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영생의 말씀

2026-03-08 · 설교 원고 · 9쪽 · 약 18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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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백교회 고준석 목사 - 1 - 사순절 세 번째 주일 [요한복음 강해 25] 요한복음 6:52~71 (신약 154쪽) 영생의 말씀 본문 68절의 ‘영생의 말씀’을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 기를 바랍니다. …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는 예수님 말씀에 ‘수군거리던’ 유대인 들이, 주님이 주실 떡이 다름이 아닌 주님의 ‘살’이라는 말씀에는 서로 ‘다투기’ 시작합니다. 사 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줘서 먹게 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이들도 있고, 이런 말 을 입에 담는 것 자체가 불쾌하고 불경하다고 항변하는 이들도 있고, 그래도 오병이어 기적까지 봤는데 여기에도 분명 어떤 영적 의미가 있지 않겠냐고 애써 두둔하는 사람들까지, 치열한 갑론 을박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걸 보신 주님은 이번엔 한술 더 떠서, 주님의 ‘피’도 마셔야 한다고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 실로 너희에게 이르오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 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처럼, 나를 먹는 자도, 내가 보내는 그도 나로 말미암아 산다, 하십니다. 사람들 반응이 어땠을까요? … 네, 정말 ‘산 넘어 산’이라고 했겠지요. 율법이 철저하게 금하는 피까지 마시라고 하니, 많은 사람이 얼굴을 찌푸렸을 것입니다. 오늘 이 얘기는 가버나움에 있는 회당에서 하신 말씀이라고 59절에 나오는데요, 경건하고 엄숙한 회당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야 기에, 대부분이 혀를 차며 회당을 나섰을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 곁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어 갑니다. 오병이어 기적의 현장에 있었던 수 많은 인파에서,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기 위해 배를 타고 갈릴리 건너편까지 쫓아온 사람들로, 거기서 다시 가버나움 그 회당 안까지 따라와서 주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던 사람들로, 그렇게 숫 자가 줄더니, 이젠 예수님의 ‘제자’라고 불릴 만한 사람들 위주로만 남게 됐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제자들도 비슷한 반응입니다.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도대체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서로 수군거립니다. 그걸 아신 주님께서 말씀하지요.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요즘 말로 ‘긁히느냐?’ 그건 너희가 여전히 내 말을 육의 차원에서만 듣고 있기 때문이 다. 만약 내가 나중에 전에 있던 곳, 하늘로 다시 올라가는 걸 보게 된다면 어떨 것 같으냐? 지 금 이 말에 걸려 넘어진다면, 앞으로 다가올 그런 일들은 어떻게 감당하겠느냐? … 살리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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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영인 것이지, 육은 무익하다. 내 말을 육의 이야기로 들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들은 다 영이고 생명이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이 말씀은 더 어렵지 않습니까? 제가 풀어서 설명해 드린다고 했는데도 쉽지 않습니다. 갈수록 태산입니다. 조금 전엔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영생을 얻는다고 하시더 니, 이젠 육은 무익하고 영이 살린다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하신 말씀을 육으로 듣지 말고 영으 로 들으라고 하시는 것 같은데, 도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 다시 하 늘로 올라가시면 그땐 무슨 떡을 먹어야 하는지, 제자들로서는 그저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쯤 되면 주님의 의도를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주님은 지금 어려운 말씀을 쉽게 풀어주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신비와 혼란 속으로 일부러 제자들을 몰아넣 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정말 육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성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깨달을 수 있는 그런 차원의 말씀을 통해서, 계속해서 제자들을 체질하고 있는, 다시 말해 제자들을 가려내고 계신 것 같은 그런 느낌입니다. 실제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도 믿지 않는 자들이 있고,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않 으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는 말씀으로 일종의 쐐기를 박으십니다. 제자라고는 해도 믿지 않는 자가 있음을 주님이 알고 계시고, 그건 결국 인간의 이해나 선택의 문제이기 전에 아버지 하나님의 선택과 주권에 달린 것이라고 하셔서, 스스로 어디에 서 있는지를 돌아보고 선택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결국 팬들은 다 떠나고 제자들만 남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던 많은 제자가 주님을 떠나가 고 다시는 주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고 66절은 말합니다. ‘열두 제자’라는 표현이 요한복음에서 여기 처음 등장하는 걸 보면, 아마도 대충 열두 제자 정도만 남은 모양입니다. … 누구는 어려워 서, 누구는 실망해서, 누구는 마음이 긁혀서, 누구는 받아들이기 싫어서, 누구는 주님의 말씀이 마음에 찔려서, 그렇게 저마다의 이유로 하나둘 발길을 돌렸습니다. 오병이어, 그 놀라운 기적의 열기는 다 식어버렸지요. 수많은 사람의 환호와 수군거림과 다툼도 다 잦아들었습니다. 이젠 제 자들과 주님의 시간이고, 그곳엔 깊은 적막이 흐릅니다. 남겨진 제자들에게 주님이 조용히 물으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너희도 가려느냐?) … 부정 어가 포함된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너희도 가려는 것은 아니냐?” “너희도 떠나기를 원하지 않 느냐?”입니다. 조금 느낌이 다르지요. 우리말도 그렇지만 부정의문문은 상대방에게 ‘아니오.’라는 대답을 은근히 기대하며 하는 질문입니다. 예컨대, “내 마음 알아?”와 “내 맘 모르는 거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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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지?”는 뉘앙스가 다릅니다. “너희도 가려는 것은 아니냐?”라는 건, 떠나간 이들을 향한 안타까움 과, 남아 있는 자들을 향한 어떤 기대와 신뢰가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강요도 아니고 애원도 아 니지만, 그렇다고 무관심이나 체념도 아닙니다. 설사 떠날 마음이 조금 있더라도, 그 마음을 다 시 한번 돌아보게 만드는 그런 말씀이, “너희도 가려느냐?”입니다. 이때 시몬 베드로가 주님께 대답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 로 가오리이까?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우리가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여러분, 저를 따라서 다시 한번 베드로의 고백을 같이 이야기해 보시겠습니까?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 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우리가 믿고 알았사 옵나이다.” 아멘. 참 놀라운 고백입니다. 우리에겐 익숙하지만, 사실 ‘거룩하신 자’라는 말 자체가 구약에서는 거의 다 하나님을 직접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라고 했으니, ‘하나님께 속한 하 나님’이라고 인정한 셈입니다.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했던 공관복음의 신앙 고백도 대단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요한복음의 이 고백이 더 마음에 와닿고 감동이 됩니다. 예수님의 질문도 그렇고 상황과 맥락이 그렇지요. 왜 그런 고백을 하게 됐는지, 베드로의 마음이 실제로 어땠는지, 더 잘 드러나 있습니다. 고백하는 주체가 자기 자신, ‘나’가 아니라 ‘우리’라는 복수로 표현한 것도 주목하게 됩니다. 베 드로의 고백이 담긴 68절과 69절의 주어는 모두 다 ‘우리’입니다. ‘우리 고백’이지요. 제자 공동 체를 대표하는 리더로서, 자기의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자칫 흔들릴 수 있었던 지체들의 마음까 지도 다 한데 모아서, ‘우리의 고백’으로 단단히 붙들어 맵니다. 그래서 더 아름답고 귀하지 않 나, … 그렇게 서로를 온전하게 하는 믿음의 고백이 우리 안에도 늘 새롭게 일어나길 바랍니다. 사실 베드로의 이 표현,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입니다.”라는 말은, 지금 주님과 제자들이 함께 있는 가버나움 회당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그런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시작 하시면서 처음으로 하신 기적이, 바로 이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것인데 요, 그때 그 사람 속에 있던 귀신이 예수님께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 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4, 눅 4:34) 그랬습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그 이후로 누구도 그런 고백을 다시 하지 않았습니다. 신약 성경 전체에서 오직 베드로와 귀신만 이 예수님께 이 고백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베드로는 귀신처럼 정확히 알고 고백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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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니다. 어쩌면 베드로가 그때 귀신의 말을 마음에 담아뒀을 수도 있었겠지요. 물론 귀신은 예수님 을 ‘주님’이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나사렛 예수’일 뿐, ‘주님’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오 늘 베드로의 입을 통해 비로소 완전한 고백으로 완성된 셈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십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이 그런 분이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환호하는 군중 앞에서, 기적의 열기 속에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다 떠나가고, 이젠 남은 자들마저 흔들릴 수 있었던 순간에 나온 것이기 때문에, 베드로의 이 고백은 더욱 빛이 납 니다. 많은 제자가 이미 주님을 떠났고, “너희도 가려느냐?” 주님은 물으셔야 했습니다. 주님은 어쩌면 이 대답 하나를 듣기 위해, 그 고통스러운 ‘체질’의 시간을 견디셨는지도 모릅니다. 아버 지께서 주신 자는 다 주님께로 오게 됨을, 그리고 그들이 결코 잃어버려지지 않음을, 예수님은 베드로의 입을 통해 확인시켜 주십니다. 베드로의 고백이 감동인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 았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베드로는 ‘믿고, 알았습니다.’(believe and know, NIV) 믿음 과 앎이 함께 있습니다. 정확히 알지는 못하고 덮어놓고 믿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이 실제 로 그러함을 이성과 경험을 통해 확인했고, 또 반대로, 머리로 알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이 가슴으로 내려와서 주님을 향한 인격적인 신뢰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이번 3월 암송 구절에서도 같은 표현이 나오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 랑을 ‘알고’ 또 ‘믿었습니다.’ 여기서는 순서가 바뀌지요. 믿고 안 것이 아니라, 알고 믿었습니다. … 그러니까 믿음과 앎은 어느 것이 먼저랄 것 없이 상호보완적으로 서로를 완성한다는 뜻입니 다.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주님을 신뢰하여 말씀을 가까이하면 주님을 더 깊이 알게 됩니다. 믿음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말씀을 듣고 배울 때, 하나님에 대한 앎이 자랄 때, 믿음도 함께 자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과 지식은 모순적이지도, 배타적이지도 않고, 또 서로 분리되지도 않습니 다. 내 믿음이 잘 자라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면, 하나님에 대해 더 알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을 더 가까이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깊이 배워가는 것입니다. 알기는 많이 아는데 믿음이 잘 생기지 않는다면, 이제는 아는 대로 한 걸음 내디뎌 보는 ‘모험’이 필요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하나님께 실제로 기도해 보고, 말씀대로 살아보고, 그분께 내 삶을 맡겨보는 것입 니다. 지식이 가슴으로 내려와 믿음이 되려면 반드시 그 체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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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사람과의 관계도 비슷하지요. 어떤 사람에 대해 다 알지 못하지만, 신뢰를 바탕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그 사람을 더 온전히 알게 되고, 또 알면 알수록 더 깊이 그 사람을 신뢰하게 됩니 다. 물론 사람은 더 많이 알게 돼서 실망하고 믿음을 잃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하나님은 다 르시지요. 알면 알수록 더 신뢰하게 되고, 믿을수록 더 알고 싶어지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 주 님이십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라고 바울 사도가 권면 했습니다(고후 13:5). 어디까지 시험하고 무엇을 확증해야 하는가,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 때까지‘라고 말합니다. … 오늘 주님도 같 은 말씀을 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한다 고 하십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안에 주님이 계신다는 것이 여러분은 정말로 믿어지십니까? 내 가 주님 안에 있는데, 주님이 또 내 안에 있다는 진리가 여러분 이해되시는지요? 어떻게 내가 주 님 안에 있는데, 주님이 또 내 안에 계실까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가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음으로 나무 안에 있고, 동시에 나무의 수액이 가지 안으로 들어가 나무도 가지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 금도 성령과 말씀으로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시지요.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주님 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머리로만 아는 게 아니라, 어떻게 실존적으로 누리고 살 수 있는가, 중요한 건 그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더 알아가십시오, 그러면 더 믿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더 신뢰하고 의 지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을 더 알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 붙어 계십 시오. 그러면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음을, 온전히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사실 오늘 베드로도 주님을 온전히 알아서 이 믿음을 고백한 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에게도, 제 자들에게도 오늘 주님의 말씀은 너무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 이건 누가 봐도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가리키는 말씀 이지요. ‘인자’라는 말 자체가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종’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오늘 주님의 말씀 만으로 누가 그것을 다 이해할 수 있고 또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솔직히 예수님도 사람들이 다 이해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으셨을 거예요. 주님의 죽음에 대해 지금까지 말씀하신 적도 없고, 십자가 죽음도 부활의 영광도 아직 감춰져 있고, 이 모든 진리를 깨닫게 하실 성령조차 아직 오 시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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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베드로가 오늘 이후에 보여준 모습으로 볼 때, 베드로는 이 내용의 상당 부분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나중에 제자 들에게 따로 말씀하셨을 때, 그때 베드로가 뭐라고 항변했습니까?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 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마 16:22)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베드로를 주님은 뭐라고 부르셨어요? 네, 놀랍게도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다.” 하십니다. 너희 중의 하나는 마귀라고 오늘 말씀하시는데, 사탄이라는 말에 베드로는 그때 얼마 나 가슴이 철렁했을까요? 그런 온전하지 않은 믿음과 지식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주님을 떠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 68절에 보면,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그러지요. … 무엇 때문에 주님을 떠나지 않는다고요? 네, ’영 생의 말씀‘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 주님께 있기 때문에,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영생의 양식이라는 사실은 적어도 알고 믿기 때문에, 베드로는 주님을 떠날 수 없다고 이 야기합니다. 나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거지요? 주님이 많은 말씀을 하시면서 점점 더 그 내용이 깊어지고 어려워졌지만, 그래도 베드로는 그 내용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영생’ 그리고 ‘말씀’, 그거면 지금 상황에서 충분하지요. 제가 시험 삼아 ‘제미나이’에게 물어봤습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두 명사를 고른다면 뭐가 될까?” 그랬더니 ‘말씀과 생명’, ‘말씀과 영 생’이라고 대답합니다. 정확하지요? 어려운 얘기도 많고 또 다 믿어지는 상황도 아니지만, 그러 나 베드로는 가장 중요한 걸 ‘이해하고 믿었고’, 그래서 주님 곁에 머물겠다고 고백할 수 있었습 니다. 오병이어의 표적 때문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불러서가 아니라, ‘영생의 말씀’ 때문에 주님을 떠 날 수 없다고 하니, 그 말씀이 나를 영원히 살게 한다고 하니, 이보다 근사하고 아름다운 고백이 없습니다. 다른 건 차차 알게 되겠지요. 요한복음에 자주 나오는 표현 중의 하나가, 제자들이 처 음에는 깨닫지 못했다가 나중에 주님이 영광을 얻으신 후에 그 말씀을 기억하고 알게 됐다는 내 용입니다. 영생의 말씀 때문에 주님께 머물다 보면, 그 양식을 먹다 보면, 모든 퍼즐이 완성되는 때가 오게 됩니다. 지금 우리의 삶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지요. 왜 내 삶이 지금 이럴까,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 어났을까, 너무 거기에 몰두하면 길을 잃기 쉽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크고 영원한 섭리와 계획 안에 있지만, 바로 내 눈앞만 보고 사는 우리는 그 전체 그림을 볼 수도, 이해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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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도 없습니다. 지금은 그저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께 머물러 생명을 누리는 것에 집중하면 충분합 니다. 물론 말은 쉽지만 실제로는 어렵지요. 그래서 주님께로 가는 것이 주님을 믿는 것이라고 하시고,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라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너희도 가려느냐?” 그 질문에 대해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왜 주님을 떠나지 않으려 하십니까? 무엇을 기대하며 오늘도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예 배하고 계십니까? 베드로처럼 영생의 말씀이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까? 혹시 다른 기대나 바램이 있어서는 아닙니까? 제 개인적인 얘기를 조금 하는 걸 여러분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 저희 어머니가 돌 아가시고 저는 요즘 ’상속‘에 관한 여러 행정적인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희 어머니가 남겨주신 유산에는 재산보다 빚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결국 ’한정승인‘이라는 걸 하게 됐습니다. 어머니의 채무를 갚되, 어머니가 가진 재산 한도 내에서만 변제할 수 있도록 법 원에 신청한 것입니다. 아예 상속을 포기해도 되지만, 그러면 그다음 순서의 상속 대상자에게 그 빚이 넘어가서, 아무런 상관없는 친척이 괜히 빚을 떠안게 되기 때문에, 보통 빚이 재산보다 많 은 경우 이렇게 한정승인을 신청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한정승인이 저에게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12년 전 저희 아버지께서 돌아 가실 때도 같은 이유로 한정승인을 해야 했습니다. 하시던 일과 사업, 식당이 잘되지 않아서 빚 이 재산보다 더 많으셨고, 그렇게 아버지의 빚과 재산을 정리한 어머니는 그 이후로 기초생활수 급자로 살아오셨습니다. … 그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한정승인에 필요한 여러 서류를 준비하고 처 리하면서 저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과연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게 뭔가, 그 믿음으로 무엇을 얻고 무엇을 남기고 가는 인생인가. 예수를 믿으면 어떤 삶을 살게 되는가. 다시 고민하 게 됩니다. 저희 아버지도 그렇고 어머니도 그렇고, 일평생 주님과 교회에 헌신하며 사셨습니다. 넉넉지 않 은 형편에도 삶의 모든 우선순위를 교회와 신앙에 두고 사셨습니다. 개척교회를 섬기다 그 교회 첫 장로가 되셨고, 교회 건축을 위해 저희가 살던 집을 줄였습니다. 목사님의 차를 사드리신다면 서 아버지는 거의 일평생 자전거만 타고 다니셨습니다. 집에서 자는 날보다 교회에서 주무시는 날이 훨씬 더 많았고, 교회 일을 위해 생업을 쉬실 때도 비일비재했습니다. ‘십의 일’로는 부족하 다고 하시면서, ‘십의 이’, ‘십의 삼’을 드리실 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삶은 항상 고단했습니다. 배움이 짧아 고생도 많이 하셨고, 세상적으로 어려운 일도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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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겪으셨습니다. 자녀들에게 물려줄 재산보다 빚이 더 많은 인생이었으니, 짐작이 가실 겁니다. … 무엇보다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삼 형제 중 막내이신 아버지가 가장 먼저 돌아가셨고, 저희 어머 니도 마찬가집니다. 6남매 중에 제일 먼저 돌아가셔서, 이번에 형제들이 참 많이 우셨습니다. 그런 삶이어도 하나님으로 인해 행복했는지, 하나님의 생명을 풍성히 누리며 사셨는지, 두 분께 자세히 여쭤보지는 못했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살다가 돌아가실 것을 아셨다고 해도, 그 젊은 날 그렇게 하나님께 헌신하며 사셨을 것인지, 후회는 없으신지, 차마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 대신 그 질문을 오늘 저 자신에게 해 보게 됩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예수를 믿고, 목사가 되어 살아 가고 있는지. 주님께 뭐가 있기에, 무엇을 기대하기에 여전히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일을 감당하 고 있는지, “너희도 가려느냐?” 주님의 질문 앞에 그렇게 오늘도 다시 서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왜 주님을 믿고, 무엇 때문에 주님을 떠나지 못하십니까? 베드로와 같은 대답입니까?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주는 하나님 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우리가 믿고 알았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고백이신지요? … 설사 풍성한 떡이 없고, 기적과 축복이 없어도, 영생의 말씀이 주님께 있고 실제로 그 말씀을 통해 생명을 풍 성히 누리고 있는지, 나를 택하시고 부르신 주님의 뜻을 행하는 그 일이 나에게 진정 생명의 양 식이 되고 있는지, 그래서 주님을 떠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여러분, 어 떠십니까?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결국 십자가의 주님을 믿음으로, 그분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영생에 이르고, 그분의 말씀을 먹음으로 날마다 그 생명을 누리며 사는 것임을, 우리 모두가 알고 또 믿게 되기를 바랍니다. 다른 게 복이 아니라, 주님께 가까이 함이 복이고, 가서 주님의 말씀을 먹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복이라고, … 삶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지 않 아도,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여 살아가는 매일이 기적이라고 믿고 또 알아가길 소망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주님이 제자들에게, 너희 중 한 사람은 마귀라고 하셨는데요, 그 말을 들 은 베드로와 제자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요한복음을 기록할 때야 그게 가룟 유다인 줄 알았 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으니, 다들 너무나 당황스럽고 두렵지 않았을까요? 심지어 베드로는 예수님께 나중에 ‘사탄’이라고 꾸중까지 듣고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저주했으니, 주님 말씀 하신 그 마귀가 바로 나 아닌가, 두려워하고 떨지 않았을까요? 베드로만이 아니었겠지요. 다들 주님을 배반하고 떠나가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베드로와 제자들이 잘한 것은, 그런 자신을 바라보다 주님께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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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 를 부르신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끊임없이 주님께로 다가가 그 믿음을 고백 한 것일 겁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주님 물으실 때, “우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영생의 말 씀이 주께 있고,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우리가 믿고 알았습니다.” 그 고백이 결국 시몬을 베드로 되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란 어떤 순간에도 주님께로 가서 그분의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임을 잊 지 마시길 바랍니다. 내가 한없이 부족하게 느껴지고, 심지어 내가 마귀처럼 느껴질 때도, 반대 로 때론 내가 뭐라도 된 것 같고, 믿음으로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순간에도, 우리는 주님께로 가서 영생의 말씀을 먹고 누리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 지난주에도 말씀드렸 지만, 여러분, 말씀을 꼭 밥처럼 드세요. 말씀은 아프고 힘들 때 맞는 수액도 아니고, 고통을 줄 여주는 진통제도 아닙니다. 밥처럼 잡수시고 그 밥심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저희 교회 홈페이지를 새로 만들면서, 우주 집사님께서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 멋진 문구를 만들 어주셨는데요, ‘살아있는 말씀, 말씀을 살아내는 성도’라는 구절입니다. 생각할수록 정말 귀하고 멋진 얘기 같습니다. 그 구절 그대로, 언제나 풍성한 ‘영생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붙좇아 살 아내는 그런 교회, 그런 성도가 되기를, 그래서 주님 약속한 영생을 꼭 풍성히 누리며 사시기를, 다시 한번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