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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체를 드리라' 2017년 10월 22일 주일 설교

2017-10-22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5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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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2 오순절 후 스무 번째 주일 설교 ---------------------------------------------------------- 로마서 6장 12~18절,  지체를 드리라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7102202.mp3 위 링크를 클릭하시면 음성 파일로 들으실 수 있고 첨부한 파일을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하셔서 들으실 수도 있습니다. (로마서 강해 20) 본문 13절의 ‘지체를 드리라’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의 고백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6장 전반부 말씀에서 믿음으로 구원 받은 성도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대략 네 가지 정도로 정리를 해봤습니다. 여러분 기억나시는지요? 바울은 성도의 구원과 구약 출애굽 사건을 연결하고, 특별히 세례와 홍해를 건넌 사건을 연관시키면서, 1)성도는 죄와 사망이 다스리는 나라를 떠났고, 2)더 이상 그 지배와 다스림 가운데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동시에 예수와 함께 연합하여 세례 받음으로 3)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의에 대하여 살아났다고도 했습니다. 4)그와 연합하여 그와 동일한 죽음을 경험하는 우리는, 훗날 그리스도의 부활과도 같은 모양으로 연합하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바울은 그러한 현실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향해서, 12절의 ‘그러므로’라는 말을 시작으로 결론적인 권면을 이야기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로서, 이번에는 우리가 스스로 행해야 할 무언가에 대해 진지하게 가르쳐주고 있는 건데요, 그래서 본문에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해라!”, “~하지 말라!” 하는 동사의 명령형이 계속 등장합니다. 사실 로마서를 지금까지 묵상해 오면서, 우리는 이런 반복적인 명령형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해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그것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믿음으로 얻은 구원의 은혜 등, 아시는 것처럼, 로마서는 복음의 대한 영적 진리를 서술해 왔습니다. 그래서 앞에서는 거의 명령형은 등장하지 않고 주로 평서문이나 자문자답의 형태를 취해왔습니다. 이것은 로마서 전체에서도 마찬가지인데요, 로마서를 크게 둘로 나누면 1장부터 11장까지, 그리고 12장부터 그 뒷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부는 오늘 6장 후반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그러한 진리의 진술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2장 이후에 본격적으로, 거기서도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는데요, 성도의 삶에 대한 교훈과 명령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6장 후반부의 말씀은, 12장 이후에 나오는 그 명령의 예고편이자 요약본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로마서의 구조를 여러분께 언급하는 이유는, 우리가 로마서를 읽을 때, 사실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을 차지하는 이 교훈과 명령의 메시지들을 간과하거나, 오해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담고 있는 앞의 모든 내용들이 다 평서문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그것이 이미 그렇게 이루어졌고, 성취가 되었으며, 앞으로 그렇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 이미 다 이루어지고 끝난 일들로서, 거기에는 우리의 능력이나 의지가 개입될 여지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 진리를 반드시 온전히 알아야 하고 그것을 계속적으로 상기해야만 이 땅에서 믿음의 싸움을 싸울 수 있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받아들고, 그것을 계속 기억하고 묵상함으로써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늘 반복적으로 생각하고, 또 확증해야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면 우리의 실존이, 삶의 환경이 그게 아닌 것 같고, 죄와 사망이 여전히 다스리는 세상을 사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한 흑인 아빠가 유치원에 가는 딸아이를 붙잡고, 매일 아침마다 거울 앞에 함께 서서 뭔가를 말하는 영상을 본적이 있습니다. 아빠는 딸과 함께 거울을 보며, 자신의 말을 딸이 그대로 큰 소리로 따라하게 하지요.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존귀한 존재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며, 세상의 복이다.” 쉼 없이 외치게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잊지 않고, 세상이 뭐라 하든, 당당함과 온전함을 잃지 말기를 바라는 아빠의 간절함이 절절히 느껴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 역시 날마다 그와 같은 자기 확인과 확증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죄와 사망이 다스리는 것 같은 세상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가 끝이면 안 됩니다. 이미 이루어진 구원의 은혜와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믿었다면, 그 다음, ‘그러므로’ 그 뒤의 이야기가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라(빌2:12),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제 직접 해야 할 것, 할 수 있는 것을 분별하고, 그것을 연습해야 합니다. 훈련해야 합니다. 성도로서의 삶이란 그저 주님 주신 구원을 늘 반복적으로 생각만 하며 살다가 천국에 가는 과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분명 우리는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할 구원 있고, 또 싸워야 하는 믿음의 싸움이 남아 있는 방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이루어진 구원과 그 이후의 이루어야 할 구원, 곧 거룩한 삶에 대해 참 혼동하기가 쉽습니다. 이미 이루어진 구원은 마치 내가 하나님을 선택하고 믿은 결과인 것처럼, 그 자체가 이미 내가 뭔가를 하나님께 해 드린 것처럼 생각하게 되고, 정작 그 이후의 우리가 이루어야 할 구원에는 하나님께 그 책임을 떠넘기는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전도를 해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내 믿음이 마치 내 실력 같아 보이기도 하고, 또 죄에 대해 너무 자주 넘어져서 그것이 내 힘을 넘어선 무엇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내 힘으로 회개를 하고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은 게 아니라, 성령이 우리 가운데 들어오시고 믿음을 주심으로 죄를 깨닫고 회개를 하게 됐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착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착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을 따름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이루어야’ 할 구원에 대해서는, 그러니까 오늘 말씀처럼, 성경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이루라, 행하라, 하지 말라, 명령하시는 바에 대해서는 오히려 하나님께 맡겨버릴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이 어떤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지를 삶으로 고백하라고, 강하게 명령하고, 강조하는 그 말씀을, 이번에는 내 노력과 의지와 싸움이 아니라,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일인 것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만 합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자주 기도합니다. “하나님, 연약한 저를 붙들어 주셔서, 죄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사, 승리하게 하여 주옵소서. …” 우리가 드리는 많은 기도가 이런 내용들인데요, 이것이 엄밀히 틀렸다, 말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건 이 기도 다음, 우리의 태도와 방향입니다. 성경은 바로 그 일을 위해, 우리가 직접, 스스로, 우리의 몫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있고,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할 싸움이 있습니다. 12절, 13절, 19절 등에 반복되는 말씀은, 우리의 지체를 죄에게 내주지 말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체, 곧 우리의 몸과 그 육체가 살아내는 삶의 자리를, 육체의 사욕, 육체가 원하는 욕망에 드리지 말고, 하나님께, 하나님의 원하심 앞에 내어 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 하나 하나, 그 노력들이 바로 죄와 사망으로부터 이별한 저와 여러분이, 거룩한 성도로서 시작해야 하는 믿음의 싸움이라고 성경은 강조합니다. 이건 우리 자신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대신 해 주시지 않습니다. 아니 대신해 주실 수가 없습니다. 몸이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로봇을 다루시듯, 우리 생각을 조종하셔서 우리의 몸을 움직이시는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공부를 잘 할 수 있게 지혜를 주십시오.”라는 기도와 내가 내 몸으로, 내 욕망과 싸워 이기며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하는 것, 어느 것이 좋은 성적을 위해 더 중요합니까? 당연히 직접 공부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왜요? 하나님이 공부하시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공부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고, 공부하는 데 필요한 모든 여건도 허락하셨습니다. 그 다음은 내가 할 몫입니다. 내가 이루어야 할 몫입니다. 성도의 삶도, 거룩함도 똑같습니다. 공부는 안 하고 기도하는 것과 똑같이 우리의 삶의 거룩함을 하나님께 내맡기면, 우리는 늘 형편없는 성적표를 받아들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공부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수학 기말고사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시험 전날까지 공부를 하나도 안 하고, 못하고 있다가, 시험 바로 전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제 수학 공부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너무 늦은 것을 제가 잘 압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제가, 교회에서 학생회 회장인 제가 시험을 망치고 창피를 당하면, 저만 손해가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기사, 이제 제가 남은 시간 어떻게 공부해야 할 지 지혜를 허락해 주십시오. 주님,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제가 좀 더 구체적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이제 가지고 있는 많은 수학 문제집 중에 딱 한 권만 제가 고르겠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없으니, 마지막 종합평가만 풀고 시험을 보겠습니다. 어떤 문제집을 고를지 주님 지혜를 허락해주시고, 그 문제를 풀 때, 꼭 핵심적인 내용들을 숙지할 수 있도록, 그래서 다른 시험 문제들도 응용하여 풀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으로 도와주시옵소서.” 그리고는 마치 점을 치듯, 눈을 감고 여러 문제집 사이로 손을 움직여서, 그 중 한 권을 뽑아 들었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뽑은 문제집이라는 것이, 해법 수학이라고, 그 모든 문제집 중에 가장 얇은 책이었습니다. 그걸 펴서 단원 맨 뒤에 있는 종합평가 부분, 딱 두 페이지만 열심히 풀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잤고 좋은 컨디션으로 다음날 학교에 갔고, 가서도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그 부분만 다시 훑어 봤습니다. 드디어 수학 시험지를 받아 본 저는 하나님의 기적을 봤습니다. 바로 그 문제집 종합평가가 그대로 시험에 출제된 겁니다. 당연히 저는 풀지도 않고 답을 적어 냈고, 저희 반에서 유일하게 수학 100점을 맞았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저를 불쌍히 여기사 저에게 엄청난 기적을 베푸셨다고 믿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두 페이지라도 제가 직접 공부했다는 그 사실을 늘 기억합니다. 그것도 안 하고 그냥 (자빠져) 잤을 수도 있고, 아예 포기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거라도 한 겁니다. 최선을 다한 것은 아니지만, 또 방법도 이상했지만, 어쨌든, 힘껏 제 몸을 공부의 도구로 바쳤습니다. 그건 하나님이 대신 해 줄 수 있는 게 아니고, 오직 제가 몸을 움직이고, 시간과 제 욕망을 다스려서, 제 머리를 사용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지금 성경이 권면하는 바가 그것입니다. 그걸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거라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면, 그 다음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직접 싸워야 합니다. 그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의 도구로 드리는 겁니다. 몸의 사욕, 즉 만족을 모르는 우리의 탐욕을 위해 몸과 시간과 힘을 사용하지 말고, 이미 만족할 수 있는 모습으로 회복된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도구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 너의 육체와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가운데 사용되도록, 직접 움직여야 합니다. 여기서 그저 기도만 하고 있거나, 하나님께 그 책임을 넘기지 말고, 몸의 일부분 단 하나라도, 삶의 가장 작은 부분이라도, 직접 순종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믿음의 싸움입니다. 왜 이걸 싸움이라고 하냐면, 사탄 역시 이곳을 주목하고 공격해 오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탄이 공격할 수 있는 자리가 오직 거기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된 성도들을 사탄은 더 이상 다스릴 수 없습니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싸움의 가능성이 바로, 아직 부활의 몸으로 새로워지지 못한 우리의 이 소멸될, 유한한 이 몸의 사욕입니다. 몸의 욕구가 다 문제가 있는 게 아닙니다. 조금 구분이 필요한데요, “욕구와 욕망은 구분해야 합니다. 생존을 위한 육체의 욕구는 당연한 것이고 그 또한 거룩한 것입니다. 다만 ‘절제와 교정’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매일 매순간 경험하는 거지요. 너무 많이, 과도하게, 잘못 먹고 마시지 않아야 합니다. 다른 욕구들도 마찬가지이지요. 절제하며 건강하게 누리는 욕구는 하나님의 축복이고, 이것 역시 중요한 싸움입니다. 욕구가 채워졌다면 인간은 욕망을 다스려야 합니다. 욕망은 욕구와 조금 다릅니다. 욕망은 생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기적 즐거움을 위한 것입니다. 물론 이 욕망 역시 일정 부분 채워져야 하지만, 문제는, 이미 다 채워지고 누려졌지만, 스스로는 계속 결핍을 느끼며,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욕망 앞에 잘 멈추지 못합니다. 계속 결핍을 느끼며 더 많이, 더 깊이 욕망으로 들어갑니다. 성도는 이 부분에서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면 욕망에 몸을 맡김으로 이미 하나님이 이루신 우리의 구원과 회복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욕망을 내려놓지 못하면, 결국 우리는 스스로가 피폐해집니다. 이미 주신 구원을 잃어버리기 때문이고, 자신을 채우기 위해 타인의 것을 빼앗는 방법으로 변질되기 때문입니다(손성찬, 응용하여 인용).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하나님께 ‘~ 해 주십시오’라고 간구하는 첫 머리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거기에는 욕구의 절제와 욕망의 거절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에겐 양식이 필요하지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님을, 그 떡에 우리의 거룩함과 존귀함이 있는 게 아님을, 떡보다 더 큰 즐거움이 하나님 안에 있음을,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로 이미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싸움을 싸웁니다. 그래서 성도는 일평생 軍人입니다. 절제와 훈련이 동반되는 삶이어야 합니다. 사실 이런 말씀을 드리기가 저는 참 부끄럽습니다. (요즘 제 몸은 제 인생에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을 두 가지 겪고 있습니다. 하나는 제 머리카락에 새치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고, 또 하나는 제 체중이 이제껏 가보지 못한 곳을 계속 경신하며 오르고 있는 겁니다. 앞자리가 바뀌고 말았습니다.) 나이를 먹고 믿음의 연륜이 더해지는 과정에서, 욕구와 욕망을 더 잘 관리를 못하는 것 같아서, 요즘은 아내를 따라 욕구를 조절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애굽에서 나온 수백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뭐라고 부르십니까? 가까스로 절대 권력에서 해방되었으니, 자유민, 혹은 전쟁 난민, 피난민, 이렇게 부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일컬어, ‘여호와의 군대’라 하십니다. “430년 만에 여호와의 군대[짜바 여호바]가 애굽 땅에서 나왔다(출12:40~41)” 말씀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나올 때 그냥 무질서하게 나온 게 아니라, 군인처럼, 대열을 지어 나오게 하셨습니다(출13:18). 오늘 본문에 ‘무기’라는 단어가 계속 나오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몸을 두고, 몸을 가지고, 싸우는 군대로 부르심 받은 겁니다. 실제로 우리가 정말 자유해져야 하는 것은, 어떤 제도와 법이나 시스템이나 세상의 편견이나, 이런 게 아닙니다. 물론 그것들에게서도 자유해야 하지만, 정말 필요하고 시급한 자유는 우리의 탐욕과 이기심과 같은 잘못된 몸의 사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 싸움이 절대로 쉽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자신들이 무엇의 종이었는지를 명확하게 알게 됩니다. 처음엔 바로의 권세, 애굽의 제도와 법의 종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간 지 정확히 사흘 만에 출애굽 병사들은, 하나님을 원망했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외쳤습니다. 이유는 먹을 것 때문입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배불리 떡을 먹던 때에, 그때 하나님 손에 죽었더라면 차라리 좋았을 것을…. 우리가 광야에서 굶어 죽게 생겼다.”(16:3)고 탄식했습니다. 광야 생활 내내 그 문제로, 물과 음식과 고기가 없다고 때마다 하나님께 원망하고 모세를 비난했습니다. 그들에겐 절제도 없었고, 남을 위한 헌신이나 섬김도 없었습니다. 주님이 때마다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지만, 늘 더 많은 것을 위한 원망이요, 비난이었습니다. 이렇게 살 바엔 차라리 다시 애굽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이 더 낫다고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무엇의 종으로 살아온 것인지를 그들은 광야에 나와 비로소 알게 됐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했던 시험, 그리고 주님이 광야에서 금식하시며 당하신 그 시험, 그 싸움을 오늘 우리도 날마다 싸우고 있습니다. 절제되지 못한 욕구와 비뚤어진 욕망에 늘 반응하며 죄의 종이 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미혹을 분별하고, 내 몸과 삶을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릴 것인지, 우리는 결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싸움이고, 한 번에 끝나지 않는 길고 지루한 훈련이요, 싸움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한 번에 승부를 보는, 그래서 갑자기 삶이 거룩해지는 그런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체가 죽어 부활의 몸을 입을 그때까지 우리는 계속 이 싸움을 싸워야 하고,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우리의 몸과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연습을, 훈련을 반복해야 합니다. 넘어지고 잘 안되어도 그 싸움을 멈추면 안 됩니다. 멈추지 않는 한 반드시 이기는 싸움을 우리가 싸우고 있음을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잠깐 패배해도 빨리 일어나서 다시 하나님께 내 몸과 삶을 드리면 됩니다. 죄를 범한 것이 부끄러워 계속 죄 가운데 빠져 있으면 안 됩니다. 은혜의 능력으로 속히 일어나야 합니다. ‘어린 왕자’라는 책에 보면, 그 책에서 제일 짧은 챕터 중 하나인 것 같은데, 그런 내용이 있지요. 어떤 별에 술꾼이 살고 있는데, 이 별을 다녀와서 어린왕자가 매우 우울해졌다. 빈 병과 가득한 술병 더미 속에 말없이 앉아 있는 술꾼을 발견한 어린왕자가 묻습니다. “너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술 마셔!” 침울한 기색으로 술꾼이 대답하죠. “무엇 때문에 술을 마시는데?” 어린왕자가 묻자, “잊기 위해서.”라고 대답합니다. “무얼 잊어?” 다시 묻자, “내가 부끄럽다는 것을 잊기 위해서.” 술꾼이 고개를 떨구고 고백합니다. “뭐가 부끄러운데?” “술 마시는 게 부끄러워.” 어린왕자가 난감해져서 그 별을 떠나며 중얼거리지요. “어른들은 확실히 너무 이상해.” 술 취한 것이 부끄럽고, 그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계속 술을 마신다는 이 술꾼의 이야기를 우리는 반복하면 안 됩니다. 죄의 종이 된 것이 부끄러워 그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계속 죄를 지으면 안 됩니다. 그 부끄러움을 주님이 직접 다 짊어지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 절제와 통제에 머무르지 마시고, 주님을 위해, 성도를 위해, 이웃을 위해, 여러분의 몸을 드리십시오. 중립 지대에 머물면 끌려가기 쉽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여러분의 몸과 삶을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이웃을 위해 ‘드리는’ 연습을 하십시오. 엄청난 희생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설거지 한 번 더 하시고, 직장에서 복사기 한 번 더 돌리고, 교회에서 작은 수고를 한 번 더하는 거기에 우리의 진짜 영성이 있습니다. 섬김을 받는 데 익숙해지지 마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여러분의 지체와 성도들을 쉬게 하고 유익하게 할 수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고 직접 행하십시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우리 몸을 의의 종으로 드리는’ 가장 중요하고 첫째 되는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고백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존경하는 우리 이음교회 성도 여러분, 이 믿음의 싸움을, 이 몸을 드리는 거룩한 연습과 훈련을 멈추지 마시고, 날마다 그 싸움을 성실하게 감당해 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떡으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가 바로 우리임을, 부디 여러분의 삶으로 증언하고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그렇게 구원을 이루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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