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선으로 악을 이기라' 2018년 10월 21일 주일 설교
2018-10-21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5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81021 오순절 스물두 번째 주일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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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14~21, 선으로 악을 이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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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60) 본문 21절의 ‘선으로 악을 이기라’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으로 아름답게 고백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저는 요즘 들어 중고등학생들이 빨리 방학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소린가 하실 텐데 …, 아시는 것처럼 저희 교회와 사택이 여러 학교들로 둘러 싸여 있는 위치다 보니, 아침마다 이 앞 2차선도로들이 통학 차량들로 인해 정신이 없어집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자기 차로 학교 앞까지 태워다주고 가시는 통에, 가뜩이나 좁은 도로가 정말 난리도 아닙니다. 그래서 저희 출근길도 덩달아 전쟁터 같아집니다.
저 앞쪽의 큰 도로까지만 타고 와서, 큰 길에서 아이들을 내려주시면 훨씬 괜찮겠는데, 부모들은 기어이 이 안쪽 도로까지 들어오셔서는, 학교 바로 앞에서 아이를 내려줍니다. 내려주자마자 거기서 불법 유턴을 하고, 그러면서 오가는 차들이 꽉 막혀 도로가 엉망이 됩니다. 제가 아침에 아내를 역까지 데려다주고 교회로 들어오면, 하루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기운이 다 빠져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속으로는 스트레스로 부글부글하면서 말이지요. … 그런데 생각해보면, 저 역시도 그렇게 아내를 데려다주기 위해 도로에 차 한 대를 보탠 것이니, 사실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다 사람은 거기서 거기이고, 그렇게 서로 불편과 미움을 주고받으며 사나 봅니다. 모두 철저하게 내 입장, 내 중심에서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저의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 동안, 제게 신앙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은, 당시 저희 교회 부목사님이자, 중고등부 담당 교역자이셨던 박종현 목사님이라는 분이었습니다. 평범한 옆집 아저씨 같은 외모에, 인자하고 너그러운 품성을 가진, 참 좋은 분이셨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이 목사님의 말씀 듣는 걸 좋아했는데요, 이 분의 메시지는 주로 성경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쉽게 풀어 설명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흔한 예화도 거의 없었고, 어디서 들어본 적 없는 대단한 통찰, 이런 것들과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저 늘상 먹는 흰 쌀밥처럼, 또 아플 때 먹는 흰죽처럼, 성경을 곱게 갈고 정성껏 끓여 낸 참 담백한 메시지였습니다. 한주 내내 양념 가득한 세상 이야기 속에 살다 주일이면 그 담백한 말씀을 먹고 힘을 냈습니다. 한 그릇 먹고 나면 속이 참 개운하고 편해졌고, 다른 지식과 진리에 대한 식욕도 생겼습니다. 어릴 적 그렇게 좋은 말씀을 듣고 행복하게 배울 수 있었던 게 참 저에겐 큰 축복이었구나, 싶습니다.
평생 기억에 남는 그분의 말씀 중에, 학교 가서 친구들과의 사이에서, 절대로 보복하여 때리지 말라는 주제의 말씀이 있습니다.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 목사님께서 비슷한 주제의 설교를 아주 자주 하곤 하셨기 때문인데요,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마 5:39)는 예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살아내야 한다고, 친구가 때리면 그냥 맞으라고, 같이 맞붙어 주먹질하지 말고 그냥 맞고 오라고, 때리려고 하면 열심히 도망가라고, 그것이 우리가 주님의 자녀이고, 하나님 백성인 증거라고 힘을 주며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목사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도 늘 그렇게 가르치셨는데요, 자녀들이 학교에서 맞고 오면 정말 크게 칭찬을 하셨습니다. 가끔씩 사람들이 둘러앉아 자기 자식 자랑할 기회가 생기면 그 목사님은 꼭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애들은 공부는 잘 못하는데, 그래도 학교 가서 늘 맞고 온다고. 키도 크고 힘도 세지만 절대로 똑같이 싸우고 오지 않고, 그냥 맞아주고 오는 착한 아이들이라고, 당시 우리로서는 잘 이해가 안 되는 자식 자랑 이야기를 자주 하셨습니다.
물론 목사님이 계시지 않을 때, 사람들이 했던 말도 기억이 납니다. ‘저렇게 자식을 키우면 애들이 기가 죽어서 안 된다’고 수군거리던 사람들 …, 그러거나 말거나 목사님은 때마다 같은 말씀을 반복했습니다. 사람들 말처럼 그분의 자녀들이 기가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저는 목사님이 풀 죽어 계실 때를 자주 본 것 같습니다. 담임목사님과 성도들에게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다, 결국 목회를 그만 두시고, 지금은 작은 회사를 다니신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딸로 세상을 사는 건 세상의 인정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는 걸, 저는 어릴 적 그분을 통해 분명히 알게 됐습니다.
2015년 가을이었을 겁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끔찍한 테러가 발생했습니다. 파리의 도심 여러 공연장과 축구 경기장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사상 최악의 자살 폭탄 테러 및 대량 총격이 발생했고, 최소 130명이 사망하는 참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다음날 이슬람국가(IS)는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발표를 했는데요 …,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앙투안 레이리스라는 남자 역시 이 테러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게 됩니다. 17개월 된 아들 멜빌에게는 엄마를 잃은 날이기도 했습니다.
아내를 잃은 그 슬픔과 분노의 시간을 견디며 기록한 몇 편의 글이 나중에 하나의 책으로 엮어져 나왔는데요, ‘당신들은 나의 증오를 갖지 못할 것이다’라는 제목의 책으로, 프랑스인들은 물론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그 책에서 앙투안은, 아내를 살해한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금요일 저녁 당신들은 특별한 한 사람, 내 필생의 사랑이자 내 아들의 어머니인 한 여인의 생명을 도둑질했다. … 그렇지만 당신들은 나의 증오를 갖지 못할 것이다. 나는 당신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지만 알고 싶지도 않다. 당신들은 죽은 영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당신들에게 맹목적인 살인마저 요구하는 신이 정말로 우리를 그의 모습대로 만들었다면 내 아내의 몸에 박힌 총알 하나하나가 그 신의 심장에도 상처를 냈을 것이다. … 아니, 어림없다. 나는 절대 당신들에게 증오라는 선물 따위는 줄 마음이 없다. 당신들은 그걸 원했을 테지만, 증오에 분노로 답하는 것은 당신들을 지금의 당신들로 만든 그 무지함에 굴복하는 것일 터이다. 당신들은 내가 두려움에 떨고, 내 이웃들을 경계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내가 안전을 위해 자유를 희생시키기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당신들은 패배한 것이다. 나는 여전히 삶을 계속할 것이니. … 물론 나는 그녀를 잃은 슬픔으로 만신창이가 된 것이 사실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당신들이 승리했음을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당신들이 얻은 그 승리는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나는 아내가 매일 우리와 함께 할 것이며, 당신들은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자유로운 영혼들의 천국에서 우리가 다시 만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나의 아들과 나, 우리는 이제 둘이 되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세상 모든 군대보다도 강하다. 나에게는 당신들에게 할애할 시간조차 없다. 낮잠에서 깨어난 멜빌에게 가 봐야 하기에. 그 아이는 이제 겨우 열일곱 달이 되었다. 아이는 언제나처럼 간식을 먹어야 하고, 그러고 나면 우리는 언제나처럼 함께 놀 것이다. 이 어린 사내아이는 감히 평생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삶으로써 당신들에게 도전할 것이다. 어림없다. 당신들은 이 어린아이에게서조차도 증오심을 가져갈 수 없을 것이다.”
… 설교를 준비하면서 다시 이 책을 읽게 됐는데요,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짜내어 증오를 증오로 갚지 않으려는 모습에서 저는 문득,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잃은 어머니 마리아와 그 가족들, 또 예수님의 제자들의 마음이 어땠을까 하는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을 용서하는 것마저도 정말 큰일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는 많은 권면이 연이어 나오는 12장을 마무리하면서, 어쩌면 우리로서는 참 감당하기 매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12장 처음 두 절에 언급된 것처럼, 12장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을 본받지 않고, 거룩한 예배의 삶을 살기 위해 분별해야 하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마지막 단락에서 사도는, 정말 믿음 없이는, 신앙 없이는 우리가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말씀 앞에 우리를 마주 세웁니다. 마치 본문을 읽는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맞는지, 아닌지를 시험이라도 해 볼 요량으로 말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분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그대로 살아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시는 분도 또한 없을 겁니다.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는 것, 원수를 먹이고 마시게 하는 것,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는 것, 여러분 과연 어떻게 해야 우리는 이 말씀을 살아낼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을 살아내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딛고 일어서야 하는 믿음의 기초가 있다면, 저는 본문 19절 말씀에 대한 믿음, 곧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며, 진노하시며, 대신 원수를 갚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지난 수요 성경 강해 시간에 출애굽기 말씀을 묵상하면서, 출애굽하는 히브리인들에게, 애굽 사람들의 은금 패물을 빼앗아 주게 하사, 그들이 그동안 받지 못한 노동의 대가를 모두 돌려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모습을 성경은 ‘약탈하다’라는 뜻의 동사 ‘나짤’을 통해 표현하는 것도 확인한 바 있습니다.
네, 19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그렇게 친히 원수를 갚으시는 분이심을 믿을 수 있어야 우리는 오늘 말씀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출발점입니다. 수요일의 하나님을 경험하고, 또 신뢰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오늘 주일의 하나님에게까지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히브리인을 학대하는 애굽 사람 하나를 죽이는 일을 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신 게 아니라, 그 모든 보복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자신은 히브리인들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자유와 믿음의 삶으로 그들을 인도하기 위해 자신을 부르셨음을, 먼저 신뢰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신뢰하는 믿음이 우리의 삶과 모든 행동의 기초입니다.
보복하는 것이 우리의 권리 밖의 것임을, 결코 보복이 우리의 몫이 될 수 없음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라는 19절 말씀은, 원수를 갚는 건 오직 당신의 권한이라는 하나님의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의 힘이 있어 보복의 능력을 가지고 있든지, 아니면 철저히 무력하든지 상관없이, 보복하는 것, 원수를 갚는 것은 오롯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고 성경은 일관되게 말씀합니다.
그래서 차라리 우리는, 애굽에서의 히브리인들처럼, 상대에게 원수를 갚을 능력이 아예 나에게 없는 경우에, 훨씬 더 강하고 빠른 하나님의 보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우리는 우리 나름 보복할 힘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괜히 우리의 힘으로 애매한 보복을 시도하려다가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상황이 됩니다. 보복에 대한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여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게 되고, 또한 동시에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보다 훨씬 더 못한 보복만을 상대에게 가하는 그런 결과를 가지게 되곤 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오늘 인용하는 신명기 말씀에 가서 보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판단하시고, 불쌍히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고 그 종들을 불쌍히 여기시리니 곧 그들의 무력함(과 갇힌 자나 놓인 자가 없음)을 보시는 때에로다.”(신 32:36) 네, 하나님은 판단하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공의로 양쪽의 잘잘못을 측량하여 판단하시는 일이 먼저 있습니다.
사실 내가 일방적으로 억울함을 당하는 경우라 할 때에도, 그 상황을 깊이 들여다보면 거기서 일정 부분 우리 몫의 책임을 발견할 수도 있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판단의 자리에서 더욱 겸손하라고, 더욱 하나님의 주권을 경외하라고 말씀합니다. 아울러 우리 또한 그와 비슷한 일들을 다른 누군가에게 행하여 억울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돌아보고 회개하라고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하십니다. 보복의 날, 그들의 환난의 날이 결코 멀지 않다고, 아주 가깝다고,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심판의 날까지 성도는 인내하고, 하나님의 주권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게 인내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말이나 행동으로 하는 보복, 상대에게 아무 타격도 되지 않는 소심한 보복으로 하나님의 보복을 대신하지 말고, 하나님이 친히 진노하시는 그때까지 낮은 마음으로 겸비함과 의로움을 지켜내시기를 바랍니다.
여기까지 이르렀다면, 이제 마지막 단계가 남아 있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토대로, 사도는, 더 높은 곳을 향해 뛰어오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 그를 위해 축복하는 것, 그가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에서 주리고 목마를 때 먹고 마시게 하는 것, 그 마지막 신앙의 도약이 남아 있습니다. 악을 견디는 것에서 악을 이기는 것, 지금 사도는 거기까지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보십시오. 십자가의 가장 큰 의미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것입니다. 죄인을 대신하여 대신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형벌을 당하는 것, 그래서 죄인들을 자유케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이 십자가가 가진 의미의 전부는 아닙니다. 십자가는 단지 죄를 대속하는 것만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이 이 땅의 죄악을 다루시고 승리하시는지를 명확히 드러내시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직후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향한 증오와 폭력을 당신 안에서 가두시고, 그 모든 악의 힘을 그 안에서 깨뜨리십니다. 세상에 충만한 악을 더 이상 유통시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일 만큼의 강력한 증오와 미움의 죄악을 십자가에 매달린 당신의 몸 안에서 모두 소진시켜버리십니다. 십자가는 결국 악의 무덤이 되는 셈입니다.
그렇게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 땅의 모든 악은 그렇게 정복당하며, 오로지 그렇게만 이길 수 있음을 드러내십니다. 사도는 그러한 주님의 모습을 한 단어로, ‘선’이라고 부릅니다. 악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 그것은 오직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악에 대한 심판과 처벌로 악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악은 반드시 선으로만 소멸됩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악을 향해 베푸는 선, 그 ‘안에서’ 악은 비로소 소멸됩니다.
그러한 선은 불특정 다수를 향한 선이 아니라, 나를 괴롭히고 나를 박해하는 자들을 향한 선일 때 직접적으로 악을 대면합니다. 나를 향해 악을 쏟아낸 누군가를 용서하고, 나에게 쏟아진 그 악을 더는 유통시키지 않기 위해, 도리어 그를 축복할 때, 비로소 또 하나의 악이 완전히 소멸됩니다. 그리고 그 죄악의 종으로 매여 있던 그가 비로소 회개의 기회, 자유의 기회를 가집니다. (숯불의 의미)
여러분, 주님은 우리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 16:24)고 말씀합니다. 우리 모두 각각의 자기 십자가가 다 있고, 우리가 그 십자가를 져야만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매순간 우리의 삶으로 들어오는 수많은 악들을 거기 묻어버리고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는 십자가. 악이 더 이상 유통되지 않게 하는 ‘악의 무덤’, 그리고 그 악한 공격에 타격을 받은 우리가 다시 주님의 공의로 부활하게 되는 승리의 자리, 그곳이 십자가이기에, 주님은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라 명령하십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를 따른다는 건 그런 것입니다. 세상이 볼 땐 허망한 싸움, 말도 안 되는 싸움을 자처하는 길입니다. 스스로 악과 싸우며 악을 이기겠다는 길입니다. 악을 이기겠다니요, 여러분,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가 악을 이긴다는 말입니까? 악은 그저 피할 수 있으면 다행인, 그런 절대적인 존재가 아닙니까? 누가 그런 싸움에 관심을 기울이며, 누가 그런 싸움을 인정이나 하겠습니까? 그저 내 한 몸 잘 먹고 잘 사는 삶이면 족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게 나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요구하십니다. 너희가 만약 나를 따라오려거든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4~48)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는 것은 우리가 그저 예수를 믿는다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에 있는 게 아니라 하십니다. 우리가 그저 예수를 믿고 복을 받아 이 땅에서 평안한 삶을 사는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딸임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닮아갈 때,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같이 우리도 자비로울 때, 그래서 정말 ‘그 아버지의 그 딸, 그 아들’이라고 인정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된다고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신 말씀 앞에 힘껏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건 어려워, 나의 상황과는 맞지 않는 일이야’, 이렇게 스스로 단정하지 말고,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가장 큰 증거라는 것을 잊지 말고, 할 수 없다고 느껴질 때마다, 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 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물론 이런 일들이 언제나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또 분별이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밀린 임금을 받는 문제처럼 우리의 권리를 다 포기하는 것이 善인 것도 아닙니다. 억지로 화목의 결과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18절 말씀처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일종의 조건이 걸려 있는 겁니다. 18절을 직역하면, “1)그것이 가능하다면, 2)그리고 그것이 너희에게 달려 있는 한에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는 말씀인데요, 우리가 화목하고 싶어도, 여전히 상대가 미움과 증오를 가지고 달려들 때에야 도리가 없습니다. 화목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악을 갚지 않는 것이 목적이라는 걸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모두 타고난 보복적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여야 합니다. 오죽하면 ‘보복 운전’, ‘정치 보복’, ‘리벤지 …’ 뭐 이런 말들이 있나 싶습니다. 누가 되로 주면 말로 갚아야 속이 시원합니다. 지는 게 이기는 게 아니라, 이겨야 이기는 것이라고 그리 배우고 그리 살아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신앙의 냉정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주의 말씀 앞에 잠잠히 우리가 누구인지를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삶의 작은 일에서부터 다시 우리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 십자가가 온 세상의 악을 없앨 수는 없을 겁니다. 나 하나 참고 용서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하는 생각도 분명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작고 힘없는 십자가들이 모여 오늘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됐습니다. 증오를 증오로 갚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의 십자가로 인해, 그래도 세상이 이만큼 견디고 있습니다.
한 남자가 썰물 때 바닷가를 걷다가 바다로 미처 물러가지 못한 불가사리가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린 소녀와 마주치게 되었는데, 소녀는 불가사리를 하나씩 주워 바다로 되돌려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가 소녀에게 물었습니다. “무얼 하고 있니?” 소녀가 대답합니다. “물에 다시 넣어주지 않으면 죽거든요.” “그런데 너무 많잖니.” 그가 말했습니다. “그래 봤자 소용이 있을까?” 소녀는 불가사리를 또 하나 집어다 바다에 넣어 주며 말했다. “얘한테는 소용이 있어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마주치는 불가사리들만이라도, 열심히 주님의 사랑이라는 바다에 넣어주며 사십시다. 그것이 그 사람에게는 반드시 소용이 있을 것임을 믿고, 그렇게 할 때,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될 것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힘껏 선으로 악을 이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날마다 그렇게 세워지는 우리의 십자가에 부활의 능력이 충만히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