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양의 문, 선한 목자
2026-06-14 · 설교 원고 · 9쪽 · 약 19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원고 쪽 이동 · 9쪽
원고 1쪽
우리고백교회
- 1 -
오순절 후 세 번째 주일 [요한복음 강해 35]
요한복음 10:1~21 (신약 162쪽) 양의 문, 선한 목자
본문 7절과 15절의 ‘양의 문, 선한 목자’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
러분의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 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이 유대교로부터 쫓겨냄을 당하
자, 예수님이 그를 찾아내어 만나십니다. 그런 예수님을 그가 인자요, 주님으로 고백하며 엎드려
절하지요.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에도 계
속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내용 자체는 아주 따뜻하지만, 대화의 분위기는 그렇지 않
은데요, 이 대화가 앞의 9장과 연결되어 있고, 주요 청중이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이기 때문입니
다.
내용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무엇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른바 요한복음의
‘에고 에이미’ 그 세 번째와 네 번째 내용이, 오늘 본문에서 하나의 맥락 안에 나옵니다. 전반부
에서는 나는 양의 문이다, 그러시고 뒤에서는 나는 선한 목자다,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과 생명으로 인도하실 때는, ‘양의 문’이라 그러시고, 주님이 우리를 돌보실 때는 ‘목자’, 그
중에서도 ‘선한 목자’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주님의 이 두 가지 비유 모두에서 저와 여
러분은 공통적으로 ‘양’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양의 문’이시기도 하고 ‘목자’가 되시기도 하
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양쪽 모두에서 똑같이 ‘양’입니다. 참 중요한 부분이지요. 예수님이 ‘양의
문’이고 ‘목자’이신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양’이라는 사실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나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 경험, 예수님 경
험도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양이 아니라면, ‘양의 문’은 있으나 마나입니다. 그건 그냥 불편한 장애물에 불과합니다. 내
가 양이 아닌데 목자가 무슨 필요 있고, 그 목자가 선한 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아무리 선한
목자여도 사실상 나에게는 무의미한 존재입니다. … 여러분, 예수님이 나는 ‘양의 문’이고, ‘선한
목자’라고 하시는 이 말씀 속에는,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양’이라는 너무나 분명하고 중요한 진
실이 담겨 있습니다. 지극히 연약해서 반드시 목자가 필요하고, 보호받을 수 있는 울타리(와 우
리)가 있어야 하고, 또 거기에 드나드는 문도 필요합니다. 그것이 오늘 주님이 말씀하는 저와 여
러분의 실제 모습이고, 그걸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진짜 신앙 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
다.
원고 2쪽
- 2 -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스스로 ‘양’과 같다고 느껴지십니까? 양, 그러면 여러분 어떤 이미지가 떠
오르시나요? … 네, 참 평화로운 느낌입니다. 잠이 안 올 때 양을 백 마리까지 센다고 하는데요,
한가로운 초원에서 양들이 하나씩 울타리를 뛰어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안정됩
니다. 그만큼 온순하고 평화롭습니다. 참 무해한 동물이지요. 반대로 말하면 연약하고 무력합니
다.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빨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포식자를 따돌릴 수 있
는 빠른 발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양은 청각이 발달해서 소리에 예민하고 겁이 많은 데 반해, 상대적으로 시력은 제한적입니다. 넓
게는 보는데 깊게, 또렷이 보지를 못합니다. 눈이 머리 양쪽으로 떨어진 채 자리하고 있어서, 바
로 코앞이 사각지대입니다. 위협을 감지하는 데는 유리하지만, 스스로 길을 찾아가거나 장애물을
분별하기 어렵고, 방향 감각도 좋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이사야 선지자가 말
한 그대로입니다. 목자가 푸른 풀밭,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해 줘야만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저와 여러분이 그렇다고 하십니다.
살다 보면 가끔은 내가 좀 대단해 보이는 때도 있고, 그래서 뭐든 다 해낼 수 있을 것처럼 여겨
지는 때도 있습니다만, 성경이 말하는 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우
리는 조금 더 독립적으로 되어 혼자서 뭐든 잘하게 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얼마나 연약
한 존재인지를 더 자주, 더 선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갈수록 더 주님 의존적으로 되고, 범사에
주님을 의지하게 되지요. 우리의 영적 현실이 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부름과 기원의 기도에 있었던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정확히 하나님을 ‘목자’로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 그럽니다. 자신이 양과 같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경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찾아보면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고백하는 경우가 의외로 거의
없습니다. 단 두 사람, 다윗, 그리고 야곱뿐입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처음 고백한 사람은 뜻밖
에도 야곱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기르신 분이요(창 48:15), 나의 목자(창 49:24)라고 말합니다.
죽음을 앞두고 한 고백이지요. 아마 젊어서는 자기가 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적어도
여우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을 거고, 그래서 하나님도 목자가 아니었을 거예요. 그러다 인생의 황
혼에서 고백하게 된 거지요. 나는 양이었고 주님은 목자였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하나님
은 지금 어떤 분으로 고백되십니까?
성도는 주님의 보내심을 살아내는 거라고 지난주에 설교했습니다만,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합니
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
원고 3쪽
- 3 -
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 10:16) 세상으로 보냄을 받아 갈 때도 우리는 양입니다. 이리와
맞설 수 있는 뭐 늑대이거나 사자가 아니에요. 그저 양입니다. 뱀처럼 지혜로울 수는 있지만 뱀
은 아닙니다. 뱀처럼 맹독을 무기로 이리와 맞설 수 없어요. 비둘기처럼 순결할 수 있지만 비둘
기는 아니지요. 비둘기처럼 날아올라 이리에게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그걸 잊지 않는 것이 너무
나 중요합니다. 거기에 우리의 생명이 달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나중에 베드로 사도는 마귀를 ‘사자’
라고 표현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 5:8) 했습니다. 주님은 ‘이리’라고 그러셨는데, 실제로 겪어보니 사자였어요. 그것
도 우는 사자, 포효하는 사자(roaring lion)였습니다. 훨씬 더 강력하고 훨씬 더 무서웠던 것입니
다.
‘동물의 왕국’ 같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경계심을 풀고 있다가 어이없이 맹수에게
잡아먹히는 동물들이 가끔 나옵니다. 자기가 누군지, 주변에 어떤 위협이 있는지 잊어버린 채,
그냥 넋 놓고 있다가 맥없이 당하고 맙니다. 자칫 우리가 그러기 십상입니다. 내가 능히 혼자서
죄를 이길 수 있을 것처럼, 스스로 생명을 얻고 풍성히 누릴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가다
보면,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지위나 영향력을 가지게 되고, 사람들의 인정도 받고, 돈도 좀 벌고,
그렇게 내가 뭐라도 된 줄 착각하게 되면, 어느새 마귀에게 놀아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난 수요일 고린도전서 말씀을 나누면서, 바울이 성도들에게 ‘음행’이라는 죄에 대하여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여러분 기억나시지요? “음행을 피하라[φεύγω].” 음행으로부터 ‘힘껏 도망쳐라’, 그
랬습니다. 맞서 싸우거나 적당히 조심하는 게 아닙니다. 그럴 가능성이 있는 상황과 환경으로부
터 죽기 살기로 도망치는 겁니다. 그게 사는 길이에요. 그건 비겁하거나 무능한 게 아니지요. 지
혜로운 것이고, 성숙한 것입니다.
죄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거기서 생명을 얻고 누
리는 일에 있어서, 내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냥 어떤 ‘일’은 어느
정도 다 잘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하는 일이든 교회의 일이든, 그게 설교든 목회든, 내 경험
과 지혜를 의지해서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습니다. 돈도 벌 수 있고, 직장에서 인정도 받을 수
있고, 교회에서도 많은 일을 완성도 있게 할 수 있지요. 다 일이니까요. 노력하고 숙련되면 누구
나 눈에 보이는 결과를 낼 수 있습니다.
원고 4쪽
- 4 -
하지만 그 일들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
입니다. 일은 제대로 된 것 같은데, 계획하고 준비된 대로 다 됐는데, 막상 둘러보면 뭔가 허전
할 때가 있습니다. 생명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깨닫고 그래
서 생명이 다시 살아나고, 또 일하는 내 속에서도 생명의 충만함이 흘러넘쳐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건 다 주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잘
관리할 수 있습니다. 적과 작업도 하고, 반사판도 깔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그 생명을 자라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우리가 정말로 ‘주님의 일’을 하려 하고, 또 세상의 모든 일을 주님이 보내신 일로 믿고 감당하
려 한다면, 여러분 우리는 한순간도 주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생명을 얻고 더 풍성
히 얻기 위한 모든 일이 오직 주님을 통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 그 일을 방해하고 시
험하는 마귀의 계략과 공격 앞에 우리는 너무나 연약합니다. 우리 스스로 분별하고 이겨낼 수가
없어요. 힘세고 탁월한 양이면 이리랑 맞설 수 있습니까? 그러면 제일 먼저 물려 죽기 십상입니
다. 생명이 역사하는 곳에 반드시 죽음도 역사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 마귀 사탄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귀신같이 파고들어서, 마음을
어렵게 하고, 두려움을 심고, 교만을 부추기고, 낙심하게 만들고, 서로를 향한 사랑과 신뢰를 무
너뜨립니다.
이번 예배당 이전을 하면서도 정말 별의별 일을 다 경험했습니다. 아니, 아직 ‘현재 진행형’이에
요. 경험하는 중입니다.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집니다. 기도가 절로 나오고, 주님
아니면 안 된다는 고백이 수시로 터져 나옵니다. (이게 방송만 아니면 다 얘기할 수 있겠는데,
이게 영상으로 나가고 있어서 차마 다 말을 못 하네요.) 사람으로서는 예상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고, 도저히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문제들이 끊임없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목자이고, ‘양의 문’이라고 하십니다. 양들이 그리로 들어가면 비로소 구
원을 얻고, 그 문을 통해 들어오고 나가며 꼴을 먹습니다. … 양에게 문이 필요하다는 것은 양을
두르고 있는 울타리를 전제로 하지요. 그리고 그 울타리는 하나의 공간을 둘로 분리합니다. 그
안에 있으면 보호받을 수 있고, 그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긴 하지만 싱싱한 풀을 먹을 수 있습니
다. 그 둘을 연결하는 것이 바로 ‘문’이지요. 양은 그 문을 날마다 들어오고 나가며 생명과 쉼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문이 바로 주님이라고 하십니다. ‘생명의 안전’과 ‘풍성한 공급’이, 오직 예
수라는 ‘문’을 통해서만 누려질 수 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라는 문을 통해 생
원고 5쪽
- 5 -
명의 꼴을 먹으러 나가고, 다시 예수라는 문을 통해 들어와 쉼과 안식을 누립니다. 우리가 아침
에 출근할 때 현관문을 열고 나가서 밖에서 일을 하고, 다시 문을 통해 집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우리의 삶이 예수라는 문을 통해 끊임없이 들어오고 나가는 과정이라고 하세요. 그 과정을 통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는다고 약속하시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정말 문처럼 계속 드나드셔
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선택과 출입이 그 문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의식적으로, 그리고 습관
적으로 그 문을 드나드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지켜주겠다고 유혹하는 수많은 ‘다른 문’, ‘가짜 문’들이 존재합니다. 그 문 안
으로 들어가면 안전할 것 같고, 또 그 문 너머에 더 화려한 삶이 있을 것처럼 우리를 미혹합니
다. 하지만 그것은 실은 다 양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으로 이끄는 절도요, 강도라고, 주님은
경고하세요.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는 문은 오직 주님뿐이라고, 양의 생명
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가 친히 양의 문이 되신다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좀 주목할 부분은, 오늘 본문의 비유에서 예수님의 역할이 어떻게 변해가
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처음엔 이렇게 말씀하세요.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않고 다
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이고, 강도다.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양의 목자다. 목자가 문 앞에
오면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목자가 양들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낸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기에 목자를 따라간다.”(1~4절) 여러분, 여기서 예수님은 양의 문입니까, 아니면
양의 목자입니까? 네, 아무래도 목자겠지요.
그런데 7절에 보면 이번엔 목자가 아니라 ‘양의 문’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문이니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 앞에서 설명해 드린 내용인데요, 그런
데 ‘양의 문’이라고 하시는 7절과 9절 사이에는 또 ‘목자’처럼 말씀합니다.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않았다.” 절도나 강도의 반대는 문입니까, 목자입니까? 네, 목자
지요. 이어지는 10절도 마찬가집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
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목자인가
요, 문인가요? 네, 도둑과 대비되는 건 문보다는 목자에 더 가깝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처럼, 문
이 온다고 표현하는 건 좀 어색하기 때문입니다. 11절 이하에서는 이런 혼란이 없습니다. 그냥
‘선한 목자’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앞쪽은 ‘양의 문’의 비유면서도 또 ‘목자’의 비유입니다. 그래
서 좀 왔다 갔다 하는데요,
[이런 혼란을 해결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양의 문’이라는 표현이 잘못
기록됐을 가능성입니다. 원래는 ‘양의 목자’였는데, ‘양의 문’으로 잘못 표기했을 수 있다는 주장
원고 6쪽
- 6 -
이 실제로 이어져 왔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아람어에서는 ‘목자’라는 단어와 ‘양’이라
는 단어의 발음이 아주 비슷했거든요. ‘목자’는 ‘라(으)야’라 하고, ‘문’은 ‘타(르)야’여서 알파벳
하나 차이입니다. 실제로 고대 아람어 성경 사본 중에는 ‘양의 문’이 아니라 ‘양의 목자’로 기록
한 경우까지 발견되는데요, 하지만 요한 사도는 이 책을 헬라어로 썼단 말이지요. 헬라어로 ‘목
자’와 ‘양’은 완전히 다른 단어입니다. 목자는 ‘ποιμήν’이고 문은 ‘θύρα’여서 헷갈릴 가능성이
없습니다. 의미상으로도 그렇지요. 9절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이렇게 ‘문’이어야 자연스럽지 ‘목자’를 넣으면 이상
해집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해결은 그냥 혼란을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음에는 양의 이름을 불
러 인도하는 ‘목자’라고 하셨다가, 다시 ‘양의 문’이라고 했다가, 끝에 가서 결론적으로 ‘선한 목
자’라고 말씀하셨다고 이해하는 겁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목자’이면서 동시에 ‘양의 문’이 될 수
있느냐, 왜 주님은 ‘목자’의 비유 사이에 ‘양의 문’이라는 비유를 넣으셨느냐, 여기에는 당시 목
자들의 실제 삶이 반영되어 있다고 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당시 목축 문화에서는, 양들을 모아두는 우리(sheepfold), 축사가 크게 두 종류였습니다.
하나는 마을 안에 있는 우리인데요, 각각의 집에 붙어 있는 경우도 있고, 각 가정에 양이 많지
않을 때는, 마을에 공동 축사를 지어 함께 관리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런 배경의 이
야기가 앞쪽에 나오지요. 마을의 양들을 하나의 큰 우리에 넣고 그 문을 문지기가 밤새워 지킵니
다. 아침이 되면 목자들이 와서 자기 양들을 데리고 갑니다. 문지기가 문을 열면, 양들이 자기
목자 음성을 알고 따라가서, 풀도 먹고 물도 마시고, 밤이 되면 마을로 돌아와 다시 우리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마을 근처에 더 이상 풀이 없게 되면, 그래서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들판까지 나가서 양
들을 치고 거기서 밤을 보내게 되면 상황이 좀 달라집니다. 제대로 된 우리를 만들 수도 없고,
또 문지기가 따로 있지도 않습니다. 돌이나 가시덤불을 이용해서 대충 울타리를 만들고, 양들을
그 안에 넣어둔 다음, 목자가 그냥 그 들어간 입구를 지킵니다. 따로 문이 있는 것도 아니지요.
양들이 드나들 수 있는 작은 통로가 있을 뿐이고, 목자가 그 입구에 직접 눕거나 앉아서 밤새 양
을 지키게 됩니다. 목자의 몸이 곧 문이 되는 거지요. ‘목자’이면서 동시에 ‘양의 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양의 문’이라고 하는 말씀 속에는, 주님이 우리를 당신의 몸으로, 당신의 생
명으로 친히 지키시고 보호하시겠다는 분명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목자’가
아니라 ‘선한 목자’이십니다. 양들을 위하여 목자가 자기 목숨까지 걸기 때문입니다. 단지 돈을
원고 7쪽
- 7 -
받고 양을 돌보는 ‘삯꾼’이 아닙니다. 양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자신이 살기 위해 양을 버리고
달아나는 게 아니라, 양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우는 선한 목자, 여기 ‘선하다’라는 단어[καλό
ς]의 사전적 의미대로 직역하면, ‘고귀한 목자’, ‘존귀한 목자’가, 주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저는 양을 길러본 적어서 그런 목자가 세상에 있나 싶은 생각이 솔직히 듭니다. 아무리 양
을 사랑해도 내 목숨까지 내놓고 맹수와 싸울 수 있나, 그것이 과연 이성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가
능한 일인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내가 기르는 강아지에게 큰 강아지가 달려들 때, 견주님들
보통 어떻게 하나요? 아마 막아서고 내 개를 보호하겠지요? 자기 목숨까지 걸까요? 그런데 오늘
주님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목자가 왜 그렇게 양의 생명에 집착하는가? 그 목자가 양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라고 주님은
설명하십니다. 목자가 양을 우리 밖으로 나오게 할 때, 자기 양들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한다
고 3절에 나옵니다. 그냥 양무리, 양 떼가 아니라, 한 마리, 한 마리 다 그 개성과 특징을 목자가
알고 있고, 그래서 하나하나 이름도 붙여줬습니다.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
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고 하시지요(15절). 목자가 양을, 양이 목자를 너무
나 잘 알고, 서로 정말 깊고 친밀한 관계 속에 있어서, 목자가 자기 목숨을 걸고 양을 지킵니다.
양이 위험에 처했을 때, 경제적 손익이나 내 안위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양의 생명을 생각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현실에서 정말 그런 목자와 양이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다윗이 사울
왕에게 했던 유명한 고백이 생각납니다. 비록 어리지만 골리앗과 능히 싸울 수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양을 지킬 때 사자나 곰이 와서 양을 물어가면, 가서 그 짐승들과 싸우고 죽여서 양들을
건져냈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런 목자가 정말 있었던 거지요. 어린 목자 다윗에게 그 양들은
단순히 아버지의 재산이 아니라, 어떤 일이 아니라, 반드시 내가 지켜내야 할 ‘나의 양’이고, ‘생
명’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그렇게 우리를 아시고,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생명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주님의 몸으로 친히 죄와 싸우셨고, 죽음의 입에서 기어이 우리를 건
져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지금도 친히 ‘양의 문’이 되십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되 더욱 풍성
히 얻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당신의 몸으로 우리의 출입을 매순간 지키고 계십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어떤 이익의 도구나 수단으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생명이, 우리 자체가 주님의 목적입니다. 삯꾼과 선한 목자는 여기서 갈리지요. 선한 목자는 양
이 목적이지만, 삯꾼은 돈이 목적입니다. 사실 삯꾼이 꼭 나쁜 게 아닙니다. 선한 목자가 대단한
원고 8쪽
- 8 -
겁니다. 돈을 받고 일하는 모든 사람을 삯꾼이라고 합니다. 받은 만큼 일한다면 그건 착하고 충
성된 삯꾼이고 그 정도만 해도 훌륭합니다.
하지만 받은 만큼 일한다는 그 기준이 어렵습니다. 돈으로 내 일의 가치나 헌신을 측정할 수 없
기 때문입니다. 100만 원에 합당한 일의 양이 따로 있느냐, 어디까지가 내가 받는 삯에 대한 책
임이냐, 그건 대단히 주관적인 것이고, 그 일에 대한 내 태도의 문제이지, 객관적인 기준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돈을 받고 일하는 목자는 분명 삯꾼이지만, 삯꾼처럼 일해서는 목자가 될 수 없
습니다. 목자는 양의 생명을 지키고 살리는 존재일 때만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양의 문이요, 선한 목자가 되신다는 것은, 주님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어떤 다른 목
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지 않으신다는 거룩한 선언과도 같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이 말은
그가 나를 목적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기 생명도 내어줄 수 있는 거지요. 목자의 목
적이 자기 이익이 아니라 양의 생명이기 때문에, 그는 선한 목자입니다.
사람은 어떤 수단이 아니라 하나의 목적으로 인정받을 때, 비로소 충만함을 느끼고, 거기서 더
나은 모습으로의 변화가 시작됩니다. 누군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를 통제하거나 바
꾸려고 하지 않을 때, 다른 이유 없이 그냥 나를 원하고 나를 귀하게 여길 때, 그때 인간은 비로
소 마음을 열어 스스로 변화를 향해 돌이킬 수 있습니다. 양을 위해 목자가 목숨을 버릴 때, 하
나님이 인간을 위해 십자가를 질 때, 인간은 비로소 사랑에 눈을 뜨고, 그 사랑 앞에 항복하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렇게 이곳에 와 있게 됐고, 또 그 사랑을 증언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
여 있습니다.
예전에 배우 하희라 씨가 방송에서 그런 얘기 하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남편
최수종 씨는 크리스천이고 하희라 씨는 가족 전부가 독실한 불교 집안인데요, 그렇게 두 사람이
만나 결혼했을 때 걱정이 많았던 거지요. ‘사랑하긴 하지만 종교적인 문제로 다투거나 하지 않을
까? 자꾸 이 사람이 나를 전도하려고 하면 어떻게 하나?’ 양쪽 모두 신앙심이 깊어서 더 염려됐
습니다. … 그런데 남편이 자기에게 한 번도 교회 나가자고 하지를 않더랍니다. 세상 둘도 없이
다정한 남편인데, 한 번쯤은 가자고 할 법도 한데, 말을 안 합니다. 오히려 처가 식구들하고 같
이 절에도 가주고, 절밥까지 먹고 그랬답니다. 있는 그대로 존중한 거지요. 심지어 상갓집 다녀
오면 불교 신자들은 밖에서 소금 뿌리고 집에 들어가는데, 자기가 남편한테 소금을 뿌리면 그것
다 맞고 그러고 집에 들어오는데, 한 번도 싫은 내색 하지 않고. 자기 방식을 강요하지 않고, 묵
묵히 15년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하희라 씨의 동생이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한테 얘기
하더래요. 엄마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가족들이 아무리 반대해도, 나는 이제 교회 나갈 거라고.
원고 9쪽
- 9 -
동생의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자기도 그랬대요. 나도 교회 가야 한다고, 그렇게 자매가 같이 예
수님을 믿게 됐다는 얘길 하더라고요. 사랑이 곧 전도였던 거지요. 전도가 목적이 아니라 사람이
목적이었고, 그 마음이 전달될 때 비로소 복음의 문도 열린 것입니다. (전도가 그래서 참 어렵습
니다. 전도보다 사람이, 사랑이 목적이 되면서도, 어떻게든 예수를 증언할 수 있는 그 좁은 길을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목적으로 삼는 존재가 세상에 하나만 있어도 살아지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그게 강아지가
됐든, 부모가 됐든, 배우자가 됐든, 누가 됐든, 나 자신을 목적으로 여겨주는 존재가 있으면, 우
리는 숨이 좀 쉬어지고 그러면서 존귀한 일을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사랑을 받으면 나도 그
렇게 사랑하게 되지요. 과연 저와 여러분이 지금도 그 사랑을 경험하고, 또 서로 나누고 있는지,
그리고 그 사랑을 증언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그
사랑을 더 온전히 알고 누려서, 우리도 그런 사랑을 증언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내가 연약한 양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양의 문’이요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을 더 깊
이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양의 문’이 되신 주님께로 다니고, 목자를 알고 그 음성을 알아
서, 그분의 말씀에만 반응하는, 정말 그분의 양이 되어야 합니다. … 양은 청각이 좋은 동물이라
고 했지요. 귀가 밝아야 합니다. 주님 음성을 알고 그걸 따라가야지, 듣기 좋은 소리 한다고 엉
뚱한 음성 쫓아가면 안 됩니다. 그건 다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한 소리라고 하세요.
오늘 주님이 하신 비유의 말씀 중에서 양은 사실 별로 할 게 없습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주님
이 강조하는 양의 특징이 나오는데요, 혹시 그게 뭐였는지 기억나시는지요? 네, 양에 관해 주님
이 묘사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신 동사가 ‘안다’(‘듣다’)입니다. 목자는 ‘버린다’인데, 양은 ‘안다’
에요.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3절)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4절) “나는 선한 목자라. 나
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4~15절)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주님을 알고, 주님의 음성을 아는 주님의 양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내가 정말로 주님의 양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을 때, 나의 목자 되시고, 나의 출입을 지키시는
주님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그 경험이 갈수록 진해지고 깊어져서, 주님의 참된 안식과 풍성한
생명의 꼴을 날마다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그리고 받은 사랑 그대로 꼭 증언하며 사시기를, 주님
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