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오래 참고,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2021년 3월 14일 주일 설교)

2021-03-14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5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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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절 네 번째 주일 메시지 ---------------------------------- 고린도전서 13:4~7, 오래 참고,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 ​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 첨부파일 cor28 .mp3 파일 다운로드 ​ (고린도전서 강해 28) 본문 4절과 7절의 ‘오래 참고,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 지난주 저희가 나눈 본문은 ‘사랑이 없다면 이렇다’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나에게 아무 유익도 없다고 했었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사랑은 이렇다’라는 말씀입니다. 도대체 사랑이 뭐기에, 사랑이 없다면 그 어떤 대단한 믿음과 은사들조차 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지, 그 사랑의 참 모습에 대해, 사도는 오늘 읽은 네 절을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 본문은 총 열다섯 개의 동사를 사용하여 사랑의 모습을 설명합니다. ‘오래 참고’로 시작해서 ‘모든 것을 믿고,’ ‘바라고,’ ‘견디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 열다섯 가지 표현이 전부 다 동사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기본적으로 ‘동사’인 것이지요. 사랑은 우리의 어떤 마음 상태나 감정,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와 태도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 사실 성경이 말씀하는 사랑의 계명에 우리가 순종하기 어려운 것은, 그것이 우리의 본성과 맞지 않아서 그것을 행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성경과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의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만, 실제로 사랑을 이렇게 이해하고 또 이런 사랑을 노력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 정말 우리가 이 사랑의 계명을 지키고자 한다면, 사랑이 단지, 우리가 실천하기 ‘어려운’ 무엇이기 이전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무엇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걸 인정하고, 사랑을 ‘배워서,’ 순종해야 하는 것이지요. 성경은, 내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 우리의 구체적인 태도나 행위가 사랑이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이 없어도 사랑은 존재할 수 있고, 오히려 그런 감정과 무관할 때, 그 사랑은 더욱 온전하게 빛납니다.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만,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마음보다는 행위가 먼저일 때도 많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서 사랑의 행위를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랑의 행위에 순종함으로써,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경험합니다. ​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본문에 나타난 이 열다섯 가지 사랑의 행위들은, 모두 하나님의 모습을 설명하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사랑은’이라는 말 대신에, ‘하나님은’이라고 넣어 읽어도 본문은 아무 어색함이 없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은’이라고 넣어서 읽으면, 성경이 말씀하는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 사랑에 관해 성경이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훨씬 더 분명하게 다가옵니다. ​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도 그렇게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단지 하나님의 모습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받고 믿은 우리의 모습이 또한 그러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여기서부터 우리의 실존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말씀하셨지요.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처럼 온전할 수 있는가?’ 너무나 무리한 말씀이지만, 예수님은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진실을 전제하고 계시다는 걸 기억해야 되지요. 그게 무엇입니까? 네,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온전해라, 이것은 결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계명이 아닙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 딸이며, 정말로 하나님이 나의 아바 아버지라고 믿어지고 경험되는 이에게 주신 말씀인 것입니다. ​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내 아버지의 사랑으로 깨닫고 누리며 살아가는 이들에게만 오늘 본문은 의미 있는 말씀입니다. 하늘 아버지로부터 이러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것을 지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말씀 자체가 무척이나 공허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 그럼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을 정말 나를 자녀로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깨닫고, 누리고 계십니까? … 혹시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에게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경험되고 있습니까? 혹 여러분을 형통하게 하고, 세상 고난이 다 비껴가게 하는 그런 사랑이었습니까?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 다 예쁘다, 잘한다, 칭찬하는 그런 아빠 사랑이었습니까? ​ 혹시 오늘 본문 말씀처럼, 나를 향해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하지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그런 사랑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아 누리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 만약 그런 사랑을 누리고 있고, 그것이 정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면, 그 자녀 된 우리 또한 누군가를 그렇게 사랑 수 있을 것이고, 비록 잘 안 되더라도, 그 사랑이라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더 깊고 더 온전하게 느낄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 주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 이제 본문으로 좀 더 들어가 보면, 여기 기록된 내용들을 곱씹어 읽어보면, 우리는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랑의 어떤 특징이 먼저 눈에 들어오시는지요? … 짧은 시간에 다 나눌 수는 없겠습니다만, 우선 이 열다섯 가지 내용을 비슷한 것끼리 한 번 추려보면, 유독 본문이 강조하는 사랑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 예컨대 사랑에는, 시기와 자랑과 교만이 없다고 하는 건, 사랑이 ‘일종의 겸손의 모습’으로, 특별히 ‘자족하는 자의 겸손’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족하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겸손, 그것이 사랑의 한 모습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 또한 사랑이 무례히 행하지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는다는 것을 보면, 사랑은 분명 ‘타인을 존중하고 먼저 배려하는 태도’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또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사랑이 진리 안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란다고 하시니, 사랑에는 믿음과 소망이 결부되어 있다는 것도 알 것 같습니다. ​ 그런데 본문에서 우리에게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오는 부분은, 사랑을 유독 인내와 연관시키고 있다는 점일 겁니다. … 본문은 ‘오래 참고’로 시작하여,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로 끝납니다. 양쪽 끝에 인내가 있지요. 마치 책이 넘어지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북엔드처럼, 사랑에 관한 모든 내용을, 양쪽 끝에 자리하고 있는, 이 두 가지 인내가 품고 지탱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모든 것을 참으며’(7절)라는 말이 한 번 더 들어가 있어서 더 더욱 인내가 강조되어 있기도 합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습니다만, “사랑은 온유하며”라는 말 속에 함축된 의미 역시 실은 ‘인내’입니다.) 그러니까 인내는 사랑의 여러 가지 모습들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그것들과는 똑같지 않은, 사랑의 가장 중요하고 기본이 되며 사랑을 온전히 세우는 그런 어떤 것임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사실 본문에 기록된 이 세 가지 인내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모두 각각 다른 헬라어 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4절의 ‘오래 참고’라는 말(마크로쑤메이), 7절 앞의 ‘모든 것을 참으며’의 ‘참다’라는 단어(스테고), 또 7절 마지막에 나오는 ‘견디느니라’(휘포메노)까지, 각각 다른 단어를 사용하여 구분해 놓았는데요, … 가장 먼저 나오는 ‘오래 참다’는 하나의 단어입니다. ‘마크로쑤메오’는 동사인데, ‘마크로스’와 ‘쑤모스’가 더해진 합성어입니다. ‘마크로스’는 ‘멀리 떨어뜨리다’라는 뜻이고, ‘쑤모스’는 ‘분노’라는 뜻입니다. 문자대로 직역하면 ‘분노를 멀리 떨어뜨리다’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오래 참음’은, 내 안에 어떤 분노, 고통이 있고, 그 분노를 일으킨 누군가의 존재, 행위가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그 분노를 스스로에게서 멀리 떼어냄으로써, 그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고, 또 같은 모습으로 보복하지 않고, 결국 상대방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그런 인내가 바로 이 ‘오래 참고’입니다. ​ 성경은 이것이 사랑의 첫 번째 모습이라고 말씀합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분노케 만드는 누군가에게, 그에 마땅한, 또 가능한, 어떤 보복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랑이고, 거기서부터 사랑이 시작된다는 겁니다. 사랑이 이런 거라니, 참 놀라운 이야기 아닙니까? … 혹시 여러분 이런 오래 참는 사랑의 예를 성경에서 찾아본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저는 구약의 다윗 생각이 났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그는 한동안 사울 왕의 미움을 받았고, 나중엔 살해의 위협까지 받게 됩니다. 사울의 집요한 추적으로 인해서, 광야를 떠돌고 다른 나라에 망명까지 해가며 도망자로 지내야 했습니다. 때론 미친 사람인 척 연기를 해서 겨우 죽음을 모면하기도 했지요. 우리가 사랑하는 시편의 많은 시들이 그런 상황에서 기록됐습니다. ​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다윗에게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가 두 번이나 찾아오지요. 어떤 동굴(엔게디) 속에 숨어 있을 때 한 번, 또 사막(십 광야)에서 다시 한 번, 다윗은 무방비 상태의 사울을 해할 수 있는 완벽한 기회를 잡습니다. 그 중 한 번은 아예 사울 왕이 잠들어 있을 때였지요. 사울의 목숨이 다윗의 손에 있었습니다. 그를 죽일 수 있는 이유와 힘과 기회를 모두 가지고 있었지만, 다윗은 보복하지 않습니다. 오래 참습니다. 옆에 있던 다윗의 장수 아비새가, 내가 대신 죽이겠다고 하는데도 그를 말립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사람을 죽이면 죄가 없지 않다고, 사울의 목숨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다윗은 그렇게 자기 안에 있는 분노를 힘껏 떼어냅니다. 그리고는 다시 도망자가 됩니다. 성경은 이러한 모습을 ‘오래 참음’이라 말하고, 이것이 사랑의 첫 번째 얼굴이라고 말씀합니다. ​ 예수님께서 로마의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가시던 날 밤, 주님 곁에 있던 베드로도 아비새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자신의 허리춤에서 칼을 빼어, 주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 중 한 사람(말고)의 귀를 베어 떨어뜨렸습니다. 그 밤에 일부러, 정확히 귀만 떨어뜨린 거라면 베드로의 칼 솜씨가 꽤 괜찮았던 듯 보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베드로를 만류하시지요. 그리고는 베드로의 칼을 맞은 사람의 귀를 고쳐주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합니다. “이것까지 참으라.”(눅 22:51) 이것까지, 여기까지 참으라. … 나를 해하려는 자에게 보복하지 말고, 해하지 말고, 참으라. 비록 칼이 있고, 힘이 있지만, 이유와 명분도 있지만, 이것까지 참으라, 말씀하시고 주님은 순순히 그들에게 체포되어 가십니다. 성경은 이것을 사랑이라고, 오래 참는 사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 주님께서 그 다친 사람을 고쳐주신 것은, 오래 참음에서 한 발 더 나간 사랑일 겁니다. 나를 해롭게 하려는 이에게 도리어 친절을 베풀고 도움을 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에 이어서 나오는 ‘사랑은 온유하며’에서, ‘온유하다’라는 동사 ‘크레스튜오마이’가 바로 그런 뜻입니다. 단지 부드럽고 따뜻한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타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어떤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헬라어 성경을 읽어보면, 앞의 오래 참음과 이 온유함이 하나로 묶여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랑은’이라는 주어가 하나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라고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온유함은, 나에게 분노를 일으킨, 내가 오래 참은 그 사람에게로 향하는 친절입니다. 단지 그를 해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그에게 친절을 베풀어 돕는 것, 그것이 온유함의 사랑입니다. 오래 참지 못한다면 온유할 수도 없겠지요. ​ 본문 7절 맨 앞에 나오는, ‘모든 것을 참으며’의 ‘참다’도 이와 비슷한 맥락의 단어입니다. ‘스테고’라는 이 동사의 본래 의미는, ‘지붕을 덮다,’ ‘보호막을 치다,’ 이런 뜻입니다. 직역하면, “사랑은 모든 것을 덮습니다, 보호합니다.”입니다. 다른 사람을 ‘cover’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요.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대신해 줄 수도 있을 것이고, 나에게 행한 어떤 허물을 덮어주는 것도 있을 겁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 그냥 내가 맡아서 남을 cover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남을 덮어주며 참는 것이 사랑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 우리는 그 오래 참고 온유한 사랑, 또 덮어주는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분명히 보았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아직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복하지 않으시고, 심판하지 않으시고,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그의 피로 우리를 덮어주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주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오래 참고, 온유하며, 덮어주는 사랑으로 우리를 여전히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7절 마지막에서, 전체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를 보면, 비록 참는 것은 똑같지만, 이것은 그 상황이 조금 다른 어떤 인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앞에서는 그래도 내가 어떤 힘이 있고, 칼이 있고, 보복의 기회라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 참는 것을 의미했지만, 여기서는 그마저도 없는, 그런 상황입니다. … 여기 ‘견디다’에 사용된 헬라어 동사가 ‘휘포메노’인데요, ‘아래’라는 뜻의 ‘휘포’와 ‘머무르다’라는 뜻의 ‘메노’가 합해진 말입니다. 어떤 힘든 상황 아래 머물러 있는, 피하지 않고,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거기 머물러 있는 상태, 그런 인내가 바로 여기 ‘견디다’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4절의 ‘오래 참고, 온유하며’의 인내, 그리고 7절의 ‘모든 것을 참으며’의 인내가, 그래도 뭔가 조금이라도 힘이 있는 사람의 인내라면, 이 마지막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는, 그저 힘없는 자의 어쩔 수 없는 인내입니다. 고통의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그냥 거기 머물며 견디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인내, 어떻게 보면 가장 고통스러운 인내이지요. 그런데 성경은 이것이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실 때, 그 아래엔 어머니 마리아가 계셨습니다.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마리아는 그렇게 십자가 ‘아래’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렇게 있는 것 외에는, 어머니 마리아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차라리 내가 저기 매달리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하며, 아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그저 몸부림치며 바라봤을 것입니다. 무엇을 해 줄 수 없지만, 그냥 그 고통의 무게 아래 오롯이 함께 머무는 것이 전부이지만, 성경은 그 고통스러운 인내가 다름 아닌 사랑이라고 말씀하며, 그것이 오늘 모든 사랑의 모습을 갈무리하고 있습니다. ​ 사실 우리는 어떤 고통에서 벗어나고, 그 환경을 기어이 극복해내는 것이 믿음이며,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내가 누군가를 돕고 헌신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럴 힘이 있으면 그렇게 해야겠지요.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면,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 마음이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때도 있지요. 다만 견디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같이 있어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인생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어떤 이유나 하나님의 뜻도 알지 못한 채, 그저 견디고 있어야만 하는 그 막막하고 외로운 순간에, 주님은 우리가 사랑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그렇게밖에는 사랑할 수 없는 때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도 그래야 하셨지만, 예레미야 같은 말씀에도 보면, 그런 연약한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예레미야 8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 아니, 하나님이신데 그렇게 계시면 안 되지 않는가, 당장 그 백성을 구원하시고 회복하셔야 하지 않는가, 우리는 항변해보지만, 때로 하나님은,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 곁에서, 그저 함께 상하고 슬퍼하시는 것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기도 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 그런 주님의 뜻을 다 헤아릴 수는 없다는 것이, 우리 이 믿음의 실존이 가진 곤고함이기도 합니다. ​ 이렇게 성경이 말씀하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정말 우리가 사랑을 크게 오해하며 살고 있구나, 실감하게 됩니다. 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 ‘사랑해야지’, 마음먹으면 우리는 당장 어떤 따뜻한 느낌이나 특별한 도움, 이런 것을 생각하지만, 오늘 성경이 말씀하는 사랑은, 오래 참음으로 시작하여 견딤으로 끝나는, 참 지루하고 고된 인내입니다. 사랑이라는 새 계명, 단 하나의 계명에 순종함에 있어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 사랑인지를 알고, 무엇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인지를 깨닫고, 그것을 행하는 데 우리의 신앙의 초점을 맞추는 것임을, 우리는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사랑을 나눈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에 대해 오래 참고, 온유하며, 모든 것을 덮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그런 사랑이어야 합니다. 누군가 나에게 보이는 적대감과 나를 향한 칼날을 인내하고, 그를 위한 친절을 남겨두는 그런 사랑이지요. 때론 무기력해보이지만, 고통 아래 함께 머물러 있는 사랑, 우리는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보다 중요한 일이 없다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다른 데 사용하는 우리의 노력과 열심을, 우리는 이 사랑에 쏟아 부어야 합니다. 이 오래 참는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많은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고, 우리의 신앙도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비록 어렵긴 하지만 이 사랑의 길이 결국은 우리를 참으로 살아 숨 쉬게 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내로 남을 사랑할 때 비로소 우리 자신이 살아날 것입니다. 진실로 자유함을 느낄 것이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겼다는 확신이 들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인내의 사랑으로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부활의 주님을 믿고, 그 주님의 말씀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이 가장 좋은 길이며, 가장 큰 은사요 열매임을 믿고 살아내 보십시다. ​ 이러한 사랑이 우리에게 어떤 무거운 계명이나 의무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 사랑을 하늘 아버지로부터 내가 받고 누리며 살아갈 때만, 우리는 어찌어찌 이 사랑을 흉내 낼 수 있을 따름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더 많이 누리고, 느끼는 일에, 여러분의 관심과 시간을 쏟으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 주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세상이 우리를 주님의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요 13:35).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방식이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서, 세상이 우리를 예수의 제자로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아니더라도,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지는 못할지라도, 다만 서로를 용납하고, 보복하여 갚지 않고, 도리어 친절을 베푸는, 그런 모습으로, 끝까지 함께 견디며, 그렇게 사랑하십시다. 내 형제가 실족할 것 같으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노라고 말했던 바울 사도처럼, 나의 의나 믿음을 자랑하기 위한 사랑이 아니라, 그저 잠잠히 누군가의 연약함을 견뎌주고 덮어주는 그런 사랑이, 저와 여러분의 인격과 성품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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