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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44. 십계명 #9
2019-09-05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6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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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된 설교 원문
20190904 수요 성경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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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1:16, 십계명 #9.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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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아홉 번째 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인데요, 영어로는 “You shall not give false testimony against your neighbor.”(NASB), “네 이웃을 해치는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입니다. 다시 말해 이웃에게 해가 되는 모든 거짓된 말들, 그리고 그 언어에는, (진실에 대한) 침묵도 포함이 될 텐데요, 그 모든 거짓된 말들을 금하라는 말씀입니다.
2012년에 나온 덴마크 영화들 중에 ‘The Hunt’(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가 있습니다. 주인공 남자 루카스는 유치원 교사인데요, 아내와 이혼 후 고향으로 내려와 반려견 한 마리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는 곧고 바르면서도 친절한 성품으로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은데요, 그가 일하는 유치원에서도 아이들과 선생님들에게 인기 스타입니다.
그런 그의 가장 친한 고향 친구 테오에게는 클라라라는 딸이 있습니다. 루카스의 직장인 그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아이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아빠의 친구인 이 루카스에게 호감을 가지게 됩니다. 자기 말을 잘 들어주고, 늘 친절한 루카스를 특별한 마음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겁니다. 여느 날처럼 루카스가 아이들과 함께 뛰놀고 있을 때, 클라라가 누워 있는 루카스에게 다가와서는 뽀뽀를 합니다. 어린아이가 아빠 친구에게 하는 평범한 뽀뽀라고 느낄 수도 있지만, 루카스는 이것이 예사롭지 않음을 직감합니다. 그래서 클라라에게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지요. “그런 건 엄마, 아빠랑만 하는 거야.”라고 타이르며, 같은 또래와 잘 어울리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것이 클라라에게는 큰 상처가 되고 말았습니다. 거절당한 슬픔과 아픔에 클라라는, 자기에게 장난치는 친오빠들로부터 들었던 성적 농담을 활용해서, 마치 루카스가 자신에게 성추행을 한 것처럼, 유치원 원장에게 거짓으로 폭로합니다. “저 아저씨 **를 봤어요. … ***가 막대기 같아.” 등과 같은 말로 말입니다.
당연히 유치원과 온 마을이 난리가 납니다. 이유 없이 거짓말을 할 리 없다고 생각하는 어린아이의 말을 사람들이 진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검증과 조사도 거치지 않은 채, 루카스에게 대한 일방적인 비난과 분노가 전염병처럼 온 마을을 뒤덮습니다. 비록 극소수의 친구들이 여전히 루카스를 신뢰하지만, 이미 소문에 소문이 이어져, 루카스는 더 이상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상황이 악화되자 클라라가 엄마에게 진실을 고백합니다. “내가 바보 같은 말을 했는데, 이젠 다른 사람들까지 바보 같은 말을 따라하고 있어.”라고. 하지만, 어른들은 그 말조차 아이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상처를 억누르다가 생긴 말이라고 오해해버립니다. 어른들이 그렇게 나오자, 이젠 이 아이마저도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고 맙니다.
물론 루카스의 삶은 지옥이 되어버렸습니다. 증거가 없어 결국 경찰에서는 무혐의로 풀려나지만, 그럼에도 그를 향한 마을 사람들의 폭력과 공격은 계속됩니다. 그의 반려견도 죽고,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나고, 그의 집으로는 큰 돌이 날아들고, 마트에선 더 이상 그에게 물건을 팔지도 않습니다. 한 인간의 인격과 삶이, 진실을 외면하는 공동체에 의해 처참하게 부서지는 과정이 실감나게 그려진, 가슴 아픈 영화입니다.
거짓 증언, 거짓된 풍설(風說, 23:1)에 대한 경고가 오늘 아홉 번째 계명과 함께 읽은 출애굽기 23장 전반부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특히 23장의 말씀은, 방금 소개한 ‘더 헌트’라는 영화의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1.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2.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며 3.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지니라.”
영화 속 루카스는, 만약 사람들이 거짓된 풍설, 곧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바람처럼 떠도는 소문을 퍼뜨리지만 않았어도, 또 생각 없이 다수의 목소리를 따라 부당한 증언을 이어가지만 않았어도, 또 가난한 자, 곧 힘이 없고 순진한 아이라 하여 무턱대고 그녀를 두둔하고, 일방적인 판단만 내리지 않았어도, 그가 그토록 무기력하게 사냥 당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영화의 제목, ‘The Hunt’처럼, 모든 인간은 이러한 소문과 악한 증언 앞에 무기력한 힘없는 사냥감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단지, 과학이 발달하지 않아 목격자들의 증언에만 의존하여 판결해야 했던 수천 년 전의 이야기인 것만이 아니라, 바로 오늘의 이야기이며, 또 가장 민주적인 나라, 가장 살기 좋다는 나라, 덴마크의 국민 행복지수가 세계 1위라는 통계도 본 적이 있습니다만, 그런 나라의 이야기입니다. 오늘날도 이 계명은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며, 여전히 너무나 중요한, 그러나 또한 너무나 지키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남의 이야기하기를 좋아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목회자인 아더 핑크는, “이 아홉 번째 계명보다 우리가 더 자주, 그리고 무의식중에 범하는 말씀은 없다.”고 했습니다. 잠언에도 보면,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 곧 맛난 음식과 같아서 (우리) 뱃속 깊이 들어간다.”(18:8, 26:22)고 했습니다. 네, 우리는 그냥 남 이야기 하는 걸 좋아하고, 듣기도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수군거림, 그와 같은 ‘뒷담화’의 내용은 99.99%가 험담과 비방이지요. 타인의 좋은 점을 ‘뒷담화’ 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단 재미가 없어서 하더라도 길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험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주석에 주석을 달며, 금세 논문 급의 창조물이 탄생됩니다.
우리는, 그런 수군거림이 그저 일상의 작은 유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그것이 다름 아닌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자, 또한 그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내버려두심’의 형벌의 결과라고 말씀합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 인간을 내버려두셨을 때, 그의 타락한 마음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결과물, 열매 중 하나가 바로 비방과 수군거림이라는 것입니다(롬 1:28~30).
예수님께서도 거짓된 말들이 다름 아닌 마귀에게서 난 ‘마귀의 모습’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거짓말하는 자, 그리고 그 거짓으로 이웃을 해하는 자, 그의 인격을 파괴하고 그를 망하게 하는 자, 그의 아비가 바로 마귀라고 하신 것입니다. 너무나 무서운 말씀이지요.
결국 예수님 자신도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의 거짓 증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복음서는 기록합니다. 예수를 죽이기 위해 대적하는 이들은 거짓 증인과 증거를 찾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나서서 거짓 증언을 했지만, 쓸 만한 증거는 얻지 못하였지요. 그때 마침 두 사람이 나서서 “이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세울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라고 증언합니다.
물론 주님이 그 말씀을 하신 것은 맞지요. 그러나 전체 맥락이 예수님의 육체를 향하여 하신 말씀인 것을 그들은 일부만 문자적으로 옮겨 악의적으로 증언했습니다. 우리도 아주 잘 하는 기술 가운데 하나이지요. 나의 의와 이익을 위해, 듣는 사람이 내 편을 들어주기를 바라면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기술(記述)이 아니라, 의도적인 편집과 왜곡, 과장에 능한 것이 사실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사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을 너무 가볍게 생각합니다. 이 문제가 거짓을 일삼는 마귀의 자식과 진리의 하나님의 자식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곤 합니다. ‘마귀’라는 헬라어 명사 ‘디아볼로스’가 원래는 ‘거짓으로 비방하는 자’라는 의미이지요. ‘남을 헐뜯기 좋아하는’이라는 의미의 형용사로도 사용됩니다. 마귀의 본질이 거짓 증언으로 남을 해하는 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 21:8에서, “그러나 …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디아볼로스와 그의 자녀들에 대한 최후의 심판을 이야기하십니다. 여러분, 거짓 증언, 수군거림, 불의한 침묵의 모든 뿌리가 결국 마귀, 사탄임을 기억하시고, 부디 이웃을 해하는 일체의 언어에 대하여 깨어 경성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결국 조심하는 사람이 이깁니다. 조심해야만 넘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안 그래.’ ‘나는 달라’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위험합니다. 일본의 한 학자(감바 와타루)가, 인간은 8분마다 한 번씩 거짓말을 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거기엔 남을 해하지 않는 소위 ‘하얀 거짓말’도 포함되어 있겠습니다만(마틴 루터는 거짓말을 세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익살스러운 거짓말, 유익한 거짓말, 그리고 해로운 거짓말입니다. 익살스러운 거짓말은 아마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종종 행해지는 장난과 관계될 수 있고, 유익한 거짓말에 대해서 루터는 여기에 히브리 산파들과 라합의 경우를 포함시켰습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거짓말은 일상적인 것이며, 우리 스스로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우리 자신이 이 문제 앞에 연약함을 인정하고 계속 조심하며 늘 성령의 도우심을 구할 때, 비로소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마귀의 함정들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말할 때에는, 특히 그의 좋지 않은 것에 관해서라면,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이야기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으로 말해야 함을 율법은 강조합니다. 특별히 죄인의 처형에 관한 율법의 기록을 보면, 사형을 집행 시 그에 대해 증언한 증인이 가장 먼저 손을 대야 합니다. 예컨대 투석형(投石刑)의 경우, 그 사람의 죄를 증언한 사람이 제일 먼저 돌을 던집니다. 증인은 단지 증언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것에 대한 마지막 책임까지 지는 것입니다.
또한 위증자에게도 엄격한 처벌을 내립니다. 만약 위증자의 거짓이 드러나게 되면, 그 처벌은, 원래 증인이 증언한 죄의 형벌을 그대로 받게 하도록 율법은 규정합니다. 예컨대 누군가의 간음죄에 대한 위증이 드러나면, 그 증인이 간음죄 처벌을 받습니다. 이웃을 해하는 거짓 증언을 공동체에서 뿌리 뽑고자 하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신 19:19).
그러고 보면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그 간음한 여인, 간음의 현장에서 붙들려온 그 여인의 이야기도 이 관점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고 주님이 말씀하시는데, 그 기세등등했던 사람들 중 아무도 먼저 그녀를 치지를 못하지요. 여기서 ‘먼저’라는 말이 중요한데, 먼저 치려면 스스로 그 현장을 목격한 증인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위증한 것이 드러나면, 자신이 그 간음죄의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먼저 나서지를 못하지요. 분명히 현장에서 음행 중에 잡혀 왔다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녀를 주님 앞에 데려왔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증인의 무게를 감당하려 하지 않는 겁니다. 그들은 아마도 정말 현장에 있던 이들이 아니라, 소문에 소문을 듣고 온 사람이거나, 아니면 예수를 죽이기 위해 모의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영향을 받거나 매수된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요(要)는, 누군가에 대해 말할 땐,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에게는, 그만큼의 무거운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저 재미와 즐거움을 위해 그런 이야기에 함부로 말을 섞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듣고 계시며, 그 말이 결국 내 손에 피를 묻힌다는 의식을 가지고, 최대한 우리의 입을 무겁게 놀려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진리의 하나님, 그분의 자녀요, 그의 백성이라면 말입니다.
문제는 단지 결심만으로는 쉽지 않다는 점이지요. 그것이 나쁜 것인 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것은, 모든 죄가 그러하듯, 이것 역시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즐거움과 유익을 주기 때문이지요. 레위기 19:16의 말씀에 보면,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며, 네 이웃의 피를 흘려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경제적으로나 관계적으로 나에게 유익함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남을 비방하고, 또 그런 자리에 합석하게 됩니다. 예컨대 성경에서, 거짓 증인을 매수하여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강제로 빼앗은 아합 왕과 이세벨, 또 거짓 증인들에겐 그 포도원이라는 공동의 이익이 있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그냥 관계 그 자체가 큰 동기가 되기도 합니다. 다함께 비방하고, 다들 수군거리는데, 거기서 진실의 편에 선다는 것은, 아예 그 관계를 잃어버릴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 공동체의 강한 반격으로 내가 피해를 입는 경우도 생길 수 있습니다. 시편의 첫 말씀, 1편이 바로 그 말씀이지요. “1.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5절에는, “그 악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라고 해서, 결국 반드시 악인의 길은 망하고, 의인의 길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고 말씀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 악인들의 자리에 함께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를 수도 있습니다.
네, 이익과 관계를 포기하고서라도 우리가 거짓 증인들의 회중과 함께 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고, 또 하나님께서 반드시 정직한 자를 구원하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시편 7편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7:10) 한 번 저를 따라해 보실까요?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아멘. 우리의 방패는 다름 아닌, 정직한 자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가 함께 묵상했던 여호수아 1장의 말씀, 여러분 잠시 기억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라.” 명령하시고, 곧바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었냐면 …, 담대하여 앞으로 전진해라고 하신다거나, 담대하여 나가서 싸우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 그 극도의 담대함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켜 행하라고, 그 담대함으로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의 담대함은 결국 무엇을 위해서인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담대함은 다름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담대함으로 자신감 있게 살고, 한 마디를 해도 힘 있게 말하기 위해서, 그래서 담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이익이나 우리가 속한 관계를 잠시 포기해야 할 때조차, 좌우로 흔들리지 않고 주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어떤 손해를 감수하면서라도 진리를 고수할 수 있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강하고 극히 담대하라고, 정직한 자를 보호하시는 여호와를 방패 삼으라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순교자’를 영어로 ‘MARTYR’라 하잖아요? 이 단어가 ‘증인’이라는 헬라어 단어 ‘마르투스’에서 왔다는 것 아시지요? ‘주 예수의 증인’, ‘진리의 증인’이 바로 초대교회 순교자였던 것입니다. 정직하고 바른 증언에는 고난과 핍박이 따르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여호수아에게,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 말씀 따라 살면, 그러면 반드시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여러분, 비록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 약속을 믿고, 진리의 자녀답게 거짓을 버리고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제 개인적인 이야기 하나만 더 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문득 제가 어릴 적 겪었던 작은 일화(episode)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 제가 초등학교 시절, 제가 다니던 모(母) 교회가 교회 건축을 했습니다. 상가 지하에서 시작한 작은 개척교회가 얼마 안 있어 그 상가 2층으로 옮기게 됐고, 조금 더 있다가 결국 작은 땅을 사서 아담한 예배당을 건축하게 됐습니다.
당시 저희 아버지께서는 그 교회의 유일한 장로님이셨습니다(기억이 정확하진 않은데, 그땐 안수집사님이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와 예배당에 대한 책임감과 애착이 남다르실 수밖에 없었지요. 그 전부터도 신앙에 있어서 워낙 좀 유별난 분이셨지만, 건축이 시작되자 이건 뭐, 완전히 그 일에 인생을 걸고 헌신하셨습니다. 하시던 일까지도 다 그만 두시고, 아예 공사 현장에서 살다시피 하셨습니다. 잠도 현장에서 주무시고, 무슨 건설현장 노동자처럼, 그렇게 몇 달을 사셨습니다. 언제나 극단적인 건 좀 안 좋습니다만, 당시 아버지께 그 일은 그런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제 친구들이 보게 된 겁니다. 아버지께서 러닝셔츠 차림으로, 일꾼들과 함께 현장에서 일하고, 또 건축자재를 가득 실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시는 모습을 본 친구들이, 저 몰래 서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는데, 결국 얼마 가지 않아서, 그런 소문이 돌았습니다. 준석이 아버지가 사업이 망해서 (당시 표현으로) 노가다를 뛰고 계신다더라, 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가족이 다 따로 살고 곧 이혼도 한다더라, 등등의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초등학교 반 친구들이 다 알 때까지도 저는 그 이야기를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는데요, 나중에 제 가장 친한 친구가 제게 조심스럽게 그 사실 여부를 물어봤을 때, 제가 처음 그 이야기를 듣게 됐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아무것도 몰랐고, 늘 같이 놀던 친구들이 이상하게 저를 멀리하는 게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지금은 뭐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 당시에는 혼자 정말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개인적 이야기가 좀 길어졌습니다만, 저는 그때 작은 결심을 하나 하게 됩니다. ‘내 귀에 들어온 누군가에 대한 험담은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겠다. 내 입은 소문의 무덤이 되게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물론 그대로 다 살지는 못했습니다만, 그동안 한 인간으로서나, 또 성도의 중요한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는 목사로서도, 그 결심을 지켜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된 계기가 바로 그 어린 시절의 아픈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참 많은 분들이 제게 찾아와 정말 말 못할 이야기들을 고백하게 된 것 같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이 부정의 명령 말씀을 긍정으로 바꾼다면, 이런 메시지일 것입니다. 이웃을 해하는 것이 아니라(against your neighbor), 이웃을 위하여(for your neighbor), 그들에 관한 거짓된 말과 소문들을 분별하고, 그치게 하며, 또 악한 거짓말로부터 이웃을 보호하기 위해 꼭 필요한 증언을 하라, 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딛 1:2)의 백성, 진리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내야 할 삶의 모습일 것이며,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증인 된 저와 여러분의 책무일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계명은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의 정체성과 직결된 문제인 것이지요. 만약 우리가 거짓 증언을 일삼고, 그런 무리와 어울려 누군가의 흠이나 수군거린다면, 도대체 예수에 대한 우리의 증언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의 증언이 의미 있고, 힘이 있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옛 사람의 거짓된 말과 행위를 벗어버리고,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말을 진실하고 정직하게 연단해가야 할 것입니다(골 3:9~10).
가능하면 말을 줄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남에 대해서는, 쓸데없는 말은 줄이는 게 좋겠지요. 야고보 사도께서 경건에 대하여 말하기를,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약 1:26)고 했는데, 어쩌면 우리의 혀는 너무 자유로운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다윗 같은 사람은,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 141:3)라고 기도했다지요. 네, 우리도 늘 같은 고백이어야 할 것입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고 하신 말씀처럼(약 3:8), 이것이 우리의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님을 인정하고, 우리의 입에 하나님께서 친히 파수꾼을 세우사, 입술의 문을 지켜주시기를, 늘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디 오늘 이 말씀이, 우리의 뿌리 깊은 죄악을 고치시고, 또 저와 여러분의 언어와 증인 된 삶을 온전히 지켜주시는 능력의 말씀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는 온전히 열납되고(시 19:14),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진실한 증언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