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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16. 내 백성과 네 백성

2019-01-10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8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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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9 수요 성경 강해 --------------------------------- 출애굽기 8장 16~32절, 내 백성과 네 백성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받으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음질이 양호하지 못함을, 용량으로 인해 설교 도입부와 종결부가 빠져 있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원고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나일 강물이 피가 되는 재앙에 이어, 개구리 재앙, 그리고 이번에는 ‘이’의 재앙입니다. 아론이 지팡이로 땅의 티끌, 먼지를 내려지자 애굽 온 땅의 티끌이 수많은 이가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여러분, ‘이’ 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어린 시절에는 주로 머리카락에 기생하는 소위 ‘머릿니’와 서캐(이의 알)가 있어서 그거 떼어낸다고 학교에서, 또 집에서 적잖이 소동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만, 꼭 머리카락에만 생기는 건 아니고, 사람이나 가축의 몸이나 옷에 기생하는 흡혈곤충을 일컬어 통상 ‘이’라고 합니다. 피를 빠는 곤충이기 때문에 발진(發疹)티푸스 ·회귀열 등의 전염병을 매개하기도 하는데요 …, 사실 본문의 ‘이’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켄’(킨님)은 조금 해석의 범위가 넓은 단어라서 꼭 ‘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성경 난하주에 보면 ‘각다귀 종류로 볼 수 있음’이라고 되어 있는데, 각다귀는 ‘이’와는 또 다른 곤충입니다. 모기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피를 빨지 않고 주로 농작물을 먹이로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티끌이 이가 되어 사람과 가축에 올랐다고 명확히 강조하고 있음을 보면(17b, 18b), 여기서는 각다귀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외경 중 하나인 지혜서에 이 단어와 출애굽기의 이 본문 내용이 등장하는데요, 거기에서는 ‘모기’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들은 타향살이 때에 겪은 온갖 사건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땅이 동물들을 길러내지 않고 ‘모기’들만 낳게 한 일이며 강에는 물고기가 살지 못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개구리들만 우글거리던 일들을 회상하였다.”(19:10) 그러니까 이나 모기처럼, 포유류의 피를 빠는 작은 곤충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아론이 지팡이를 들어 땅의 티끌, 땅의 먼지, 땅의 흙을 내려쳤을 때, 그 티끌들이 모두 ‘이’가 됩니다. 땅을 내려치는 이 행위[나카]는 아주 강한 타격을 의미합니다. 앞에서 나일 강물이 피로 변할 때 지팡이로 나일 강을 내려친 것처럼, 이번에는 땅을 강하게 내려칩니다. 애굽 땅을 다스리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것이자, 애굽이 섬기는 사막의 신이 ‘셋’(Set)인데요, 이에 대한 하나님의 강한 심판의 공격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여기 ‘티끌’로 번역된 단어 ‘아파르’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사용하신 땅의 먼지를 가리키던, 거기서는 ‘땅의 흙’으로 옮겼던, 바로 그 단어입니다. 이런 ‘아파르’가 하나님의 생기가 불어넣어지지 않은, 그저 먼지뿐인 존재로서의 인간, 그럼에도 교만하여 하나님을 떠난 죄인의 모습을 형상화한 표현이라고 본다면, 본문의 재앙은 그런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의미도 갖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생각해보면 놀라운 말씀입니다. 사람이 취함을 입은 흙이 사람의 피, 곧 사람의 생명을 빨아 먹는 곤충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곧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존임을 성경은 분명히 합니다. 애굽이 히브리 민족의 고혈(膏血), 곧 사람의 기름과 피를 빨아먹는 흡혈 동물처럼 학대했던 것을 하나님은 이번에도 잊지 않으십니다. 다른 것이 흡혈귀가 아닙니다. 타인의 고혈을 빨아먹는 모든 눈 먼 인간들이 다 흡혈귀입니다. 자신의 이익과 기득권을 위해 타인의 고혈을 빨아먹는 모든 흡혈 인간들에게 화 있을진저! 특별히 본문이 강조하는 이번 재앙의 가장 큰 특징은, 18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애굽의 요술사들이 흉내 낼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재앙을 멈추지는 못해도 똑같이 흉내는 낼 수 있던 앞의 재앙들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그러자 그들이 바로에게 가서 보고합니다(19절). 이것은 ‘하나님의 권능’[에츠바아 엘로힘 후]이라고 말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된 부분의 난하주를 보면, ‘히, 손가락’이라고 되어 있는데요, ‘에츠바’는 손 전체가 아니라 손가락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자적으로 옮기면, ‘하나님의 손가락’이 됩니다. 왜 굳이 요술사들이 ‘하나님의 손’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손가락’이라고 했을까, 싶은데요, 이 재앙이 아론이 내려친 지팡이로부터 시작된 것을 생각해보면, 아마도 요술사들은 아론의 지팡이를 하나님의 손가락의 형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을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해한 대표적인 구절로는, 우리가 잘 아는 시편 8편의 말씀입니다. 시편 8편은,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우심을 찬송하는, 다윗의 대표적인 시이지요.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는 시구가 시의 처음과 마지막에 등장하여 시를 열고 닫습니다. 이 시의 3절에,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라는 구절, 기억하실 겁니다. 여기서는, 비록 우리말 성경에는 자세히 드러나지 않지만,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의 손가락’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물론 오늘 출애굽기 본문에서처럼,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을 상징한다고 넓게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와 비슷한 신약성경에서의 표현은, 누가복음 11:20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그런 기적을 나타낸다고 이야기를 하니, 그때 주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여기 ‘하나님의 손’이 사실은 ‘하나님의 손가락’입니다. 신약성경에서도 ‘하나님의 손가락’은 ‘하나님의 권능’을 상징합니다(병행 본문, 마태복음 12:28에서는, ‘하나님의 손가락’ 대신 ‘하나님의 영’을 사용). (바알세불이, 말씀드린 대로 귀신의 우두머리인데, ‘바알세불’이라는 히브리어 자체가 ‘파리 떼의 왕’이라는 뜻으로, 이어지는 네 번째 재앙, 파리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그 외에 ‘하나님의 손가락’이라는 표현이 중요하게 등장하는 성경 구절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는 장면에서입니다. 출애굽기 3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 둘을 주시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그것은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18절)이라고 언급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하나님의 손가락이 쓰신 것’이라고 되어 있어서, 마치 실제로 하나님의 손가락이 돌 위에 율법을 새겨 기록하신 것처럼 강조했습니다. 같은 말씀이 신명기에도 기록된 것으로 볼 때(신 9:10), 율법에 대한 성경의 관점이 어떤 것인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가락과 관련된 또 한 가지 중요한 용례는,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 앞으로 끌고 온 장면이 있는 요한복음 8장인데요, 돌로 쳐야 하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주님이 두 번 연거푸 같은 행동을 하시지요. 몸을 굽히시고는,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십니다. 그때도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주님의 손가락과 땅의 먼지가 한 구절 속에 등장하는데요, 땅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기록하는 장면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한 인간을 상징하는 땅의 먼지 위에 하나님의 손가락이 드리워지는, 그래서 그 먼지가 다른 이의 고혈을 빨아먹는 흡혈귀처럼 존재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행위는 아니였을까, 생각해보게 만듭니다. 조금 깊이 생각해봤습니다만, 요술사들이 이것이 하나님의 손가락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결국 이건 우리 손을 떠난 일, 우리의 능력 밖의 일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다는, 일종의 항복의 표현일 겁니다. 물론 바로는 여전히 고집스럽고 완악합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이 눈앞에 보여도, 완악한 마음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편 8편의 저자 다윗은 굳이 그런 기적이 나타나지 않아도 하나님의 손가락을 발견합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일상 곧 하늘과 달과 별에서 하나님의 손가락을 느끼고,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손가락을 경험합니다. 기적이 없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무거워서, 완악해져서, 하나님을 느끼지 못할 따름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요즘 묵상하는 시편 119편의 말씀에서처럼, 하나님의 율법에서, 그것을 기록하신 하나님의 손가락과 그 권능을 느끼고, 그것을 사모합니다. 교만한 자는 어떤 기적 앞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귀신의 왕에게서 힘을 빌려 일으킨 기적이라고 할지언정 말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겸비한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자랑할 수 없고, 내 힘으로 소유할 수 없지만, 그러나 사모할 수 있고, 은혜가 떨어지는 것을 경계할 수는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디 고난이나 재앙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평안한 일상에서, 우리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손가락을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충만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삶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손가락을 인정할 때 우리는 피조물을 다스립니다. 다윗이 시편 8편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며 고백합니다. “4.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반면에 오늘 본문 속의 바로와 애굽은 먼지로부터 나온 ‘이’의 재앙 앞에조차 속수무책입니다. 그것이 사람과 가축 위로 오르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섬기는 삶일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는 능력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삶일 때, 비로소 내 삶이 정돈되고, 다스리는 자로 바로 섭니다. 출애굽기가 강조하는 구원은, 계속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향한 구원’입니다. 자기 자신을 섬기는 삶에서, 자기 자신의 탐욕을 섬기는 삶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으로의 변화가 곧 구원입니다. 그저 예배에 참석하고 교회를 다니는 것이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하나님이 내 삶의 주가 되셔서, 그의 말씀이 내 삶을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양립할 때, 힘껏 그분의 뜻 앞에 순종할 수 있어야 비로소 그 삶이 예배입니다. 내 유익과 기쁨보다 주님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기쁨을 위해 내 뜻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손가락을 경험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이 그 믿음에 이르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세 번째 재앙인 ‘이’의 재앙의 결말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기록되지 않은 채 곧장 네 번째 재앙으로 넘어갑니다. 아마도 추측건대, 그러한 상태가 유지되는 가운데 연이어 네 번째 재앙이 애굽을 덮친 것으로 보입니다. 네 번째 재앙은 파리 떼가 애굽 전역을 뒤덮는 것입니다. 사실 ‘파리’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이것이 정확히 우리가 아는 그 파리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단순히 ‘해충’ 정도로 번역을 해도 무방한 그런 표현이 이 ‘아로브’라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가축의 피부 위에서 괴롭히는 것이 앞의 ‘이’의 재앙이었다면, 이번에는 사람과 가축이 먹어야 할 것을 더럽히며 공격하는 재앙인 셈입니다.  여기서는 앞에서 계속 등장하던 요술사들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바로 앞의 재앙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똑같이 행하지 못한 결과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 앞에 한풀 꺾였거나, 실망한 바로가 그들을 더 이상 소환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번 재앙에서 부재한 사람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아론입니다. 파리 재앙이 시작된 이후에, 즉 25절 이후에는 바로가 모세와 아론 두 사람을 모두 부르지만, 재앙이 시작되는 시점에는 모세 혼자 바로를 상대합니다. 다시 말해 이 네 번째 재앙에서는 요술사와 아론 없이, 바로와 모세가 직접 대결하는 양상입니다. 대리자 없이 주군(主君) 사이의 싸움인 셈입니다.  한편 이번 재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23절입니다.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를 구별하리니”라는 표현인데요, 파리 떼가 애굽 온 지역을 덮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하고 있는 고센 땅은 예외였던 겁니다. 사실 고센 땅은 애굽에서 가장 물이 많은 지역으로, 그래서 벌레가 더 많아야 하는 곳이지만, 이 재앙에서 자유합니다. 이러한 재앙이 자연적인 재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재앙과 간섭이라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나는 것이지요. 물론 이것이 세상이 겪는 고난과 자연적인 재해를 하나님 믿는 백성들만 피해간다는 뜻은 아닙니다. 세상이 당하는 고통을 우리도 당합니다. 그러나 교만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으로서의 재앙은 다른 문제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도, 애굽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보호하심과 건지심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얼마나 많은 경우 자연적인 재해들이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인지 우리는 다 구별할 수는 없지만, 또 구별하려 애쓸 필요도 없지만, 하나님은 분명한 입장이십니다.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 18:25)라는 아브라함의 항변에 응답하시는 분이심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네 번째 재앙에서, ‘내 백성’이라는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20절부터 23절까지 계속해서 ‘내 백성’이라고 언급하시고, 애굽 사람들을 향해서는 ‘네(바로의) 백성’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이 둘을 명확하게 구별해내십니다. 네, 하나님은 지금 출애굽을 통해, 당신을 예배하는 당신의 백성을 구별해내시려 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애굽 온 땅을, 애굽의 바로와 신하와 백성과 집들, 그들이 사는 땅(21절)을 다스리십니다. 애굽의 모든 것 가운데 계시며, 그것을 통치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하나님은 그저 능력 있는 어떤 하나의 신으로 나타나실 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며, 하나님은 그들의 주가 아닙니다. 요술사들이 ‘하나님의 손가락’이라고 말할 때, 그 ‘하나님’은 ‘엘로힘’, 곧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보통명사에 불과합니다. 때로는 이방의 신들도 이 이름으로 불렸고, 천사들도 ‘엘로힘’으로 기록되기도 합니다. 심지어 고급 관리를 일컫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시편 8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손가락을 언급하며, 하나님을 ‘여호와’라 부릅니다. ‘야훼’는 ‘엘로힘’과 다릅니다. 여호와는 고유명사입니다. 엘로힘이 하나님의 백성과 바로의 백성을 구별하지 않는, 모든 세계의 하나님이심을 드러낸다면, 여호와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구별하는 이름입니다. 말 그대로 언약을 통해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드러내실 때 ‘여호와’라는 이름이 선포됩니다. 여호와의 자기 백성은 그를 섬기는 자로 실존합니다. 예배로 섬기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며 섬깁니다. 그럴 때 비로소 엘로힘은 우리에게 여호와 하나님, 나의 주가 됩니다. ‘여호와’는 ‘주’라는 말과 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여호와’로 나타나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주로 영접합니다. 나와 하나님이 자기 백성, 자기 하나님인지, 아니면 그저 엘로힘인지는, 우리가 누구를 섬기는 자인지에 따라 구별되며, 그것은 생각보다 아주 명확한 구별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먼저 택하시고, 변화시켜 가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을 먼저 ‘내 백성’이라고 선언하신 후, 그들을 이끌고 나가셔서 그들을 자기 백성답게 가르치시고 인도하십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백성은 아닙니다. 그러나 완전한 상태가 아닐지라도 그 방향의 삶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그저 그로 인하여 복 받고 천국 가는 것과 같으면, 그건 그냥 종교일 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거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를 나의 ‘주’로 인정한다는 것이며, 그를 섬기고 그의 말씀을 따르는 일을 내 삶의 목적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종교와 구별된 신앙, 우상과 구별된 신앙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지금 그 길 위에 있음을 늘 잊지 마십시다. 하나님을 주로 섬기며 사는 신앙, 하나님을 여호와 나의 주로 고백하며,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사는 신앙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갑니다. 그것이 성화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우리의 성숙이 곧 성화입니다. 헛된 신 우상은 아무리 섬겨도 인간의 인격적인 성숙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인격은 인격적인 존재로만 성숙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주로 섬기는 신앙인지 아닌지는, 결국 우리의 삶이 증언할 것입니다. 이와 파리의 재앙으로 인해 바로가 정신이 없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불러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되, 그걸 지금 고센 땅, 애굽 안에서 하라고 말합니다. 바로의 대안. 25절, ‘이 땅’에서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주’는 바꾸지 말라는 뜻입니다. 애굽 사람으로서, 애굽의 종으로서, 애굽의 가치관과 삶의 방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예배만 드려라, 하는 것입니다. 그냥 종교로서 하나님을 믿고 살아라, 여러 신들 중 하나로서 하나님을 ‘겸하며’ 섬기며 살아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삶의 자리는 바뀌지 않으면서 그냥 예배만 드리는, 단지 교회만 오가는 사람으로서 사는 것입니다. 모세의 그럴 수 없다고 항변합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행하는 희생의 제사를 대단히 싫어한다고, 그래서 자신들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애굽이 신성시 하는 황소나 숫양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문제를 언급한 것일 겁니다. 26절에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에서, ‘미워하다’라는 동사 ‘토아바트’는, 창세기(46:34)에서 요셉이 아버지 야곱과 자신의 형들에게, 바로 앞에 가서 할 말을 가르쳐주는 대목에서 나왔던 단어입니다. 바로에게 우리가 목자라는 직업을 가졌다고 말하라고, 그러면 애굽 사람들이 목축을 가증히 여기기 때문에, 가족이 다 고센 땅에 따로 살게 될 거라고 했던 말 속에서, ‘가증히 여기다’라는 표현이 이 단어 ‘토아바트’입니다. 그러자 바로가 새로운 제안을 제시합니다. 애굽 밖으로 나가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고 이야기합니다(28절). 언제든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정도로만 나갔다가 오라고 합니다. 애굽 땅에서 예배하라는 말과 사실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바로의 이러한 말은 앞으로 광야로 나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생각나게 하는 일종의 예언 같습니다. 광야에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얼마나 자주 이야기하던 그들이던가요?     아울러 바로는 이번에도 자기 자신을 위해 간구해달라고 모세에게 부탁합니다. 파리 떼가 사라지도록 기도해달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기도하겠다고, 내일 파리 떼가 떠나갈 거라고 약속하며, 한 가지 중요한 단서를 답니다. 29절 후반절인데, “바로는 이 백성을 보내어 여호와께서 제사를 드리는 일에 다시 거짓을 행하지 마소서.”라고 이야기합니다. 한 입으로 두 말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바로는 약속을 깨뜨립니다. 32절 말씀처럼, 그는 파기 떼가 제거되자, 곧장 마음을 바꾸어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지 않습니다. 마음을 바꾸고, 말을 바꾼다는 것, 식언하는 것은 교만한 인간의 가장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어제 묵상한 시편 119편 말씀에서는, 그걸 ‘두 마음을 품는 자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double-minded, 119:113).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민 23:19,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개역한글)] 식언한다는 것, 그것은 바로 자신이 신이 아님을, 참 하나님과 무관함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 두 마음을 품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전심으로 하나님을 주로 인정하는 삶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사실 출애굽기의 열 가지 재앙을 기록한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찾거나 삶의 좋은 인사이트(insight)를 얻고자 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 그 자체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좋은 교훈을 얻기 위한다면 굳이 성경일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종교의 경전도 있고, 그냥 좋은 책들도 많습니다. 성경의 고유함은 다른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시고, 그 말씀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로서, 우리와 관계 맺으시는 하나님의 현존이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을 때 중요한 건, 어떤 교훈을 얻느냐가 아닙니다. ‘나’를 위한 말씀을 발견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발견하는 것이 더 우선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에도 우리 자신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나에게 과연 유익이 되는가, 나는 여기서 무엇을 얻을 수 있나, 하는 관점입니다. 그러나 이런 묵상이 반복되면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교제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성경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주기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먼저 알려주는 책이며,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하는 책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를 위한 교훈의 목적으로 성경을 대한다면, 결국 하나님 그 자체보다 우리 자신의 감정이나 필요에 예민한 사람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모습은 왜곡되고 일그러지겠지요. 예배와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은혜를 강조합니다. 필요 이상으로 우리의 필요와 관심, 그리고 우리의 만족에 집중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우리가 실제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나 기분이 은혜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자체, 그리고 그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드러나시는 것,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증하는 것이 더 근본적인 은혜입니다. 우리의 필요와 만족이 목적이 되면 그것은 이미 예배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예배를 반복할 때, 우리의 신앙은 일그러집니다. 성경을 읽어서 우리가 유익을 얻고 교훈을 얻는 것으로 우리가 세상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성경을 그런 목적으로 읽는 사람들이 세상에도 많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해가는 과정,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는 과정 자체가 우리에게는 가장 큰 은혜이며, 성도의 가장 존귀한 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세상과 우리를 구별하는, 하나님의 백성과 바로의 백성을 구별하는 가장 본질적인 차이임을, 오늘 본문은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바로의 백성과 구별하신다는 메시지입니다. 재앙이 바로의 백성들에게만 내리는 것은 하나의 과정이요,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 구별의 핵심은 예배이며,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의 모습 그 자체입니다. 그 구별, 그 구원을 향해 지금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재아에서 구별해내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어디 쯤 와 있는지 잘 생각해봅시다. 바로의 백성들에게는 있는 재앙이 우리에게 없음으로 인하여 누리는 잠깐의 구별을 원하는 신앙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와 교훈을 얻는 신앙인지, 아니면 정말로 하나님을 여호와 나의 주로 인정하고 그를 예배하며, 그분의 말씀을 사모함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알아가며, 결국 그분을 닮아가는 과정에서 오는 영원한 구별을 경험하고 있는지, 오늘 저와 여러분 스스로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분별하는 이 시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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