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출애굽기 강해 53.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3)
2019-12-12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20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91211 수요 성경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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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3:2~13,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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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속해서 언약서의 내용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하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여러 계명들은, 우선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기뻐하고 또 싫어하시는가를 드러내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 모습에 이르게 하시기를 원하시는가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했습니다. 아울러 이런 계명들의 그 내용을 살펴보면,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우리들과 같은 하나님 백성들의 이른바 ‘하나님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고도 했습니다. 모든 생명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자, 피조물을 자비로 보존하시는 자요, 또 피를 피로, 생명을 생명으로 갚음으로써, 당신의 백성을 죄와 사망에서 구속하는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이 언약서의 내용은 증언합니다. 오늘 나눌 본문에서도 이런 ‘하나님 경험에 의한 계명’이라는 특징은 계속되는데요, …
이는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바로 그것을, 우리는 다른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누고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현실과 잇대게 하고, 현실 속에서 실체를 가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유와 평화를 충분히 누리는 자만이, 그가 하신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 자유와 평화를 다른 이들, 또 이 땅의 모든 피조물들과 공유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삶에서 누리는 ‘하나님 경험’이 그래서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는 정확히 그 경험만큼만 복음을 살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나 아닌 다른 이들을 향해 오픈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열매가 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부디 먼저 하나님을 더욱 풍성히 경험하고 또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풍성함으로 여러분의 삶뿐만 아니라,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들이 또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23장 2절부터 말씀을 나누기 시작해서, 역시 시간이 되는 데까지 묵상을 하겠습니다. 23장 전반부(1~9절)는 대체로 사법적 공의에 대한 내용을 다룹니다. 1~3절은 증인과 관련된 것이고, 6~8절은 재판장과 관련이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1절,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라는 말씀에 대해 나눴습니다만, 제가 말씀을 전하고도 사실은 많이 반성하게 된 것이 …, 솔직히 제가 말씀을 전했으면서도 그 이후 한 주의 시간 동안 그 부분을 깊이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는 것을, 이번에 말씀을 준비하며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이시며, 또한 진리이셔서 거짓된 말, 허망한 말, 악한 말을 미워하신다, … 그러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우리의 언어가 정말 중요하다,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더욱 말에 주의하자, 설교는 했지만, 실상 저는 그 고민을 품고 기도하지도 못했고, 또 기억하여 조심하지도 않았습니다. 무의식적인 노력이야 있었을는지 모르겠지만, 결국 저에게 주신 말씀이, 제 안에 머물지 못하고, 그냥 저를 관통해 지나가버린 느낌입니다.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말씀이 삶에 머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속상합니다. … 혹시 여러분은 어떠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좀 다르셨기를 바래봅니다. 지난 주 저처럼 그냥 말씀을 흘려듣지 마시고, 여러분, 주시는 말씀마다 삶으로 잘 간직하셔서, 꼭 말씀의 열매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어지는 본문 2절은 사람의 숫자와 대중의 흐름에 따라 정의가 아닌 것에 휩쓸리지 말 것을 경고합니다. 우선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라고, 즉 다수의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지 말 것을 말씀합니다. 분명 우리가 그렇게 되기가 너무나 쉽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일 겁니다.
이것은 앞의 1절에서 악인과 연합하지 말라는 말씀과 비슷하면서도 다른데요, 앞에서는 우리의 의지가 좀 더 개입된 적극적인 문제인데 반해서, 이것은 훨씬 수동적으로 다수의 악함을 ‘따라가는’ 문제입니다. 때론 우리가 자각하지 못한 채 그냥 휩쓸려가는 경우도 포함되겠지요. 여기의 ‘다수’는 그저 몇 사람일 수도 있지만, 범위를 넓혀 보면 수천, 수만, 혹은 온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것이 아예 하나의 거대한 제도와 시스템이 되어버린 경우도 있겠지요. 그런 ‘다수’의 흐름이 있을 때, 대부분이 다 그렇게 살 때에도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거대한 흐름에 저항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로까지 연결됩니다.
왜 이런 저항이 우리에겐 힘든 문제일까요? 네, 당연히 이러한 저항에는 많은 불이익이 뒤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다수의 군중이 주는 안정감과 소속감을 일단 내려놓아야 하지요. 한 때 같은 편, 같은 입장에 있었던 이들에게, “이제 와서 배신이냐?” “너만 잘났냐? 너만 의인이냐?” 하는 비난과 조롱을 듣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려면 일단 그것을 견디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나만 잘 나고, 나만 의인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더러 당신의 자녀라 하시고, 의로운 자라,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 하시니, 그저 그 말씀 따라 사는 것뿐임을 스스로 기억하고 다짐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진리, 그 자체와 함께 담대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 12:32) 한 번 따라해 보십시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아멘) 주님은 우리가 결코 ‘많은 무리’가 될 수 없음을 전제로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자체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고 경고하시기도 했습니다(마 7:14).
여러분, 주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주류가 되기는 이미 틀렸습니다. 물론 주님의 나라가 임할 그때는 다를 것입니다. 그 적은 무리들이 다 모여 온전히 거대한 하나님나라를 이룰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의 현실은, 우리로 늘 적은 무리가 될 준비를 하게 만들 따름이라는 걸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어제 QT 말씀(계 13:11~18)에 보면, 짐승과 그 이름을 상징하는 숫자 666과 그 숫자로 된 표를 오른손이나 이마에 받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표’라는 헬라어 ‘카라그마’가 본래 로마 황제의 옥새를 뜻하는 말인데요, 로마의 모든 공식 문서에 그 ‘카라그마’가 찍혀 나오게 되고 그래서 그 옥새의 힘으로 강력한 집행력을 갖게 됩니다. 결국 666이라는 카라그마는, 내가 황제의 백성임을 인증하는 어떤 표식이라는 뜻인데요, 당연히 그 표식이 없다면, 정상적인 시민의 삶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종의 신분 확인이 안 되는 셈이니까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그 표를 받지 않은 사람은 매매를 할 수 없게 된다고 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경제적 활동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는 것인데요, …
다수에 속하지 못한다는 것의 가장 극단적인 실례가 바로 그것일 겁니다. 국가와 사회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법적 문제가 된다든가,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향한 박해가 심해지는 마지막 때에는 그와 같은 일들이 실제로 성도들을 어렵게 할 것입니다. 물론 형식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그 표를 받지 않고, 오직 예수의 흔적을 지닌 채 살고자 노력하는 성도들, 그래서 여러 불편과 손해를 감내하며, 짐승의 표가 아닌 예수 흔적을 자신의 삶에 채워가는 교회와 성도들이 이 땅에는 분명 존재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인들은 그런 어려움들을 삶의 한 부분으로 이미 받아들여버려서 특별히 인식하지 못하고 계신 경우도 많지만 말입니다.
여러분,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제가 이 부분을 길게 강조하여 말씀드리고 있는데요, 그만큼 이것이 우리에게는 어렵고 그러면서도 중요한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모든 부분에서 이 믿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 1:1), 오직 진리와 함께 기뻐할 것(고전 13:6)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복 있는 성도의 삶임을 여러분, 부디 믿으시고, 그 길을 담대히 걸어가시기를, 그래서 성도의 영광에 이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울러 서로가 서로에게, 그 적은 무리의 한 편이 되어주셔야 합니다. 아무리 담대한들 혼자서는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옆에 누가 있어야, 함께 손잡아 주고, 함께 달려야, 함께 울며 기도해줘야 우리는 진리와 함께 즐거워하는 그 고독한 여정을 버텨낼 수 있습니다. 비록 적은 수이나, 우리는 결코 혼자는 아닙니다. 반드시 ‘무리’라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모인 한 분, 한 분이, 서로에게 그 소중한 곁이 되어 주시기를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이러한 다수의 힘, 권력의 힘이 개입 되서는 절대 안 되는 장소가 바로 법정이겠지요. 2절 후반부가 그 내용입니다. 재판정에서 내려지는 판결이 다수를 따라, 다수의 위증을 따라 그릇된 판결이 되지 않도록, 그런 부당한 증언에 참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저희가 법정까지 가는 일이 자주 있지는 않습니다만, 꼭 법정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일상 가운데 잘잘못을 가리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언 하는 것, 또 거짓된 풍설에 가담하는 것,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매우 미워하시는 일입니다.
특히 법정은 객관적 공정함을 그 생명으로 합니다. 법적 판결이 정의의 마지막 보루가 되기 때문이지요. 거기서 정의가 패배하면 이제 더는 기회가 없습니다. 비록 판사가 완전할 수 없으나 그걸로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왜 심판자로, 판결자, 재판장으로 오시는가, 충분히 헤아려집니다. 오직 우리가 행한 대로, 주님이 친히 공의로, 참되게 심판하실 것을 성경은 강조합니다. 혹 이 땅의 법정에서 당한 억울함과 수치가 있다면 그때 다 풀어지고 회복되어야만 하며, 또 반드시 그리 될 것입니다.
본문은, 이 땅의 법정 역시 최대한 오직 객관적 사실과 증거에 입각한 공정한 판결을 내리라고 강조합니다. 특히 3절과 6절은, 각각 비슷한 내용인데요, 이는 우리에게 조금 충격적이라고 할 수도 있는 말씀입니다.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치우쳐 두둔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일면 매정해 보이기도 합니다만, 법정은 동정심으로 판결할 수 없습니다. 정상참작이야 되겠지만, 가난이 면죄부가 되지는 않습니다. 가난한 자일지라도 오직 사실에 입각한 판결이어야 하는 것은, 그렇게 세워진 법적 정의라야 비로소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온전히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같은 이유로 본문 8절은 뇌물을 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고 말씀하여, 이것이 재판의 공정성과 직결된 것임을 강조합니다. 뇌물만 없다면, 또 뇌물이 통하지 않는 곳이라면, 사실 가난한 사람을 굳이 두둔하여 판결할 필요도 없겠지요. 뇌물은 그 자체로 그런 뇌물을 사용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자 폭력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심각한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뇌물 주거나 받아본 적 있으십니까? … (돈이 없어서 우리가 뇌물로부터 자유로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충분한 돈이 있고, 그걸 통해 더 큰 이익과 편의를 얻을 수 있다면 입장이 다를 것입니다.) 사실 뇌물 그러면 우리는 나와 별로 상관이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만, 엄밀히 말해 뇌물을 주는 사람이 어디 ‘이게 뇌물이오.’ 그러겠습니까? 이것은 가벼운 인사치레요, 정당한 선물이요 대가 없는 호의라고, 자기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기본적으로 뇌물과 선물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결국 뇌물은 나를 위해서 상대에게 뭔가를 주는 것이고, 선물은 나보다는 상대방을 위해서 주는 거겠지요.
물론 나를 위해서 주는 것인데도 뇌물을 줄 때의 마음은 별로 즐겁고 유쾌하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 자신이 물질 앞에 비굴해졌음을 스스로 인식하기 때문인데요, 주중에 읽은 책 ‘아침의 피아노’에 보면, 그런 대목이 나옵니다. 암 선고를 받고 죽음을 얼마 앞두지 않은 상황에서 저자가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글인데요, 인상 깊은 구절 중 하나가 … “돌아보면 내가 누군가들 앞에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비굴한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그런 적은 없었다. 그게 나다.” 스스로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뇌물은 먼저는 주는 자의 인간 됨됨이를 비굴하게 만듭니다.
또 받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선물을 받으면 어떤 존중의 느낌과 기쁨, 그리고 고마움을 먼저 경험하게 되지만, 뇌물을 받으면 뭔가 찜찜하고 불편한 마음을 먼저 느끼게 됩니다(사실 받아 봤어야 잘 이해가 될 텐데요). 미묘한 차이지만 분별하려고만 한다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확연한 차이입니다. 다들, 그래도 뇌물 같은 걸 한 번이라도 받아보고 싶다, 하는 표정이신데요, …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왜 이런 문제가 중요하며, 또 왜 이런 미묘한 차이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냐면,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뇌물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치우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는 일도 없으시니라 하니라.”(대하 19:7). 하나님께서 뇌물을 받지 않으신다, 이 말은 하나님께 뇌물을 바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까, 없다는 것입니까? 네, 충분히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신앙에서도 뇌물은 그리 멀리 있지 않은 문제인 것입니다.
언제 우리가 하나님께 뇌물을 바치게 되는 건가요? 네, 사람에게 뇌물을 줄 때와 마찬가지로, 그 무언가를 통해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조작하고 조종하고 싶을 때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나 헌신을 일종의 뇌물처럼 생각하는 일, 없으십니까? 그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여 드리는 선물, 말 그대로 ‘예물’이 아니라, 그걸로 뭔가 잘 보이고, 하나님 마음에 좋은 인상을 남겨서 내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한 수단, 혹은 적어도 하나님께 밉보이지는 않아야겠다는 그런 마음은 없으십니까? 예배도 그렇지요. 결국 그것이 나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의 결과를 의도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예물이 아니라, 뇌물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반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을 우리가 뇌물처럼 여길 수도 있습니다. 대가 없이 주시는 은혜, 우리가 갚을 수 없는 은혜, 받아 누리기만 하면 되는,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먼저 잘 누리고 기뻐하기도 전에 뭔가 그에 합당한 답례를 해야 할 것 같은, 그리고 그 답례가 가능할 것 같은, 그런 마음이 들곤 합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서 성탄절 선물을 받듯, 온전히 기쁨으로 누리면 족한 은혜들을, 혹시 여기에도 뭔가 무언의 압박이 있는 것 아닌가, 이걸로 나의 마음을 사서 뭔가를 더 요구하려 하시는 것은 아닌가, 여러 번 계산기를 두드리느라, 그 천국의 감격을 놓칠 때도 참 많습니다. 세상 말로는 철이 들었다고 하겠지만, 신앙적으로는 순수함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과 온전히 선물과 감사로 그 기쁨을 누리는 사랑의 관계인지, 뇌물이 오가는 어떤 비즈니스적 관계는 아닌지 한 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사람을 향한 우리의 마음에도 깊은 영향을 끼칠 것이며, 무엇보다 우리 안에 천국의 참된 기쁨을 회복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나 사람에게나, 뇌물과 보답을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라, 진실한 선물과 감사를 주고받는 건강한 관계, 그래서 늘 기쁨이 충만한 관계를 만들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4절과 5절은 원수가 당하는 어려움에 대해 정직하고 자비롭게 대할 것을 명령합니다. 3절과 6절이 동정심으로 정의를 굽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었다면, 이번에는 미움의 감정으로 인하여 정의를 굽게 하지 말라는 뜻이겠지요. 예컨대 원수가 기르는 소나 나귀가 길을 잃었을 때, 또 짐을 싣고 가다가 짐에 눌려서 쓰러졌을 때,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말고, 반드시 도우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의 첫 출발점이 바로 여기, 원수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겠지요.
여러분, 원수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는 것, 이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아니겠습니까? 네, 이것 또한 우리에게는 참 어려운 일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보다는 덜 힘들겠지만 어려움에 빠진 원수를 돕는 것 역시 우리의 본성에는 맞지 않습니다. 도와주기는커녕 고소해 하고 즐거워하고, 또 그 짐을 더 무겁게 만드는 게 우리의 타락한 본성입니다.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들이 세운 에돔이라는 나라가 형제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 유다에 그러했지요.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여러 차례 침략을 당하고 기어이 정복을 당해 나라가 망했을 때, 에돔은 철저하게 바벨론의 편에 섰습니다. 우리가 얼마 전에 묵상한 오바댜 말씀이 바로 그런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은 달라야 함을 말씀합니다. 악인과 선인, 은혜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 모두에게 인자와 자비로 대하시는 우리의 아바 하나님처럼, 우리 역시 원수에게까지도 자비를 베풀고 선대하며 또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상이 클 것이며, 참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시면서 말입니다(눅 6:35).
원수를 사랑하는 것까지는 어렵지만, 그래도 한 번 힘써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오늘 말씀처럼 어려운 상황에 처한 원수를 선대하는 것, 그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원수의 어려운 상황이야말로, 지금의 어그러진 관계와 그로 인한 여러 문제들을 우리가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겠지요. 만약 우리가 내미는 도움의 손길을 원수가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소중한 계기를 갖게 됩니다. 나에게도 좋은 것이, 내 안에 있던 미움의 쓴 뿌리 또한 제거할 수 있게 될 겁니다. 비록 미워하는 관계라고 해도,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화평의 물고를 트게 됩니다. 주님은 지금 나와 타인 모두를 위한 그 기회를 잡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노래하면서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네, 이 고백은 너무나 중요합니다만, 그러나 그 맛있는 밥상과 넘치는 잔으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는 여전히 또 다른 신앙의 문제로 남는다는 걸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맛있는 밥상을 차려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는 것도 우리의 귀한 신앙이지만, 그것을 누구와 함께 먹을 것인가 고민하는 것은 더 귀하고 중요한 신앙입니다. 내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른다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또한 나누며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그것이야말로 다름 아닌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임을 드러내는 가장 완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말씀드린 것처럼, 이것은 당연히 우리의 본성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혹시 여러분 원수 있으신지요? 미워하는 사람 있습니까? … 없다면 다행이지만, 평생 아예 없을 수도 없는 게 우리 삶의 현실입니다. 과연 우리가 그런 힘든 관계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베풀어 줄 수 있는가, 아마 우리의 실력만으로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원수를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원수를 원수로 대하지 않는다고, 또 내가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준다고 해서, 상대방이 나에게 행한 잘못이나 죄가 그냥 다 용서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내가 원수 갚지 않아야 하나님이 대신 갚으심을 말씀합니다. 성도는 이 말씀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고엘’로서 보복하시는 하나님, 그 공의의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나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조차 힘껏 자비를 베풀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부디 우리 모두에게 그 믿음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10절에서 13절까지는 안식년과 안식일에 대한 말씀입니다. 안식년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제4계명의 확장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요, ‘안식년’이라는 명칭은 후에 레위기에서 등장합니다만, 그 내용과 본질은 여기서 먼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섯 해 동안은 열심히 농사지어 결실하되, 일곱째 해에는 땅을 갈지 말고 묵혀두라고 말씀합니다. 소위 휴경(休耕), 휴작(休作), 또 우리말로는 ‘해걸이’를 하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하는 이유가 특별하고 중요합니다. 보통 농부들이 해걸이를 하는 이유는 … 네, 떨어진 땅의 힘, 곧 지력(地力)을 회복하여 생산력을 향상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땅을 몇 개로 나눠 일부러 돌려가며 휴경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안식년의 취지는 전혀 다르지요. 당시에는 이런 휴경이 땅의 힘이나 소출과 연관이 있다는 것도 잘 모를 때입니다. 이스라엘은 전통적으로 유목에 의존했고, 또 지금껏 애굽의 종이었으니, 이스라엘은 이제 정착할 가나안에서 처음 제대로 된 농경을 시작하는 셈이지요. 당연히 그런 농업적 지식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하나님에게는 다른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안식년을 명령하는 것은, 1차적으로 땅의 주인인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 다른 피조물을 위함입니다. 다름 아닌 가난한 자들이 와서 마음껏 먹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고, 그래도 남으면 들짐승들까지도 먹고 배부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것 때문에 7년마다 농사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 참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놀랍고 또 특별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안식일’, ‘안식년’ 그러면 일단 내가 쉬는 것부터 생각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내년이 안식년인데요, 저도 같은 모습입니다. … 그런데 하나님은 비단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 특히 스스로 쉼을 선택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안식일, 안식년을 가지라고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나의 쉼이, 내게 의존하는 사람들 또한 쉬게 하고, 더불어 내 탐욕을 쉬게 함으로써 남는 것을 다른 이들의 쉼을 위해 공급할 수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쉼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자비를 베풀 때 비로로 그 쉼이 우리 모두의 쉼이 됩니다.
세상에는 쉼을 선택할 수 없는 존재가 너무나 많습니다. 당시 종과 노예가 그랬고,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가 그랬으며, 배고픈 짐승들이 그랬습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려면, 누군가 쉼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 쉼을 다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이 본문이 말씀하는 안식년, 안식일에 담긴 메시지입니다.
12절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은 소와 나귀와 여종의 자식과 나그네의 쉼을 말씀하시지요. ‘여종의 자식’이 언급되는 것은, 여종이 쉬어야 그 어린 자녀도 온전한 쉼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쉼을 가리켜, 그들이 ‘숨을 돌리리라’ 그랬습니다. ‘숨을 돌리다’라는 표현도 참 귀하지 않습니까? 어딘가를 급하게 갈 때 ‘숨 좀 돌리고 가자’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숨 좀 돌리고 가자.” 말씀합니다. 너만 쉬지 말고, 다른 이들도 심지어 동물도, 땅도, 숨 좀 돌리자, 말씀합니다. 소처럼 나귀처럼 쉼 없이 일해야 겨우 먹고사는 사람들, 그들의 쉼이 누군가의 쉼에, 다스릴 권한이 있고, 힘이 있는 사람의 쉼과 잇대어 있음을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참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욕심을, 탐심을 내려놓아야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번에도 이스라엘을 향해 말씀합니다. 너희가 종으로 살아봤으니 그 고통을 알고 있으니, 다른 이들을 그렇게 대우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내가 종일 때 고생했으니, 너도 고생해봐야 한다, 이런 마음은 내려놓고 사십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금 하시는 말씀이 그것이지요. 너희가 종이었으니, 종에게 쉼의 자비를 베풀라, 그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게 잘 안 됩니다. 내가 받은 대로 남에게도 해야 속이 시원합니다. 군대 후임일 때 수많은 학대와 핍박을 받은 사람이 시간이 지나 선임이 됐을 때, ‘그래 너희는 나처럼 그런 고생 하지 말아라. 내가 잘 해주마.’ 하는 마음, 쉽지 않습니다. 내가 당한대로 그대로 되갚아주려 합니다. 더 심하게나 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은 분명합니다. 그 모든 죄의 악순환을 하나님의 백성인 너희가 끊어라, 종 된 아픔과 고통을 아는 너희가 그 결박을 끊어라, 말씀하십니다. 가나안 땅이 또 다른 의미의 애굽이 되지 않도록 미리 자유의 율법, 쉼의 율법을 주십니다. 여러분, 이 계명에 담긴 주님의 마음을 잘 헤아려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을 통해, 누군가 숨을 돌리고 사는 그런 쉼이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쉼이 그렇게 연약하고 취약한 이들의 쉼을 허락하는 자비로운 쉼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나만 쉬고 남은 일하게 만드는 그런 삶은 살지 마십시다. 한 해 쉬어서 조금 적은 돈을 벌더라도, 나를 통해 누군가 쉼을 누릴 수 있는 그런 인생이 되십시다.
이제 하나의 단락을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은 13절에서, “내가 네게 이른 모든 일을 삼가 지키고”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신들의 이름은 부르지도, 들리게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선 ‘모든 일’입니다. 부분만, 내가 지킬 수 있다고 판단되는 것만, 내게 도움이 되는 것만을 취사선택하여 지키고 그렇지 않은 것은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하신 모든 것을 주의하여 순종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도 강조하셨지요. 지극히 작은 계명을 지키고 가르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하나 하나 우리의 마음에, 삶에 담아 두십시다.
아울러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심으로써, 이 말씀들이 그저 단순히 어떤 사회운동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문제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의 관계의 열매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다른 신을 섬기고 예배해서는 결코 순종할 수 없는 말씀이 본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더 온전히 사랑하고 신뢰함으로써만 이 말씀들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저와 여러분의 삶이 오늘 이 말씀들을 넉넉히 순종하게 되기를, 그것을 위해 필요한 사랑과 믿음을 이 시간 주님께서 풍성히 허락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