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 2018년 2월 25일 주일 설교
2018-02-25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8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80225 사순절 두 번째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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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1장 19~27절,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80225.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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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묵상 2) 본문 25절의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으로 고백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지난 주 말씀에서는, 우리가 사순절을 보내면서, ‘하나님 앞에서의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이 어떤 것인지, 함께 고민해보자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우선 경건이란, 하나의 행위나 고백이 아니라, 나의 부족함을 직면하고, 매순간 더 나은 경건을 지향하는 상태, 태도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태도의 핵심은 무엇보다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것일진대, 그 행함은 다름 아닌 들음에서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듣느냐, 그것이 행함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했지요. 행함을 위한 들음이란, 두 번 말씀을 듣는 것이라 했지요. 내가 들어서 이미 implanted 된 말씀이라도, 한 번 더 생각하고 소상히 들여다봄으로써, 그 말씀 안에 담긴 하나님의 깊은 의도와 뜻을 분별하는 것이 순종의 출발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사순절이 되자’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여러분 그렇게 열심히 ‘생각’하는 사순절이 되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현대신학자 중에 존 캅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분이 ‘생각하고 질문하는 신앙’을 강조하면서 이런 말을 했어요. “우리는 (주일마다) 교회 주차장에 차를 파킹하면서 우리의 뇌까지 파킹하고 있다.” 어떤 의미인지 아시겠지요? 여러분, 지금 주차장에 또는 다른 어디에, 우리의 생각을 파킹해놓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여기 앉아 계신 거 아니지요? 힘든 한 주를 보내고, 그저 쉬고 싶은 마음에, 따뜻하고 재밌는 이야기를 기대하시는 건 아니지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가 주님의 뜻을 조금 더 깨닫고, 생각하고 그렇게 조금 더 경건의 모습으로 새로워지는 오늘 이 예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오늘은 25절의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는 구절을 좀 생각해 보겠습니다. 율법도 결국 법인데요, 결국 법은 일차적으로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는 성격이 있는데,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의 완전한 법은 이와 정반대로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야고보 사도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던 것으로 보여요. 2장으로 넘어가서 12절에도,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고 기록해서, 역시 율법 앞에 ‘자유’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에게 율법이란 자유와 뗄 수 없는 무언가였던 셈입니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율법이 자유롭게 하는 대상이 뭔가요? 네, 사람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자유하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완전한 율법의 목적은 인간을 자유하게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만약 율법이 인간을 자유하게 하는 법이라면, 그럼 율법과 인간 중에서 어느 것이 목적이고, 무엇이 수단인가요? 아직은 좀 명확하지 않지요?
지난주에 잠깐 말씀드렸는데요, 안식일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배고픈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자르고 비벼서 먹으니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항변했지요.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고 있소.” 그때 주님은, 다윗이 성소에서 제사장들만 먹게 되어 있는 떡을 먹고 또 자기 동료들에게도 줘서 먹게 했던 일화를 인용하시면서,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지요. “…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2:27~28)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고,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새번역 성경을 비롯한 여러 성경의 번역처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보면, 율법과 사람의 관계가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여러분,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라는 말씀에 비추어보면, 안식일의 율법이 목적인가요, 아니면 사람이 목적인가요? 네, 사람이 목적이에요. 율법을 지켜야 하는 대상은 우리 사람이지만 그러나 목적은 사람이에요. 사람이 수단이 아니라, 율법이 수단이에요. 사람을 어떻게 하기 위한, 사람에게 어떤 좋은 것을 주기 위한 수단이 율법이라는 걸, 주님은 일관되게 가르치신 것에요.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여기 있지요. 사람이 목적이 아니라, 율법 자체가 목적이라는 것을 믿고 살아온 수많은 종교 기득권자들, 그리고 그들에게 생각 없이 놀아난 사람들에 의해, 주님은 결국 십자가를 지신 거예요. 사람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 율법의 해석, 율법의 이해, 율법의 적용, 그 모든 전통과 신학과 신앙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저항하면서, 주님은 사람이 수단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신 거에요.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끝에 이런 말씀을 더하셨어요.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이 말씀 역시 대단히 충격적인데요, 인자, 곧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의 의미가 뭔가요? 앞으로 안식일 대신 ‘주의 날’ 곧 주일을 지켜라, 그 ‘주의 날’의 ‘주’가 바로 나 예수다, 뭐 이런 의미인가요? 지금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지요.
우선 우리는 여기 ‘인자’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돼요. 단지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씀하지 않고, ‘인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셔서 예수님 자신을 표현한 것인데요, 구약에서 ‘인자’(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처음엔 그냥 사람이나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말이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이스라엘과 유다가 다 망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 해체되면서, ‘인자’라는 말은, 그런 상황을 바로잡을 메시아를 일컫는 말이 됐어요. 다니엘서나 외경 에녹서 같은 묵시적 예언서에서 이것이 분명해지지요.
하나님나라가 끝난 것 같은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이러한 인자, 곧 메시아를 기다렸어요. 그가 오셔서 세상의 권력, 세상의 제국을 무너뜨리고, 하나님나라, 하나님의 통치를 회복시킬 것이라고 믿었어요. 여기에는 다분히 종말론적인 회복과 심판의 개념이 녹아들게 되는데요, 그래서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인자’라는 말을 통해, 마지막 때에 오셔서 세상을 바로잡고, 죄인을 판단하고 심판하며, 의인을 구원하시는 메시아를 바라는 염원을 담은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 스스로를 ‘인자’라고 부르신 거예요. 그것도 너무 자주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스리고, 심판하실 메시아, 종말의 주인, 그렇게 예수님은 당신을 ‘인자’라고 부르셨어요. 그러니까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이 말은, 안식일과 율법에 표현된 하나님의 참된 뜻이 무엇인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해석하고 판정하는 역할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모든 토라를 해석하는 최종적인 권위와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법을 어떻게 지켜야 할 지 그 방향을 지시해줄 존재 또한 오직 예수님 자신이라는 의미인 거예요. 다시 말해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율법이 판단되고 해석된다는 거예요. 당연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 것이지요.
누가복음에 보면 어떤 율법 선생이 예수님께 찾아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질문을 하는데요,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어요. 그때 주님이 이렇게 반문하시지요. “1)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그리고) 2)네가 어떻게 읽느냐?” 여기 예수님의 질문을 잘 보시면, 예수님의 질문은 두 가지에요. 1)율법이 뭐라고 하느냐? 또 2)그 율법을 너는 어떻게 읽느냐? 율법이 뭐라고 하느냐, 그건 어려운 질문이 아니에요. 율법 선생이니, 이미 율법은 다 알고 있고, 외우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두 번째 질문을 하세요. 그렇다면 너는 그 율법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는 거예요. 어떻게 읽느냐, 즉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느냐, 율법의 의미와 목적을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하느냐, 이걸 물으세요. 율법의 선생이라는 너는, 율법을 어떻게 읽고 이해하고 가르치고 적용하고 있느냐, 주님이 질문하신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은 율법을 어떻게 읽으시나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人子, 율법과 성전의 주인이자 판단자이신 예수님의 눈으로 읽으시나요, 아니면 어떤 전통이나, 교리나, 어떤 권위 있는 목사나 신학자의 눈으로 읽으시나요? 여러분, 예수님은 율법을 이렇게 읽으세요.
율법이 목적이 아니라 사람이 목적이다. 율법은 사람을 자유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법이다. 사람을 구원하고, 온전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것이 바로 율법이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수단으로 삼지 말라. 사람이 아닌 율법을 목적으로 삼지 말라. 율법으로 인하여 사람을 억압하고, 차별하고, 정죄하지 말라. 율법이 사람을 위한 것이지, 사람이 율법을 위한 것이 아니다. 여러분, 귀 있는 자들이 되셔서 이 말씀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야고보서 2장을 잠깐 보세요. 1장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을 이야기하면서, 마지막에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 이렇게 27절에서 말씀하고, 그렇게 2장으로 넘어가면, 곧바로 무슨 주제가 나오는가 하면, 바로 ‘차별’입니다. 1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이어지는 본문에서도 계속해서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요, 뒤에 8절과 9절을 또 함께 읽습니다. “8.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이 있고, 그것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지만, 만약 율법을 통해 사람을 차별한다면 죄를 짓는 것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요 …, 저를 다시 보세요.
여러분 왜 율법을 지키면서 차별이 일어나는 일에 대해 야고보 사도는 경고하나요? 여러분, 율법의 내용 중에는, 차별적인 내용이 들어 있나요, 없나요? 아예 없지 않지요. 얼핏 잘못 해석하면 충분히 차별처럼 읽게 되는 구절들이 많이 있어요. 대표적인 게 남녀의 문제에요. 율법에는 남녀의 차별처럼 느껴지는 게 많아요.
산모가 아이를 낳으면 그 출산의 과정에서 나온 피와 여러 분비물로 인해서 일정 기간 동안 산모는 율법적으로 부정한 상태가 되는데, 그 부정한 상태가 끝나고 정결하게 되는 데 필요한 시간이 아들을 낳았을 때와 딸을 낳았을 때, 서로 다르지요. 언제 더 오래 부정하지요? 네, 딸을 낳으면 더 오래 부정해요. 아들을 낳으면 일주일 동안 부정한데, 딸을 낳으면 33일 동안 부정하다고 성경은 말씀해요(레12장).
그런데 성경은 왜 그러한지 거기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으세요. 왜요? 질문하지 않았으니까요. 질문했다면 분명히 그 이유를 답해주셨을 거라고, 저는 확신해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늘 말씀에 대하여 하나님께 물으라는 거예요. 분명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에 있어, 어떤 ‘구별’을 원하셨을 거예요. 그러나 그걸 사람은 차별로 바꾼다구요. 그리고는 당장 딸보다 아들이 더 영적으로 우월하고 탁월한 것처럼 생각하고 율법에도 없는 걸로 남녀를 차별하기 시작한다구요.
여러분, 유대인들은 그런 말을 해요. “여자에게 토라를 가르치느니 토라를 불태우는 것이 낫다.” 지금도 이렇게 가르치는 종교가 있지요. 아예 여자들에게는 율법 자체를 배우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율법에는 있지도 않은 내용인데 말이에요. 그런데 제가 말씀을 준비하고 성경을 묵상하다가 참 감동한 게 있는데요, 여러분 앞서 인용한 누가복음 10장의 율법 선생 이야기, 예수님께 찾아와서 시험하여 질문한 내용, 또 예수님이 “너는 율법을 어떻게 읽느냐?” 하는 그 대화 이후에, 바로 이어지는 단락의 내용이 뭐냐면요, 우리가 잘 아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에요. 주님이 나사로의 집에 들어가셨는데, 마르다는 예수님 드실 거 챙기느라 분주하고,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들은 이야기지요.
여러분, 왜 이 장면이 중요하고, 또 감동적인가요? 그리고 왜 굳이 이 말씀이 율법 선생과의 그런 대화 직후에 거기 기록되었을까요? 주님은 토라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율법이 결코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직접 몸으로 보여주세요. 율법 선생만 토라를 배우고 가르치는 게 아니라, 남자만 토라를 소유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읽는 율법의 관점은, 마리아는 결코 토라를 배울 수 없는 거예요. 여자는 마르다처럼, 그냥 가서 주방에나 있고, 음식이나 준비해야 되는 거예요. 지금도 그러잖아요. 수련회 같은 거 가면 여자 집사님들은 더운 여름에도 땀 흘리며 식당에서, 주방에서 일하고, 정작 말씀은 잘 듣기도 어렵잖아요.
마르다는 마리아가 자신의 일을 도와줘야 한대요. 그런데 주님은 마리아의 선택이 잘한 거래요. 그리고 그에게 율법을 가르쳐주세요. 당시로는 있을 수 없는, 정말 놀라운 일이지요. 성경에 예수님이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인 나사로에게 말씀을 가르치셨다는 말씀은 안 나와요. 그런데 그의 누이 마리아가 예수님께 말씀을 배우고 제자가 된 것에 대해서는 따로 지면을 할애해서 설명해요. 마치 앞의 율법 선생에게 했던 질문, “너는 율법을 어떻게 읽느냐?”라는 그 질문에 대해 스스로 답을 하시는 것 같아요. 율법은 바로 이 인자의 눈으로, 나의 관점과 나의 삶으로 해석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그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율법은 구별에 대하여 말할 뿐 차별이 아님을, 오히려 모든 차별을 소멸시키는 완전한 법임을 주님이 직접 보여주신 거예요.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율법은 그 자체로 차별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자기들만 율법을 가지고 있다고, 자기들만 할례를 행한다고, 그래서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자신들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했어요. 율법을 주신 이유는 그러지 말라고,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하고, 그래서 자유하게 하려고 주신 것인데, 그 율법 자체가 차별과 억압의 도구가 된 거예요.
여러분, 복음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논쟁이 안식일인데요, 율법이 정하는 안식일은 다함께 쉬는 날이었어요. 십계명에서 안식일에 대해 말씀하실 때,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냐면요, 신명기 5장(12~15절)에 보면, “12.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13.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4.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15.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여러분, 이 구절을 읽으면서 어떤 내용이 강조되는 것 같으세요? 네, 주인이나 종이나 함께 쉬라는 거예요. 15절이지요. 하나님은 안식일에 대한 율법을 주시면서, 과거 이스라엘이 종이었고, 하나님이 그런 그들을 자유하게 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하세요. 왜요?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 안식일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지켜내는 첫 단추가 되기 때문이에요.
너만 쉬지 말고, 너처럼 종들도 쉬어야 한다, 안식일에는 누구도 일하지 못하게 하라는 거예요. 너만 쉬는 게 아니라, 너의 남종과 여종들까지, 심지어 소와 나귀와 가축까지, 너희가 차별하는 그 이방인들까지, 다 쉬게 하라는 거예요. 그 하루만이라도 차별하지 말고, 일을 멈추게 하라는 거예요. 그들이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귀한 아들, 딸들임을 기억하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쉼을 통해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하라는 거예요. 정말 자유로운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일하고 있는지, 혹시 일이 주인이고 나는 종은 아닌지, 돈이 주인이고 나는 노예는 아닌지, 양심과 자유 의지를 가진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한갓 일과 사람과 돈의 노예처럼 그렇게 억압받고 차별받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돌아보며, 회복하기를 원하셔서,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시간을 가장 먼저 거룩하게 하신 거예요.(*)
안식일은, 당장 내일 열심히 일해야 되니까, 그래서 쉬라는 게 아니에요. 한 주 또 열심히 일해야 하니까, 오늘 하루는 충분히 쉬라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보다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어요. 인간은 절대로 종일 수 없다는 거예요. 인간은 절대로 수단이 아니라는 거예요. 인간은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고 억압받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인간은 절대로 자유 없이 살면 안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창조하시고, 어떻게 구원하시고, 어떻게 축복하셨는지, 그 하나님을 기억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되새기기 위해 안식하라는 거예요. 자유하게 하는 완전한 율법을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라보며 말이에요. 그게 예배이고, 안식인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당신을 나는 양의 목자다, 나는 선한 목자다(요10:14), 이렇게 말씀하시잖아요? 여러분 이 말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렇게 따뜻하고 위로가 되는 말이 아니라, 매우 모순적인 말이에요. 목자는 율법적으로 선할 수 없거든요. 원래 유대인들 사이에서 목자라는 존재는 부정한 존재에요. 차별을 당하는 존재라구요. 왜요? 목자들은 짐승들과 늘 함께 이동하고 함께 머물잖아요. 그 과정에서 율법적으로 부정한 상태에 놓이기가 너무 쉽지요. 동물의 사체나 피를 만지는 것도 다반사이고, 무엇보다 안식일에도 일해야 하잖아요. 짐승을 굶길 수는 없으니까 말이에요. 결국 목자들은 안식일을 제대로 지킬 수가 없는 존재에요. 그렇다고 초원에 있다가 성전으로 달려와 속죄의 제사를 드릴 수도 없고, 결국 목자들은 계속 그 부정한 상태가 유지되는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목자는 정결하고 존귀한 자들이 아니었어요. 차별 받는 거지요.(다윗의 예) 여러분, 삯꾼이라는 말이 왜 나왔겠어요? 나중엔 돈을 주고 목자를 사는 거예요. 나는 목자 안 해. 나는 율법적으로 깨끗한 사람이야. 이런 거예요. 그러다 나중에는 목자들은 심지어 법정에 증인으로 세우지도 않았어요. 그들은 그럴 자격이 없다고 판단한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누가 제일 먼저 그 소식을 들었고, 또 그 소식을 증언했다고 성경은 기록하나요? 다름 아닌 그 목자들이에요. 별을 보고 아기 예수를 찾아 온 건 동방의 현자들이었지만, 직접 하나님께 메시아의 탄생과 의미를 들은 사람은 목자들이었어요. 언제나처럼 목자들이 밤에 들에서 양 떼를 지킬 때, 정결하고 경건하지 못한 모습으로 그렇게 밤에도 일하고, 안식일에도 일하고 있을 때, 주의 사자가, 천사들이 그들에게 찾아와 주님 나신 소식을 전했어요. 그리고 그 목자들이 예수 탄생의 첫 ‘증인’들이 되었어요. 마치 예수님의 부활의 첫 증인이, 여제자들이었던 것처럼, 가장 경건하지 않다고 여겨졌던 사람들을 통해, 주님의 오심이 증언된 거예요.
베들레헴으로 달려가 마리아와 요셉을 만나고 목자들은 천사들이 아기 예수에 대해 했던 이야기들을 다 전했어요. 그런데 성경은 그 어머니 마리아가 그 목자들이 전해 준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했다고’(눅2:19) 증언해요. 누가 증언한 소식이에요? 목자에요. 그런데 마리아는 그걸 마음에 ‘새기고 생각했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이 우리 마음에 새겨지고 깊이 생각되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세요. 주님이 율법을 완성하시는 분이라고, 율법을 이해하고 실천하려거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율법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세요.(*) 그 주님의 가르침 속에서 오늘 야고보 사도, 또 바울 사도를 통한 메시지가 기록되고 증언되고 있는 거예요.
율법은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자유롭게 하는 완전한 율법, 그것을 들여다보고 실천해라. 율법의 목적이 사람이지 사람의 목적이 율법이 아니다. 율법은 사람을 자유하게 한다. 그가 가진 양심과 이성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그 사랑 안에서 자유롭게 순종하게 한다. 자유와 사랑 안에서 순종하는 것이 경건이다. 양심에 거리끼는 것을 억지로 행하는 순종은 더 이상 없다. 생각해라, 그리고 순종해라.
그리고 그 율법은 이웃을 나의 몸처럼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으로 귀결된다. 결국 율법은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법이다. 율법은 사람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기 위한 법이다. 긍휼로 사람을 대하지 않는 자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다. 사람을 차별하고 정죄하기 위한 법으로 사용한다면, 그 자체로 이미 율법은 잘못 이해된 것이다. 율법은 자유롭게 할 때에만 완전한 율법이다. 성경의 증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성경을 어떻게 읽습니까?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 질문을 던지고 계십니다. 성경에는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고, 너희는 그 성경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누구의 눈으로 읽고, 누구의 삶과 죽음으로 해석하여, 적용하고 있느냐? 여러분 혹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말씀보다 목사나 다른 권위 있는 누군가의 가르침에 기대어 그렇게 성경을 묵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데 율법을 사용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우리 고백교회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진리로 자유하며, 진리로 자유케 하는 예수의 제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으로 많은 사람의 자유를 억압했던 기독교를 부정하고, 저항하여, 오늘의 개신교를 일으킨 마르틴 루터를 잘 아실 겁니다. 그 루터의 이름, 정확히는 그 姓은 본래 ‘루터’가 아니었습니다. 그와 발음이 비슷한 ‘루데르’(루더)였는데요, 훗날 그가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자신의 성을 ‘루터’로 바꾸게 됩니다. ‘루터’라는 이름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노몬 텔레이온 톤 테스 엘류테리아스]의 ‘자유’라는 헬라어 단어 [엘류테로스]에서 왔습니다. ‘엘류테로스’에서, 맨 앞과 맨 뒤의 철자를 빼고 가운데 ‘류테르’(Luther) 곧 ‘루터’로 그의 성을 바꾸게 됩니다. 루터 역시 예수님의 눈으로 성경을 다시 보게 됐고, 성경이 자유하게 하는 완전한 율법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개신교의 정신이고, 신앙의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는 신앙은 자유하게 하는 신앙입니까, 아니면 여전히 억압하고, 차별하며, 정죄하는 신앙입니까? 스스로의 힘으로 정결할 수 없고, 자유할 수 없는 이들을, 이 시대의 목자들, 나그네들, 이방인들을, 우리가 앞장서서 차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것이라고, 그것이 경건의 처음이라고 오늘 성경은 증언하는데, 그렇다면 이 시대의 진정한 고아와 과부가 누구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돌보려고 하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신앙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구약의 시대를 살고 있고, 복음이 무엇인지,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순절 기간 동안, 아니 여러분의 평생 동안,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예수의 눈으로 다시 성경을 읽으십시오. 주님이 요구하시는 긍휼과 사랑으로 인간을 바라보고 대하십시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십시오.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람을 수단으로 삼지 마십시오. 그것이 자유롭게 하는 완전한 율법의 가르침입니다. (다음 주에도 계속 본문을 이어서 강해하겠습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