 되고 말겠지요. 주님은 그렇게 굳이 종교적인 논란을 자초하는 방식으로, 안식일에 일을 하시고 또 그것을 명확히 드러내는 방식으로 그를 고쳐주십니다. 이 일의 의미와 시급함을 제자 들에게 강조하기 위함이고,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그 일을 감당해야 하는지 분명히 보여주신 것 입니다. 사실 주님이 진흙을 만들어 눈에 바르시는 부분은 마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 사 역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볼 수 없이 태어난 그에게, 볼 수 있는 눈을 새로 만들어 주시는, 그 렇게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완성하시는 장면처럼 느껴지는데요, 그런데 여러분, 태초에 하나님께 서도 흑암을, 어둠을 마주하셨지요. 창세기에 보면 창조 전에 이미 땅과 물과 어둠이 있었다고 나옵니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성경은 창조 이전의 세상을 그렇게 묘사합니다. 진흙(땅)과 침(물)과 맹인(어둠)이 나오는 오늘 본문과도 연결되는데요, 하지만 성경은 그 어둠을 설명하거나 해석하지 않지요. 그것이 어디서 생겨났는지, 왜 창조 이전의 세상이 그런지에 대해 말하지 않 고, 단지 하나님이 일을 하셨다고만 기록합니다. 빛을 창조하시고, 그 빛을 누리며 살아갈 생명 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오늘 주님이 행하신 치유의 기적 속에는, 하나의 일관되고 분명한 메 시지가 존재하지요. 이 땅에는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어둠과 재앙과 고난이 항상 현존합니다만, 그 속에서 하나님은 계속 일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주님을 보내신 분 의 일을 함께 행하자고,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고 계십니다. … 태초의 창조는 하나님이 혼자 행 하셨지만,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와 믿음의 사역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우리를 통해 행하시겠다고 하시지요.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해야만 한다, “나를 믿는 자는 내 가 하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 이라.”(요 14:12)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주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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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백교회 - 7 -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일에 참여하도록 보냄 받은 주님의 동역자라는 사실을, 우리가 믿고 살아낼 수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그런 ‘일꾼들의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대해, 세상의 아픔에 대해 서로 이야기만 많이 하면서, 우리에겐 그런 고난이 없기를 기도하는 그런 어떤 겁많은 구경꾼들의 교회가 아니라, 단지 우리 교회에 더 많은 성도를 보내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는 교회가 아니라, “추수할 것은 너무나 많은데 일꾼이 적으 니, 하나님 일꾼들을 더 보내 주십시오.”(마 9:37~38) 기도할 수 있는, 그런 착하고 충성된 종들 의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실로암으로 보냄을 받아 가는 그 순종의 발걸음 속에서 이 맹인의 눈이 치유된 것처럼, 우리 삶 의 풀리지 않는 여러 문제와 고난도, 그렇게 보냄을 받아 살아가는 순종의 삶을 통해 치유되는 역사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신앙은 그런 거지요.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 입니다.”(스텐리 하우어워스). … 지난 수요일에 나눈 요셉의 삶이 그랬지요. 그가 당하는 여러 고난과 억울한 일에 대해 하나님은 그 어떤 이유도, 설명도 요셉에게 하지 않으십니다만, 요셉도 그런 하나님께 힘껏 협력했습니다. 알 수 없는 답을 찾기 위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지 않고, 자신을 보내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썼습니다. 해석되지 않는 자신의 꿈에 집착하고, 이해되지 않는 자신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그렇게 자기 연민에 빠진 삶이 아니었지요. 자신의 꿈과 삶의 해석은 하나님께 맡겨두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들을 힘껏 섬겼습니다. 노예로 있을 때도, 감옥에 있을 때도, 애굽의 총리가 됐을 때도, 그가 처한 자리와 상관없이 그는 늘 맡겨진 일에 성실했고 정직했습니다. … 사실 매번 손해 보는 장사였지요. 남 좋은 일만 시켜주는 것 같고, 가면 갈수록 요셉의 상황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것 이 다, 요셉의 삶을 완성하는 거룩한 퍼즐이 됐지요. 요셉이 당한 그 어떤 고난도, 하나님은 허 투루 하지 않으셨고, 그 모든 퍼즐이 합력하여 가장 온전한 선을 이루도록, 하나님은 열심히 요 셉을 위해 일하고 계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삶에도 동일하게 역사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지난주 월요일에 중국에 가 계신 동원 집사님에게서 카톡이 왔습니다. 교회가 큰 변화를 앞둔 시 기에 하필 멀리 떨어져 있게 돼서, ‘이게 과연 어떤 무슨 뜻인지’ 고민되지만,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을 거라 믿는다고 하면서, 집사님은 일단 자신에게 딸린 백 명 의 직원들 생계를 책임지는 그 부담감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고 했고, 또 한 가지, 북한이 지척인 그곳에서, 그 땅과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실까, 헤아려 보고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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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그러면서 어떤 한 찬양의 링크를 보내 주셨는데요, 설교 후에 함께 부르겠습니다만, 여러분 ‘한 라에서 백두까지, 백두에서 땅끝까지’라는 찬양 아십니까? ‘이 땅의 동과 서 남과 북’ 이렇게 시 작되는데요, 그날 아침에 우연히 그 찬양을 듣고 너무 은혜가 됐다고 하면서 저에게도 한번 들어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저도 그 노래를 한참 들으면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은혜가 있었는데요, 그러면서 동원 집사를 위 해 기도하다 보니까 그 모습이 딱 그런 거예요. 왜 중요한 이 시기에 서로 떨어져 있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건 다 하나님께 맡기고, 지금 하나님이 맡겨주신 직원들 잘 섬기고, 또 하나님 이 보게 하시는 그 땅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는 그 말이, 오늘 말씀과 연결되면서 저에게도 큰 도전이 되고 또 은혜가 됐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고 살면 안 보이던 게 보여야 하지요. 성전에서 숨어서 빠져나가시던 주님 눈 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이 보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돌로 치려는 사람들을 피해 급히 가는 와 중에, 내가 살고 죽는 그 다급한 순간에, 주님은 그 맹인을 보셨습니다. 그런 눈이 떠지는 것이 야말로 정말로 보는 것이겠지요. 세상 사람들 보는 대로 보고, 그들이 못 보는 건 우리도 못 보 고 산다면, 주님이 보시는 것에 우리가 눈을 뜨지 못한다면, 그거야말로 영적 소경일 것입니다. 내 코가 석 자요, 지금 내 삶이 얼마나 바쁘고 힘든데 누굴 바라보고, 누굴 위해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겁니까, 그런 마음이 들 때도, 솔직히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일할 수 있는 시간이 그 리 많지 않을 거라고 주님 말씀하세요.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늘 기회가 있고, 늘 일할 수 있는 게 아 닙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그런 ‘인생의 밤’, ‘신앙의 밤’, ‘사명의 밤’이 금방 찾아옵 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다.”(엡 5:16) 바울 사도가 말하지요? 그냥 시간 아껴서 열심히 살라, 그런 뜻이 아닙니다. ‘아끼라’라고 번역된 동사[ἐξαγοράζω]는 구원하다, 되찾아 오다, 값을 주고 자유하게 하다, 그런 뜻입니다. 영어로 ‘redeem’이잖아요? 구원하고 구속(救贖)하는 것, 악한 세 상에 빼앗겨 버린 우리의 시간을 ‘하나님의 시간’으로 되찾아 오라는 강력한 요청입니다. 세상이 악할수록, 어둠이 점점 짙어질수록, 일할 수 있는 지금 이 짧은 순간을 붙잡아 하나님의 일을 하 라는 뜻이에요. 저와 여러분, 또 우리고백교회가, 그 주어진 기회를 꼭 붙잡을 수 있기를 소망합 니다. 뇌과학 전문가인 한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풍선 찾기’ 실험을 했습니다. 학생들에게 각자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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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 이름을 쓴 풍선을 불어서 복도로 다 던지게 합니다. 그리고 이제 5분 안에 자기 이름이 적힌 풍 선을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학생들의 수많은 풍선으로 가득한 복도에서, 서로 부딪히고 밀치면서 열심히 자기 풍선을 찾아보지만, 시간 내에 성공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 이번엔 룰을 바 꿔서, 아무 풍선이나 집어 들고, 거기에 적힌 이름의 주인에게 풍선을 건네주라고 했습니다. 그 러자 채 2분도 되지 않아서 모든 학생이 자기 풍선을 손에 쥐게 됐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다 자기 풍선, 자기 행복, 자기 권리, 자기 축복 찾는 일에만 열심이고, 그래서 세상이 아수라장입니다. 지옥과 천국은 그런 곳이라고 하지요. 긴 숟가락으로 자신만 먹으려고 하다가 아무도 먹지 못하는 곳이 지옥이고, 똑같은 숟가락과 음식으로 서로를 먹여주려고 하는 곳이 천 국이라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모습이든 다만 저와 여러분은 천국을 살길 바랍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불운이지만,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불행이라고 했습니다만(알베르 카뮈),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불운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삶으로 초청하십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 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고, 또 믿게 하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주님은 다시 우리를 어딘가로 보내고 계시지요. 그 말씀에 기쁘게 순종하 여, 우리의 눈이 활짝 열리고, 세상에 주님의 빛을 비추는, 저와 여러분, 우리고백교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