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2021년 5월 2일 주일 설교)
2021-05-02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20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부활절 다섯 번째 주일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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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6:1~12,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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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강해 35) 본문 3절의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부활에 대한 메시지를 끝으로, 이제 사도는 긴 서신을 마무리해나갑니다. 마지막 인사를 하기 전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통해서, 끝으로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을 당부하는데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구분해볼 수 있겠습니다.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구제 예물과 관련된 부분, 또 향후 바울 사도의 선교여행 일정에 대한 내용, 그리고 디모데와 아볼로에 관한 안부 정도로 정리해볼 수 있겠는데요, 오늘은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구제 예물을 중심으로 이 세 가지 내용들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바울 사도는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구제 예물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당시 예루살렘교회는 잦은 기근과 또 유대 사회의 신앙적인 박해로 인해서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한 상황이었는데요, 성경 곳곳에 이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요. 바울 사도는 이 부분에 특히 관심이 많았는데요, 예루살렘을 돕기 위해서 고린도교회뿐만 아니라, 1절에 언급된 갈라디아, 지금의 터키 지역의 여러 교회들(비시디아 안디옥, 더베 등)과 또 오늘날 그리스 북부에 해당하는 마게도냐의 교회들, 예컨대 빌립보나 데살로니가의 교회들까지, 자신이 선교한 거의 모든 이방인 교회들에게 이 구제의 연보를 요청한 상태였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 사도는 이 일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는데요, 이방인 선교 사역만으로도 너무나 분주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일에, 대단한 열정과 우선순위를 두고 있었습니다. 사실 당시는 돈을 전달하는 유일한 방법이, 사람이 직접 가서 전해주는 것밖에는 없는 그런 상황인데요, 그럼에도 바울은 그 각각의 교회들을 직접 다 돌면서, 그들이 준비한 예물을 가지고 스스로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그 과정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고, 로마로 압송되게 되지요. 바울 사도가 이렇게 엄청난 에너지와 시간을 사용하고, 또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이것을 그는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어떤 구제사역의 하나로 이해하기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예루살렘교회는 모든 이방인 교회의 어머니교회입니다. 처음 예수를 믿고 복음을 전했던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이 세운 예루살렘교회를 통해서, 이 땅의 다른 모든 교회가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5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는데요, “… 저희는(이방인들은) 그들(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롬 15:27)고 했습니다. 모든 이방인 교회와 성도들이 예루살렘교회에 영적인 빚을 지고 있고, 따라서 이제 그들의 육적인 어려움을 돕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도리라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구제는, 복음의 핵심을 건드리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이제 더 이상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뉘지 않게 됐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교회를 위해 이방인 교회가 예물을 보내고, 또 그것을 예루살렘교회가 기쁘게 받는다면, 이거야말로 복음에 기초한 새로운 하나님나라 공동체가 이루어졌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지요. … 사실 여기서는 구제 예물을 ‘주는 것’보다는, 그것을 이스라엘이 ‘받는 게’ 더 어렵고 대단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본래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고 여겼고, 부정한 이방인과는 아예 상종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제예물을 보내는 게 문제가 아니라, 사실은 그 예물을 유대인들이 받아들일지 바울은 그게 더 걱정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더는 이방인도, 유대인도 없이 하나의 새로운 백성만 있음을 참으로 믿어야만 이 일이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실제로 이사야 같은 말씀에 보면, 바로 이러한 연합의 모습을, 종말의 때에 이루어질 하나님나라의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맨 마지막 장(66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의 영광을 본 적도 없는 이방인들이, 마치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성전에 바칠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서 가져 오는 것과 같이, 그들이 또한 나 주에게 바치는 선물로 말과 수레와 가마와 노새와 낙타에 태워서, 나의 거룩한 산 예루살렘으로 데려올 것이다.”(사 66:19~20, 새번역) … 여기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선물’, 이 단어가 바로 오늘 3절의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에서, 이 ‘은혜’라는 단어인 거지요. … 그러니까 바울 사도는 구약에 예언된 이 종말의 사건이, 지금 예루살렘을 위한 이방인 교회의 예물을 통해서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당연히 전달하는 자신의 역할 또한 단순히 돈을 운반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그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고, 복음의 선교 사역을 일단락 짓는 중요한 사명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래서 그 위험하고 힘든 일을 자처한 것입니다.
결국 이 구제 예물은 예루살렘에 전달됩니다. 예물을 모으고 전달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만, 결국 바울 사도는 여러 이방인 교회가 드린 은혜의 선물을 예루살렘까지 직접 전달하게 되고, 예루살렘교회 역시 이를 기쁘게 받아들이게 되는데요, 이렇게 해서 사실상 이방인과 유대인의 경계가 허물어진 새로운 하나의 교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2천 년 전 그 최초의 교회와 성도들이 어떤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어떻게 자기 자신들의 교회만이 아니라, 십자가로 인해 맺어진 더 넓은 신앙의 관계를 인식하고, 그 관계망 안에서 서로 교제하며 복음을 살아냈는가를 다시 한 번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은 언제나 우리를 새로운 세상에 눈 뜨게 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도록 독려하지요. 주님이 우리에게, “가라! 가서 제자를 삼으라.” 명령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은, 필연적으로 그 관계의 지경이 계속 넓혀질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의 원심력이라고 할까요, …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은, 절대 뭔가 안으로 고립되거나 또는 좁아지거나 하지 않습니다. 계속 확장되는 힘을 느끼며 살게 되지요. 설사 그 내부에 부족함이 있고, 또 아직 온전하지 않을지라도, 오늘 고린도교회가 그러했는데요, 그럼에도 그 시선은 언제나 우리 자신너머의 어딘가로 향하게 됩니다. 나중에 고린도후서에서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것이, 마음이 옹졸해지지 말라고, 여러분의 마음을 넓히라고 이야기하는데요(고후 6:12~13), 모든 성도와 교회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우리의 삶이 더 넓고 더 깊은 관계 속에 놓이게 됐음을 늘 인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은 지 한참이 됐는데도, 항상 나의 삶, 내 가족, 내 교회, 이렇게만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건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 교회도 마찬가지지요. 늘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안전이고, 우리의 부흥이라면, 뭐 설사 그렇게 될 수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건 건강한 교회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고백교회’라는 이름의 그 ‘우리’가 과연 어디까지인가, 항상 진지하게 되돌아봐야 합니다. 여러분 개인의 삶도 한 번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믿고 내 삶의 지경이 과연 이전보다 더 넓어져가고 있는지, 아니면 오히려 그 관심과 교제의 영역이 점점 더 좁아지거나 굳어져가지는 않는지 …, 건강한 신앙이라면, 분명 그 지경이 계속 자연스럽게 확장되는 걸 느끼실 겁니다. 지금이야 코로나를 핑계로 삼기에 참 좋은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받은 은혜가 다른 어디론가 잘 흘러가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를 냉정하게 확인해봐야 하겠습니다. 교회가 감당하고 관계를 맺는 섬김의 지경, 또 우리 각자의 삶의 지경이 계속해서 확장되도록, 늘 함께 고민하고 노력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생각해볼 부분은, 이러한 구제예물을 드리는 일에 있어서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에 당부한 몇 가지 권면에 대해서인데요, 본문 2절이 그 내용이지요. 다시 한 번 2절을 보면,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매주 첫날 모아두라, 그러니까 주일이지요, 매 주일마다 예물을 미리 준비해두어야지, 나중에 바울이 방문했을 때 갑자기 드리게 된다거나, 또는 사람 얼굴 보고 마지못해 드리는 일이 생기기 않게, 사람 눈치 보며 드리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서 미리 준비하여 드리라는 것입니다. ‘너희 각 사람이’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까, 여유가 있는 몇 사람만이 아니라 각각의 성도 모두가 자기 형편에 따라 이 일에 참여해라고 또한 사노는 권면합니다.
이러한 말씀은, 비록 고린도교회가 특별한 구제예물을 드리는 데 있어서의 권면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우리에게도 중요한 내용입니다. 예물을 드리는 데 있어서, 기본적인 원칙 같은 것이 잘 정리되어 있지요. 각각의 성도가, 하나님 주신 축복에 따라, 여기 2절의 ‘수입에 따라’의 ‘수입’이라는 단어[유오도우]는 본래 ‘번영’이라는 단어인데요, 문장을 직역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번영에 따라’, … 준비된 예물로서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드리라는 것입니다. 아마 지금 우리 성도님들은 다 그렇게 하고 계실 겁니다. 비록 교회가 헌금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만, 제가 어떤 부분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는 여러분이 다 느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처럼, 각자의 형편에 따라, 사람 눈치 보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준비된 마음으로 드리면 그것으로 된 겁니다.
다만 여러분, 제가 여기서 한 가지 꼭 당부 드리고 싶은 부분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예물을 드리는 것만큼이나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 또한 성도의 매우 중요한 책무라는 점입니다. 오늘 고린도교회의 이 구제예물을, 바울 사도는, 자신이 아니라, 교회가 인정한 사람에게 맡겨서 그를 통해 예루살렘에 전달하라고 3절에서 이야기합니다. 자기 자신은 그저 교회가 합당하다고 생각한다면 함께 가겠다고 하지요. 재정과 관련된 일이기에, 일말의 오해도 없이, 투명하고 바르게 처리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인 겁니다. 여러분,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교회가 바른 곳에 똑바로 예산을 사용하도록 살피고 감시하는 일은, 성도의 마땅한 권리요 책임입니다. 사실 거기에 교회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한국교회가 어쩌다가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까지 오게 됐습니까? 열심히 하나님께 드리기는 하는데, 그걸 점검하는 일에는 소홀했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잘 하겠지, 장로가 알아서 하겠지, 단지 예물을 드리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저희 홈페이지에 매달 결산 보고서가 올라오지요. 그걸 여러분이 직접 확인하시고, 뭔가 의문이 있거나, 이건 아니다, 싶으신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물어보고 체크하셔야 합니다. 거기까지가 성도의 헌금 생활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가는 데, 우리 모두가 책임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예물을 드리는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더 무슨 이야기를 보태고 싶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 성도님들의 형편과 상황을 제가 얼추 다 알고 있고, 교회를 위해서 늘 헌신하고, 애쓰는 그 모든 노력을 제가 모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럼에도 제가 여러분께 꼭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 우리가 예물을 드릴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사실은 예물은, 그것을 우리가 ‘드리는 데’ 초점이 있기보다는, 하나님이 그것을 ‘받으시는 것’에 초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 예물의 본질은 내가 얼마를 드렸다, 이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우리가 드릴 수 있게 되었고, 우리가 드리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인류 최초의 예배, 예물은 가인과 아벨, 두 형제가 드린 제사였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하나님은 가인의 것은 받지 않으십니다. 가인도 땀 흘려 기른 곡식으로 드렸는데, 하나님이 외면하신 겁니다.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라는 제사가 있기 때문에, 짐승의 피로 드리지 않았다고 받지 않으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받지 않겠다고 표현하셨는지, 또 왜 가인의 것만 받지 않으셨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만, 그래서 여기서 정말 더 중요한 것은, 가인의 것을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는 것이 아니라, 아벨의 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고, 예물을 받으신다, 우리는 그것을 너무 우리 입장에서,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무슨 부족한 것이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행 17:25) 여러분, 믿으십니까?
우리도 아무에게서나 아무 돈이나 선물을 받지 않습니다. 누가 준다고 여러분은 다 받습니까? 그런 게 아니지요. 그럴만한 관계가 됐을 때나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다 받으신다고 여기는 것은 순전히 우리의 착각입니다. … 지금 예루살렘에 보내는 구제 자체가 그런 문제라고 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아무리 구제예물을 준비해서 보내도, 예루살렘교회가 받을지, 거절할지, 바울은 지금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이방인과 상종하지 않아서, 그들이 사는 땅을 밟지 않으려고, 시간이 걸려도 멀리 돌아서 가는 유대인들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공유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그들이 개라고 여기고, 그들이 원수라고 여겼던 이방인들이 보내주는 돈을 받으려고 할까, 바울은 그것을 걱정합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본래 어떤 겁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피 흘려 죽기 전까지는,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다고 성경은 말씀하지요. 뭔가를 주고받는 그런 관계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수요일마다 레위기 말씀을 통해서 확인하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그걸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이 다 받으신다고 착각합니다. 그게 이스라엘의 오랜 착각이기도 했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 예물이 헤아릴 수 없이 쌓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도움이 필요해서, 예배와 예물을 요구하시는 게 아닙니다.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된 그 자체로 이미 우리가 넘치게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뭘 더 받거나 어떤 복을 받으려고 예배드리지 않습니다. 이미 복은 다 받았고, 지금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복인 줄 알기에 예배합니다. 맞습니까?
우리가 이러저러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헌신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체로 우리에게 얼마나 큰 복입니까? 우리를 충성스러운 일꾼으로 여기셔서 우리를 써 주신 것만 해도 이미 감격이 아닙니까? 청와대에서 여러분을 불러 써준다면 어떤 마음일까요? 대대로 가문의 영광이라고 할 겁니다. 주의 일을 할 때 여러분, 그런 마음이십니까? 혹시 별 감흥도 없고, 오히려 내가 희생하는 거다, 그런 마음이십니까? 아마 아니실 겁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순간도 제가 목사로서 하나님께 뭔가를 헌신한다, 희생한다, 하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나처럼 쓸모없는 인간을 목사로 부르시고,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쓰시겠다고 불러주신 그 자체만으로, 저는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주일 아침마다 눈을 떠서 다시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을 전하게 됐을 때, 저는 오늘도 하나님이 나를 한 번 더 사용해주신다는 그 사실이 정말 기적처럼 여겨집니다. 아마 여러분 모두가 다 그런 고백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을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으십니다. 오죽하면 우리가 대접한 냉수 한 그릇조차 잊지 않으신다고 하시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면, 선지자의 상을 받습니다.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면 대접한 사람이 의인의 상을 받습니다(마 10:41).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니까 믿으셔도 됩니다. 여러분, 어떻게 우리가 선지자의 상을 받고, 우리가 어떻게 의인의 상을 받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선교사의 상을 받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누군가를 우리가 섬기기만 해도, 그가 일평생 수고해서 받을 상을 우리에게도 주시겠다는 겁니다. 아주 우리를 축복하고 싶으셔서 어쩔 줄 몰라 하시는 것이지요. 비록 복을 받기 위해 드리지는 않지만, 그러나 우리가 드리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은 그냥 받으시는 경우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드릴 수 있고, 헌신할 수 있게 된 그 사실 자체에 먼저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얼마나 드리고, 무엇을 헌신했다,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부르셨고, 나와 내 헌신을 기뻐 받으셨다,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나라의 부요함 가운데 참여하게 하셨다, 그것을 먼저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는 이용흥선교사님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통해 탄자니아 선교에 참여하게 된 것이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좋은 선교사님을 만나서, 우리가 그 사역에 동참하고, 결국 선교사의 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여러분, 우리에게 얼마나 큰 복이요 은혜입니까? 우리가 선교사님을 돕는 게 아닙니다. 실은 선교사님이 우리를 돕는 겁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제가 수많은 선교사님을 만나봤고, 지금도 여러 분을 알고 지냅니다만, 사실 저희 갈렙 선교사님은 정말 존경할 수밖에 없는 그런 분 아닙니까? … 저는 이번에 선교사님께서 다음 스텝을 준비하려고 한국에 들어오신다고 했을 때, 그냥 오셔서 공부하시고, 오랜만에 좀 쉬시다가 재충전을 하고 가시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들어오셔서는 지금 뭘 하고 계십니까? 다시 또 탄자니아 청년들을 여기로 불러다가, 이곳에서 공부를 가르치고 기술을 배우게 해서, 역으로 다시 탄자니아로 파송할 생각을 하고 계십니다. 지금 그 일을 위해서, 자비로 땅을 사고 기계를 사서, 그렇게 사역을 준비하고 계시지요. 여러분,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선교사님을 보신 적 있습니까? 그런 분을 저희 교회의 파트너로 삼아주신 게 저는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스러운지 모릅니다. 물질적으로는 우리가 그분을 섬길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그분이 우리를 섬기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를 향해 이야기하지요. 내가 이번에 고린도에 가면, 거기서 겨울을 지낼 것 같은데, 이번에 가는 이유는, 고린도교회에서 나를, 이후에 내가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다, 6절에서 이야기합니다. 여기 ‘보내어 주다’라는 헬라어 동사, ‘프로펨페인’은, 단지 그를 환송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를 책임져 파송한다는 뜻입니다. 그가 이동하고, 가서 일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경비를 담당한다는 뜻이고, 심지어 그의 안전을 책임져 줄 가이드를, 보디가드를 동행해서 함께 보낸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말 그대로 선교사를 파송한다는 의미의, 매우 중요한 선교적 용어입니다. … 그런데 본문을 읽어보면 바울이 그 어려운 일을 요청하는 건데도 불구하고, 결코 고린도교회에 부탁하는 뉘앙스가 아닙니다. 나를 좀 파송해주면 좋겠다, 그래주면 참 고맙겠다, 뭐 이런 어감이 아니지요. 6절을 잘 읽어보면, 마치 바울을 그렇게 파송하는 것이, 고린도교회에 어떤 큰 혜택이나 되는 것처럼, 그런 어조로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이는 너희가 나를, 내가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이게 참 이상한 말이지요. 내가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 나 좀 도와 달라, 이런 게 아니라, 이 귀한 일에 너희를 좀 참여시켜주고 싶으니까, 이 기회를 놓치지 마라, 뭐 이런 느낌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탄자니아 선교도 그런 거겠지요. 이건 전적으로 우리에게 복이요, 은혜입니다. 우리가 도와드리는 게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돕고 계십니다. 지금도 탄자니아 땅에는 계속해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서, 수많은 학생들과 청년들이 예수를 믿고, 주께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 땅에 어떻게 복음의 일들이 일어나고, 성령의 능력이 어떻게 역사하는지, 어떤 열매가 있는지, 여러분 저희 홈페이지에 있는 선교사님의 기도 편지만 한 번 읽어봐도 다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그런 선교지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사실은 작년 여름부터, 선교사님과 저희와의 파트너십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이미 기도 편지를 자세히 읽어보신 분은 눈치 채셨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작년 상반기 때까지만 해도 선교사님의 기도 편지 끝에 나오는 저희 교회 이름 옆에는, 그냥 ‘협력’이라고만 나와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돕는 관계에 있는 교회라는, 아주 기본적인 뜻입니다. … 그런데 작년 8월에 받은 기도 편지부터 이 문구가 바뀐 겁니다. ‘협력’에서 ‘파송’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파송’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보내어 주다’라는 헬라어 동사 ‘프로펨페인’의 의미입니다. 그의 생계와 모든 사역의 필요를 책임져준다는 뜻입니다. 제가 그렇게 써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부탁할 수가 없지요. 아직 저희는 그럴 힘까지는 없으니까요. 그냥 선교사님께서 지난여름부터 그렇게 먼저 이 표현을 사용하신 겁니다. 어떤 마음으로 그러셨는지, 왜 그때부터 그렇게 하셨는지, 차마 그 이유를 여쭤보지는 못했습니다. 혹시 오타가 아닌가, 다음번에는 다시 ‘협력’으로 쓰시지는 않나, 그냥 혼자서만 설렜을 뿐입니다. 여전히 그렇게 우리를 생각해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갈렙 선교사님이 83년생입니다. 사실 그리 나이가 많다고 보기는 어렵지요. 한국 나이로도 아직 마흔이 안 되셨으니까, 이제 시작입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본문을 묵상하면서, 본문 10절에 나오는 디모데와 오버랩이 됐습니다(물론 디모데는 훨씬 더 어렸겠지만 말이지요). 오늘 바울은 디모데를 고린도에 자기 대신 보내면서, 간절한 마음을 담아 부탁하지요.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그가 오기를 형제들과 함께 기다리노라.” 바울은 뭔가를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눈치입니다. 디모데를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고까지 이야기합니다. 뭔가 불안하다는 거지요. 디모데가 아직 많이 어리기 때문이고, 또 고린도교회에는 바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일부 사람들이 있어서, 자신에 대한 감정을 디모데에게 쏟아낼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문득 갈렙 선교사님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주님의 마음도 그러지는 않을까, 괜한 걱정을 해보게 됩니다. 한국에 선교사님을 다시 보내시면서도, 갈렙 선교사를 잘 보살피고, 평안히 보내어 다시 탄자니아로 오게 하라, 여러분, 그게 주님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사실 귀국을 결정하고, 여기서 공부하고, 사역을 이어나가시는 선교사님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벌써 사람들의 오해도 있고, 이미 여러 선교 후원이 끊어졌다는 말씀도 지난번에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바라건대 오늘 바울 사도의 권면처럼, 두려움 없이 여기 잘 계시다가, 평안히 탄자니아로 되돌아가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님이 우리에게 가진 그 믿음과 바램대로, 다시 선교사님이 탄자니아로 나가실 땐, 정말 우리가 명실상부한 파송 교회로서, 선교사님과 온전히 동역하게 되는 그런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러분, 그렇게 함께 기도해주시고, 늘 선교사님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분명 주님께서 선교사의 상으로 우리 모두를 축복하실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윤여정’이라는 배우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것을 보면서 참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상’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참 별 게 아니다, 생각해왔는데, 이번에 보니까, 그게 정말 별 거구나, 하는 걸 새삼 느끼게 됐습니다. … 사실 그동안 그렇게 주목받지는 못했던 배우였지요. 그런데 이번에 상을 받으니까, 모든 게 바뀌게 됐습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온 세계가 지금 그녀의 삶과 작품과 말에 매료되어 있습니다. … 당장 상을 받고 며칠 안 돼서 KBS에서 그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방송을 했는데요, 저도 그걸 봤습니다만, 보는 내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상이란 게 그런 거더라고요. 그의 삶을 완전히 다시 보게 만듭니다. 그녀의 젊은 시절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그녀가 걸어온 75년의 모든 인생의 여정이, 이번 기회를 통해서 오롯이 재평가된 겁니다. 그걸 보면서, ‘상’이라는 게 정말 무서운 거구나, … 누구에게 인정을 받느냐, 누가 주는 상을 받느냐에 따라, 그게 그 사람의 모든 삶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거구나,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선지자의 상을, 의인의 상을 받는 길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내가 반드시 선지자가 아니어도, 내가 굳이 의인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거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그들에게 행하는 작은 섬김 하나까지 잊지 않으시고, 굳이 ‘상’이라는 말로, 우리에게 갚아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런 걸 바라고 한 것도 아닌데, 왜 구태여 그런 민망한 단어까지 사용하여 약속하시나, 싶은데 저는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면서, 생각을 바꾸게 됐습니다. 그 상, 나도 받아야겠다, 반드시 받아야겠구나, 그러기 위해 정말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살아야겠구나, 다짐하게 됐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주님 오실 때, 우리가 부활의 몸으로 그 주님을 맞이할 때, 반드시 영광스런 성도의 상을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땅에서 행한 여러분의 수고와 헌신이 결코 헛되지 않고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날 것입니다. 혹여나 사람들은 잘 인정해주지 않았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여러분의 인생이 전혀 다른 영광으로 영원히 빛나게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 꼭 주연상이 아니어도 아무 문제가 안 되더라고요.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이 이 정도라면, 주님께 받는 조연상은 얼마나 존귀할까, … 사랑하는 여러분, 주를 위한 우리의 헌신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가장 큰 복이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 부르심이 우리의 가장 존귀한 영광임을 믿으시고, 여러분, 지금까지 해 오신 것처럼, 앞으로도 주의 일에 더욱 힘쓰고, 그 섬김의 지경을 조금씩 더 넓혀가는, 그런 저와 여러분 우리고백교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