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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2020년 2월 16일 주일 설교
2020-02-16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9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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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된 설교 원문
20200216 주현절 후 여섯 번째 주일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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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2:18~27,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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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강해 51) 본문 24절의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으로 온전히 고백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하고 또 축복합니다.
지난 주 세금에 관한 바리새인과 헤롯당의 질문에 이어, 오늘은 사두개인들이 주님께 찾아와 부활에 관하여 묻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당신께서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세 번이나 말씀하셔서, 부활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나타내신 바가 있는데요, 그런 예수님께 부활에 관한 유대인의 오랜 난제를 던짐으로써, 그 대답에 따라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웃음거리로 만들거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모세의 율법을 거부하는 입장을 밝히게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로 유명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며, 영이니, 천사니, 천국이니 지옥이니 그런 것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영원한 하나님을 믿는데 어떻게 초월과 사후의 세계를 믿지 못할 수 있는가 싶지만, 뭐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들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모세오경에 그런 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럼 어떻게 모세오경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할 수 있는가 …, 그건 모세오경만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마치 받아쓰기하듯 직접 기록하게 하신 성경으로, 성경의 다른 책들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경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택하고 불러 성령의 감동을 통해 예언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다른 모든 말씀들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뭐 이런 종파가 다 있나, 그렇게 해서 과연 제대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만, 사실 종교라는 것, 믿음이라는 것에는 늘 그러한 위험이 존재합니다. 믿어야만 하는 것을 믿는 게 아니라, 내가 믿고자 하는 바를 믿는 것, 참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비단 사두개인들만의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왜 사두개인들이 그토록 모세오경에만 집착했는가, 그것은 그들의 출신과 배경을 생각해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사두개’라는 이름부터가 조금 특이한데요, 구약의 사독이라는 사람 혹시 들어보셨는지요? 네, ‘사두개’는 바로 그 사독이라는 이름에서 왔습니다. 구약 최초의 대제사장이었던 아론의 11대손으로, 다윗과 솔로몬이 왕으로 있던 유다 최고의 전성기 시절에 대제사장을 지냈습니다. 정치적 혼란과 반역이 난무하던 때에도 끝까지 다윗과 솔로몬 부자의 편에 섰고, 그래서 솔로몬 왕 때에는 유일한 대제사장으로 남게 되는 매우 영광스런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후 사독의 가문은 이스라엘의 제사장직을 사실상 독점합니다. 오직 사독 가문만이 대제사장이 될 수 있는 독보적인 자리에 오른 것인데요, 먼 훗날 멸망한 유다가 잠깐 다시 정치적인 독립을 이루었던 시절 그런 사독의 후예를 자처하며 모든 종교적 기득권을 행사하던 사람들이 바로 사두개인입니다.
사독 가문의 출발과 사두개인의 등장 자체가 그랬지만, 본래 제사장이라는 직책은 기존의 정치적 권력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습니다. 물론 제사장과 왕이 서로 견제하며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서로가 상대방의 힘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대부분 이 둘은 공생관계를 이루게 됩니다. 당시 사두개인들 역시 로마의 비호 아래 그 역할을 보장받았고, 따라서 사두개인들은 친 로마에, 친 귀족, 그리고 친 세속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사장과 국가 권력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야합하는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을 견제하는 유일한 대안이, 바로 예언자입니다. 이사야나 예레미야, 또 세례요한과 같은 사람들이 바로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이미 화석처럼 굳어 생명력을 잃어버린 종교, 살아 있는 권력에 신앙과 양심을 팔며 세속화 되어버린 종교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는 일이 예언자들의 몫이었습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은 제사장의 전통에서 기록된 것과 예언자의 전통에서 기록된 두 가지 종류의 문서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입니다.)
당연히 예언자들은 종교와 정치 모두의 공공의 적이었습니다. 왕은 무력으로, 제사장들은 그들이 가진 종교적 기득권으로 예언자들을 끊임없이 핍박했습니다. 제사장들의 입장에서 예언자들을 공격하는 가장 좋은 무기는, 그들이 하는 말 자체가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냥 과대망상에 빠진 사람의 말이라거나, 귀신들린 자라고 몰아붙이는 것이지요. 그러려면 기존에 명확한 하나님 말씀의 기준과 틀이 있어야겠지요. 그래서 모세오경을 고집합니다. 모세오경 외에는 더 이상 하나님 말씀이란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아예 처음부터 예언자들이 전하는 메시지의 진정성을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제사장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다행인 것이, 모세오경에는 부활이니, 영생이니, 하는 죽음 이후의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는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모세오경 자체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하고 또 그 백성으로 살아야 하는가, 그 현실적인 규례와 제사, 정결에 관한 법들을 다루는 책들인데, 죽음 이후에 관한 이야기들이 다뤄질 리가 없지요. 제사장인 자신들의 역할과 기득권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한 모세오경이야말로, 그들에게는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말씀이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야기가 좀 길어졌습니다만, 결국 그렇게 사두개인들은 점점 더 참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져갔고, 세상과는 더 가까워진 채로 단단히 굳어져갔습니다. 당연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 수도, 경험할 수도 없었고, 결국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 여러분, 우리의 신앙도 얼마든지 그런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며 하나님을 믿노라 말은 하지만, 실은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길 수도 있고, 내가 가진 것들을 지키기 위해,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 일이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진리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신앙이어야 하지만, 현실은 우리의 삶이 진리에 영향을 끼치는 그런 신앙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제사장이나 예언자가 다 교회의 직분과 사역자들로 변형되고 대체됐습니다. 이젠 제사장과 예언자가 따로 구별되지도 않지요. 그래서 너도 나도 예언자적 영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젠 교회가 스스로 진리 안에서 깨어 매순간 스스로를 개혁하지 못하는 한, 교회는 옛날보다 더 쉽게 타락할 수 있고, 우리는 그만큼 진리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말로만 부활이지 실제로는 오직 이 땅에서의 삶으로 모든 게 끝나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21세기적 사두개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한국 기독교는 그 변곡점을 지나도 한참 지나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저는 늘 두렵고, 긴장됩니다. 저부터가 사두개인의 삶은 아닌가, 이러다 다시 오신 주님도 못 알아보면 어떻게 하나, 우리 성도들이 정말 참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있는가, 자문하기를 반복합니다. 일찍이 모세가,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전부 자기처럼 다 예언하는 자가 됐으면 좋겠다고 고백했습니다만, 정말 저는 우리 성도들 모두가 빠짐없이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서, 교회와 우리 모두가 날마다 하나님 앞에 새로워지고, 진리를 삶으로 고백하는 그런 믿음에 이르게 되기를 원합니다.
적어도 사두개인처럼, 이 세상으로 끝인 것처럼은 살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 매여 예수 믿어 그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걸 목표로 하는 신앙이 아니라, 적어도 예수 믿는 그 자체가 이미 최고의 복임을 깨달아, 오직 진리에 매인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그래서 우리 교회의 사명처럼, 삶으로 진리를 고백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런 사두개인들이 오늘 주님께 하는 질문은. 신명기 말씀에 등장하는 이른바 수혼(嫂婚, Levirate marriage)에 관한 것입니다. 수혼, 곧 형수와의 결혼은, 자식 없이 죽은 형의 가문과 기업을 보존하고, 홀로 남은 여인이 살아갈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주기 위한 제도였는데요, 오늘날의 관점으로는 좀 이상한 법처럼 생각되지만, 여성의 지위와 권한이 전무하던 당시 사회에서는 당연하고 아름다운 전통으로 여겨지던 제도였습니다. 다름 아니라 예수님의 족보에도 바로 이 수혼이 포함되어 있지요. 이방인이던 룻이 자신의 남편이 죽은 후 보아스라는 가까운 친족을 통해 다윗의 할아버지 오벳을 낳습니다.
아무튼 사두개인들은 이 수혼의 전통을 예로 들어 부활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문제를 일으키는지 이야기합니다. 이 제도에 따라 칠형제 모두와 혼인의 관계를 맺은 여인이 있다면, 부활 후에는 도대체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제시됩니다. 하나는 그런 상황 자체가 부활과 상관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또 하나는 사두개인들이 부정하는 부활이 성경에 어떤 형태로 증언되고 있는지, 그들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모세오경을 통해 직접 밝혀주십니다.
먼저 부활의 때에는 우리의 육체와 삶이 이 세상의 것과는 전혀 다를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미 죽음 자체가 그 권세를 잃고 소멸되었기에, 부활한 인간은 더는 생식을 통해 후손을 남겨야 할 필요도 없고, 따라서 이 땅에서와 같은 혼인의 양상에 더 이상 매이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천사처럼 말이지요.
물론 천사조차 인정하지 않는 사두개인들에게 이런 주님의 대답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었을지는 의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성경의 본문을 근거로, 부활에 대해 다시 한 번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사실 보다 직접적으로 부활을 언급하는 구약의 여러 본문들이 있습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사 26:19)와 같은 이사야서의 말씀이나,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단 12:2)와 같은 다니엘서 말씀도 생각납니다. 다윗이 쓴 여러 시편에도 스올의 권세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이 자주 언급되지요.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그 본문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조금 더 어려운 설명을 감내하고서라도 굳이 모세오경의 본문을 예로 드십니다.
다름 아니라,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모세의 소명 부분이지요. 호렙 산의 불붙은 떨기나무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로 다가오는 모세를 향해, 그의 이름을 부르시며 가까이 오지 말라고,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신 후에, 스스로를 소개하십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하나님은 당신을 인간에게 소개하시면서 특별한 하나님의 이름을 말씀하시거나, 하나님만의 어떤 고유한 이력을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택하여 언약을 베풀었던 사람들, 바로 그 사람들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실 뿐입니다. ‘여호와’라는 건 사실 하나님의 구체적인 이름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저 이름이 없다는 뜻이라고 했지요. 그런 거룩한 하나님의 정체성이, 다름 아닌 언약의 대상에 묶인 하나님으로 소개됩니다. 내 이름은 없다, 다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다, 그것이 나다, 선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언약을 맺으신 인간이 하나님께 어떤 의미인지 명확하게 드러나지요. 그저 인간의 짧은 한 번의 인생으로 끝나는 그런 관계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의 성격이 어떠한지 하나님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십니다. 이미 죽은 지 수백 년이 지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가 바로 지금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현재형 동사를 써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과거에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지금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여전히 살아 있고, 여전히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존재임을 분명히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복이 되게 할 것이며, 그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모든 땅을 그와 그 자손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참으로 그 말씀을 믿고 살았으며 또한 믿고 죽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그 모든 약속의 현실을 살아서 눈으로 본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는 오직 이삭이라는 언약의 아들 하나뿐이었고, 그가 남긴 땅도 그와 아내가 묻힌 무덤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이미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그 모든 언약을 현실로 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바치라 했을 때, 그는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이삭 대신 바칠 숫양을 따로 준비하실 뿐이었지만,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그보다 더한 것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했던 것입니다. … 비록 작은 무덤에 불과했던 땅이지만, 아브라함은 얼마든지 그냥 얻을 수도 있는 그 땅을, 굳이 주인에게 값을 제대로 치르고 매입하지요. 하나님 말씀대로 정말 그곳이 별보다도 많은 후손들의 땅이 될 것임을, 그리고 자신 또한 산 자로서 그 언약의 성취를 보게 될 것을 믿음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불리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여전히 현존하여 하나님의 언약의 파트너로 살아 있음을, 당신의 이름을 걸고 선언하셨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자들은 절대 죽음에 넘겨질 수 없으며, 모든 약속의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성취를 반드시 살아서 보게 될 것입니다. 부활은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의 당연한 결론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27절)는 선언을 하십니다. 사실 이 말씀은 무척 재밌는 표현인데요, 왜냐하면 사두개인들에게는 이 말이 부활이 없다는 말로도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산 자들만의 하나님이시며, 죽은 자의 하나님은 아니라는 이야기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은 이것을, 이미 부활이 시작되었음을 강조하는 결론으로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사두개인들을 향해 충격적인 선언을 더하시지요. “너희가 하나님을 크게 오해하였다.”고 하십니다. 여기 ‘오해했다’는 이 표현[플라난]은 본래 뭔가가 일정한 궤도에서 벗어나거나, 정상적인 루트에서 이탈한 경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이 진리로부터 벗어나 이미 잘못된 길에 들어서 있음을 지적하신 것인데요, 24절에 보면, 그런 오해가 어디로부터 출발되었는지 말씀합니다. 네,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했기에,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고 하십니다. 성경,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 여러분은 직접 경험하고, 또 알고, 누리고 계신지요?
사실 사두개인더러 성경을 모른다고 하시다니 …. 이건 정말 워렌 버핏에게 투자를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셈입니다. 누구보다 성경을 잘 알고 이해하며, 심지어 그걸로 남을 가르치는 자인데, 주님은 그런 그들을 향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른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예로 드신 본문이 말씀드린 모세와 아브라함의 그 이야기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아마 그 본문을 수천 번은 읽고 또 가르쳐왔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거기서 단 한 번도 ‘산 자의 하나님’을 발견한 적이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네, 그들이 믿고 싶은 내용이 아니었으니 보이지 않았을 것이며, 또한 이미 그들 안에 자리 잡은 하나님에 대해 선입관들이 그들의 눈을 가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사두개인만 그런 한계가 있는 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라는 절대적 타자 앞에 언제나 낯선 이방인이며, 하나님에 대한 완전하지 않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인정하고, 매순간 하나님을 더 온전히 알고자 하느냐, 그것일 겁니다.
여러분은 최근에 그런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습니까? ‘아, 하나님이 이런 분이셨구나,’ 정말 새롭게 알게 된 그런 충격 말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이런 분이셨어!?’ ‘내가 이제껏 하나님을 제대로 오해해 왔구나.’ 하는 고백이 우리의 삶에서 멈추면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살아 있다는 증거니까요.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영원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애 3:22~23)이라는 노랫말처럼, 아침마다 말씀을 통해 새롭게 발견되는 하나님.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누리는 풍성한 하나님의 권능, 그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의 평범하고 반복되는 일상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언제나 현재형이어야 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무언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을 더 온전히 알고자 하는 지금의 그 갈망과 노력이 중요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금방 하나님으로부터 이탈하여 하나님을 오해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앎의 갈망이 다름 아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뭐가 하나님 사랑입니까?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그 현재적 갈망이 아니면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 오죽하면 히브리어로 남녀가 사랑을 나눈다는 그 동사의 원래 뜻이 ‘안다’이겠습니까? 서로를 다 알지 못함을 인정하며, 또 더 알고자 하는 그것이 다름 아닌 사랑이며, 하나님 사랑의 실존인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 안에 그 사랑이 꼭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왜 사두개인들이 진리로부터 멀어져 하나님을 크게 오해하게 되었는지, 왜 부활마저 인정할 수 없었는지, 그 중요한 이유를 다시 한 번 상기해보십시다. … 그것은 지금 내가 이 땅에서 누리고 있는 기득권과 이익에 그들이 매여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사두개인들이 추구하는 가장 위대한 가치는 안전입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지키는 것, 현상을 유지하는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신앙보다 더 중요한 가치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을 더 온전히 아는 일은 늘 위험하고 두려운 일이지요. 그 하나님이 나에게 또 무슨 회개와 순종을 요구하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항상 일정한 선을 넘지 않고자 애를 쓰며, 하나님에 대해 더 알고자 하는 마음도 억누르게 되는 것이 그 때문입니다.
비단 사두개인들 같은 귀족적 종교인만 그런 삶의 태도를 가진 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안전에 대한 기본적인 욕구가 있으며, 자신이 살아온 방식대로 사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을 압니다.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변화는 늘 두려운 것이고, 위험을 내포합니다. 외부 환경의 강압적 요구 없이 기존의 방식을 벗어나는 것, 사실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알파고가 이세돌 9단에게 승리한 이후에 우리나라 바둑 초일류 기사들은 어쩔 수 없이 알파고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더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된 겁니다. 특별히 구글 측이 공개한 기보(棋譜), 알파고와 알파고가 맞둔 기보 50개가 공개되고 더 충격에 빠지게 됐는데요, 우리나라 최고 기사 중 한 사람이 그 기보를 몇 개 보다가, 문득 너무나 무서워서 더는 기보를 보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너무 두려웠던 것이지요. 지금까지 정석이라고 믿었던 것, 지금까지 최고의 수라고 믿었던 모든 기존관념이 무너지는 현실 앞에서, 바둑을 처음부터 새로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공포라는 감정을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도 우리는 늘 공포심을 극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면서 그 감정을 느끼게 하십니다. 평생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 살아오던 어부들에게 그들의 상식과는 다른 요구를 하십니다. 새벽에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절대 물고기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의 권위에 눌려 그들은 순종이라는 걸 해보기로 결단했고, 그렇게 주님은 가장 먼저 그들이 가진 생각을 깨뜨리는 것을 통해 당신을 따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바로 무엇이 가장 안전한 삶이 말씀합니다.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4~27)
예수 믿는 자와 세상 사람의 가장 큰 현실적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안전의 토대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미 자신이 가진 것, 살아온 것, 그것이 안전의 기초입니다. 주님은 무엇이 안전의 근거라 하십니까? 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행한다면 안전하다, 그러나 기존의 방식대로, 자기의 뜻대로 자기 삶을 고집하는 사람, 스스로 안전하다고 믿는 그 삶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안전하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그런 삶을 일컬어 주님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의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은 지금 안전합니까? 여러분의 삶의 기초는 어디에 놓여 있습니까? 여러분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순종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계십니까? 혹시 그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위험으로 몰아넣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내가 가진 안전을 혹시 내려놓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로 인해, 하나님 아는 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일 앞에 게을러지도록 스스로 방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삶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모래 위에 지어진 집에 불과합니다. 지금은 괜찮아 보여도 어려움이 닥치면 뿌리째 흔들립니다. 여러분,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의 토대가 되게 하십시오. 여러분이 좋아하는 어떤 성경구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읽고 살아내는 일에 힘을 쓰십시오.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알아 가십시오. 예수님이 사단의 시험을 무엇으로 이기셨는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죄와 사망의 권세에 맞서 부활의 신앙을 살아내는데 있어 하나님의 말씀만이 유일한 무기임을 믿습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말씀을 읽기 위한 물리적인 시간과 노력을 꼭 확보하셔야 합니다. 주일에 목사를 통해 듣는 설교로 그 노력을 대신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 세상 지식에 부족함이 없던 바울이,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 고귀하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리 생각하십니까? 네, 그렇다면 좀 덜 고상한 것, 덜 고귀한 것에 대한 여러분의 관심과 노력을 조금만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는, 그런 신앙에 대해서는 오늘로 ‘아듀!’, 이별의 인사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부활을 믿고 살아낸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는 여기서 부활 신앙을 살아낼 수 있을까요? … 어려운 질문이지만, 분명한 것은 부활을 믿고 부활을 산다는 것이, 그저 죽은 후에 천국에 간다는 그런 믿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부활을 믿는 사람들답게,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우리의 지금 모습이 전부인 것처럼은 살아가지 마십시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이 우리에게 허락하실 그 영원한 영광의 삶을 기다리고 사모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지금 모습이 우리의 실체가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애벌레가 나비의 삶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부활한 우리의 모습이 아마 그와 같을 것입니다. 우리가 차마 다 생각할 수 없는 영광과 아름다움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부활을 살고자 한다면, 믿음의 선조인 아브라함의 삶을 기억합시다. 영원하지 않은 이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는 헛된 안전이 아니라, 영원하신 주의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온전한 안전을 누리고 산 그의 믿음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기를 바랍니다.
거기서 더 앞으로 나가, 내가 부활의 열매가 아닌, 씨앗이 되는 삶을 선택하는 용기가 있기를 바랍니다. 내 삶이 비록 이 땅에서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열매는 부족하고 그저 작은 씨앗처럼 보이는 삶을 선택한다 해도, 아브라함은 반드시 그 열매를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과 막벨라 굴만을 얻고서도 믿음의 조상이었던 것처럼, 비록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는 작을지라도, 내 후대와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믿음의 눈을 뜨고 부활의 씨앗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부활도 없고, 영생도 없다고 믿었던 사두개인들은 결국 주후 70년 예루살렘 파괴와 함께 유대교 역사에서 소멸됐습니다. 이 땅의 것만을 믿는 이들의 삶은 결국 그렇게 역사에서 소멸될 것이나, 부활을 믿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모든 산 자의 하나님이 되시며, 죽음을 넘어 모두를 살리시는 그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부디 날마다 주님의 살아 있는 말씀에 삶으로 반응하며,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두 다 알고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또 그 앎이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기도합시다. 생명의 주님. 우리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은 더 온전히 알게 하시며, 그래서 주님을 더욱 닮아가게 하옵소서. 성경도 알고, 하나님의 능력도 아는 삶이고 싶습니다. 머리로가 아니라 가슴으로, 또 삶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하고 누리는 복 된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