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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35. 준비하게 하여 기다리게 하라
2019-06-05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8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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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된 설교 원문
20190605 수요 성경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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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9장 7~25절, 준비하게 하여 기다리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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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내 광야, 시내 산으로, 더 정확히는 하나님 자신에게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그들을 향해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을 베푸는, 출애굽의 절정에 해당하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산 앞에 장막을 치고 먼저 모세가 하나님께 올라갔고,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보배로운 소유, ‘세굴라’ 삼으심을 말씀하십니다. 아울러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 되게 하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단 하나의 조건 곧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잘 듣고 지킬 것을 요구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그 말씀을 듣고 모세가 다시 산 아래로 내려와 그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장면부터 시작됩니다. 장로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자 백성들의 반응은, 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하나님의 프러포즈에 대한 이스라엘의 응답은, “Absolutely Yes!”였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그들을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그들을 업어 인도하셨는지, 그들은 다 보았으니 말입니다.
모세는 이 감동적인 반응을 다시 여호와께 전합니다. 그냥 그 자리에서가 아니라 다시 혼자 산에 올라가야 합니다. 사실 19장 본문의 행간에는 모세의 계속되는 수고가 담겨 있습니다. 산에 몇 번 올라가는 게 뭐 힘든 일이냐 싶지만 모세의 나이가 벌써 80대입니다. 더구나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시내 산의 높이가 2,285m라고 말합니다. 사실 제 개인적으로는 동의하기가 좀 어렵고, 그렇게까지 높은 산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모세가 처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것도 시내 산인데, 양떼를 몰고 그렇게 높은 산에 올라갈 이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
어쨌든 모세는 여러 번 산에 오릅니다. 힘도 들고 왜 이런 과정이 반복되어야 하나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겠지만, 늘 그렇듯, 모세에게는 진한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응답을 가지고 두 번째 산에 올랐을 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9절인데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네게 임함은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들이 듣게 하며 또한 너를 영영히 믿게 하려 함이니라. …” 이렇게 오르락내리락 수고를 반복하고, 네가 중간에서 말을 전하는 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힘들겠지만 … 왜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지, 이제 주실 율법도 왜 모세의 수고가 필요한지, 하나님은 미리 모세에게 설명하십니다.
셋째 날 실제로 그렇게 산기슭으로 올라온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임재가 나타나게 되는데, 빛도 통과하기 어려운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게 됩니다(17~19절). 그런데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네, 모세와 여호와 하나님과의 대화를 백성들이 듣게 하려고,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모세를 영영히 믿게 하려 함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 모세를 향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시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비록 여호와의 임재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엄청난 두려움 속에 이루어지겠지만, 모세 너를 향한 내 마음은 각별하다, 그러니 두려워말라는 사랑과 배려의 메시지이자, 그것이 오히려 모세의 리더십을 위한 하나님의 준비된 계획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모세도 두려워했지만 말입니다(히 12:21).
하나님은 모세의 중심과 어려움을 다 아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떠하며, 또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떠한지, 모세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얼마나 애달파 하는지, 하나님은 그 중심을 아십니다. 그가 어떤 수고를 통해 여기까지 백성들을 인도해왔는지도 알고 계시며, 그러면서도 공동체로부터 때마다 그 권위를 위협받고 있는 것도 다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만 말씀하시고, 그와 나누는 대화를 이스라엘로 하여금 듣게 하시고, 또한 그를 영영히 믿게 하십니다.
여기서 주목되는 단어가 ‘영영히’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얻습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의 백성들만이 아니라, 영원한 믿음을 얻습니다. 실제로 그 일이 이루어집니다. 모세는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거룩한 율법의 중재자로 신뢰받고 있으며, 그의 삶과 신앙은 우리의 중요한 롤 모델이 되어 있습니다. 그 지위와 역할은 주님 오실 때까지 이어질 것이며, 주님 오셔서, 이 시간이 영원으로 잇대어 들어갈 때 그의 영광은 더 완전히 빛날 것이며, 그의 지위는 영원한 지위가 될 것입니다.
모세의 순종과 섬김은 일시적입니다. 그는 수천 년 전, 단 120년의 세월을 살았을 뿐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 기간은 그중 1/3에 해당하는 노년의 40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그런 수고와 섬김을 영원에 담으십니다. 결코 그 세대로 끝나고 잊히는 땀과 수고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그의 헌신을 미래에, 영원에 닿게 하시며, 영원히 잊히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광으로 갚으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도 그러하시며, 우리에게 맡긴 사명들을 감당하는 여러 일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 또한 그러하심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현실의 순간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섬김과 수고를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시고, 하나님나라의 영원한 선한 열매로 합력하여 이루심을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된 종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친히 말씀하시며, 많은 타인들 가운데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에 나눠진 그 이야기들을 들리게 하시고, 그들 앞에서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그 머리에 부어 존귀하게 세우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하나님을 기뻐하며 신뢰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위한 삶 가운데 지치고 힘들 때, 오늘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늘 기억하며, 하나님으로 인해 큰 위로와 힘을 얻으시길 축복합니다.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겠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백을 모세가 여호와께 전했을 때, 하나님의 명령 첫 마디는 … 다름 아니라, 오늘과 내일을 구별하여 성결하게 준비하고, 기다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10~11절). 셋째 날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날 때까지, 남은 이틀의 시간을 온전히 준비의 날로 삼아, 하나님과의 만남을 준비하고, 일상을 정돈하라고 하십니다. 네, 그것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겠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여호와의 첫 명령이었습니다.
모세가 처음 이곳에서 불타는 떨기나무 안에 임재하신 여호와를 만났을 때, 그가 하나님 앞에서 신발을 벗고, 거룩함과 정결함을 갖추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했던 것처럼, 이스라엘 온 백성들 또한 그 준비와 기다림을 요구받습니다. 성결함으로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 그것이 바로 십계명과 율법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19장은 여호와의 임재 그 자체보다도, 그것을 예비하고 준비하는 과정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여호와의 임재 장면은 16~19절에 간결하게, 하지만 강력하게 기록되어 있고, 나머지는 준비하고 기다리는 모습과 하나님을 경외하며 거룩의 경계를 넘지 않아야 함에 대한 강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마치 1시간 남짓의 혼인식을 앞둔 신부와 신랑이 극도의 긴장으로 그 전날을 보내고, 모든 마음과 생각을 예식을 위해 준비하는 것처럼 말입니다(결혼식 전날).
10절에 보면 아주 특별한 단어가 나오는데요, ‘그들을 성결하게 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성결하게 하다’라는 단어 ‘카데쉬’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거룩하게) 구별하다’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가 성경에 처음 등장한 것이 창세기 2:2~3인데요,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일곱 번째 ‘날’을 ‘카데쉬’ 하신 것과 같이, 또 시내 산이라는 ‘공간’을 ‘카데쉬’하신 것과 같이,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도 ‘카데쉬’를 명령하십니다.
거룩하게 하는 것, 성별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는 것을 말합니다. 내 삶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 내가 하나님의 ‘세굴라’로서, 하나님의 보배로운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감사와 겸손으로 잠잠히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고,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 그것이 ‘성별(聖別)’입니다.
그런데 그 방법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는 것이 10절의 ‘옷을 빠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 외에는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다른 특별한 조건이 없습니다. 어찌 보면 참 별로 대수롭지 않은 명령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을 추가합니다. 15절에 보면, 여인을 가까이 하지 말라 이야기합니다. 사실 이 부분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앞에 10~12절에는 없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금욕과 절제의 마음으로, 온전히 여호와를 향한 마음으로, 그렇게 준비하기를 원하는 리더의 감동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실제로 나중에 율법의 규례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포함되는데요, 주일에 언급한 진설병의 경우도 다윗과 그의 무리가 진설병을 먹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조건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여인들을 가까이 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성적 절제 ↔ 바알).
어쨌든 하나님의 명령은 단 하나, 옷을 깨끗하게 빠는 것입니다. 얼핏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런데 제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것이 참 중요하고도 당시로서는 어려운 명령입니다. 광야에서 제일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세탁일 겁니다. 누가 사막에서 옷을 빨고 다리고 그러겠습니까? 사람과 짐승 먹을 물도 없는데, 어지간하면 그냥 지내다가, 비오면 빨고, 어디 큰 웅덩이나 오아시스 같은 곳에서나 큰 맘 먹고 밀린 빨래를 하며 지냈을 겁니다. 건조한 기후라 어느 정도는 가능한 일이겠지요. (아마 정식으로 세탁한 것은, 출애굽 이후 60일 만에 이번이 처음이었을지 모릅니다.) 더구나 수십, 수백 만 명의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꺼번에 다 빨래를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엄청난 양의 물이 소모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단 하나의 성별을 말씀하십니다. 생명 그 자체인 물로 온 백성이 빨래를 하면서, 몸과 마음을 정돈하고, 지금껏 인도하신 하나님을 생각했을 겁니다.
어쨌든 성결의 준비는 그렇게 이틀의 시간 전부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냥 마음의 준비만이 아니라, 생명과 같은 물을 소모하여, 정결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준비합니다. 사실 이건 너무나 당연한 태도요 준비입니다. 몸과 마음의 준비가 따로 가지 않습니다. 중요한 사람을 만나러 나갈 때에도 우리는 정결함으로 준비하고 기다립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도, 예배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읽으며 제가 매일 아침 예배당에 들어올 때의 마음가짐, 또 주일이나 수요일에 예배하러 들어올 때의 마음가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물론 목사인 저는 당연히 예배가 있는 날이면 미리 옷도 빨고, 구두도 닦고, 세탁소도 들르고, 따로 더 마음을 쏟아 씻기도 합니다. 조금 민망한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만, 저는 수요일과 주일에 입는 옷들이 따로 있고, 심지어 속옷과 손수건도 따로 있습니다. 꼭 그래야지 해서가 아니라, 오랜 습관입니다. 하지만 평소에 예배당에 들어오면서는 별 감흥이 없었습니다. 저희 교회 구조가 워낙 오픈되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솔직히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겁니다. 무슨 이웃집 현관에 들어가듯, 너무나 쉬운 마음, 편안한 마음뿐이었습니다.
사실 개신교 성도들이 가장 약한 게 그런 것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편하고, 너무 가깝습니다. 물론 그래서 더 하나님이 멉니다. 하나님이 왕이시며, 주님이시고, 하나님께서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심을 기억한다면, 그분 앞에 나아갈 때, 말씀 앞에 설 때, 우리의 마음은 분명 지금보다는 더 조심스러워질 것입니다. 왕이나 대통령을 알현하는 접견실에 들어갈 때, 하다못해 사장이나 윗사람의 방을 들어갈 때도, 아마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때보다도 더 조심하고 더 신경 쓸 겁니다. 우리의 태도에 분명 뭔가 문제가 있습니다.
천주교인들은 미사를 드리러 성당에 들어갈 때 항상 성호를 그으며 들어갑니다. 불자들은 두 손을 모으고 합장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냥 당당하고, 아무렇지 않게 들어갑니다. 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는지, 그럼에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기억함으로, 스스로 삼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요즘 성도들, 또 목사들에게는 예배를 ‘드린다’는 개념이 별로 없습니다. 무슨 강의를 들을 때보다도 훨씬 더 마음은 이완되어 있고, 태도는 산만하며, 자세는 흐트러져 있습니다. 설교자의 메시지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별되어 준비된 거룩한 음성임을, 설교자나 듣는 성도나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그러면 그럴수록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로부터는 멀어집니다. 나만 스스로 가깝게 여길 뿐, 하나님은 더 멀어집니다.
본문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거리를 계속 강조합니다. 아무리 여호와께서 그들 가운데 임재하시고, 구름과 불기둥으로 동행하시고, 말씀으로 함께 하셔도, 하나님은 철저하게 경계를 정하시고, 그 경계 이상으로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십니다. 단지 다가오지 말라 말씀하기만 하시는 게 아니라, 넘어오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십니다. 넘어오려는 자는 손을 대지도 말고, 돌이나 화살로 멀리서 죽이라고 하십니다. 그를 제지하기 위해 움직이는 그 사람조차도 그 경계를 넘어설 수 있고, 그래서 함께 죽을까 염려하시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장 깊고 분명한 여호와의 임재 속에서 여호와의 가장 깊은 초월과 구별을 경험하게 됩니다. 가장 가까이에 계신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와 얼마나 멀리 계신 분이심을 경험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바로 그 모순적인 순간에 허락된 것입니다.
그 경계를 지키는 것, 넘어가지 않는 것, 그것이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가장 처음 주신 명령이자 가장 반복적으로 강조된 규례였습니다. 내가 너희를 내게로 인도했다고 말씀하시면서도, 너희는 나에게 언제든 나아올 수 있는 제사장 나라라고 말씀하시면서도, 하나님은 당신과 우리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인지, 하나님의 거룩이 우리의 성결과 얼마나 거리가 먼 거룩인지, 여호와와의 연합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하나님은 우리로 느끼게 하시고, 그것을 지켜내라고 엄히 경고하십니다.
이것은 실제 셋째 날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맞으려고 산기슭으로 올라갔을 때, 다시 하나님은 모세만 산꼭대기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또 말씀하십니다. 다시 내려가서 백성들에게, 또 제사장들에게도 경고하라고. 여호와께서 어떤 분이신가 더 가까이 다가와 보려고 하지 말라고, 많은 사람이 죽게 될 것을 엄히 말씀합니다. 모세가 이번에는 하나님께 응대하지요. 걱정하실 것 없다고, 하나님 말씀하신 대로 이미 다 조치를 해 놓았다고 말합니다(23절). 그러나 하나님은 들은 채도 안 하시며, 다시 말씀합니다. 내려가서 너는 아론과 함께 올라오고, 제사장들이나 백성들은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게 하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결국 모세는 다시 한 번 내려가 반복하여 그 말을 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과의 온전한 연합은 언제나 하나님의 거룩과 초월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과의 연합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를 통한 연합이지, 그냥 서로 편하게 대하는 그런 연합, 그래서 서로 어깨동무하고,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그런 연합이 아닙니다. 이미 묵상한 말씀입니다만, 웃사가 수레에서 떨어질 것을 염려하여 법궤를 잡았다가 죽임을 당하기도 했었지요(삼하 6:6~7). 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끊임없이 의식해야 하고, 우리가 결코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존재임을 인정함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역설적으로 바로 거기 가장 친밀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혹자는 이것이 구약의 이야기이며, 신약으로 넘어오면 달라진다고 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하나님과의 관계도 친밀하고 친구처럼 가까운 그런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 율법이 정한 거룩함의 경계들이 무너지고 찢어졌습니다. 이젠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어, 다른 이들은 잠깐 들어가 보는 것만으로 죽는 성소나 지성소도 없으며, 만지면 큰일 나는 성물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 땅의 모든 피조물 자체에 있어 성과 속의 구별이 사라진 은혜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마음이 더 이상 경외함일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구약의 성도들보다도 훨씬 더 큰 경외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우리는 성소 휘장이 어떻게 찢겨졌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제사장의 중재 없이 우리 각자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어떤 희생의 제물을 사용하셨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모습이 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 복음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과 멀리 있으며, 우리의 삶이 얼마나 하나님의 거룩과 무관한지를 폭로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서 더욱 겸손하게 되며,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이제 우리가 묵상하기 시작한 히브리서에 보면, 본문의 ‘시내 산’과 이른바 ‘시온 산’을 대비하여 말씀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히브리서 12장인데요, [18절부터 29절까지 살펴보면 …, 18.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19.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20.이는 짐승이라도 그 산에 들어가면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령을 그들이 견디지 못함이라 21.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 22.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24.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25.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26.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27.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드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 28.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9.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시내 산은 오늘 율법을 받는 그 산을 일컫는 것이고, 시온 산은 예루살렘이 세워진 그 산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장소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21절에 보면, 바로 오늘 본문의 상황에서, 모세조차도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심히 두렵고 떨렸다고 나옵니다. 계속해서 22절은, “그러나 우리가 이른 곳은 시온 산”이라고, 대조하여 말씀하는데요, 그러나 그 두려움과 떨림이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결론에 해당하는 28절과 29절은, “28.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9.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로 마무리됩니다. 비록 하나님과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온전한 연합의 관계로 회복되었으나,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의 방법은, 경건함과 두려움(= 경외)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소멸시키는 불로 존재하시며, 우리의 모든 우상과 더러움들을 태우시는 거룩한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여전하십니다. 변함이 없으십니다. 여전히 거룩하며, 여전히 사랑이십니다. 구약에서는 엄하고 무서운 분이셨다가 지금은 사랑이신 그런 게 아니라, 그 두 가지가 늘 모순 없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조화를 이룹니다. 하나님의 초월이 강조되던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오늘 우리가 주시는 여호와의 율법을 통해 그 친밀함을 경험했습니다. 다윗을 비롯한 많은 시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기뻐하고, 수많은 노래가 율법 그 자체에 돌려진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경외와 성결의 과정을 통해 주신 말씀, 율법 안에 담긴 하나님의 친밀한 임재를 느끼고, 사모하며, 기뻐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이 강조되던 구약 시대에 온전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친밀함, 하나님의 말씀과의 친밀함으로, 다른 이들과 구별된 믿음을 가졌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친밀함, 하나님의 내주하심이 강조되는 이 신약 시대에 온전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함으로 다른 이들과 구별된 믿음을 가집니다. 다들 하나님이 편하고, 쉽고, 다 용납하고, 그런 신앙에 젖어 정말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지 못할 때,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거룩함을 통해, 더 친밀하고 가깝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가장 깊고 친밀한 은혜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그 뒤에 임하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 저와 여러분이 되십시다. 하나님은 경외를 느끼게 하시고, 그 후에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많은 자연적 현상들, 우레와 빽빽한 구름과 큰 소리와 불과 진동은 결국 모세와 나누는 깊고 세미한 대화의 전조입니다. 정말 친밀한 하나님과의 대화는 그 엄청난 임재 다음에 있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엘리야가 이세벨을 피해 도망가서 바로 오늘 모세가 오른 이 산, 호렙의 어느 굴에 숨어 있을 때,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합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야가 뭐라 뭐라 억울함을 호소하니(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굴 밖으로 나오라고, 거기 서라고 하시더니, 그때 강한 임재로 나타나십니다. 처음엔 바위를 부수는 크고 강한 바람이 불었지만 거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았고, 또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번개)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이 지난 후, 세미한 소리가 있었는데, 바로 그 세미한 소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세미한 소리, 즉 작고 고요한 소리,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자세히 주의하여 귀를 기울여야만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 네,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뜻이 선포되고, 그것을 분별하는 것으로부터 하나님과의 온전한 연합이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 저와 여러분이길 원합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받아 힘껏 순종함으로 더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로 나아가기를, 그래서 모세를 존귀한 자의 영광 가운데 인도하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의 삶 또한 그 복된 삶에 이르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