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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안수하는 사람" 2015년 1월 18일 주일 설교

2015-01-18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9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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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18 주현절 후 두 번째 주 ----------------------------------------- 사도행전 8장 14~25절, 내가 안수하는 사람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50118.mp3        주현절 후 두 번째 말씀으로, “내가 안수하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은 받은 만큼 베풀 수 있는 동물입니다. 배려도, 인정도, 칭찬도, 또 사랑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받은 그 이상을 줄 힘이 없다는 것, 그것이 어쩌면 죄의 실존입니다. 그래서 어릴 적 부모에게 절대적인 사랑과 지지를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국 UCLA의 연구진에 따르면, 부모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뇌 성장이 더디고 보통의 아이보다 뇌가 더 작고 검다고 발표한 바 있는데요, (특히 자매들, 나를 많이 사랑해주는 남자, 그게 최고인데, 그러려면 그 가정을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주변을 살펴봐야 합니다.) 나라는 감옥의 문을 열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역설적으로 그런 사랑을 먼저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진심으로 느끼고 경험한 사람, 은혜 안에 거하는 사람, 성령의 충만함 속에 사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들의 관심과 마음 씀씀이가 나를 인정해주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에게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아울러 나 자신이라는 굴레로부터 자유한, 그래서 ‘나’를 내려놓는 일에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지 못하는 사람,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지 못한 사람, 성령의 충만함을 소멸하거나 아직 채워지지 못한 사람은, 철저하게 이 ‘나’라는 감옥 안에 매여 살아갑니다. 나를 사랑하는 그 이기적인 욕망을 결코 내려놓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의 시몬이라는 이름의 마술사처럼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빌립을 전심으로 따라다니지만, 그의 내면은 아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성령으로 충만하지를 못한 상태입니다. 어디서 알 수 있습니까? 베드로와 대화하는 그의 말 속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시몬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본문의 절은 두 곳입니다. 19절과 24절입니다. 19절,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빌립 말고, 내가 안수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나를 위해 세상이 존재하고, 나를 위해 공동체가 존재하고, 나를 위해 하나님이 존재해야 합니다. 24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가 시몬을 호되게 꾸짖자 그에 대한 시몬의 대답입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않게 하소서 하니라.” 전혀 달라지거나 변화되지 않습니다. 이후에 이 소원에 대해 베드로가 어떻게 반응했었는지, 성경은 말해주지 않지만, 우리는 이런 시몬의 모습에서 분명한 한 가지 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예수를 잘못 믿으면, 결코 ‘나’라는 문제를 내려놓을 수 없구나,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들의 이야기, 빌립과 베드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지난주에 집중적으로 살펴본 것처럼, 빌립은 자신의 역할, 자신의 자리에 충실하면서도, 그런 자신의 한계로부터 자유함을 보여줍니다. 자신이 수고하고 애쓴 사마리아 선교가 베드로에 의해 완결되는 걸 배 아파하지 않았습니다. 왜 나에게서는 그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베드로가 안수했을 때 성령이 임했는지, 속상해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베드로보다 더 영향력 있는 존재가 되려고 애쓰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한계를 공동체 안에서, 다른 지체들과 함께 극복하고자 합니다. 지체들과 더불어 사랑하고 사역함으로써 ‘나’라는 존재를 내려놓았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안수하고 성령이 임했으니 내가 짱이다, 이런 모습 없습니다. 그들은 다시 자신들의 자리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자신들의 몫을 감당합니다. 베드로와 요한 모두 아무리 노력해도 빌립처럼 될 수는 없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평생을 갈릴리 시골에서 살아온 그들이 헬라파 빌립처럼 온 세상을 자기 집 안방처럼 여기며 복음을 전할 수는 없는 노릇인 겁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빌립이 없다면, 그들은 더 이상 베드로도, 요한도 될 수가 없음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발은 발의 자리에, 손은 손의 자리에서 각각 서로를 돕고 섬기는 것임을 그들은 온전히 알고 믿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그렇게 여러분을, 그리고 공동체를 부르십니다. 비슷한 사람끼리, 적당한 사람끼리 그냥 묶어주시고 그걸 공동체다, 이렇게 부르시는 게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우리를 하나의 공동체로 부르십니다. 서로에게 반드시 필요한 누군가를, 또 나를 필요로 할 그 누군가에게로, 우리 각자를 보내시고, 부르셔서 주님의 몸을 완성하게 하십니다. 공동체는 무슨 합체 로봇이 아닙니다. 발 따로, 다리 따로, 머리 따로 만들어서 합치는 게 아니라, 원래부터 하나의 몸으로 주님이 디자인하셔서 우리를 주님 안에 연결하십니다. 여기 서로를 한 번 돌아보십시오. 저 사람이 여러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는 게, 조금 기분 나쁘십니까? 내가 왜 저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하나, 불쾌하십니까? 그런데 기분 나쁘고 불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결코 혼자 믿고 혼자 살아가는 자리로 부르시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빌립을 돕기 위해 사마리아로 보냄 받은 사람, 누구누구입니까?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사실 혼자 와도 됩니다. 실제 하는 일로만 보면 요한 필요 없어 보입니다. 요한의 사역은 등장하지도 않으니 말입니다. 그런데도 예루살렘 교회는 반드시 둘을 보냅니다. 빌립의 경우는 매우 특별한 케이스입니다. 예루살렘에 엄청난 박해가 몰려온 상황에서, 지금은 도망가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흩어지는 게 아니라, 뿌려지는 고난의 상황이었기에, 지금 빌립은 불가피하게 홀로 다닙니다. 하지만 그건 정상적인 게 아닙니다. 나머지 사도행전의 다른 이야기들도 전부 쌍쌍입니다. 바울과 바나바. 둘이 나중에 다투지요. 그래서 혼자 다닙니까? 아닙니다. 다른 짝을 찾아 함께 다닙니다. 바울은 실라를, 그리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전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모의고사 격의 사역을 하실 때에도 그러했습니다. 한 명씩 보내지 않고, 늘 둘씩, 묶어서 보냅니다. 때로는 그게 불편하기도 하고 힘들기도 했겠지요. 여러분, 둘이 같이 늘 다닌다, 그게 항상 쉬운 게 아닙니다. 바울 같은 사람은 아마 혼자 하는 게 훨씬 더 좋다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늘 함께 불러서, 함께 보내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주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 증인이라는 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율법에 증인은 단수가 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둘 이상이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시작 자체가 단수가 아니라 복수에요. 혼자서는 증인이 안 되요. 구성이 안 되는 거죠. 그게 기독교의 신비이고, 그게 천국의 비밀이에요. 불교와 같은 종교, 또 다른 종교들도 사실, 개인적으로 수양하고 득도하여 서로 연합하는 그런 구조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 부르심 자체가 공동체적입니다. 하나의 가족, 하나의 종족,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교회, 하나의 공동체로 부르십니다. 하나로 시작해서 둘이 되는 게 아니라, 본래부터 둘이 하나가 되도록 만드셔서 시작하는 겁니다. 그게 복음의 진수입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세 분이시며 한 분이시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공동체도 본래부터 복수형입니다. 증인이 아니라 ‘증인들’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증인이 아니라, 증인들로서, 이렇게 함께 부름 받은 존재라는 걸 믿으십니까? 여러분 신앙은 경쟁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가는 경주와 같은 겁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라고 했습니다. 경쟁이 아니라, 경주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함께 하는 경주, 그게 우리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이, 이렇게 함께 경주하는 그 과정을 통해, 함께 성장하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세상일처럼 그저 나만 열심히 해서 남보다 앞서는 모습으로 천국에 가도록 하신 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 말했습니다. 엡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you also are being built together)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단 하나의 복합 건물입니다. 결코 여러 채가 함께 올라가는 아파트가 아닙니다. 같은 수준에서 함께 자라가는 주의 몸, 그게 저와 여러분의 신앙인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모르고, 성령을 받기 전의 제자들은 그게 안 되었습니다. 머리로는 되는데 마음으로, 삶으로 안 되는 겁니다. 지난주 말씀드린 대로 제자들의 쓴 담즙은 서열이고, 경쟁이고, ‘나’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왜 그렇게 맨날 누가 더 높으냐, 누가 더 크냐, 그런 싸움을 했다고 했습니까?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고대 사회 자체가 이 서열, 계급에 관한 관심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이야 그냥 갑을, 이런 관계이지만, 당시는 명확한 계급의 구별이 있었지요. 신분이라는 게 고대인들에게는 너무나 현실적인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천국에서의 서열, 지위 이런 것에 특별히 관심이 더 많았고, 그에 대한 기준과 설명이 담긴 책들도 유행을 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다 ‘돈’] 그런데 그것은 예수를 믿는 신앙 안에서 반드시 넘어야 할, 가장 위험한 신앙의 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이야기가 기록된 본문, 마태복음 18장으로 한 번 가보시겠습니다. 이 18장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게 됩니다. 1절인데요, 제자들이 주님 앞에서 묻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여러분 이 질문 어떻게 여겨집니까? 저는 아주 대단한 질문 훌륭한 질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누가복음 22장에 가서 보면 제자들이 누가 더 크냐, 이런 문제로 다투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지금 이 대목은 그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느껴집니다. 크기는 큰 문제인데, 그 큰 게 천국에서입니다. 이게 중요하지요. 이 땅에서 말고, 천국 가서 누가 더 큰 자가 됩니까? 이런 질문입니다. 훌륭하지요? 여러분도 그런 고민 하지 않나요? 천국 가서 좀 큰 자로 살고 싶다. 영원히 사는 건데, 집도 넓고 그랬으면 좋겠다. 물론 현실에서의 자신의 신앙을 좀 과시하고 싶었던 거겠지요. 내가 주님을 위해 이렇게 헌신하고 주님을 위해 이만큼 희생하고 있는데, 이게 다 천국 가면 보상 받는 거겠지요? 이렇게 지금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마도 베드로 외의 다른 제자들이었을 겁니다. 마16장, 17장에서 베드로가 제자 중의 으뜸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장면이니까요.] 그런데 주님의 답이 역시나 동문서답이십니다. 어린 아이 하나를 불러서 제자들 사이에 세워 놓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큰 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라가 아니라, 아예 천국에 들어가려면, 이라는 단서 아래 말씀하십니다. 천국 가서 큰 자 되는 법, 이게 천국 가는 법, 이렇게 바뀐 겁니다. 제자들이 질문한 의도와 그 마음 자체를 문제 삼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3절 가운데, ‘돌이켜’라는 구절이 들어가 있는 겁니다. 돌이키다(스트라페테 = 메타노이아), 유대인들이 자주 쓰는 회개의 표현입니다. 지금 생각을 고치고, 회개하는 게 먼저임을 말씀하십니다. “지금 너네 생각의 방향이 틀렸다. 그걸 일단 바꿔라.” 이겁니다. 생각을 바꾸고, 길을 바꿔서 걸어야 한다. 방향을 고치라! 천국 가려면 이 아이처럼 되어야 한다, 이게 주님의 답이었습니다. 얼마나 강하게 말씀하시는지, 강조구가 범벅입니다. 3절 처음에 보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거 과장 아니다, 이거 그냥 하는 소리 아니야, 이거 진짜 확실한 거니까,(아멘 레고 휘민) 잘 들어라, 이겁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도 한 번 더 강조합니다. 어린 아이처럼 안 되면 천국에 못 간다, 그런데 그냥이 아니라, ‘결단코’ 못 간다, 이렇게 말씀한 겁니다. 헬라어 직역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기를 기대하지를 말아라.” 이렇습니다. 그럼 어린 아이들(파이디온), 어떻게 되라는 말씀인 겁니까? 겸손해라? 꼭 그런 표현만은 아닙니다. 아이들, 겸손합니까?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저도 어릴 때 별로 안 겸손했던 거 같고, 나이가 어릴수록 겸손한가요? 글쎄요. 여기서 아이들은, 그 룰 자체, 그 서열 프레임 자체를 모르는, 관심이 없는, 무시하는 그런 존재를 일컫습니다. 세상적으로 큰 자 되는 것, 아이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순진무구이지요. 그냥 부모만 있으면 족하다 여깁니다. 부모가 옆에 있느냐, 없느냐,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지 뭐 1등이 되느냐, 몇 등이 되느냐, 관심이 없습니다. ** 영상 (facebook), 부모와 아이가 함께 한 영상을 보면서 따라하는 거에요. 칸막이를 쳐 놓고. 처음에는 일반인의 우스꽝스러운 표정. 나중에는 장애인. 부모는 나중에 못따라 합니다. 의식이 가로막아요. 이건 따라 하면 안 된다. 근데 아이들은 그냥 합니다. 뭐, 좀 다를 뿐이지 뭐가 문제야. 그냥 벽 자체가 없어요. 정상, 비정상, 갑, 을 뭐 이런 게 없습니다. 순진하지요. 여러분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등수, 서열, 갑을, 이런 거 관심 없었지요. 그러다 부모에 의해, 세상에 의해 타락하고 변해서 이렇게 된 겁니다. 참 세상이 악하지요. 지금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너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느냐. 처음 믿고 사랑할 땐, 그저 주님의 자녀 된 것만으로 기뻐하고 감사했는데, 주님만 있으면 된다고 그러더니, 이젠 서열을 따지고 위에 올라서겠다고 하느냐? 방향이 틀려졌다. 돌이켜서 어린아이로부터 다시 시작해라. 서열 같은 거 관심 없는 그런 성도, 그들이 은혜를 아는 자들이고, 그들만이 천국에 합당하다, 주님은 강조하시는 겁니다. 물론 당시 사회에서는 그런 아이들의 지위는 형편없었습니다. 서열을 따질 수도 없는 존재, 그게 아이들입니다. 힌두교의 계급, 브라만(Brahman:사제·성직자), 크샤트리아(Kshatriya:귀족·무사), 바이샤(Vaisya:상인·농민·지주), 수드라(Sudra:소작농·청소부·하인)의 네 가지로 분류된다. 그런데 그 외의 사람들, 그러니까 계급을 논할 수 없는 존재들도 있었는데요, 불가촉천민(달리트 계급)이 그들입니다. 아이들도 그런 지위였습니다. 지위 자체가 없는, 오직 부모를 통해서만 지위를 갖는 존재이지요. 그렇게 되라고 주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더 낮아져야지! 그래서 더 높아져야지. 이렇게 하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지위 밖의 존재로 자유하라는 겁니다. 그게 은혜니까요. 여러분 어린아이처럼 되는 게 왜 중요합니까? 이렇게 낮아지고 같아져야 서로를 진심으로 대할 수 있게 되고, 약아 빠진 마음이 사라지게 되고, 거리낌 없이 사귈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 노는 거 보십시오. 영악한 아이들 말고, 천친 난만한 아이들. 너무 재밌어 하고, 너무 행복해 하고, 너무 자유롭지 않습니까? 왜 그게 가능합니까? 어떤 관계적 서열을 서로가 인식하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냥 좋고 행복한 거에요. 여러분, 천국은 그런 사람의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한없이 행복하고 평안한 사람들, 그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가 교회이고, 여러분의 공동체인 겁니다. [여러분 한 번 천진난만하게 서로 보면서 웃어 보시지요. 어린 애들처럼, 아무 생각 없이 서로를 그냥 나의 친구로서 벗으로서 용납하며 웃어보십시오. 그게 천국이며,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원하시는 모습이 그런 거거든요. 그냥 서로 웃고 놀아라. 서로를 용납하고 함께 놀아라.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넘치면 넘치는 대로, 그걸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겁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이어서 5절부터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번에는 이 아이를 영접하는 것, 그리고 실족하게 하는 것에 대해 말씀합니다. 신앙이 경쟁과 갈등의 차원에 노출되면, 어느 순간 공동체 안에 이런 아이 같은 사람이 실족하는 일, 그러니까 믿음이 약해지거나 죄에 빠지거나 공동체로부터 시험에 빠지는 일, 더 나아가 아예 믿음의 자리를 떠나게 되는 그런 일들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실은 이 구도 자체가 하나의 비유입니다. 어린아이 같이 믿는 자, 공동체에 들어와서 정말 순진하게 주님을 믿는 자들이, 그런 믿음이 아닌, 서열에 눈이 멀고, 뭔가를 위해 경쟁하고 그런 존재들에 의해 상처를 입고 시험을 당하는 상황인 겁니다. 정작 천국에 갈 사람은 그 사람인데, 나머지 잘났다는 이들이 그를 업신여기고 무시합니다. 교회 와서 유일하게 힘을 얻고, 자유함을 누리는 사람들, 세상의 을, 병, 정들이 교회 와서 그 자유함이 무너지는 일들이 생깁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 생각나지요? 교회 와서, 자기 자랑, 돈 자랑, 학벌 자랑, 외모 자랑, 부모 자랑, 이러고 다니는 사람들. 그래서 교회에서도 실족하게 하는 그런 일들. 그게 얼마나 하나님 앞에 악한 일인지를 주님은 직접 설명하십니다.] 6절에 보면, 그런 이들을 향해 주님이 처음으로 하신 말씀, 맷돌 메고, 아니 그냥 맷돌도 아니고 연자 맷돌입니다. ‘뮐로스 오니코스’ ‘뮐로스’ ‘mill’ 맷돌, 방앗간 이런 뜻이죠? 여기 오니코스는 나귀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나귀까 돌리는 맷돌입니다. ‘삼시세끼’에서 이서진이 커피 갈 때 쓰는 그런 맷돌 아니에요. 사람이 돌리는 연자 맷돌은 상하 두 돌로 구성된 큰 맷돌, 아랫 쪽의 돌은 고정되어 있었으며, 윗돌은 나귀가 끌며 돌렸습니다. 여기에서 연자 맷돌(뮐로스 오니코스)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습니다. 어마무시하게 큰 맷돌이지요. 눈먼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가 돌렸던 그 맷돌 정도 될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그걸 목에 매고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게 낫다 그랬습니다. 쳐다보기도 싫다는 겁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심각한 문제입니까? 7절 보십시오. 실족하는 그런 일들 때문에 세상에 화가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실족하게 하는 일이 세상에서 없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 세상에서 늘 실족하는 사람들. 그래서 주님 앞에 왔을 때에야 비로소 인간 취급 받고 비로소 살아 있는 것 같은 그런 사람들. 그들을 다시 실족하게 하는 사람, 그는 결코 화를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손, 발, 눈을 다 잘라버리고 빼버리라는 겁니다. 실족하게 만드는 원인을 완전히 제거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어디서 교만해지고 어디서 높아져서 공동체 안에서 갑질 하고 있는지, 그게 외모 때문이고, 그게 잘난 학교 때문이면, 그거 다 지우고, 버리고, 없애고서라도 그들과 같은 처지가 되라 이 말입니다. 돈 때문에 어린 아이처럼 친구가 될 수 없다면 그걸 버려라, 그래서 같은 처지가 되라는 겁니다. /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장애인, 정말 지위가 낮지요? 그렇게라도 되어서 그 사람과 같은 처지가 되라는 겁니다. 장애인이 되면 자랑을 좀 못하게 되니까, 그 정도가 되면 이제 서로 힘의 균형이 좀 맞춰지니까, 그렇게 살아라, 말씀하는 겁니다. 그 어린 아이, 그 소자, 그 아무 지위도 없는 사람처럼 되지 않으면, 영원히 지옥 불에 던져진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10절에 보면 우리에겐 낯선 말씀이 나옵니다.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의 천사들이라고 된 건, 그 소자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천사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유대인들은 천사에도 다 서열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늘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천사들이 따로 있습니다. 지위가 높은 이 천사들, 그들이 그런데 누구냐. 바로 이 땅에서 소자들, 아무 자랑도, 힘도, 권세도 없는 그 사람들의 천사들인 겁니다. 그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대변해주는 천사, 그들의 상황을 보고하고 그들이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를 날마다 점검하고 하나님께 말하는 천사입니다. 이 땅의 소자, 하나님이 그렇게 생각하고 대우하신다는 것을, 여러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한 가지만 더 생각해보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지난 Talk Bible 시간에 세족식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했었는데요, 오늘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그 다음 이야기가 바로 성도 간의 죄와 용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5절,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아래 주석에 보면, 죄가 ‘네게 범한 죄’라고 되어 있지요. 누군가가 나를 시험에 빠뜨릴 만한 그런 죄를 범했을 때, 성도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입니다. 주님의 첫 번째 가르침은 일단 그 사람과 나, 둘이 해결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 사람을 찾아가서 내가 이런 상처, 이런 아픔을 받았다, 말하고 사과를 받으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실은 이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죠? 여러분 누군가 여러분에게 잘못하면 일단 여러분 어떻게 합니까? 누군가에게 알립니다. 그리고 내 편을 만들죠. 1:1의 문제가 아니라, 1:多 혹은 多:多의 문제로 바꿔버립니다. 원망들을 만한 사람이 점점 늘어나는 겁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제일 어려울 때가 이럴 때입니다. 목사한테 누군가의 험담을 하거나, 누군가로부터 상처 받은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게 이해는 갑니다. 목사밖에 없으니까, 간사님 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하는 건데, 그런데 순서가 잘못된 겁니다. 일단 그 사람과 1:1로 그 문제에 대해 분명하게 논의를 해야 합니다. 담론, 먼저 당사자끼리 논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왜 이게 중요합니까? 그래야 서로의 허물이 더 이상의 문제없이 잘 마무리되고 봉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문내고 그게 더 와전되고 결국 작은 문제가 나중엔 도저히 봉합할 수 없는 더 큰 문제로 비화되어 버립니다. 타인의 잘못을 내가 그 사람 아닌 다른 사람에게 먼저 오픈하는 것, 그 내면에는 어떤 마음이 들어있습니까? 그 문제 자체의 용서와는 관계없이, 그에게 타격을 주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일종의 복수심인 겁니다. 그거 용서가 되어도 결국 그 사람은 사람들의 이목에 노출되고 그 허물이 알려집니다. 그러면 용서고 뭐고 아무 것도 아닌 게 되는 거지요. 진정 그를 용서하고 화목하려면 일단 주님 안에서 두 사람이 해결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무턱대로 하나님하고만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아까 말씀드렸지요? 사람과 풀어야 하나님과 풀리는 거라고. 안 그러면 영화 ‘밀양’처럼 되는 거라고. 상대방에게 용서도 구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회개하고 용서받았다? 그건 기독교도 아니고 뭣도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전에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용서를 구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죄는 어떻게 사라집니까? 용서를 통해서 사라지는 겁니다. 망각을 통해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일본의 죄. 잊자고 합니다. 그러면 안 사라져요. 기억해서 용서를 구하고, 그 용서를 해야만 그 죄가 사라지는 겁니다. 그렇게 둘이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하면, 15절에, 너는 형제를 얻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받은 상처를 고백하고, 그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며, 다시 그것을 용서하고 죄를 사할 때, 18절 말씀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매였던 것들이 풀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기서 풀지 않으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게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들도 다 이 맥락 안에 놓여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되묻지요. 얼마나 내 형제를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라. 그러면서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의 비유를 하시는 겁니다. 보통 5천 데나리온이 1달란트니까, 5천만 데나리온과 1백 데나리온의 차이입니다. 비율로 오십만 배의 빚을 우리가 탕감 받고 용서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끝까지 서로를 참고 용서하고 기다리십시오. 여러분이 용서하는 바로 그만큼 하나님도 여러분을 동일하게 대우하신다고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으니 말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성도들은 공동체 안에서 함께 죄를 고하고 용서하며, 서로의 발을 씻겨주며 함께 의로워지며 살아가는 족속입니다. 성도의 가장 큰 힘이 다름 아닌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죄를 함께 이기며, 극복하는 것, 그것이 성도의 가장 큰 능력 아닙니까? 내가 내 발을 씻는 게 아닙니다. 내가 내 죄를 스스로 씻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의 지체가 여러분을 씻겨줘야 깨끗해지는 겁니다. 부끄러워도 발을 내밀어야 하고, 열 받아도 그 발을 씻어줘야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제자로 빚어져 갑니다. 그래서 성도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지어져 가는 겁니다. 주님은 오늘 약속하셨습니다. 19절과 20절입니다. “19.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합심과 그들 중에, 여기에 highlight! 합심해야 합니다. 거기 주님이 계시고, 우리의 기도가 응답됩니다. 여러분, 신앙의 길을 바르게 정하고 가십시다. ‘나’만을 위해 달려가는 방향이었다면, 그 길 멈추고, 돌아서서, turn around, 우리가 함께 가는 길로 나아가십시다. “신앙의 가장 결정적인 무엇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무언가가 아니라, 내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무언가가 아니라, 나와 다른 누군가와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무언가이다.”라는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신앙은 분명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임을 기억하고, 우리 서로를 더 귀히 여기며, 함께 빚어져 가십시다. 왜 우리에겐 베드로 같은 훌륭한 목사가 없는가, 탓하지 말고, 왜 나에겐 빌립 같은 동료가 없고, 왜 다 시몬인가, 이렇게 탓하지 말고, 우리를 한 몸, 한 식구로 부르신 주님의 뜻 앞에 겸손히 우리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냐가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 누가 계시느냐, 거기 진정 하나님이 계시느냐가, 우리의 삶을 결정함을 믿고, 부디 온전히 하나 되는 역사가, 온전히 나를 내려놓는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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