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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20:1~9 (구약 348쪽) 죽지 아니하게 하기 위함이라
2025-05-18 · 설교 원고 · 9쪽 · 약 19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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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다섯 번째 주일 [여호수아 강해 34]
여호수아 20:1~9 (구약 348쪽) 죽지 아니하게 하기 위함이라
본문 9절의 ‘죽지 아니하게 하기 위함이라’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 마침내 모든 지파의 기업 분배가 마무리됐습니다. 이제 분배
받은 각자의 기업에서 새로운 일상을 시작할 때인데요,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여호수아에, 또
기업을 받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과 다음 21장입니다. 여호수아에 나
오는 마지막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기도 한데요, 분배가 다 끝나고 기업의 삶이 시작되기 전
에 주신 말씀이니까, ‘주신 그 땅에서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관한 메시지가 담겼다
고 볼 수 있겠고, 그만큼 중요한 말씀입니다.
본문의 흐름상 조금은 갑작스러워 보이지만, 하나님은 이 대목에서 이른바 ‘도피성’에 관해 말씀
하십니다. 앞서 모세가 살아있을 때 두 번이나 강조하셨던 내용이기도 한데요(민 35장, 신 19장),
그들의 기업 중에 ‘도피성’이라는 걸 따로 정하여 구별하라고 하십니다. 새로 번역된 ‘새한글 성
경’에서는 이 ‘도피성’을 ‘피신 도시’(city of refuge)라고 옮겼던데요, ‘아레 함미클라트’라는 원
문 그대로 직역하면 ‘받아들이는 성읍’이란 뜻입니다.
그럼 누구를 받아들이는 성읍이냐, 3절에 나오는 것처럼,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입니
다.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는데, 자기도 모르게 실수로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게 된 사람, 그가
급히 피해 있어야 하는데, 그때 그를 ‘받아들여 주는’ 도시가 바로 ‘도피성’입니다. 이렇게 부지
중에 사람을 죽인 예로, 성경은 산에서 나무 벨 때를 이야기하는데요, 사람이 친구와 함께 나무
를 베러 가서 손에 도끼를 들고 일하는데, 갑자기 도끼날이 자루에서 빠져 옆에 있던 친구에게
날아가 죽게 만든 경우가 신명기에 한 예로 나옵니다(신 19:5). 죽은 사람에게도, 죽인 사람에게
도 너무나 큰 비극이지요.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말아야 하지만, 불완전한 인간이 함께 살아
가는 세상이다 보니, 실수로 생명을 해하거나 다치게 하는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우
리 인간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부지중에 살인한 사람을 도피성으로 급히 도망가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왜 도망
가야 하느냐, ‘피의 보복자’를 피하기 위함입니다. 살해당한 사람의 ‘피를 보복하는 자’가, 부지중
에 살인한 사람에게 보복할 거라는 겁니다. 사실 이런 ‘피의 보복자’는 원래 실수가 아니라 고의
로 사람을 죽인 자가 도망갔을 때, 그를 쫓아가 보복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오늘날처럼 치안과
사법 체계가 제대로 갖춰지지 못했던 시기고, 또 당시에는 이른바 ‘동해보복’의 원칙이 있어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생명에는 생명으로 갚게 되어 있어, 살인자에 대한 사적 보복을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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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용인해 준 건데요, 누가 이런 ‘피의 보복자’ 역할을 주로 맡았겠습니까?
네, 당연히 그 가족이 되겠지요. 무슨 살인청부업자나 이런 게 아니라, 살해당한 사람의 가장 가
까운 가족, 친척을 가리켜 ‘피를 보복하는 자’, 히브리어로는 ‘고엘 하담’이라고 불렀습니다. 여러
분, ‘고엘’, 그러면 많이 들어보셨지요? 네, 원래는 ‘무르는 자’,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자’라는
뜻입니다. 형편이 어려워져서 내 기업을 팔거나 빼앗기게 됐을 때, 또 빚을 갚지 못해 누군가의
종이 되었을 때, 그 값을 대신 치르고 땅과 자유를 되찾아 주는 자, 물러주는 자가 바로 ‘고엘’입
니다.
그런데 그런 ‘고엘’ 중에는 ‘피의 고엘’도 있습니다. 억울하게 죽은 가족의 피를, 생명을 무르는
건데요, 이건 단순히 개인적 원한을 갚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누군가 살해되면 그 피로
인해 땅도 더러워지고 저주를 받는데, 그 피를 흘리게 한 사람의 피가 아니면, 다시 깨끗해질 수
없다고 율법이 정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에 대한 공의가 회복될 때 비로소 그 땅이 죄의 저주에서
벗어납니다. … 그러니 단순히 개인적인 보복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업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살인에는 반드시 생명을 무르는 행위가 뒤따라야 하는 건데요, 적법한 절차에
따라 살인자를 체포하고 처형하면 다행이겠지만, 그러지 못하게 되는 경우엔 ‘피의 보복자’가 반
드시 그 역할을 대신하도록 율법은 명령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부지중에 살인한 사람은 최대한 빨리 도피성으로 피신해야 합니다. 거기서 정당
한 재판을 받고, 이것이 고의적 살인이 아닌 과실치사임을 밝혀야만 형벌과 보복을 피할 수 있습
니다. 도피성에서는 어떤 이유로도 ‘피의 고엘’이 그를 죽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달려가
야겠지요? 괜히 머뭇거렸다가 길에서 ‘고엘’을 만나면 큰일입니다. 살해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정말 실수였다, 해명한들 소용없습니다. 가족이 죽었는데 어떤 소리가 귀에 들리겠어요. 속된 말
로 눈에 뵈는 게 없어지지요. 그러니 일단 최대한 빨리 도피성으로 도망가야 합니다. 가서 자기
잘못을 고백하고, 그것이 부지중에 일어난 실수임을 밝혀야만 합니다.
그렇게 고의로 살인하지 않았음이 재판을 통해 드러나면 그다음은 어떻게 될까요? 네, 일단 생명
을 생명으로 갚는 일이나 피의 보복을 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죄는 아니지 않습니
까? 어쨌든 사람을 죽였으니,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하나님은 그가 얼마 동안 도피
성 안에서만 살도록 하여 그 자유를 제한하십니다. 만약 그냥 도피성 밖으로 나갔다가는, 피의
보복자가 그를 살해해도 책임을 묻지 않았습니다. 언제까지 나가지 못하지요? 네, 대제사장이 죽
을 때까지, 대제사장의 생명으로 억울하게 죽은 이의 생명을 갚을 때까지, 대속할 때까지, 도피
성 안에서만 살아야 합니다. 보통의 죄에는 허용된 보석(속전)으로 인한 가석방도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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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고의로 인한 살해는 아니지만, 생명은 오직 생명으로만 갚을 수 있다는 원칙이 여전히 유효
한 것입니다.
문제는 대제사장이 언제 죽을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부지중에 살인한 사람이야 당연히 대
제사장이 일찍 죽길 바랄 것이고, 피해자의 가족들은 대제사장이 최대한 오래 살길 바라겠지만,
그건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지요. 오직 하나님께 달린 문제입니다. 만약 대제사장이 아주 젊다
면 일평생 도피성에서 살아야 할 수도 있고, 세상 말로 오늘 내일 하시는 분이라면 금방 자유의
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생명이 그렇듯, 이 또한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일입니다.
그래서 도피성에 머무는 그 시간은 참으로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한편으론 자유가 억압된
처벌과 감금의 시간이지만, 사적인 보복으로부터 그를 지켜주는 보호의 시간이기도 하고, 또 다
른 한편으로는 억울하게 빼앗긴 생명에 대한 공의와 위로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가 공존하는 곳이지요. 죄인을 위한 피난처이지만, 동시에 죄에 대한 정의가 실현되는 거룩
한 공간, 그것이 바로 도피성입니다.
부지중에 사람을 죽인 이른바 과실치사죄의 경우, 오늘날엔 2년 이하의 금고 또는 700만 원 이
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형법이 정하고 있는데요, 대제사장이 사망해야만 구금이 풀리도록 한 도피
성의 경우엔 그보다 훨씬 강한 처벌의 의미가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도피성은 감
옥과는 전혀 다른 곳이니 꼭 가혹하게만 볼 수도 없습니다. 좁은 공간에 갇혀 사는 게 아니라 보
통의 성 안에서 삽니다. 거기에도 엄연히 일상이 있고, 이웃이 있고, 사람답게 살아갈 환경과 상
당한 정도의 자유가 존재합니다. 다음 주일에 살펴보겠습니다만, 이런 도피성은 전부 레위인들이
살아가는 성읍들이기도 한데요, 하나님께 구별되어 바쳐진 레위인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진정한
회개와 치유의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 어떻습니까,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신 기업을 온전히 누리고 살아가는 데 있어, 이러한 도피성은 여러모로 참 중요한 역
할을 담당했겠지요? 하나님의 은혜와 정의를 함께 드러내는 공간으로서,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백성들의 신앙과 삶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실수하고, 또 그 실수로 인해 누군가를 해칠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을 항상
가지고 사는 존재입니다. 내가 의도치 않은 일로 인해 상대를 괴롭게 하고, 또 타인의 그런 실수
로 인해 내가 큰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 오늘날 과실치사가 가장 흔히 일어나는 경우가 아마
교통사고일 텐데요, 내가 낸 사고로 인해 누군가 크게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하면,
참 가슴이 섬뜩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런 일을 막고 싶다고 해서 다 막아지는 것도 아니지요. …
지난 주일에 집에 가려고 차를 타고 징검다리에서 여기로 오는데, 그날 바람이 엄청 세게 불었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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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까? 그 바람으로 인해 세워놓은 한 입간판이 날아와서 제 차의 보닛 위로 떨어졌어요. 차에
좀 흠집이 나서 제 맘도 찢어졌는데요, 그게 차가 아니라 사람을 덮칠 수도 있었겠지요.] 정말
도끼날이 자루에서 빠지는 것 같은 그런 불의의 사고가 언제든 날 수 있는 게, 사람 사는 세상입
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은 그 기업 안에 이런 도피성을 여러 개 두라고 말씀합니
다. 누구든 쉽게 찾아 도망갈 수 있게, 요단강 동편에도 세 개, 서편 가나안 땅에도 세 개, 총 여
섯 개의 도피성을 세우라고 하시면서, 그것이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십니다. 본문 2절과
3절에 ‘너희를 위해’라는 말이 반복되지요. 도피성은 (다른 그 어떤 목적보다) 하나님의 기업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규례입니다. 단지 살인을 저지른 사람만이 아니라, 언제든 살인
할 수 있는 ‘우리 모두를 위해’, 늘 원치 않는 상처와 고통을 주고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죄
인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도피성이라고, 그 성을 구별한 후에야 비로소 가나안에서의 삶을
시작하라고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나눠드린 지도를 보면 여섯 곳의 도피성 위치가 표시되어 있는데요, 참고로 어떤 지파가 어디를
분배받았는지, 각각의 지파 이름은 제가 지워놨습니다. 여러분이 나중에 직접 각 지파의 이름을
한번 적어보시면 좋을 것 같고, 어쨌든 여섯 개의 도피성이 있습니다. 남쪽에 하나, 북쪽에 하나,
가운데 하나, 그렇게 요단강 좌우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어서, 어느 지역에 살든 하루 안에 도피
성에 도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도피성으로 가는 길목마다 ‘도피성’이라 쓴 큰 팻말이 설치됐
고, 도피성으로 향하는 길들은 넓고 평탄하게 잘 닦아놓게 했습니다. 제때 피신하지 못해서 피의
보복자에게 붙잡히지 않도록, 그래서 또 다른 살인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들이,
율법으로 세심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도피성은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나님
이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그 땅에서 생명의 충만함을 누리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거룩한
삶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그 중요한 실마리가 도피성의 규례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긍휼을 실현하는 도피성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그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함께 살아낼 것인지, 다
피할 수 없는 세상의 많은 비극과 고통 앞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함께 살아갈 수 있을
지, 백성들은 한 번 더 생각했을 것입니다. 죄의 권세에 짓눌려 서로 죽이고 보복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어떻게 하면 죄인들이 모인 이 세상을 지옥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로 살아낼 수 있
을지, 함께 고민하며 살아가게 했을 것입니다.
당연히 이런 도피성은 오늘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여전히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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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사망의 문제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그 현실을 직시하게 만듭니다. …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은
누구나 실수하고, 그 실수로 인해 누군가의 생명과 삶에 해를 가합니다. 실제적인 생명과 육체에
해를 입히기도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폭력도 있어서,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위해를
가해, 상대방이 온전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게 만드는 경우도 자주 일어납니다.
그런 현실 속에 살면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이 있다면, 언제든 그런
비극이 나로 인해 일어날 수 있음을 알고, 최대한 그런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것입니
다. 자루에서 빠진 도끼날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로 날아가는 것은 우리가
막을 수 없다 해도, 도끼날이 자루에서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미리 주의하고 빠지지 않
게 조치할 수는 있습니다. 바람이 부는 걸 막을 순 없지만, 그런 날에는 입간판을 좀 안으로 들
여놓을 수는 있겠지요.
부지중에 누굴 해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는 세상이지만, 그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큰 화가 있
습니다. 나의 실수로 인해 내 이웃은 물론 나 자신과 여러 사람이 고통에 빠질 수 있고, 또 우리
가 살아가는 이 땅이 정결함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늘 조심해야 합니다. 무엇
보다 각자 맡은 자리에서 정말 성실하고 정직하게 자신의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돈을 더 많이
벌고, 어떻게든 남을 이기고 인정받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남의 생명에 해가 가지 않도록, 맡
겨진 일에 정말 최선을 다하는 그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회에 크게 기여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도 훌륭하지만, 그보다 훨씬 중
요한 것은, 그 어떤 생명도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
는 일에 적극적으로 공헌하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줄여주고
위로하는 그런 선한 삶을 살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다만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
고, 부지중에 내가 남을 해칠 수 있다는 사실에 늘 조심하면서, 내게 주어진 매일의 일들을, 정
말 성실하고 정직하게 행하는 그런 평범한 삶이야말로 실은 가장 위대하고 존귀하며, 바로 그런
삶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 생명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되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번 5월 암송 구절이지요.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
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3~24) 이 말씀처럼 무슨 일이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듯 할 수만 있다면 반드시 하나님
의 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상이라면 이 땅의 생명이 죽지 아니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내 주변의 모든 존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해지는 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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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결국 탐욕과의 싸움이 될 때가 많습니다. 남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
은 욕심 때문에, 이익 때문에, 생명보다 돈을 앞세워 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원가를 아껴보겠
다고 이상한 재료를 사용하고, 조금이라도 더 이익을 보기 위해 안전은 뒷전이 됩니다. 돈이 안
되는 일들을 다들 기피하다 보니, 생명이 죽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한 일들을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중증외상센터가 부족하고, 거기서 일할 전문의가 없어 살릴 수 있는 사람이 생명을 잃게
되지요. 세상 모든 분야가 마찬가집니다. 결국 우리 안의 탐심을 죽이지 못하면, 생명을 죽이는
삶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힘들지만 물질이 아니라 생명을 선택하는 삶을 우린 날마다 힘껏 살
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 입장에서 보면, 내가 받은 기업 안에 도피성이 생기는 게 좋겠습니까, 나
쁘겠습니까? 네, 백성 누구도 자기 기업에 도피성이 생기는 걸 반기지 않았을 겁니다. 내가 실수
로 남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도 쉽지 않지만, 우리 지파의 기업이 줄어든다는 것 자
체가 싫을 겁니다. 도피성이 되면 거기 모여드는 사람들이, 어쨌거나 살인자들, 범죄자들 아닙니
까? 오늘날의 혐오시설까지는 아니어도, 그 지역 사람들로서는 결코 환영할 일이 아닌 겁니다.
개별 지파의 이익과 편리만 생각한다면, 도피성을 세우는 일 자체가 불가능할 거예요. 그래서 하
나님이 ‘명령’하십니다. 너희가 죽지 아니하게 하기 위함이니, 도피성을 세워라. 너희에겐 피할
곳이 필요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서로 보복하다 결국 모두가 죽음에 이르는 일을 막으려면,
반드시 도피성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이 베풀어지는 곳, 누군가를 용납하고 받아
들여 주는 곳, 죽음의 권세가 더 이상 쫓아오지 못하는 곳, 그런 거룩한 도피성이 이 세상 가운
데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누가 그런 일을 기쁘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자기를 비워 자신의 기업 어딘가에
죄인을 위한 도피성을 마련할 수 있을까요? …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여기는 사람,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하나님 말씀이 나의 기업이라고 믿고 사는
사람, 그래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당장은 나에게 손해가 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말씀을
좇아 사는 것이야말로 참되고 영원한 생명임을 신뢰하는 사람이 아니면 누가, 자신의 삶이 하나
님의 도피성으로 세워지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 그 누가 나에게 피해 입힌 자에게 보복하지 아니함으로, 그 폭력의 고리를 끊을 수 있겠습
니까? 누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도리어 복을 빌 수 있을까요? … 하나님을 도피성 삼아 날마
다 사랑과 긍휼을 누리고 사는 사람, 하나님이 친히 나의 고엘 되셔서 반드시 공의로 행하실 것
을 신뢰하는 사람만이 가능한 일 아니겠습니까? … 다윗이 그렇게 사울을 용납하고 인내했지요.
(마치 피의 보복자처럼) 자신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된 사울을, 다윗은 똑같이 보복하지 않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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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다윗을 뒤쫓으며 지옥 같은 날들을 보냈을 사울과 달리,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조차 부족함이 없었지요.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 삼아, 날마다 생명을 누리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자기 욕심을 좇아, 다 자기 이익만 생각하며 사는 세상인데도, 그래도 이 땅이 지옥이 되
지 않고, 그래도 살아갈 만하고, 숨 쉴 만한 곳이 되는 이유는, 지금도 하나님이 모든 죄인의 도
피성이 되어 주시기 때문이고, 또 그 사실을 믿고 누리는 사람들이 스스로 작은 도피성이 되어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작은 손해 하나 보지 않으려고 다들 두 눈 부릅뜨고 사는
세상이지요. 악을 악으로 갚는 건 당연하고 더 큰 악으로 보복해야 하는 세상입니다. … 누가 나
를 한 대 때리면, 나도 한 대 때리고, 그렇게 서로 비긴 채로 싸움이 마무리됩니까, 여러분? 맞
은 사람이 똑같이 한 대 때리면, 거기서 싸움이 멈추는 게 아니라,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지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 되는 것도 어려운 게 사람 사는 세상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서로 이해하고 용납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거대한 죄와 사망의 권세 앞
에서 누군가는 다른 선택을 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받은 폭력을 다시 누군가에
게 흘려보내지 않고, 누군가 쏟아놓은 짜증과 분노를 다시 다른 누군가에게 토해내지 않고, 자신
만의 도피성에서 그것들을 풀어내고 녹여내고 있기 때문에, 그래도 세상이 아직은, 아직은 살아
갈 만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피난처 삼아 날마다 사랑과 용서를 누리며 사는 사람이 아니면, 정말 누가 이 땅에서
그런 삶을 자처하겠습니까?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 눈감아 줄 수 있는 거지
요. 사람은 내가 용서받았기 때문에 비로소 남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직 내가 온전히 용서받지 못했기 때문일 때가 많습니다.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미처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고, 아직 그 죄를 진정으로 용서받은 경험이 없으니, 나
또한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에게 그런 긍휼과 용서를 바라는 건 사실 기적을 바라는 것이나 다
름이 없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긍휼을 경험한 사람이 너그러워지고, 사랑을
받은 사람이 자비로워집니다. 언제든 도망가서 피할 곳이 있는 사람이 그래도 남을 조금이나마
더 견뎌주고 용납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참 피난처가 없는 세상입니다. 힘든 현실에서 어디로 도망갈 곳이, 피할 곳이 없습니
다. 곳곳에 나의 부족함을 지적하는 사람들뿐이고, 어디를 가나 내 잘못을 판단하고 보복하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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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마주합니다. 그런데 막상 그런 세상으로부터 피할 곳이 없습니다. 가정도, 교회도, 그 어디
에서도, 진정한 피난처를 찾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상한 곳으로 사람들이 도피하지요. 더 많이,
더 좋은 걸 먹는 일에 지나치게 몰두하기도 하고, 술이나 담배, 마약과 같은 중독에 빠지기도 합
니다. 음란과 쾌락, 잘못된 관계로 도망가 숨기도 하고, SNS나 유튜브 같은 곳에 하루 종일 정
신을 놓고 머물러 있기도 합니다.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유튜브 사용량 1위라고 하지요. 스트
레스는 너무나 큰데, 정작 다른 피난처가 없습니다. 정말로 생명으로 충만하고 참된 쉼을 누릴
수 있는 곳, 내가 나 자신의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용납되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곳, 답답
하고 숨 가쁜 일상에서 잠시나마 숨이 쉬어지게 하는 작은 피난처 하나가 없기에,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엉뚱한 곳에 도피성을 쌓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다가 생각난 노래가 하나 있는데요, 여러분 ‘도망가자’라는 제목의 노래 아시는지
요? 참 아름답고 또 슬픈 노래인데요. “도망가자.” 이렇게 시작되는 노래지요. 거기 가사가 이렇
습니다.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아. 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 괜찮아. 우리 가자.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대신 가볍게 짐을 챙기자. 실컷 웃고 다시 돌아오자. 거기서는 우리 아무 생각 말자.
너랑 있을게 이렇게. 손 내밀면 내가 잡을게. 있을까, 두려울 게! 어디를 간다 해도, 우린 서로를
꼭 붙잡고 있으니. 너라서 나는 충분해. 나를 봐, 눈 맞춰줄래. 너의 얼굴 위에 빛이 스며들 때까
지. 가보자, 지금 나랑. 도망가자.” (마치 주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얘기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만)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도피성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그곳에서 진정한 쉼과 평안을
누리고 계신지요? … 누군가로부터 부지중에 혹은 고의로 당한 폭력으로 인해 생긴 상처가 치유
되고 회복되는 그런 곳, 쓰러진 마음이 힘을 얻어 다시 바르고 씩씩하게 살아갈 그런 위로가 있
는 피난처가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또 그런 곳을 찾아 함께 도망가자고 말하는 누군가가 곁에
있습니까? … 혹시 오늘 이 예배와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피난처가 되십니까? 우리고백교
회가, 성도들과의 교제가, 생명의 충만함을 채워주는 그런 안식처가 되시는지요?
물론 교회는 모든 이들의 도피성이 되고 안식처여야만 합니다. 부지중에 죄를 지은 사람들, 또한
알고도 죄를 지은 사람들이 와서 진정한 용납을 경험하고, 용서와 구원을 누리는 피난처여야 합
니다. … 도피성은 먼저 용납하고 나중에 이해하는 곳입니다.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일단 피신하
여 생명을 보존하고, 그 후에 죄와 용서를 따지는 곳입니다. 그런 용납의 경험을 누구나 교회로
부터, 그 안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충분히 받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사람을 판단하는 모든 기준이
판단 중지되고,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딸로, 하나님의 작품으로, … 세상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진정한 도피성이 바로 교회여야 하
고, 또 저와 여러분의 삶이어야 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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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여 주는 성읍’이라는 도피성의 의미 그대로, 도대체 저 사람을 누가 받아줄까, 싶은 사람
들이 교회에서 발견되고 만나져야 합니다. ‘나는 저 사람이 도저히 이해가 안 돼!’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비록 이해되지 않아도 먼저 용납할 수 있는 곳, 먼저 받아들여 하나가 되고 그 후에 천
천히 이해해 가는 곳, 우리를 이곳에 부르신 하나님께서 서로를 이해되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실
때까지, 그 이해되지 않는 시간을 함께 견뎌내는 곳, 거기가 바로 교회요, 성도의 삶이어야 합니
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여러분의 피난처 삼아 삶의 모든 순간마다 죽지 아니함을 경험하고
생명의 충만함을 누리며 사시길 바랍니다. 부디 엉뚱한 곳에 피난처를 두지 마십시오. 우린 하나
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만 생명을 누립니다. 겉으론 아무리 화려한 꽃다발도 나무에서 끊어져 있
는 한 이미 죽음으로 물들어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이 생명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이 죽음의 일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피난처로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말씀하시지요.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용납하여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몰라주는 이가 아니라고 했습니다(히
4:15). 우리의 잘못된 모습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동기와 중심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어
떻게든 헤아려 주십니다. 부족한 우리를 온전케 하셔서,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세상의 작은 도
피성으로, 지금도 자라게 하고 계시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주님께 나아가 쉼을 누리십시오. 주일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마다
끊임없이 주님을 갈망하고 그분을 향해 돌이키십시오. … 우리의 가장 큰 죄는 어떤 하나의 잘못
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돌이킬 수 있는데도, 그러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한 원죄는,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을 택한 것, 더 이상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선택한 것이고, 그 결과는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여러분, 잊지 마시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안에서 하고, … 사람이 아닌 주님께 하는 것처럼, 일상
가운데 정직과 성실을 더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영혼을 항상 만족하게 하고, 메마른 곳에
서도 물 댄 동산 같게 하셔서, 우리의 삶을 세상에 흩어진 거룩한 도피성으로, 세우시고 완성해
나가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