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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라, 사하여 주시리라' 2020년 1월 26일 주일 설교
2020-01-26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6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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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된 설교 원문
20200126 주현절 후 세 번째 주일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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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1:11~25, 용서하라, 사하여 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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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강해 48) 본문 25절의 ‘용서하라, 사하여 주시리라’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으로 온전히 고백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또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둘째 날과 셋째 날 이야기를 다루는 오늘 본문은, 그 첫날과는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입니다. 주님의 뜨거운 분노가 표출되고, 또 차가운 심판의 메시지가 선포됩니다. 전날 성전에 들어가셔서 ‘모든 것’을 둘러보고 확인하신 주님은(11절) 이제 작정하고 다시 성전을 찾아가, 그곳을 뒤집어놓으십니다.
이런 주님의 모습, 그리고 당시의 상황은, 오늘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서 말씀의 재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시대로부터 약 6백 년 전, 유다의 첫 번째 성전이 무너지기 직전과 오늘 본문의 상황은 매우 비슷하고 또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실 오늘 주님의 말씀이나 모습들이 상당히 난해한 편인데요, 그래서 이 예레미야의 말씀은, 그런 주님의 뜻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잠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본문의 상황을 정리해 보면 …, 주님은 입성하신 첫날 저녁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로 나가셔서 거기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아침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때가 매우 이른 아침이었고(마 21:18), 아마도 식전(食前)이었던 터라, 주님은 시장하셨습니다(12절). 그때 멀리 무화과나무가 보입니다. 이미 잎사귀가 무성한 상태였고, 열매를 기대할 만 했습니다.
사실 예루살렘도 그렇고, 베다니나 벳바게 같은 예루살렘 주변의 여러 도시들이 다 이 무화과로 유명합니다. 가는 곳 어디에나 무화과나무들이 심겨져 있어서 나그네들의 배를 채우는 귀중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이 무화과나무엔 아무 열매도 없었습니다. 잎사귀는 무성했지만, 아직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다고 마가는 첨언하고 있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14절)는 저주의 말씀이었습니다. 실제 다음날 아침 그 나무의 운명을 보게 됐습니다만, 나무가 뿌리부터 말라 죽게 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렇게 생명을 소멸시키는 결과를 낳은 것은 마가복음에서 아마 처음인 것 같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주님도 배가 고프면 이렇게 무서워지나 생각했겠다, 싶습니다.
이후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주님은 계속해서 성전에서 또 다른 분노를 표출하셨습니다. … 성전 뜰에서 제사에 필요한 제물을 파는 상인들, 또 환전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말 그대로 난장판을 만든 겁니다. 이 일 직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 죽이는 일을 시작하지요. 그만큼 실로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당시 성전에 있던 상인들은 ‘이방인의 뜰’이라는 곳에서, 순례자들, 예배자들을 위한 짐승을 팔았습니다. 흠 없고 좋은 것, 병들지 않은 것으로 드리라는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하는데, 이걸 지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가까이 사는 사람들이야, 집에서 기르는 것들 중 좋은 것을 골라오면 되지만, 멀리 사는 사람들에겐 그것도 큰 부담입니다. 가지고 오는 것도 힘들고, 며칠씩 끌고 이동하다 보면 없던 흠도 생기고, 건강도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대안이, 성전에서 아예 제물을 파는 거였습니다. 이거야말로 일거양득이지요. 하나님께도 좋은 것 드리고, 드리는 자들의 수고도 좀 덜고 말이지요.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 역시 당시엔 성전용 화폐로 바꿔서 드려야 한다고 여겨졌기에, 성전 안에는 일종의 환전소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20세 이상의 유대 남성들은 1년에 반 세겔(다른 화폐로는 4 드라크마), 지금으로 치면 대략 40~50만 원 정도의 성전세를 납부하도록 율법이 정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같은 명절 말고, 보통 때에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 상번제를 드리기 위해 필요한 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통용되는 화폐는 보통 로마나 두로의 돈이었기에, 그걸 성전 세겔로 바꿔야 했던 겁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제사용 짐승의 매매나 환전이 정말 그렇게 큰 죄가 되겠는지요? 주님께서 그토록 분노하실 만합니까? 그 의도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 아닙니까? 성전은 거룩한 곳이니 아무래도 매매는 곤란하겠는지요?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지요?
사실 이 ‘이방인의 뜰’이라는 이 공간은, 본래 구약의 성전에는 없던 공간입니다. 첫 번째 성전, 솔로몬 성전이 파괴되고, 두 번째 성전, 곧 스룹바벨 성전이 다시 건축되는데요, 훗날 헤롯 대왕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성전을 개축하면서 그 성전 외곽에 추가적으로 벽을 세우게 됩니다. 이렇게 옛날 성전과 새 외벽 사이에 생긴 공간을 일컬어 ‘이방인의 뜰’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실상 이 공간은 예배와는 별 상관이 없는, 일종의 편의시설이라고 해도 무방했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이방인의 뜰’입니다. 뭐 이방인들이 와서 거기서 기도하고 예배하고, 그러라고 만든 공간이 아니라, 이방인이 와도 되는 곳, 여기까지는 들어올 수 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이방인의 뜰’과 그 내부 성전 사이에는 높이 1.5m의 담이 있었는데요, 1.5m 높이니까 사실 성인 남성은 그 내부를 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보기만 해야지 거기 들어갔다가는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너희는 보기만 하고 들어오지 못한다, 이런 뜻입니다. 이름은 ‘이방인의 뜰’이라고 해서 뭔가 포용의 뉘앙스가 드러나지만, 실상은 차별과 소외의 공간이었던 셈입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과는 한참 거리가 먼 것이지요. 그 다음 안쪽 공간에 해당하는 ‘여인의 뜰’이라는 곳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인들은 거기까지만 들어갈 수 있고, 그 내부에는 다른 공간, ‘이스라엘의 뜰’이 있습니다. (명칭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실체가 중요한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 분노하신 진짜 이유는, 단순히 ‘이방인의 뜰’에서 사람들이 장사하고 환전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종교적(?) 열심’으로 만든 그 공간을 통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어야 할 성전이 오히려 만민을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집이 되고 만 그것이 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물론 그런 상업 활동으로 인해 막대한 부를 취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성전은 점점 부패해져 간 것이 사실입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주후 66년 유월절 제사를 위해 드려진 양의 숫자가 총 255,600마리였다고 합니다. 수백억 이상의 막대한 돈이 오고갔습니다. 환전도 마찬가지지요. 사실상 독점은행이 정하는 환전수수료이니, 그것 역시 어마어마한 이윤이 남는 장사입니다.
그런 캐시카우(Cash Cow)를 아무나 가질 수 없었겠지요. 당연히 대제사장과 같은 종교 권력이 개입되어 대가를 받고 그 일을 맡겼고, 심지어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직접 매매를 담당했습니다. 그런 것과 무관하라고 따로 구별하여 세운 사람들인데, 오히려 앞장서서 장사치로 전락한 것입니다. 물론 그런 막강한 권력과 이권을 가진 대제사장 자리를 얻는데도 역시 많은 뇌물이 오갔습니다. 가장 거룩하고 깨끗해야 할 하나님의 집이 더러운 뇌물과 비리로 가득한 강도의 소굴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분노가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만큼 예배가 오염됐다면 그 삶의 모습 역시 크게 다를 리 없습니다. 예레미야서의 말씀이 그 내용이지요. 예레미야가 전한 메시지의 핵심은, 사실 예배가 아니라 그들의 삶이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공의, 그리고 자비와 긍휼이 전혀 없는 삶, 그래놓고 예배만 열심히 드리는 그 ‘종교 생활’을 하나님은 책망하셨습니다. 예배를 드림으로써 죄를 회개하고 삶을 고쳐야 하는데, 오히려 그들은 다시 죄를 짓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예배를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고, 예배할 이 성전이 있으니, 우리는 안전하다고 괜찮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런 그들을 보시며 하나님은 당신의 집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탄식하셨고 그 강도의 소굴이 곧 그 생명을 다하게 될 것을 예레미야를 통해 예언하셨습니다. 그렇게 첫 번째 성전이 파괴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예루살렘은 어떤 면에서 그때보다 더 심각합니다. 강도들이 모인 소굴일 뿐만 아니라 그 소굴에서도 강도짓이 이어지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도둑들이 자기 집, 자기 소굴에서도 도둑질하겠습니까? 그러지는 않겠지요. 강도들이 모인 강도의 소굴에도 나름의 룰과 매너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밖에서는 강도짓을 해도 집에 들어오면 더 이상 강도로 살면 안 되지요. 그럼 결국 그 소굴도 끝장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당시에는 그래도 성전이 ‘강도의 소굴’ 노릇 정도였다면, 지금은 아예 그 소굴마저도 강도짓으로 득실거립니다. 예수님의 분노가 그 때문이며, 이제 이 두 번째 성전도 파괴될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가진 성경책에는 이 본문의 제목이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이번에 제가 새로 산 성경에는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다’라고 되어 있는데 혹시 다른 제목이 있는지요? 제가 보는 다른 성경에는, ‘성전 숙청’이라고도 나옵니다. 조금 더 어감이 강한데요, 그러나 주님이 실제로 의도하신 것은 그보다도 훨씬 더 강하고 심각한 것입니다. 주님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거나 새롭게 하시려는 게 아니라, 아예 파괴하여 없애시기로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모습을 가운데 두고, 그 앞과 뒤에는 다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씀드린 무화과나무 사건인데요, 열매가 없던 무화과를 향해 주님께서 저주하시자, 그 다음날 바로 그 무화과는 말라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낯선 이야기를 하시지요. “하나님을 믿으라.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여러분 어떻습니까? 주님의 이 말씀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고 느껴지십니까? 성전에 관한 이야기에서 갑자기 믿음으로, 기도의 능력으로, 다시 용서로, … 뭔가 이야기의 전환이 너무 급하고, 또 서로 잘 이어지지 않는 내용들을 억지로 끼워 맞춘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사실 본문이 복음서에서 가장 난해한 내용 중 하나로 알려져 있기도 한데요,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해 보입니다.
주님은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때는 무화과 철이 아니었다고 마가는 이야기합니다. 무화과 철도 아닌데 열매를 기대하셨고, 열매가 없는 걸 보시고 그 나무를 저주하여 죽이신 것은 뭔가 이치에 맞지 않아 보입니다. … 그런데 여러분, 무화과나무가 원래 그렇습니다. 꼭 철이 아니어도 열매를 맺는, 또 그 열매가 있어야만 하는 신기한 나무입니다.
근동의 무화과는 1년에 네 번에서 다섯 번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본문의 시간적 배경인 유월절이 있는 3~4월에 그 첫 번째 열매가 맺힙니다. 열매가 맺히긴 하지만 이 첫 열매는 별로 맛이 없습니다. 그 열매가 다 떨어지고 다시 맺혀지는 두 번째 열매부터가 우리가 아는 당도 높은 진짜 무화과입니다. 그래서 무화과 열매는 두 개의 각기 다른 이름이 있습니다. 하나는 맛이 덜한 그 처음 나온 열매를 가리키는 ‘파게’(혹은 ‘팍김’)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다음부터 나오는 제대로 된 무과화, ‘테나’입니다.
당연히 ‘테나’가 맛있고 상품성도 좋습니다만, 중요한 건 첫 열매 ‘파게’가 달리지 않은 나무는 ‘테나’도 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파게’가 열리고 그것을 따서 없애줘야 거기서 다시 ‘테나’가 열립니다. 그래서 ‘파게’가 열리게 되면, 비단 무화과 주인만이 아니라 길을 지나는 누구나 마음대로 따서 먹을 수 있었습니다. 어차피 팔지도 못할 열매이고, 따는 수고도 덜 수 있으니, 오히려 주인 입장에서는 고마울 따름인 것이지요.
잠깐 11장 1절에 보면 예루살렘 근처의 두 마을 이름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벳바게’이고, 다른 하나는 ‘베다니’입니다. 네, 예상하시는 대로 두 지명 모두 이 무화과의 이름들과 연관이 있습니다. ‘벳바게’는 ‘베트’와 ‘파게’가 합해져서 그 뜻이 ‘파게’의 집, 그러니까 ‘이른 무화과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베다니는, 여러 학설이 있습니다만, ‘베트’와 ‘테나’가 합해진 이름입니다. ‘잘 익은, 제 철 무화과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 인근 지역에 무화과가 얼마나 흔하고 유명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럼 여러분, 예수님께서 다가가사 잡수시려 했던 그 무화과 열매는 이른 무화과 ‘파게’였겠습니까, 아니면 제 철 무화과 ‘테나’였겠습니까? 네, ‘파게’였습니다. 비록 철은 아니고 맛도 별로지만, 이미 잎이 무성해진 무화과나무였기에, 당연히 주님은 ‘파게’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확인해보니 ‘파게’마저도 없는 겁니다. ‘파게’가 있어야 ‘테나’도 있는 것인데, 이건 아예 ‘파게’도 없으니 심각합니다. 무화과나무는 재질이 무르고 여려서 목재나 땔감으로도 사용이 불가능한, 오직 열매만을 위한 나무인데, 그저 잎사귀만 무성하니 실로 너무나 실망스러운 나무입니다.
그때 주님이 그 나무를 보시며 무슨 생각을 하셨겠습니까? 네, 열매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과 잎만 무성한 성전을 생각하셨습니다. 종교적 행위는 가득하지만, 경건의 실체와 능력은 없는 신앙, 맛있는 열매를 맺어 이방인들에게 복이 되는 그런 신앙은 고사하고, 정말 가장 기본적인 열매, 하나님이 말씀 앞에 서툴게나마 순종하려는 그 ‘파게’의 열매조차 없는 신앙, 그래서 아예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뿐 아니라 거기서도 강도짓을 하는 최악의 신앙을 주님은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그런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깨끗하게 하실 마음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그 성전을 완전히 폐기하기 위해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이제 그 때가 되었고, 주님은 친히 그 일을 이루고 계십니다. ‘파게’조차 없는 무화과나무를 굳이 주님께서 저주하시고, 고사시키신 것은, 그것이 다름 아닌 강도의 소굴보다도 못하게 된 예루살렘 성전의 운명이 그리 될 것을 드러내시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해도 그리 될 것이라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예루살렘 성전만이 아니라,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도, 그 도시가 자리하고 있는 시온 산도 같은 운명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고쳐 쓰실 마음이 없습니다. 성전도, 도시도, 산도,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김없이 완전히 무너뜨려질 것입니다. 예수라는 새 성전이 세워지고, 예수를 통해 만민이 함께 기도하는 하나님나라를 위해, 하나님은 모든 장애물들이 제거하실 것이며, 제자들은 이를 위해 믿음으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타락한 성전과 그 기초가 되는 산과 성이 다 무너져도 하나님의 자비와 화평의 언약은 파기되지 않고, 예수라는 새 언약을 통해 각 사람이 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될 것입니다. 더는 예배할 곳이나 기도할 곳이 정해지지 않을 것이지만,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여, 믿음으로 선 그곳에서, 믿음으로 성도가 연합한 그곳에서, 하나님나라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이야기를 덧붙이십니다. 25절인데요, 다른 사람의 혐의가 있을 때 용서하라고, 그래야 하나님이 너희 허물도 용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용서와 속죄의 말씀이 등장하는 것은, 지금까지 그 일을 담당했던 성전이 이제 그 생명을 다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제 그 속죄와 용서의 제사는 우리 자신 안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임재하신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세우십니다. 이제 하나님의 속죄와 서로를 용서하는 자리가 나뉘지 않고 우리 자신, 한 곳입니다. 믿고 그 이름을 의지하여 기도하는 자가 곧 주님의 집이며, 예수의 이름으로 보냄 받은 성령이 부어져 그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의 몸으로 모인 우리가 곧 성전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서로를 용서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을 확증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 모임이 강도의 소굴이 아니라, 성령의 소굴, 성령의 집임을, 우리는 함께 기도하고 용서함으로 반드시 고백해내야 합니다. 그 모습 그 자체가 우리의 정체성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중요한 의미가 이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랑과 긍휼을 힘입어 다시 기도할 수 있게 되었는가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허물 있는 자, 우리에게 등 돌린 자, 우리를 상처 입힌 자를 용서하라고, 그래야 우리 자신의 죄도 하나님께서도 사하여 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 그런 뜻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을 가졌다면, 우리 스스로 성령이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면, 그는 분명 타인을 용서하고 만민을 위해 기도하는 집이 될 수밖에 없을 거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여러분, 25절을 다시 보시면, 주님은 “다른 누군가에게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십니다. ‘혐의’와 ‘허물’은 엄연히 다른 겁니다. 허물은 명백한 죄를 의미하지만, ‘혐의’는 그런 게 아닙니다. 말 그대로 애매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서로의 혐의를 용서하라 말씀합니다. 비록 명백한 잘못이 없어도, 잘잘못을 따질 수 없어도, 서로 뭔가 거리낌이 있는 그런 상태가 됐다면, 네가 먼저 용서의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은 명백한 죄와 허물을 하나님이 용서하십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이 말씀대로 살아가고 또 기도하십시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십시다. 참 된 하나님의 성전답게 그리 살아가십시다. 우리가 모여 드리는 이 예배 속에서도, 그 용서와 화목이 이루어지게 하십시다.
또한 저와 여러분의 삶을, 이 교회를, 기도하는 집이 되게 하십시다. 요즘은 저희 교회에 매일 오전 오후로 기도하러 오시는 청년이 계신데요, 점점 더 저희 교회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자신의 삶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서 진실한 기도가 사라지면 결국 강도의 소굴만 남게 된다는 것을 본문은 경고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이, 교회가, 단 한 번에 강도의 소굴이 되는 게 아닙니다. 점점 기도가 그쳐 가고, 용서가 사라져갈 때, 시나브로 우리의 삶은 강도의 소굴이 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다시 기도하는 성전이 되십시오.(*)
끝으로 한 가지만 더 강조하고픈 것은 …, 첫 열매 ‘파게’의 순종을 맺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파게’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의 가장 원초적인 반응, 첫 순종을 의미합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하나님 말씀을 받았기에, 어떻게든 말씀대로 순종하려고 애쓰는 그 첫 노력이 파게입니다. ‘그래, 돌이키자, 순종하자,’ 하는 그 결단과 노력의 열매입니다. 당연히 온전하지 못하고, 성숙하지 못합니다. 서툴고, 연약합니다. 그러나 그 파게 없이는 다음 열매도 없습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힘껏 말씀에 반응해서, 어떻게든 열매가 맺혀지게 해야 합니다. 완전한 순종이 가능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때 하겠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부족하지만 ‘첫 열매를 맺는 열심’으로 주님의 만족과 기쁨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이 또한 우리고백교회를 향한 주님의 음성임을 믿고, 여러분, 함께 깨어 교회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여러분, 교회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위험하며, 늘 위태롭습니다. 돌이켜 회개하지 않으면 그 촛대를 옮기겠다고 주님은 경고하십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강도들이 모인 소굴을 만들 수 있고, 그 소굴이 또한 강도짓으로 가득 채워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경계하고 또 경계하며 깨어 교회를 위해 함께 기도하십시다.
올해는 너무나 중요한 일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 일들을 통해 하나님도 기대하시며 우리를 지켜보시겠지만, 마귀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틈을 노릴 것이며, 어떻게든 미혹케 할 것입니다. 안전하리라, 그 말씀은 다름 아닌 위험하리라, 하는 경고의 메시지였음을 느끼게 됩니다. 깨어 함께 기도하며, 서로 용서하며, 열매 있는 교회를 향하여 힘껏 전진하십시다. 서툰 첫 열매를 지나, 온전한 ‘테나’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용서하라,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말씀하신 주님. 우리가 그렇게 서로를 사랑하고 의지하며,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로 자라가기를 원합니다. 저희의 삶이, 또한 이 교회가 열매 맺는 참 믿음을 지켜낼 수 있도록, 주여 저희를 불쌍히 여기사, 지켜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