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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24. 아론의 죽음과 에돔의 거절

2022-05-18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6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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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8 수요 성경 강해 ----------------------------- 민수기 20:14~29, 아론의 죽음과 에돔의 거절 ​ ​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 ​ 첨부파일 num24 .mp3 파일 다운로드 ​ ■ 저희는 지난주에, 므리바에서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지 못함으로 인해서, 결국 가나안 땅에,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채, 출애굽 1세대와 함께 광야에서 생을 마감하게 될 거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함께 생각해봤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삶,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는 삶에 대해서 세 가지 정도로 이야기했지요. 우리 삶에 있어 어떤 부족한 한 가지로 인해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다른 은혜들을 소멸하는 그런 삶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자유와, 또 우리 일상에 가득한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들을 발견하고 기뻐하며 누리면서, 그렇게 삶의 많은 어려움도 함께 보듬어내는, 그런 믿음의 삶을 선택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아울러 미리암의 죽음 장면을 보면서, 우리의 종말이 정말 한 순간처럼 우리에게 다가올 것을 기억하자, 그래서 오늘 지금 이 순간을 하나님의 가장 귀한 선물로 여기며 생명의 충만함으로 살자, 그럴 때 우리가 또 하나님의 안식을 누린다고 했습니다. … 끝으로 하나님의 안식은, 모세와 아론이 마지막에 실패한 부분, 나의 나 됨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고, 내가 내 삶을 스스로 완성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를 만드시고 택하신 하나님이 친히 이루실 뿐만 아니라, 이미 우리를 그렇게 완성하고 계심을 신뢰하면서,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려 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비하시며, 후히 용서하시며, 우리의 필요를 늘 값없이 베푸는 분이심을, 우리의 삶으로 고백하고 증언하려는 그런 삶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비로소 그 안식이 우리 가운데 누려진다고 했습니다. … 어떻습니까, 여러분. 그런 삶을 생각해보고, 연습해보고 또 실제로 누려도 보셨는지요? 저도 그렇고, 처음부터 다 쉽게 되는 건 아니지만, 계속 말씀을 듣고 생각하면서, 잊지 않으려 노력하고, 또 삶에서 경험하면서, 그렇게 꼭 하나님의 생명을, 자유를, 모세와 아론이 누리지 못한 그 안식을, 이 땅에서 저와 여러분이 넉넉히, 풍성히 누리고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20장 후반부도, 사실 이러한 지난주 내용과 깊이 연관되어 있고, 그 담겨진 메시지 역시 일관된 면이 많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미리암의 죽음으로 시작된 민수기 20장이 아론의 죽음으로 마무리되고 있는데요, 그 중간에는 에돔에 대한 모세의 부탁과 여기에 대한 에돔의 거절 장면이 나옵니다. 계속되는 죽음과 거절당함, 또 실패, 어쩌면 이것들은 우리 인생의 한 단면이고, 또 피할 수 없는 하나의 과정이기도 한데요, 이제 그 이야기 안으로 또 같이 한 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가데스의 므리바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지 못한 모세가 그 다음에 제일 먼저 한 일은, 에돔 왕에게 사신을 보낸 것입니다. 지금 위치한 가데스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에돔 땅을 통과해서 지나가야 하기 때문인데요, 그 길을 잠시 열어달라고 부탁한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책망과 거절 직후에, 곧바로 에돔에게 사신을 보내는 모세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한편으로는 좀 애잔하게도 느껴지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뭔가 높은 산과 같이, 큰 바위와 같이, 무겁고 진중하며 흔들리지 않는 그런 지도자의 면모를 모세에게서 다시 한 번 보게 됩니다. … 비록 자신은 들어갈 수 없게 된 가나안 땅이지만, 모세는 낙심하거나 주저하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가나안을 향한 여정을 묵묵히 이어갑니다. 그 이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지요. 자신에게 주어진 부르심을 놓치지 않고,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끝까지 최선을 다합니다. 에돔에 사신을 보내고, 또 보내고, 백성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감당해내지요. … 분명히 큰 낙심과 아픔도 있었을 겁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신명기에 보면 모세는 다시 한 번 하나님께, 가나안 땅에 자신도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지 않았습니까? 분명 안타까운 마음도 있고, 자책하는 마음도 컸을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주저앉지 않지요. 자기연민에 빠지거나, 누구를 원망하거나 하지도 않고, 그저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합니다. (참 멋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내가 누리지 못하고, 내가 그 결과를 직접 보지 못하는 어떤 일에 대해서는, 내 나름의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괜히 나만 수고하고 남 좋은 일만 하는 셈이 되니까요. 교회나 국가 차원에서, 다음 세대, 우리 후손들을 위한 어떤 준비, 어떤 헌신이 어려운 이유가 그래서입니다. 나는 누리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 고생하고 준비한다? 이건 정말 특별한 소명과 안목 그리고 그 일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오로지 나 자신만을 생각하며 사는 그런 삶에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지요. 내일 나의 종말이 와도, 사과나무 한 그루 심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있어야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을 완성하실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있어야 할 겁니다. 저는 오늘 모세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문득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안식은 그렇게 이루어지는구나, 싶습니다. 내가 다 그 열매를 누리지 못할지라도, 씨를 심는 사람, 또 가꾸는 어떤 사람을 통해, 그 열매를 누리는 사람들이 생기는 겁니다. … 바울이 심고, 아볼로가 물을 주고, 고린도교회는 그렇게 자라고 열매 맺었다고 성경은 말씀하지요.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가 기쁨으로 단을 거두지만, 때론 뿌리는 자로 만족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내가 드러나지 않는 일, 내가 누릴 수 없는 일, 그래서 참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들이 이루어가는 나라, 그리고 그들 마음 가운데 이미 임한 그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이고, 그들이 누리는 평화가 하나님의 안식일 것입니다. 그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믿음과 은혜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가데스를 떠나 다시 가나안 땅으로 출발하면서, 모세가 에돔이라는 나라에 사신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말씀드린 것처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에돔 땅을 먼저 거쳐서 지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잠깐 지도를 보시면, [지도] … 지금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치한 곳은 바로 이곳, 십자형태가 그려진 곳, 신 광야의 가데스바네아입니다. 블레셋이라고 표기된 이 땅이 지금 가나안 땅이지요. 요즘 QT 본문에 사무엘과 블레셋의 전쟁이 한창입니다만, 당시 가나안 땅의 실질적인 주인은 블레셋이었습니다. 여기로 들어가는 가장 쉬운 방법은, 지금 있는 곳에서 곧바로 북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지요. 가데스에서 바로 북쪽으로 올라가는 이 길은 대단히 험하고 가파른 산악 지대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블레셋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정탐꾼을 보냈다가 이미 한 번 크게 좌절한 적도 있었지요. 요새와 같은 크고 강한 성읍들이 있었고, 이른바 아낙 자손이라고 하는 기골이 장대한 거인 장수들이 그곳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런 요새를 훗날 누가 나서서 정복하지요? 네, 여든다섯의 할아버지 갈렙이,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자원해서 그 땅을 취하게 됩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 루트로 갈 수는 없다고 모세는 판단했습니다. 전쟁의 경험이 거의 없는 지금 출애굽 2세대에게는 무리라는 거지요. 그래서 좀 멀리 돌아서 가긴 하지만, 에돔 땅을 통과해서 가기로 한 겁니다. 이렇게 말이지요. [지도] 직접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동쪽으로 크게 우회해서, 요단 강 동편으로 먼저 진격한 다음, 요단강을 넘어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려 한 것입니다. 마치 인천상륙작전을 펼치듯이, 방향은 정반대입니다만, 가나안 땅 중간을 치고 들어간 거지요. 그러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땅이 바로 에돔과 모압인데요, 지난주 모압의 왕 발락과 예언자 발람 이야기가 그래서 나옵니다. 어쨌든 지금은 먼저 이 에돔을 지나가야 하지요. 그래서 에돔 왕에게 미리 사신을 보내서, 우리가 그 땅을 좀 통과해서 갈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 모세가 요청한 것입니다. [지도 OFF] 아마 모세는 이것이 어느 정도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있다고 처음엔 생각했을 겁니다. 왜냐면 에돔은, 그래도 가나안 인근에 있는 여러 민족들 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가깝고 원만한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사신을 보내면서 모세는 에돔 왕에게, 우리가 당신의 형제라고 14절에서 소개하지요. 실제로 이스라엘과 에돔은 형제 민족이 맞지요. 에돔이 누구의 후손인지 혹시 아시는지요? 네, 이스라엘, 그러니까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의 후손이 세운 나라가 바로 이 에돔입니다. ‘에돔’이라는 명칭이 원래 에서의 별명이었지요. 에서의 피부색이 붉어서, ‘붉다’는 뜻의 에돔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러니까 에돔과 이스라엘은 사실 형제의 나라가 맞는 거지요. 그러고 보면요, 오늘 에돔에게 배려를 요청하는 이스라엘의 이 장면도, 과거 창세기의 어떤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 야곱이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장자권을 빼앗고 도망쳤다가, 나중에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고향으로 되돌아올 때, 형을 두려워하여 얍복 강 나루터에서 먼저 사신을 혀에엑 보내어 그 마음을 누그러뜨리려 했던 장면을 연상시키지요. 참 얄궂게도, 비슷한 일이 또 벌어집니다. 아마 모세도 그때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을 겁니다. 비록 두 형제가 사이가 아주 좋았던 건 아니지만, 결국 서로 화해하고 둘 다 하나님의 복을 받아 큰 민족을 이루게 됐으니까요, 그리고 지금 상황에선 형 에돔이 훨씬 여유가 있잖아요? 그러니 충분히 동생을 도와줄 거라고 판단했겠지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도 이 에돔을 인정해주시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너의 형제이니 그들에겐 친절하게 하라, 다른 이방 민족에게처럼 하지 말고, 훨씬 더 우호적으로 대우해라, 요구하시는 내용이 성경에 자주 등장합니다. 더구나 이스라엘은 지금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지요. 광야를 오랜 세월 떠돌았습니다. 그러니 아마 그 부탁을 더 외면하지 못할 거라는 기대도 있었겠지요. 그래서 모세는 편지에서, 자신들이 당한 고난을 자세히 설명하지요. 애굽에서 수백 년 동안 당한 학대를 강조합니다. … 그리고 겸손히 부탁하지요. 우리가 다른 어떤 피해도 주지 않고, 오직 그 땅을 통과만 하겠다, 큰 길로만 갈 것이다, 그러니 길을 좀 열어 달라 얘기합니다. 실제로 에돔이 교통의 요지거든요. 아프리카와 아라비아를 연결하는 딱 그 길목에 자리하고 있어서, 큰 도로가 이미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17절에 ‘왕의 큰길’이라고 되어 있는데요, 수많은 상인들이 날마다 오가는 그런 길입니다. 그 대로로만 지나간다면, 백성의 수가 좀 많긴 해도 별 문제없이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모세는, 지나가다 우물물도 마시지 않겠다고 하지요. 작은 불편도 끼칠 마음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에돔 왕의 대답은 어땠습니까? 네,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너는 우리 가운데로 지나가지 못한다. 내가 칼을 들고 나아가 너를 대적할까 하노라.”(18절) 강한 적대감을 보입니다. … 그래도 재차 모세가 요청하지요. 정말 큰길로만 지나갈 것이고, 혹시 어디서 물이라도 마시게 되면, 다 값을 쳐서 주겠다. 전쟁을 하자는 게 아니라 그냥 걸어서 지나갈 뿐이다. 간절히 요청합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해요? 네, 진짜 아예 군대를 거느리고 나와서 막아서지요. 정말 매몰차게 거절합니다. … 아마 모세와 이스라엘은 엄청 큰 충격을 받았을 거예요. 근데 뭐 방법이 없지요. 그냥 돌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더 남쪽으로 내려가서, 멀리 에돔을 돌아서 가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별다른 원망이나 불만의 표시도 하지 않는 것이 좀 주목됩니다. 그냥 주어진 상황을 잠잠히 받아들이고, 불편을 감내할 뿐이지요. 사실 인간적으로는 대단히 섭섭하고 서운한 일입니다. 광야 길에서 많이 지친 상황이라 더 그랬을 겁니다. … 그리고 이러한 거절 자체가 사실 좀 굴욕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자세를 많이 낮추고 부탁한 건데, 그게 거절당했을 땐 마음이 더 안 좋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모세도, 이스라엘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지요? … 앞에서 아말렉과 했던 전쟁처럼, 감정적으로 반응하여 진짜 싸우러 나가지도 않고, 모압이 그러듯 저주를 한다거나, 이걸 가지고 따로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뭐 그러지 않습니다. 그냥 피해서, 돌아서, 묵묵히 자기 길을 갈 뿐이지요. 이게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거절당함, 배척당함, 이런 건 우리의 자존감을 낮추고, 마음의 평강을 크게 깨뜨리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이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던 중에, 하루는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려고 하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섰던 일이 누가복음 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뭐라고 했냐면,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멸해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랬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그랬지요. 보아너게, 천둥의 아들답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메시아와 그의 제자들이 좀 지나가는데, 그걸 막아서느냐,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지 않는다, 우리가 누군지 보여주자, 이거지요.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들을 꾸짖으시고, 그냥 다른 마을로 돌아서 가십니다. 그렇게 누가 거절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어그러지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서 모든 게 순적하게 진행되는 것도 아니며, 또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능력이 사사건건 그런 일에 대한 보복의 차원에서 드러나는 것도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상 못한 누군가의 거절이나 근거 없는 비판이나 오해나, 그로 인한 관계의 어려움이나, 그런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지나치게 마음을 쓰고, 그래서 자기연민과 미움과 원망에 빠지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이 늘 일어나는 것이, 우리의 삶이요, 일상이라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조금도 지체되거나 어그러지거나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그 길을 계획해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고 솔로몬이 노래했지요(잠 16:9).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가장 빠른 길이요, 가장 좋은 길이라는 사실을 믿고, 다만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십시오. 그리고 다른 길로 돌아서, 다른 마을을 지나서, 다른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들을 누리며 살아가면 족합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안식을 빼앗기지 않는 중요한 삶의 지혜라고, 성경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가시며, 우리를 위해 준비하시고, 친히 싸우시는 하나님을 늘 신뢰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날마다 두려움 없이 전진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 에돔으로 향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를 떠나 호르 산에 이르게 됩니다. 에돔 땅 변경, 국경선 근처에 있는 산이라고 23절에 나오는데요, 바로 이곳에서 아론이 숨을 거둡니다. 20장을 시작할 때 있었던 미리암의 죽음도 그랬지만, 이번 아론의 죽음 역시, 무척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느껴집니다. 모든 죽음이 다 그렇겠습니다만, 아론의 죽음은 특히 더 그런 것 같습니다. 마치 죽기 위해 그곳에 가야만했던 것처럼, 그렇게 오늘 성경은 기록하기 때문입니다. … 출애굽 전체의 과정을 요약해놓은 민수기 33장에 가서 보면, 아론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십 년째 오월 초하루에, 제사장 아론이 여호와의 명령으로 호르 산에 올라가 거기서 죽었으니, 아론이 호르 산에서 죽던 때의 나이는 백이십삼 세였더라.”(민 33:38~39) 어떻습니까, 말씀드린 그런 뉘앙스가 강하게 나타나지요, 여러분? 사실 저는 이 말씀에서, 제사장 아론이 여호와의 명령으로 호르 산에 올라가 거기서 죽었다, 하는 이 대목이 참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 제사장 아론이 ‘주님의 명을 따라’ 호르 산으로 올라가 죽었다, 생각할수록 놀랍지 않습니까? 물론 모든 죽음이 다 그렇지요. 생명의 주 되신 하나님의 뜻으로 이 땅에 태어나고, 또 그분의 주권 아래 죽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얘기하니까, 전혀 새롭게 들려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호르 산에 올라가, 거기서 죽었다. 자연스럽게 살만큼 다 살고, 죽을 때가 돼서 죽었다, 이게 아니라, 하나님이 명령하시니 산에 올랐고, 거기서 하나님의 의지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렇게 들립니다. … 본문에 보면, 호르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아론의 제사장 옷을 벗깁니다. 그리고 그 옷을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 입히니까, 그제야 아론이 죽었더라, 28절은 얘기하지요. 사람이 죽어서 옷을 벗긴 게 아니라, 그 옷을 벗기니까 아론이 숨을 거뒀습니다. 하나님의 의지로 태어난 삶이요, 하나님의 주권 아래 마무리되는 삶이다, 그게 생명이고, 인생이며, 우리의 부르심이다, … 아론과 같은 ‘제사장’이라면, 하나님의 종이라면, 더 더욱 그러하다. 마치 그 사명이 끝남과 동시에 이 땅에서의 삶도 끝나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의 죽음은 우리의 사명과 잇대어 있다, 아론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호르 산에 올라가면서, 또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여러분, 아론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자신의 죽음이 예정된 곳, 자신이 묻힐 곳에 올라가는 산이라니, 한편으로는 기가 막히면서도, 아마 그 마지막 여정이 참 감사하고 행복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그랬을 것 같습니다. … 123세, 당시엔 상상하기 어려운 오랜 세월을 참 잘 살았고,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 속에 존귀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더 부족함이 없지요. 40년 간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기까지 이끌어 온 삶의 순간순간이, 마치 영화의 장면들처럼 아론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을 겁니다. 애굽의 바로와 맞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존귀한 제사장의 자리에서 평생 남을 섬기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 여러 가지 부족한 모습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 부족함들로 인해서 백성들을 더 잘 이해하고 또 섬길 수 있었지요. 내가 부족하며, 내가 연약한데, 하나님이 그것을 다 용서하시고, 순간순간마다 나의 권위와 사역을 지켜주셔서, 주신 소명을 끝까지 마칠 수 있게 하셨으니, 그래서 더 감사했을 겁니다. 무엇보다 저는 아론이 산꼭대기에서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이 마음에 참 오래 남습니다. 우린 보통 죽으면 땅으로 가잖아요? 땅 속에, 지면보다 낮은 곳에 묻힙니다. 그런데 아론은 죽으러 높은 산에 ‘올라갔어요.’ 마치 하나님의 백성은, 왕 같은 제사장은, 죽음을 통해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아론은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거기에 마지막 삶의 짐을 내려놓습니다. 아론만 그런 게 아닙니다. 얼마 가지 않아 모세도 숨을 거두게 됩니다만, 모세 역시 느보 산에서 죽지요. 마치 승천하듯, 마치 진정한 생명을 얻어 훨훨 날아 올라가듯이, 그렇게 이 땅의 생을 마감합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죽음도, 인생도 그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 이미 영광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고, 그 영광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야겠고, 또한 우리의 소망이 결코 이 땅에만 매여 있지 않음을, 늘 기억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이스라엘 온 족속이 아론을 위해 30일 동안 애곡했다는 말씀으로 민수기 20장이 끝납니다. 30일이나 장례가 이어졌으니, 정말 긴 시간이지요. 보통은 7일입니다만, 가나안 행진도 멈추고, 광야 한복판에서 30일이나 애곡했다는 건 대단한 일입니다. 나중에 모세가 죽었을 때도 30일간 애곡하지요. 그만큼 아론이 백성들의 사랑과 존중을 받았다는 뜻일 겁니다. 내 연약함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또 중보했던 사람,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평생을 헌신한 아론의 삶이 그들 마음에 오래 남았던 것입니다. …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겠지요. 스스로 많이 부족하고, 또 그 부족함을 잘 알고 있기에,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고 중보해 줄 수 있는 존재, 그게 바로 그리스도인일 겁니다. 이제 말씀을 갈무리합니다. 에돔이 거절하고, 그래서 멀리 돌아가게 되고, 또 가다보니 소중한 사람을 잃어서 슬퍼하고 아파하고, 그렇게 다시 긴 시간을 지체하게 된 가나안 여정입니다. 가나안 땅은 그렇게 가까워지는가 하면 다시 멀어지고, 이제 들어가나 싶으면 다시 지연되는, 겉으로는 그런 지지부진한 시간이 바로 민수기 20장의 시간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씀하는 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장애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은 조금씩 더 가까워지고 있다. 하나님의 약속을 사람이 막아설 수 없고, 죄와 사망의 권세가 지체할 수 없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열심’이 그 모든 것을 이기고, 반드시 우리를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게 하신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더딘 것 같고, 지체되는 것 같지만, 반드시 주님의 약속대로, 저와 여러분의 삶이 세상의 복이 되고,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게 될 겁니다. 누군가의 거절과 방해도 있겠지만, 우리가 뿌린 믿음의 씨앗과 헌신의 씨앗들이 반드시 30배, 60배, 100배로 결실할 겁니다. 비록 내가 다 누리게 되지는 못할지라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누군가 반드시 거둘 것이며, 오직 뿌린 자로 살아간 아론과 모세의 영광이, 그것을 누린 자로 살아간 이들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었음을 잊지 마십시다. … 우리의 제사장 옷을 벗고, 우리의 마지막 호흡이 멈추는 호르 산에 오르는 그 순간까지, 열심히 뿌리고 열심히 섬겨서, 꼭 주님의 안식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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