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2018년 10월 28일 주일 설교
2018-10-28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7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81028 오순절 스물세 번째 주일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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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3:1~7,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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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61) 본문 1절의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으로 아름답게 고백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본문은 로마서의 흐름에 있어서, 다소 갑작스럽고 좀 당황스러운 말씀이지요? 얼핏 이런 이야기가 왜 여기 로마서에 있어야 하나 싶기도 한데요, 실은 이 본문이야말로,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에게 어쩌면 가장 중요한 말씀 중 하나일 것입니다. 왜 그런지, 그 이면에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는지, 오늘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우선 본문이 아닌 성경의 다른 이야기를 먼저 좀 해야 하겠습니다.
하루는 대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시험하여 올무에 빠뜨리기 위해 한 가지 어려운 질문을 만들어 가지고 와서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가이사에게, 그러니까 로마의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게 옳으냐, 옳지 않으냐, 하는 거였습니다. 어려운 질문은 아닌데, 참 곤란한 질문이지요. 만약 바치라고 한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유대 백성들이 분노할 것이고, 만약 바치지 말라고 한다면 법에 걸려 로마가 분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하신 유명한 답변이 무엇이었습니까? 네, 먼저 예수님은 그렇게 올무를 만들어 예수님을 시험하는 그들의 악함을 책망하시고 … 이어 갑자기 세금으로 내는 화폐를 가져오라고 하시고는, 가져온 데나리온 은화 하나를 가리켜 반문하십니다. “여기 있는 은화에 그려진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당시 로마의 화폐에는 황제의 얼굴과 그의 글이 새겨져 있었지요. 그래서 그들이, 여기 새겨진 것이 가이사의 것이라고 말하자 주님은, “(그렇다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매우 놀라며 물러가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말에 왜 예수님의 대적자들은 아무 말 않고 물러서게 된 걸까요? …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황제에게 의무를 다하는 것이 마치 양자택일의 문제인 것처럼 접근을 했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친다면, 그건 결국 그들을 다스리는 존재가 하나님이 아닌 황제라는 걸 인정하는 셈이 되고, 그건 로마가 늘 주장해온 ‘황제 숭배’에 굴복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인데요,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문제를 가지고 와서는, 우리가 섬기는 자가 황제냐 하나님이냐, 이렇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가져 온 은화에 초점을 맞춰 그들의 전제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십니다. 너희가 사용하고 있는 동전, 그게 과연 누구의 동전인지를 먼저 물으시지요. 이 질문이 중요한데요, 주님의 이 질문 속에는, 지금 너희가 사용하는 화폐에 뭐가 그려져 있느냐, 외에도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다시 말해 너희가 누구의 화폐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느냐, 너희의 삶과 경제 활동이 누구의 화폐로, 누가 발행한 화폐로, 누구의 통치와 권세 아래에서 이루어지고 있느냐를 물으시는 겁니다. 그들이 지금 로마의 화폐, 즉 황제가 만든 화폐를 소유하고 있고, 그걸 예수님께 가지고 왔다면, 이미 그들의 경제 활동 전부가 로마 황제의 보호와 통치 안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이미 인정하는 셈인데, 이제 와서 황제에게 세금을 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를 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만약 굳이 그런 질문을 하려고 한다면, 그 화폐를 사용하지도 말아야 하고, 그 화폐를 통한 경제 활동 자체를 부정해야 하는 것이지요. 바코드가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성경을 잘못 이해한 사람들이 이건 사탄의 화폐라고, 성경이 말하는 666이 바로 이것이라고, 나중에 그 바코드가 우리 몸속에 이식이 되고, 이식한 사람만이 물건을 사고팔 수 있게 된다고 …, 그러니 절대 바코드를 사용하면 안 된다고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계셨습니다만 …, 이미 로마 화폐를 소유하고, 사용하면서, 로마 황제의 통치, 곧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고 하는 거대한 통치의 틀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평화롭고 부요한 의식주를 향유하고 있다면, 당연히 황제가 요구하는 세금의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는 취지인 것입니다. 적대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실 때 늘 그렇듯 예수님은 이번에도 그들의 질문의 토대를 건드려 질문 자체를 문제 삼으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다른 본문은, 예수님과 빌라도 총독과의 대화인데요, 예수님께서 체포되어 빌라도에게 끌려 가셨을 때,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서 흔들리던 빌라도가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너는 어디로부터냐?”(Where are You from?) 이게 “너 국적이 어디냐?” 하는 질문은 아니겠지요? “도대체 너는 어디에서 온 사람이냐? 하늘이냐, 이 세상이냐? 다시 말해, 너의 권세가 어디에 근거하느냐? 너는 너 자신을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걸 묻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어떻게 답하셨습니까?) 네, (정답입니다. 지금처럼)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아마도 짜증을 내며) 이야기하지요. “왜 (내가 묻는데) 대답을 하지 않느냐? 너를 풀어줄 권한도,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다 내게 있다는 걸 모르느냐?”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위에서 (그 권세를)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당신에겐)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을 것이다.” … 빌라도로서도, 우리로서도 대단히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가 가진 권세를 주신 이가 따로 계시며, 당신께서는 바로 그 권세를 주신 이가 계신 곳, 그분으로부터 오셨다는 말씀을 하시는 거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은, 그렇게 아들을 못 박아 죽이심으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이고, 지금 빌라도 당신은 그 목적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일 따름이라고, 그러므로 네가 나를 놓을 권세가 있는 것처럼 그리 말하는 건 지나친 것이라고 대답하신 겁니다.
여러분, 제가 본문을 설명하기 전에, 왜 이 두 에피소드들을 먼저 여러분께 말씀드리는지, 아마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예수님과 그의 뒤를 좇는 저와 여러분들이, 권세가 없어서, 힘이 없어서 세상의 권력에 복종하는 게 아니라, 정반대로 권세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있기에, 세상의 권력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사도는 우리가 그래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요.
본문은 자칫하면 오해하기가 참 쉬운 그런 말씀입니다. 마치 이 땅의 모든 정치권력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마치 어떤 통치 체제에도 다 복종하고, 가이사의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것도 가이사에게 모두 바쳐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되기가 너무나 쉽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역사 속 많은 억압적인 권력들, 나치즘이나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자들과 인종차별주의자들, 그 외에도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권력을 취하고 유지하려 했던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을 아전인수 격으로 가져와 사람들을 굴종시켰고, 또한 친일 기독교인들처럼, 수많은 신앙인들이 이 말씀을 왜곡하여 자신의 변절을 합리화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함이 아님을 우리는 앞선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오늘 사도가 1절에서 강조하시는 것처럼,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대전제로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의 대전제이기도 합니다. 구약의 가장 오래된 말씀으로부터 시작하여 신약 마지막 말씀에 이르기까지, 그 권세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우호적이냐, 우호적이지 않으냐와 상관없이, 이 땅의 모든 권세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강조합니다. 애굽의 바로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도, 페르시아의 고레스도, 로마의 가이사도, 하나님의 백성을 통치했던 모든 이방 권세가 모두 하나님의 뜻과 섭리 안에 있음을 성경은 분명히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레미야서를 묵상하면서 확인하고 있는 바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권세에 순종하기 위해 사람의 권세를 거스르는 것 또한 당연한 성도의 의무입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 5:29)고 한 베드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권세와 권력에 맞서는 것 또한 성도의 자유이자 의무인 것이지요.
바로가 히브리인 산파들에게 갓 난 사내아이들을 죽이라고 명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그 명령에 순종하기를 거부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모든 신하들을 향해 금 신상에 엎드려 절하라는 포고를 내렸을 때도,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순종하기를 거부하고 화형을 받았습니다. 다리오 왕이 삼십 일 동안 아무도 자기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고 칙령을 내렸을 때도, 다니엘은 순종하기를 거부하고 기도한 후 맹수의 우리에 던져졌습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의 이름으로 전파하는 것을 금했을 때도, 사도들은 거기에 순종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의 목적은, 정부에 대한 저항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이 두 가지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할 일들도 얼마든지 생길 수 있습니다. ‘(당시의 상황과는 달리) 로마의 경제적 수탈이 극심해진다면 과연 어디까지 이스라엘은 그 수탈을 받아들이고 또 어디서부터 수탈을 거부해야 하는가,’ 또 ‘로마나 제국주의의 통치에 대하여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고, 언제부터 저항과 봉기를 시작해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들은 결코 간단하게 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지금 그런 어려운 예외적인 문제들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한 동기와 목적이라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우리의 일상을 보호하고, 경제생활을 가능하게 만들고, 선악을 판단하여 심판하는, 이 땅의 통치 권력에 대하여, 양심과 신앙에 따라 적극적으로 복종하여, 세상의 본이 되는 삶을 살라는, 지극히 일반론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권세가 없어서 복종하는 게 아니라, 그 권세를 다스리는 권세가 아버지 하나님께 있음을 믿기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의 어떤 말씀이든지 그 말씀이 기록된 시대의 맥락과 상황을 무시할 수 없고, 또 그 맥락 속에서 해석을 해야 하는데요 … 본문 역시, 당시의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에 먼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들 중 상당수가 매우 극단적이고 호전적인 이스라엘 독립 투쟁 세력에 속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 베드로가 ‘말고’라는 대제사장의 종의 오른쪽 귀를 내리쳐 자른 장면에서처럼,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순간까지 허리에 칼을 차고 다니며, 예수님의 혁명적 메시아 사역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류적인 입장이었습니다.
비록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그와 같은 방식의 투쟁과 해방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의 구원 사역이 될 수 없음이 명명백백히 드러났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여전히 반로마적인 투쟁 기류가 팽배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사건건 로마에 문제를 제기했고, 대표적으로 조세에 대한 저항도 강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역사상 그 어떤 다른 지배 제국보다 관대한 통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분명히 재확인해야 했습니다. 여전히 칼을 차고 다니며, 가이사의 것을 어찌할 것인지를 질문하며, 그렇게 유대를 정치적으로 독립시키기 위해서 사도들과 성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님을, 하나님은 여전히 십자가의 방법으로,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으로 이 땅을 구원하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자유케 하시고 계심을, 다시금 바울은 강조해야 했습니다. 바로 그 제국의 중심인 로마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말입니다.
또한 우리는 오늘 본문이 로마서의 어떤 전체적인 흐름 속에 있는지를 한 번 더 생각해봄으로써 바울이 왜 이 문제를 이 대목에서 제기하고 있는지를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은 결국 12장부터 시작된 ‘구원받은 성도들의 예배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의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서의 삶을 살고자 할 때, 그리고 그 삶의 절정이었던 12장 마지막 부분과 지난주 말씀, 즉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과 본문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아들, 딸로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악을 악으로 갚으며, 세상의 질서도 외면해버리라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그저 유별난 사람들, 혹은 기이한 사람들, 그것이 바로 당시 유대인들을 향한 로마의 시각이었던 건데요, 그렇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자신들만이 진리를 알고 있으며, 의인이며, 그래서 자신들만의 질서와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듯, 그렇게 외면 받고 낙인찍히는 삶을 살면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왜요? 그렇게 해서는 결코 성도의 ‘삶’, ‘예배로서의 삶’을 살아낼 수 없고, 세상 속에 하나님나라가 천국이 침노하게 할 수도 없으며, 세상 사람들의 본이 되어, 그들을 예수께로 인도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어떻게 시작된 종교입니까? 한 유대인에 의해, 그것도 십자가에서 사형당한 한 유대인에 의해 시작된 종교가 아닙니까? 아무리 노력을 해도 로마로부터 낙인찍히지 않는 게 더 어려운 현실이었던 겁니다. 그러니 더더욱 오해를 불러일으킬 일을 만들어선 안 되는 것이지요.
이 땅에 존재하는 어떤 권력도 완전할 수 없습니다. 역사 속에 있던 모든 권력은 언제나 한계를 가집니다. 언제나 억압과 보복, 부패로부터 완전히 자유하지 못합니다. 민주적 저항을 통해 탄생한 정권도 자유롭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는 장로나 목사가 대통령의 자리에 올라도 여전히 권력은 권력일 따름입니다. 어째서 예수님께서 3년간의 사역 동안, 지배 권력이던 로마 정치인이나 로마의 병사들에게는 아무런 말씀도 안 하시고, 그토록 집요하게 유대 종교지도자들만 쥐 잡듯 하셨는지, 요즘 속된 말로 한 놈만 패셨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의 권력 그 자체를 바꾸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고, 새로운 권력이 들어서도 그 한계는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 권력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자포자기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더 적극적인 태도를 요구합니다. 그 권력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기에, 저와 여러분의 문제임을 인식하고, 권력이 행하고 있는 긍정적인 역할을 무시하지 말자는 것이며, 그 권력이 바르게 갈 수 있도록 힘쓰자는 뜻이며, 그 권력과 법의 틀 안에서 최대한 세상의 본이 되는 양심적인 시민이 되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삶의 토대를 만들자는 뜻입니다.
다만 성도는 법과 제도, 그리고 권력을 가진 이들을 두려워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기초입니다. 거기 하나님의 통치가 개입되어 있다는 믿음 안에서 말입니다. 그 두려움과 존경이야말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권세와 법을 경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빽 운운하며 권력을, 정치인들을 아주 만만하게 봅니다. 잘 존경하지도 않습니다. 마치 교회가 법 위에라도 있는 것처럼 교만하게 행동합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는 분명히 말합니다.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고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합니다.
바울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 로마에 직접 가는 과정 속에서 이 부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더욱 명확하게 깨닫게 됩니다. 바울이 그토록 가고 싶어 하던 로마, 그러나 가는 길이 매번 막혔던 로마에 바울이 어떤 과정을 통해 도착하게 됩니까? 자신의 자유와 힘으로가 아니라, 로마 병사들과 정치인들을 통해서 가게 됩니다. 정작 유대인들의 공격으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던 바울을, 하나님은 로마의 권력을 통해 보호하셔서 안전하게 로마에 이르게 하십니다.
만약 바울이 로마의 시민이 아니었다면, 만약 그가 로마에 책잡힐 일이 있었다면, 당시의 법과 규칙을 어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면, 결코 상상할 수 없는 로마의 호의였습니다. 세상 법을 어기며, 세금을 떼먹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 권력과 법 앞에 거리낌을 가져서는 절대로 하나님나라를 이룰 수 없습니다. 누구보다 투명하고 떳떳하며, 그 누구보다 스스로의 삶에 거리낌이 없어야만 우리는 비로소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든, 하나님나라를 이루든 할 수 있는 겁니다.
국가의 일을 하기 위해서 장관이 되고 대법관이 되고 총리가 되려면 청문회를 합니다. 나름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다고 하는 분들의 삶도, 그렇게 밝은 빛 앞에 자신의 삶이 낱낱이 드러나면, 차마 얼굴을 들 수 없는 수치스러운 모습들이 다 밝혀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나라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종들은 어떻겠습니까? 복음을 전하고,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는 사람들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청문회보다 훨씬 더 높은 기준으로, 세상의 법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삶을 정돈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째서 이 나라에서 기독교인들의 목소리가 영향력이 없어진 것입니까? 기독교인이나 세상 사람들이나 다 거기서 거기, 소위 도찐개찐인 걸 세상이 다 아는 겁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에게 이래라 저래라, 구원이니 복음이니 말을 할 수가 없게 된 겁니다. 돈을 아끼고 벌 수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법을 어기고, 편법을 사용하며, 세금을 피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런 식으로 똑같이 살면서 복음이 증거 될 리가 없고, 그런 식으로 하나님나라가 세워질 수 없는 겁니다.
정말 내가 주님의 자녀이고, 세상에서도 주님의 일을 주의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자신이 복음 전도자요, 예배자요, 빛과 소금이요, 내가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면, 그는 세상의 법적 테두리 안에서도 절대 흠이 발견돼서는 안 됩니다. 칭찬은 받지 못할망정, 범죄자이면 안 됩니다. 세금 탈루자이면 안 됩니다.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갔다가 거기서 주님을 만나고 회개하여 나중에 출소하고 난 후 신학교를 졸업하여 훗날 목사가 되고, 부흥사가 되는 그런 분들 많습니다. 목사가 실정법을 어기고 감옥에 가고 엄청난 벌금을 물면서도 버젓이 주의 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결코 합당치 않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교회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국법에 의하여 금고 이상의 처벌(양심범은 제외)을 받은 사실이 있으면 목사가 될 수 없습니다(헌법 정치 제5장 제26조). 이건 목사만이 아닙니다. 나라의 일꾼이라는 공무원도 마찬가지에요.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으면, 집행유예라 할지라도 그만둬야 합니다. 나랏일도 못해요. 얼마 전에는 음주운전으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사립대 한 의대 교수가 면직되기도 했습니다.
성경 어디에 세상 법에서의 범죄자가 회개했다고 나중에 출소하여 사도가 되고, 장로가 되고 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까? 그런 일은 없습니다. 회개하고 돌이켰다면 그냥 평신도로 교회를 섬기며 살면 족합니다. 회개했으니 다 문제가 없고, 더 나아가 마치 대단한 범죄자의 회개가 더 큰 은혜요, 더 온전한 사역의 근거인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건 성경을 잘못 본 것입니다.
교회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실정법을 어긴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법을 어긴다고 함부로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믿음의 선조들은 손해를 감수하며 법을 지키고, 그 법에 의해 희생양이 됐습니다. 수많은 순교자들은, 순교하는 그 순간까지도, 그 나라와 민족의 법대로, 고난을 감수하며, 그렇게 신앙을 지켰고, 그 테두리 안에서 교회를 보호할 수 있는 방도를 강구했습니다.
교회와 성도는 권력에 저항하기 전에 먼저 두려워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신앙적 양심에 따라 복종해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사역자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들임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십니다. 모든 세상의 권력을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일을 지금도 열심히 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이 땅의 권세들을 정하시고 사용하심으로써,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하나님나라를 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행하고 계시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 그것이 저와 여러분의 신앙입니다. 그 하나님의 일을 신뢰하는 것이, 이 땅을 정의롭게 하고 변화시키고 하는 모든 우리의 행위와 노력보다 먼저라는 것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인 겁니다.
사랑하는 고백교회 성도 여러분, 작은 교통 법규부터, 세금을 내는 문제, 여러 기득권이나 이익과 관련된 편법적 상황에 이르기까지, 여러분 성도로서 더욱 깨끗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가십시오. 고백교회가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있어서도, 결코 위법이나 편법을 동원하지 않도록, 여러분이 지켜주십시오.
누가 봐도 흠이 없는 그런 삶의 모습으로 바로 설 수 있을 때 그래서 세상의 칭찬을 듣는 삶일 때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성도가 훨씬 더 어려운 삶의 자리에 있으며 감내해야 할 불편과 손해와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국가와 여러분이 다니는 직장을 위해서도 늘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묵상하고 있는 예레미야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멸망시킨 바벨론을 위해서도 기도하라 말씀합니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렘 29:7) 네, 성도는 세상을 정죄하고 비판하기보다 먼저 두려워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우리 신앙의 모든 진정성이 출발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고백교회 성도 여러분, 또 우리 고백교회가, 하나님이 이 땅의 모든 권세를 주관하시고 다스리심이심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종들답게,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는 살아나,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자유가 부디 죄의 도구가 아닌 복음의 기회를 위해 사용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