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여호수아 21:1~45 (구약 348쪽) 자기의 기업에서 주니라

2025-05-25 · 설교 원고 · 9쪽 · 약 19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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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부활절 여섯 번째 주일 [여호수아 강해 35] 여호수아 21:1~45 (구약 348쪽) 자기의 기업에서 주니라 본문 3절의 ‘자기의 기업에서 주니라’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 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 모든 지파의 기업 분배가 마무리됐고, 또 여섯 개의 도피성도 정해 졌습니다. 이젠 정말 각자의 기업에서 새로운 일상을 시작할 때인데요, 이때 레위 자손의 족장들 이 여호수아와 리더들을 찾아갑니다. 본문 1절은, ‘그 때에’라는 말로 시작되지요. ‘나아오다’라는 동사에도 동작의 연속을 나타내는 문법적 장치(히브리어 와우 연속법)가 더해져서, 지금 이 일이 각 지파의 기업과 도피성이 모두 정해진 바로 ‘그때’ 일어났음을 강조합니다. 아직 분배가 다 끝 난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남았고, 본문은 바로 이 문제, 가나안 땅 분배 의 마지막 퍼즐에 관한 얘깁니다. 앞선 도피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번 사안도 일찍이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령하신 내용이었습 니다. 각 지파에게 기업을 분배할 때, 그 땅에 기업이 없는 지파, 오직 하나님을 기업으로 가진 레위 사람들이 거주할, 마흔여덟 개의 성읍과 목초지를 따로 구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백성들 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레위인이지요. 농사지을 토지, 기업은 필요 없지만, 거주할 집은 있어야 하고, 제사에 사용되거나 자신들이 먹기 위한 가축을 기르는 데 필요한 목초지도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명령이 기록된 민수기 35장에 보면, 거기서도 레위 자손의 성읍과 목초지에 관한 말씀이 도 피성 규례와 함께 나오고, 순서로는 도피성보다 앞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서에서는 그 순서가 바뀐 셈입니다. 도피성을 정하라는 말씀이 지난주 20장에 먼저 나오고, 그 후에 오늘 레 위 사람들이 여호수아를 찾아갑니다. 아무래도 자기들 필요에 관한 얘기다 보니 레위인들이 먼저 막 나서서 말하기가 어려운 부분도 있었을 텐데요, 도피성까지 다 정했는데도, 그것과 한 세트나 다름없는 레위 성읍에 대해서는 별 이야기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나선 것처럼 보입니 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도 일부러 모른 체 한 건 아니었을 것이고, 이제 막 얘기하려고 했거나, 혹은 부지중에 실수한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레위 사람들이 이야기하자 곧바로 성읍과 목초지를 주게 되는데요, 레위 지파의 어떤 자손에게, 어떤 지파가 어느 기업을 나눠줄지, 이번 에도 각 지파가 제비를 뽑아서 결정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레위 지파는 총 세 자손, 네 그룹으로 나뉩니다. 야곱의 셋째 아들 레위에겐 게 르손, 그핫, 므라리라는 세 명의 아들이 있어서, 각각이 하나의 종족을 이루게 되는데요, 그중 둘 째 아들 그핫, 혹은 ‘고핫’이라고도 합니다만, 이 그핫의 손자가 아론입니다. 이른바 제사장 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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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인 거지요. 그래서 그핫 자손이 제사장 가문과 비제사장 가문으로 다시 나눠져서, 레위 지파는 크게 네 그룹이 됩니다. 게르손 자손, 그핫 자손 중 제사장 가문에 해당하는 아론의 자손, 또 제 사장이 아닌 나머지 그핫 자손, 그리고 므라리 자손까지 넷으로 나뉘고, 이들이 하나님의 성소, 성전에서 맡은 일들이 다 따로 있어서, 그 역할로도 구분됩니다. 성막을 세우는 과정을 상상하면서 이들의 역할을 잠깐 생각해 보면요, 성막은 큰 이동식 텐트지 요. 텐트를 칠 때 제일 먼저 뭘 하지요? 네, 말뚝을 박고 기둥을 세웁니다. 그 일을 막내 므라리 자손이 합니다. 성막의 기둥과 받침대, 말뚝을 담당하고 운반하는 일이 므라리 자손의 역할입니 다. 기둥을 세웠으면 그다음은 뭘 해야 하지요? 네, 기둥 위로 천막을 쳐야 합니다. 성막에서는 그걸 휘장이라고 하는데요, 이 휘장이 또 엄청나지요.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이 이 휘장에 얼마 나 진심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총 네 겹의 휘장을 치는데요, 이 일을 장남 게르손 자손이 담당 합니다. 기둥을 세우고 천막을 덮었으니, 이제 그 안에 물건들을 넣어야겠지요? 그 일은 둘째 그 핫 자손이 맡습니다. 제사장이 아닌 그핫 자손이지요. 법궤, 제단, 촛대 같은 성물을 관리하고 옮 기는 역할입니다. 이렇게 성막이 완성됐으면 이제 뭘 해야지요? 네, 제사를 드려야지요. 그핫 자 손 중 아론의 후손, 제사장 가문이 이 일을 맡습니다. 이렇게 레위 자손은 기본적으로 성막과 관련된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백성들을 위한 여러 신앙적인 책무도 담당했는데요, 율법이 정하는 다양한 의식(儀式)과 규례를 관장하고, 백성 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또 생활 속에서 어떻게 율법을 적용할 것인지 연구하고 안내하면서, 그 렇게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함께 섬기며 살았습니다. 이런 레위 자손을 위한 총 마흔여덟 개 성읍과 목초지를, 이제 열두 지파가 제비 뽑아 나눠주게 되는데요, 이 중 여섯 개 성읍은 도피성을 겸했습니다. 열두 지파에 마흔여덟 개 성읍이니까 대 략 한 지파 당 네 개의 성읍인 셈인데요, 납달리 지파가 유일하게 세 성읍을 제공한 대신, 유다 와 시므온은 합쳐서 아홉 개 성읍을 내주었고, 나머지 지파들은 모두 똑같이 네 성읍씩 주었습니 다. 가나안 정복 직전의 레위 지파 인구가 23,000명이라고 민수기에 나오니까요, 하나의 성읍당 약 500명 정도의 레위인이 모여 살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도에서도 보시는 것처럼, 이런 레위 사람의 성읍은 가나안 땅 전역에 골고루 흩어져 있었습니 다. 각 지파의 기업에서 제비 뽑아 줬으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성소가 있는 실로에 레위인들끼리 모여 산 게 아니라, 가나안 땅은 물론 요단강 동편까지 곳곳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 그러고 보 면 오래전 야곱이 죽으면서 아들 레위에게 했던 예언 그대로 이루어진 셈입니다. 야곱은 둘째 시 므온과 셋째 레위를 향해서, 너희 둘은 폭력의 도구다, 너희가 분노대로 세겜 족속을 잔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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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진멸했으니, 너희가 저주를 받아 이스라엘 가운데 흩어져 살게 될 것이다, 한곳에 모이면 엉뚱한 일을 또 도모할 테니, 그러지 못하게 다 흩어질 거라고, 창세기 49장에서 이야기했는데요, 사실 상 그 말 그대로 이루어진 셈입니다. 하지만 그 흩어짐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야곱은 ‘저주의 흩어짐’을 말했지만, 결과는 ‘축복의 흩어짐’이 됐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존재로서, 자기 삶은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하나 님과 백성을 섬기는 데 집중하는 삶입니다. 이 땅에는 내 기업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는 삶이지요. 내 생명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으니, 사람에게 어떤 인정을 받고 얼 마나 많은 돈을 쌓아두고 살든, 하등 중요치 않은 삶입니다. 어제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사나 죽으나, 매이나 자유하나, 가난하나 부하나, 오직 내 몸에서 주님이 존귀하게 되고, 성도들에게 유익만 된다면 그걸로 충분한, 그렇게 하나님과 백성을 섬기기 위한 흩어짐의 삶을 살게 된 것입 니다. 이러한 역전이 어디서 기인했는가, 성경은 유명한 금송아지 사건을 그 결정적인 계기로 꼽습니 다. 아시는 것처럼 금송아지 사건은,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서 내려오질 않자, 백성들이 아론 을 부추겨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거기 절하고 예배하여 하나님의 큰 진노를 산 일입니다. 그때 유일하게 하나님의 편에 섰던 이들이 바로 레위 자손이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은 그들을 구별하 여 하나님과 백성을 섬기는 특별한 부르심을 맡기셨습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이 바로 오늘 마흔 여덟 개 성읍과 여섯 개의 도피성에도 나타나고 있는데요, 야곱의 예언대로 한곳에 모여 살지 못 하고 흩어지게 됐지만, 그 의미는 정반대가 됐습니다. 백성 속에 흩어져 살면서 그들을 섬기고 하나님과 연합하게 하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자신들의 ‘흩어짐’으로 백성들이 하나님과 ‘연합’하 게 하는 삶이라고 할까요, ‘레위’라는 이름의 뜻이 ‘연합’이지요. 흩어짐의 부르심을 통해 연합의 사명을 살아냈던 사람들, 그들이 바로 레위 자손이었습니다. 우리 삶에 있어 중요한 시간도 언제나 바로 지금이지요. 지금 내가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모습을 결단하느냐에 따라, 시간 위에 놓인 삶의 모든 궤적이 바뀔 수 있음을 성경은 분명하게 증언합니 다. 심지어 과거의 실수와 저주까지도 하나님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내십 니다. 흩어짐은 분명 저주인 줄 알았는데, 그마저도 축복이요 영광이 되게 하신 것처럼 말입니 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고,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미래와 희 망을 주시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렘 29:11). 사랑하는 여러분, 삶의 여러 갈림길마다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고, 하나님을 선택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오늘도 여러분은 예배를 선택했고,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여러 가지 힘들고 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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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가쁜 일들 가운데 한 주를 보냈지만, 다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런 여러분을 하나 님이 기뻐하시고 새롭게 하셔서, 다시 세상으로 흩어지는 여러분의 삶을 반드시 세상의 복이 되 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서만이 아니라 세상에서도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의 편에 서 실 수 있기를, 그래서 여러분의 삶을 통해 누군가 하나님과 연합하게 되는, 그런 귀한 일들을 꼭 누리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오늘 이 긴 본문에서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레위 사람 들에게 준 마흔여덟 개 성읍을 기록하면서, 성경이 그 각각의 성읍을 모두 밝히는 것은 물론이 고, 그 성읍을 어느 지파가 냈는지, 아주 자세히 언급한다는 점일 겁니다. 어느 지파에서 나온 어떤 성읍과 목초지가 누구에게 주어졌는지 일일이 열거하고, 반복되는 문구들도 생략하지 않고, 매번 다 언급합니다. 그래서 21장이 무척 길어졌지요. 그냥 어디 어디 성읍과 목초지를 받았다고 뭉뚱그리지 않습니다. 어떤 지파에서 어디를 냈는지, 그 목록과 내용을 하나하나 공들여 기록합 니다. 여러분, 왜 이렇게 기록했을까요? 각 지파가 내어준 그 하나하나의 기업이 전부 다 그들에겐 소중한 땅이고, 그러한 순종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 그만큼 귀하다는 의미 아닐까요? 그 어떤 성읍도 잊히지 않고, 어느 목초지 하나도 허투루 여기지 않으신다는 것, 거기 담긴 신앙의 고백과 헌신을 하나님도 기억하시지만, 레위 자 손과 이스라엘 백성이 함께 기억하길 바라시는 마음이, 행간에 담겨 있지 않나, 각 지파가 성읍 과 목초지를 내준 것이 그만큼 어렵고 대단한 일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본문에 기록된 마흔여덟 개의 성읍을 보면,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곳들이 참 많습니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곳이 다름 아닌 유다 지파 갈렙의 기업, 헤브론이지요. 헤브론은 도피성이기도 했 으니까, 갈렙은 참 많은 것을 내놓은 셈입니다. 부지중에 살인한 사람들이 살아갈 집과 땅은 물 론, 제사장들에게 성읍과 목초지까지 내주고, 자신들은 그 성읍에 딸린 밭과 촌락에 머물러 살았 다고 12절은 말합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가장 먼저 나서서 애쓰고 고생한 걸 생각하면, 뭔가 억울한 결과인 것도 사실입니다. 헤브론만 그런 게 아니지요. 마흔여덟 개 성읍 모두, 저마 다의 이유로 다 소중한 기업이고, 그걸 내놓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사실 집과 목초지를 받는 레위 자손 입장에서도 마음이 불편하긴 마찬가지였을지 모릅니다. 비록 하나님의 명령이라고는 하지만, 형제들이 전쟁을 통해 얻은 기업을, 아무 노력 없이 그냥 공짜로 받아서 살아가는 게 그렇게 마음 편한 일은 아니지 않았을까요? … 차라리 처음부터 레위 자손 의 성읍을 미리 정해 놓거나, 아니면 레위인들만 따로 한곳에 모여 살아가도록 했다면 어땠을까, 성소가 있는 실로 주변에 같이 거주하면 편하지요. 출퇴근 거리도 가깝고 레위 자손 입장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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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덜 민망하고, 다른 지파의 부담 역시 덜 수 있었을 겁니다. 실제로 레위 사람들이 나서서 요청하기 전까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이 일을 전혀 인지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성경은 기록합니다. 레위인들이 찾아가서 이야기한 후에야 분배가 시작되지요. 사람이 다 그렇습니다. 내가 받아야 할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억하지만, 내가 남 에게 줘야 할 것은 아무렇지 않게 잊어버립니다. … 레위 자손이 말하기 전까지만 해도, 분배받 은 기업이 다 내 것인 줄 알았던 사람이 많을 텐데, 거기서 도피성도 내놓고, 네 개의 성읍과 목 초지까지 내줘야 한다는 걸 알고는, 마음이 좀 어렵지 않았을까요? 처음부터 줄 건 주고 그 후에 받았다면 모를까, 줬다가 가져가면 더 힘든 게 사람 마음입니다. 여러분 월급 받을 때 미리 갑근세 떼고 받으시지요? 그거 미리 안 떼고 월급 받은 다음에 여러 분더러 직접 내라고 하면 어떨까요? 내기 더 힘들겠지요? 아마 세금 못 내는 사람, 안 내는 사 람 많아질을 겁니다. 하나님 앞에 예물 드리는 거, 특히 십일조 드리기가 어려운 것도 마찬가지 지요. 미리 하나님이 떼 가고 주시면 그렇게 힘들지는 않을 거예요. 다 내 소유인 것처럼 일단 받아서 떼려니까,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렇습니다. 일단 내 소유가 되면 다 시 내려놓기가 참 힘듭니다. 레위 자손의 성읍도 그래서 어렵습니다. 기업을 다 나눠준 다음 제 비 뽑지 말고, 그냥 애초에 레위 사람들의 성읍과 목초지를 따로 구별했으면 서로 더 깔끔하지 않았을까,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지파의 기업이 다 분배된 후에, 다시 제비를 뽑 아 레위 사람에게 줄 성읍과 목초지를 각 지파가 스스로 구별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본문에 가장 자주 나오는 단어가, ‘주다’라는 동사와 ‘받다’라는 동사입니다. 한쪽은 주게 하시고, 다른 한쪽은 받게 하세요.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게 아니지요. 받은 기업 중에서 일부를 구별하여, 각 지파가 다시 레위 사람에게 ‘주게’ 하십니다(3절). 받는 쪽 입장도 마찬가집니다. 근본적으로야 하나님께 받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각 지파 ‘사람들을 통해서’ 받게 됩니다. 이러한 분배 형식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일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닐 겁니다. 백성들이 서로의 필요를 함께 채워가면서, 내 생명과 삶이 하나님께만이 아니라,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음 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누 군가의 헌신을 통해서 베풀어지는 것임을, 그렇게 서로가 은혜라는 끈으로 단단히 묶여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레위인은 운명 공동체지요. 백성들이 평안하면 레위인도 평안하 고, 백성들의 삶이 어려우면 레위인의 삶도 고단해집니다. 예컨대 자기 기업을 포기했던 단 지파 에 속한 레위인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그들의 운명도 기구해졌겠지요? 미가의 제사장 노릇을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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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던 레위 청년처럼, 여기저기 떠돌며 온전히 않은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사실 레위 자손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모든 초태생, 처음 태어난 생명을 대신하여 하나님이 취 하신 사람들이라고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애굽의 모든 장자가 유월절에 죽임을 당했을 때, 하 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처음 난 것 역시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돌리라고 하셨는데요, 바로 이 레위 자손을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 대신 취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레위인이 하나 님께 바쳐졌기에 나머지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 나님은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깊이 잇대게 하셔서, 은혜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삶에 눈 을 뜨게 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지요. 우린 모두 은혜받는 자이자 은혜 베푸는 자로서 서로 긴밀히 엮여 있습니 다. 모든 예배와 사역 속에 서로가 주고받는 은혜로 가득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선, 더 약 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더 요긴하고, 부족해 보이는 지체에 귀중함을 더하셨다고 성경은 말 하지요(고전 12:22~23). 손이나 발은 눈에 금방 보이고, 그 소중함을 누구나 알지만, 심장이나 폐 는 보이지도 않고 무시되기 쉬워도, 실은 생명에는 더없이 귀한 것처럼, 교회가 그렇다는 거예 요. … 주중에 전도사님이 맹장염으로 수술을 받으셨는데요, 평소엔 있는지도 잘 몰랐던 그 작은 맹장이, 막상 탈이 나니까 어떻습니까? 온몸이 고통을 겪고, 생명이 위태로워지기도 하지요. 하 찮아 보일수록 더 중하고, 연약해 보일수록 더 귀한, 그런 생명의 관계 속에 서로 잇대어 살아가 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함께 부르시고, 함께 자라게 하시고, 함께 완성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받지 않고 줄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주기만 하는 사람도 없고, 받기만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면서, 우린 그렇게 은혜 안에서 함께 생명을 누 립니다. 값없이 받았으니 거저 줄 줄 알고, 내가 줄 수 있는 이유 또한 은혜임을 고백하면서, 서 로의 존재 자체를 은혜로 여기지요. 맞습니까? 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일 겁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 같지만, 세상은 그 은혜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것은 다 내 노력의 결과이고, 거기에 은혜가 끼어들 자리는 없습니다. 내가 가진 것 전부를 다 내가 소유하 고 나 혼자 다 누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내가 이룬 성취와 승리를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이 값없이 은혜로 주어졌는지, 또 얼마나 많은 타인의 섬김이 내게 베풀어졌는지 알지 못하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받은 섬김에 대해, 서비스에 대해 일정한 돈이 지불됨으로써 모든 계산이 끝났다고 생각하지요. 돈을 냈으니 더는 감사할 이유도, 빚진 자의 마음도 필요치 않다고 여기며, 오직 나의 권리를 지키고 누리는 일에만 몰두하며 살아갑니다. 그게 하나님 없는 세상,

원고 7쪽

- 7 - 은혜 없는 세상의 현실입니다. 마흔여덟 개 성읍과 거기서 살아가는 레위인의 삶은, 그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외침과 도 같습니다. … 우리의 생명과 삶이 하나님과 이웃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돈으로 다 갚아지지 않는 무수한 빚을 서로에게 지고 살아간다는 것. 부지중에 지은 수 많은 죄를 용서하고 또 용서받으며 산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베푼 것보다, 내 게 베풀어진 은혜가 비교할 수 없이 크다는 것, 내가 세상에 준 것보다, 내가 세상으로부터 받은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감사하게 합니다. 그럼으로써 그 감사가 결국 누구에게로 향해 야 할지 가리켜 주지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지금도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값없이 베푸 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이것이 레위 자손에게 주어진 연합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과 연합하게 하고, 또 은혜 안에서 서로가 연합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마흔 여덟 개 성읍 가운데 흩어져 살아가는 레위인의 소명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이러한 레위인의 삶을 오늘 이 시대 가운데 살아내고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 다. 모든 성도를 가리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지요. 각자의 자리에서 삶으로 하나님을 예배 할 뿐만 아니라, 마치 세상 속에 환하게 켜진 마흔여덟 개 등불처럼, 어떤 음식이든 간을 맞춰 요리를 완성하는 소금 알갱이들처럼, 우리는 오늘도 다시 세상으로 흩어지고 녹아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삶으로 증언하고, 하나님과 사람을 잇는 은혜의 다리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한편으로는 세상과 구별된 모습으로 살아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에 가득한 은혜를 분별할 줄 알고, 고마워할 줄 아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만 세상을 섬기고 세상을 위 해 희생한다는 착각을 버리고, 우리 또한 세상을 통해 얼마나 많은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지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세상에 주는 것보다 세상이 나에게 주는 것이 비교할 수 없이 많 다는 진실 앞에 늘 겸비해야 하지요. 누군가의 섬김과 존재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항상 감사하 는 자로 살아가는 것, 그렇게 끊임없이 은혜를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세상과 구별하는 가 장 거룩한 삶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회사가 날 위해 해준 게 뭐가 있느냐, 내가 수고한 만큼 보상도 안 해주고, 나를 착취하고만 있 다.” 말하기 전에, 먼저 그 직장을 통해, 그곳의 사람들을 통해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 리고 인정하는 것이, 세상과 구별된 성도의 삶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 하는 말은 맞지만,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산다.” 하는 말은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지금도 내 이웃을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알고, 존중 할 줄 아는 게 신앙이고 예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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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가끔 연예인들이 시상식에 나와서 수상 소감을 이야기할 때,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모 든 영광을 돌립니다.” 말하곤 하지요. 그런데 거기서 소감을 끝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함 께 일한 동료, 직원, 팬은 물론이고, 그 작품을 할 수 있도록 자금을 댄 회사와 대표, 자기 소속 사 사장에게 반드시 고마움을 표하지 않습니까? 물론 그래야 사회생활이 가능하겠습니다만, 그게 빈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아직 세상을 잘 모르는 것이겠지요. 저는 가끔 사모가 다니는 회사 앞을 지날 때마다, 그 회사 건물을 향해 고개를 숙여, “고맙습니 다.” 인사하곤 합니다. 정말 고맙고, 감사하거든요. 물론 아내가 흘린 수많은 땀과 눈물의 근원이 기도 합니다만, 그럼에도 그 은혜를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아내가 지금의 회사를 벌써 11년 넘게 다니고 있는데요, 어쩌다 보니 저희 교회가 걸어온 연수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덕분에 저는 주의 일에 더 집중할 수 있었고, 울고 웃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으니, 그보다 고마운 일이 없 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 흩어져 사는 저와 여러분이, 삶의 여러 순간마다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 고, 하나님을 선택한다는 것은, 세상 속에 가득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또 하나님의 은혜가 누 군가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부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참으로 감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 은혜받는 자이자 은혜 베푸는 자로서,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 안에 같이 엮여 살아간다 는 사실을 인정하고, 감사의 마음으로 기쁘게 세상을 섬김으로써, 하나님과 사람을 잇는 연합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감사가 있는 곳에는 관계가 어그러지기 어렵습니다. 여러분을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사람이 있다 면 그와 나쁜 관계일 수 있겠습니까? 설사 내가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누군가 나를 정말 고마워하고 그걸 느끼게 해준다면, 그 사람과의 관계는 나빠질래야 나빠질 수가 없습 니다. 감사는 그런 것입니다. 감사가 충만한 땅에 죄와 사망이 머물지 못합니다. 그 감사가 소멸하면, 성도는 거룩의 힘을 상실합니다. 마치 삼손의 머리카락처럼, 힘의 근원이 잘려 나간 무력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감사 없이는 말씀에 순종할 수도 없고 생명을 누릴 수도 없고 누군가를 기쁘게 섬길 수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힘 있게 시작할 수 없게 돼요. 우린 이기적 이고 변덕스러우며, 죄의 유혹에 취약하기 때문입니다. 힘든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선 택할 수 있는 능력이 어디서 오는가, 오직 감사뿐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바라고 의지하는 감 사 안에서만, 우리는 모든 거룩한 일을 온전히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원고 9쪽

- 9 -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기 위한 첫걸음은, 그 먹고 마시는 것 을 하나님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또한 누구를 통해 하나님이 주셨는지 잊지 않고 감사하 는 것이고, 그를 위해 복을 비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생명이 하나님 주신 은혜를 주고받으며 서로 연결되어 있고, 나의 생명이 다른 생명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 내가 살기 위해 먹는 모든 것이 누군가의 생명이며, 눈물이며, 땀이라는 사실 앞에 진정으로 깨어 있는 삶을 사는 것, 그것 이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내야 할 ‘왕 같은 제사장’ 된 삶의 시작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제 다시 세상으로 흩어지는 저와 여러분은, 가나안 땅 곳곳에 흩어진 마흔여덟 개 레위인의 성 읍과 같습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모두 이 시대의 레위인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고, 은혜를 누리며 감사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과 세상을 연합하는 존재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별로 ‘아멘’이 없으시네요. 아마 거기까지 생각하며 살아갈 여력이 없으셔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은 ‘개인적’이지만 ‘사적’이지는 않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단지 나 자신만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얘깁니다. 우리 각자의 삶은 다 ‘personal’ 하지만 ‘private’ 하진 않습니다.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 의미와 무게는 결코 나 하나의 삶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각자의 (personal 한) 삶이 하나님의 문제이기도 하고, 교회 와 세상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부르셨어요. … 교회, ‘에클레시아’의 뜻 이 뭐라고 했습니까? 사적인 삶, 그 밖으로 불러내진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했습니다. private 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세상 모두에 관여하는 삶으로 불러내진 사람들의 모임이 ‘에클레시아’이 고, 예수님은 그 단어를 가져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정말 실 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냥 머리로만 이해해서는 백날 설교를 들어도 ‘나’라는 감옥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그 귀한 부르심을 힘껏 감당하는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비록 나 하 나의 사적인 삶만으로도 힘든 이 세상이지만,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감사로 새 힘을 얻 어서, 세상 속에 흩어져 사는 이 시대의 레위인으로서, 하나님과 세상을 연합하게 하는 그 복 된 믿음의 삶을, 우리 모두 넉넉히 살아낼 수 있기를, 다시 한번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 니다. 아멘.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