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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사에 감사하라' (2020년 추수감사주일 설교)

2020-11-16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5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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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수감사주일 메시지 ------------------------------------------ 데살로니가전서 5:18, 범사에 감사하라 ​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 첨부파일 thanks .mp3 파일 다운로드 ​ □ 감사가 우리의 몸과 마음과 삶에 얼마나 좋은 영향을 끼치는 지에 대해서는 이미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인간의 몸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또 인간의 삶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한 결 같이 이야기하지요. 감사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건강하고 또한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고 말입니다. 실제로 감사를 잘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수면의 질이 높고 감정의 기복도 적으며,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만족도도 높다는, 구체적인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마치 벽에다 던지는 공처럼, 감사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기 마련인 복(이어령 선생의 말)이고, 그래서 어떤 사람은 “속았다고 생각하고 항상 감사하자.”(이나모리 가즈오, JAL 회장)라고까지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든 믿지 않든, 감사가 우리에게 좋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 하지만 인간은 본래, 감사에 그리 익숙한 존재는 아닙니다. 올 한 해 감사한 일들을 생각해보고 함께 나누자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제가 직접 해 보니, 처음에는 잘 생각나지 않다가, 한참 지나서야 떠오르는 감사의 제목들, … ‘아, 이것도 정말 감사하구나. 맞아, 너무 감사한 일이지. 근데 왜 이게 감사하다는 걸 처음부터 생각하지 못했을까?’ 하는 내용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일부러 감사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아마 저는 오랜 시간 그걸 당연하게 여긴 채 살아가고 있었을 겁니다. ​ 언젠가 설교 시간에 그런 말씀을 드린 기억이 납니다. ‘감사’라는 말이 성경에 언제 처음 나오는가, … 창세기도, 출애굽기도 아니고, 레위기라는 책에 가서야 비로소 이 단어가 나오기 시작하고, 또 그것이 나오는 배경도, 인간이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감사를 고백하는 장면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얘들아, 나한테 감사 좀 해라. 그리고 감사의 제사를 드릴 때에는 이러저러하게 준비해서 드려라.”고 직접 감사를 가르쳐주시는 장면에서라고 했었지요. 그만큼 감사는 우리의 본성과 잘 맞지 않는 것이고, 오늘처럼 감사의 절기가 따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 그렇게 보면 감사의 반대말은 불만이나 원망이 아니라, ‘당연하게 여기는 마음’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어떤 영화(‘부당거래’) 속 대사였지요.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안다.” … 처음엔 무척 감사했다가도 그것이 계속되면 익숙해지고, 나중엔 당연하게 여기다가, 결국 그것에 대한 권리를 스스로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다 그것이 주어지지 않을 때 불평과 원망이 나오게 되지요. 실제로 지금 우리가 가진 많은 것들이, 한때는 우리가 정말 간절히 바라던 것들, ‘이것만 있으면 정말 좋겠다, 감사하겠다,’ 했던 것들임을 알게 됩니다. 익숙해지고 당연히 여기는 마음이 그래서 참 무섭구나, 싶습니다. ​ 인간의 죄가 시작된 부분도 바로 이 대목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감사를 배우고 또 그 감사로 충만해지기 전에, ‘아, 하나님, 감사하다!’라는 생각이 두 사람의 마음을 충분히 물들이기 전에, 뱀이 먼저 이 두 사람의 마음을 감사로부터 멀리 떼어놓아 버립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창 3:1, 새번역)는 질문을 통해서였지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가게 만드는 질문일 뿐만 아니라, 이 두 사람이 에덴에서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임을 잊게 만드는, 그런 결정적인 질문이었습니다. ​ 그러니 ‘범사에 감사하라,’ …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라, 하는 이 어려운 말씀을 우리의 삶으로 고백하는 출발점은, 그 ‘당연함의 미혹’에 우리가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는 일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진심으로 인정할 수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은 다시 기적처럼 감사를 향해 돌아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감사의 마음이 죄를 이기는 성도의 힘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지요(느 8:10). 당연함을 감사로 바꾸는 오늘의 이 예배가 하나님께는 참으로 영광이 되고, 또 우리에겐 능력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 주중에 흥미로운 신문기사 하나를 읽었는데요, … 이번에 미국 대선에서 승리한 조 바이든 당선자의 책상 위에 작은 액자가 하나 놓여 있는 걸 봤습니다. 그 액자에는 두 컷짜리 만화가 들어 있는데요, 첫 번째 그림에는, 어떤 바이킹족 남자 하나가 폭풍과 번개가 몰아치는 배 위에서, 하늘을 보며 뭐라고 외치는 장면이 담겨 있습니다. 말풍선에 들어가 있는 내용을 보니, “Why me?”라고 적혀 있습니다. “왜 하필 나입니까? … 왜 이런 폭풍이 나에게 찾아온다는 말입니까?”라는 뜻이겠지요. 그리고 그 다음 컷에는, 하늘에서 그를 향해 외치는 소리가 그려져 있는데요, 여기에는 “Why not?”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왜 너는 안 되니?”라는 말이지요. ​ Twitter 'piersmorgan'에서 인용, '인사이트'에서 재인용 사실 이 만화 액자는, 조 바이든이 스물아홉 살이 되던 해 그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으로 그가 수십 년간 간직해 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때 그는 삶의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었는데요, 교통사고로 인해 부인과 딸을 한꺼번에 잃고, 두 아들은 큰 부상을 입게 됐습니다. 깊은 절망에 빠져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왜 하필 이런 불행이 나에게 닥쳤는지 거듭 묻고 있을 때, 그의 아버지가 이 만화를 건네며 말했답니다. “아들아, 세상이 네 인생을 책임져야 할 의무라도 있니? 어서 털고 일어나라, 얘야.” … 어쩌면 너무나 가혹한 말일 수도 있었을 텐데, 바이든은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일어서게 됐다고 말합니다. 그 날 이후로도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그는 늘 이 액자를 보면서, 마음을 다독였다고 하지요. ​ 저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또 하나의 감사의 실마리를 찾은 느낌이었습니다. 이번엔 아까와 정반대로, 인생의 어떤 부분, 힘들고 어려운 부분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이 감사의 출발점이 되겠구나, 싶습니다. 돌이켜보니 저도 그런 생각을 참 많이 하며 살아왔습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나’ 하는 마음이 들 때, ‘그래, 왜 나라고 이런 일이 생기지 말란 법이 있겠어, 세상에서 성도들이 다 겪는 일들인데, 목사도 겪고 사는 게 당연하겠지.’ 지금도 자주 그런 생각을 합니다. ​ 여러분, 우리의 삶에는 어렵고 힘든 일이 언젠가 또 찾아올 것입니다. 그게 인생이고 우리의 삶이라는 걸 인정해야 하는 것이, 우린 결국 다 죽기로 작정된 자들이 아닙니까? … 뜻하지 않은 일들이 찾아올 때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그 집요한 생각을, ‘왜 나라고 해서 이런 일을 겪지 말란 법이 있나?’로 바꿀 수만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때도 감사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잔잔하고 평탄할 때도, 또 거기 풍랑이 일 때도, 그 어떤 때에도 감사를 잃지 않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다고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이번에 말씀을 준비하면서, 데살로니가전서 말씀을 처음부터 죽 읽어봤는데요, 처음 1장을 읽자마자 ‘감사’라는 단어를 발견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단어 옆에서 밝게 빛나고 있는 어떤 다른 단어 하나를 함께 발견할 수 있었는데요, 저는 이것이 감사의 세 번째 실마리라고 느껴졌습니다. 여러분, 데살로니가전서 1장을 잠시 보시면, 1절에는 편지의 인사말이 나오고, 2절부터 4절까지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 “2.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3.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4.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아멘. ​ 바울 사도는 여기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로 편지를 시작하는데요, 여러분, ‘감사’라는 단어 옆에서 은은한 빛을 내는 다른 어떤 단어 하나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까? … 네, 기도와 기억이라는 말이 감사와 하나의 짝을 이루어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사도는 ‘기억’이라는 단어를 중요하게 사용하는데요, 2절에,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이라고 되어 있고, 3절 끝에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라고 적고 있습니다. ​ ‘항상 감사하는 것’,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그냥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그 감사의 내용과 대상을 ‘끊임없이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Thank’와 ‘Think’가 철자 하나 차이이기도 합니다만, 감사는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주초에 한 집사님께서 제게 감사의 제목을 보내시면서, 그 제목들이 한 주간의 묵상을 통해, 마음속에서 정말 큰 감사로 고백하게 되면 좋겠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저는 그러한 한 주의 고민과 생각이 다름 아닌 감사라고 생각합니다. 감사는 조금 더 생각하는 것, 그리고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마음, 또 여러 인생의 문제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이 그리 쉽게,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감사에 대한 수동적인 태도를 버리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기억하고 생각하면서 감사를 쟁취해야 한다고, 그래야 비로소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 사실 이 추수감사절의 기원도 그런 것이지요. 감사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좋은 일 앞에서 한 감사가 아니라, 애써 기억하고, 생각해서 얻어낸 감사였음을 역사는 증언합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청교도들이, 정말 어렵게 첫 농사를 했는데요, 낯선 땅, 낯선 환경에서, 인디언들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겨우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고 추수를 했는데, 그 소출이 너무 보잘 것 없었습니다. ‘이걸로 과연 이번 겨울을 날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찾아왔을 때, 그들은 돌이켜 감사의 예배를 먼저 드리기로 한 겁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그들을 인도하시고, 그들에게 행하신 것들을 기억하고, 생각하며, 감사하기로 ‘선택’한 겁니다. 최초의 감사절이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 성경에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가라.”(신 8:7 등)는 말씀이 여러 번 반복되어 나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삼가는 것’, … 그분이 우리 생명의 근원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살아갈 힘과 능력을 주시는 분이심을 잊지 않는 일에, 우리가 특별한 신앙적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 그래서 하나님은 감사를 고백하라고 말씀하지요. 우리의 입술로, 물질로, 그리고 우리의 삶으로 감사를 고백하는 이유는, 그렇게 고백하려면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하고, 생각하려면 기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다’라는 히브리말, ‘토다’는 본래 ‘고백하다’라는 뜻입니다. 단지 고마움을 느끼는 것이 감사가 아니라, 그것을 누군가에게 고백하는 것이 감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잊지 않고 기억하여 우리의 마음을 고백하는 것, 그것이 성도의 감사인 것입니다. 아울러 이 고백을 통해 우리는 감사의 방향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하게 됩니다. ​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어떤 상황에 대해서 감사하거나, 막연히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저 속으로 ‘아, 내 삶이 참 감사하다. 이렇게 좋은 것들을 누리고 사니 참 좋다, 이 자연도 너무 감사하다.’ 뭐, 이렇게 감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고, 우리의 감사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 고백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성도의 감사는,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초점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어떠어떠한 상황에 대해서 감사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해주신 그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 우리의 감사입니다. 상황에만 감사한다면 우리는 결코 범사에 감사할 수 없습니다. ‘범사’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그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출 때 우리는 오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 ‘범사에 감사하라’의 이 ‘범사에’라는 헬라어 ‘엔 판티’는 직역하면, 사실 ‘범사에 대하여’(for everything)가 아니라, ‘범사 속에서’(in everything)라는 말입니다. [In every thing, give thanks(KJV, NASB),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NIV, NLT, ESV)] ‘모든 일 속에서’, ‘모든 상황 속에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감사의 대상이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 여러분, 인간이 어떻게 모든 상황에 ‘대하여’ 감사하겠습니까? 저는 절대 그렇게 못할 것 같고, 또 여러분에게 그렇게 하라고도 말씀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코로나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습니까? 큰 질병에 대해서 감사가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너무나 힘든 일을 겪었는데 그런데도 그 일에 대해 감사하라고 하면 그건 일종의 신앙적 폭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향해 감사할 수는 있겠지요. 정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풍년이 됐다고 그것에 대해 감사하는 날이 추수감사절이 아닙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바, 바알 우상에 대한 숭배와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그것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성도는 감사합니다. 감사의 방향이 하나님인 것입니다. ​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않아도,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먹을 것이 없어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그 상황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감사입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 우리의 생명과 구원의 주권을 가진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지금 이 그 상황 속에서도 나와 함께 하시고, 내 삶을 다스리시며,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며,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게 하사 선을 이루실 것을 신뢰하기에, 성도는 범사에,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이러한 감사의 방향만 놓치지 않는다면, 저는 힘들 때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도 감사를 위한 또 하나의 신앙적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그가 지금 하나님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 아시는 것처럼, 얼마나 많은 시편이 하나님을 향한 탄식과 탄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까? 다윗이 늘 감사하고 늘 웃었습니까? 아닙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눈물로 하나님께 하소연하고,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원망하듯 기도했습니다. ‘나는 당신밖에 없는데, 왜 답을 안 해 주시냐! 나의 유일한 소망이 하나님인데, 어째서 침묵하시냐?!’ 하는 기도가 시편에 가득합니다. ​ 다윗이 감사하는 이유, 원망하는 것은 같은 이유에서 출발합니다.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감사하지 않는 이유, 원망하지 않는 이유도 동일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이 삶의 초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라보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는다면 거기에는 원망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저 운이 나빴거니, 그저 내 실력이 부족했거니, 이렇게 생각하고 넘어가지요. 하지만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이들은,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시편의 모든 기도가 그렇듯, 그 원망의 기도를 찬송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그는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감사는 우리의 신앙에 따라 그렇게 빚어지고 또 자라갑니다. 막연히 감사하고, 막연히 원망하는 데서, 그저 좋은 상황에 대해서 감사하는 데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원망하는 그런 자리까지,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에 대한 감사가 날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 한 신학자(팀 켈러)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가짜 그리스도인이라면 대답할 수 없는 세 가지 질문이 있는데, 첫째는 “당신의 삶에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의 증거가 있는가?” 하는 질문이고, 둘째는 “성경이 당신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증거가 있는가?”이고, 마지막 세 번째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감사가 자라나는 증거가 있는가?”라고 합니다. …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감사가 자라나고 있습니까? 어제의 감사와 오늘의 감사가 다르고, 그 감사의 방향과 깊이가 달라지고 있는지요? ​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드린 것처럼, 삶의 순간순간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감사를 고백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평소에는 하나님 없는 것처럼 살다가 1년에 한 번 추수감사절에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범사에’,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발걸음이 날마다 하나씩 하나씩 쌓여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부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감사가 날마다 자라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나누고 싶은 부분은, … 우리의 감사의 방향이 하나님이기에, 그 감사의 내용도, 모습도 인격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면 …) 여러분, 우리 안에 누군가를 향한 깊은 감사의 고백이 채워졌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어떻게 반응하게 됩니까? … 네, 어떻게 하면 이 감사를 표현할 수 있을까, 또 어떤 감사로 보답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많은 감사의 고백이 그렇게 마무리됩니다. 오늘 예배의 기원에서 읽은 시편 116편에도 나오지요. “12.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 13.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14.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시편 116:12~14) 시인은 노래합니다. 감사의 대상을 향해 우리는 어떤 보답의 행위를 고민하게 되는 겁니다. ​ 오늘 바울 사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장 9절에 보면,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라고 나옵니다. 진정한 감사는 우리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어떤 것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시편의 기자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과 하나님께 했던 약속, 서원을 지키는 것으로 그 고민이 이어지게 됐지요. 그게 감사입니다. ​ 보답이라고 하니까 물질부터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단지 물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 시편 50편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있는데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는 다름 아니라,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그 삶을 돌이키고 잘못된 행위와 태도를 고치는 것, 그것이 가장 인격적인 감사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 말씀을 맺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 어려운 말씀에 순종하는 여러 신앙적 과정에 대해 함께 생각해봤는데요, 은총으로 누리는 많은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마음, 어렵고 힘든 순간들을 삶의 한 부분으로 여기는 마음, 그러기 위해 하나님을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 또한 우리의 감사가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것임을 놓치지 않는 것, 그리고 그 감사를 우리의 입술로, 삶으로 고백하게 하는 것, 이런 이야기들을 함께 나눴습니다. ​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단지 오늘 이 주일 하루만이 아니라, 이러한 감사가 우리의 일상의 모습, 삶의 방식이 되기를 바랍니다. 온전한 감사를 통해 더 감사할 일들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래서 정말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데까지 자라가기를, 그 감사의 능력으로 온전히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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