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실로 풀이로다' 2017년 3월 5일 주일 설교
2017-03-05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20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70305 사순절 첫 번째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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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2장 22~29절, 이사야 40장 6~8절, 실로 풀이로다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0305.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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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40장 7절에 나오는 ‘실로 풀이로다’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주의 말씀이 우리의 삶으로 고백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그 앞에 있는 39장, 그리고 그 속에 등장하는 히스기야라는 이름의 왕에 대해 먼저 좀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히스기야 왕은 아시는 대로 남 유다의 가장 훌륭한 왕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됩니다. 남 유다의 열세 번째 왕으로, 당시 근동의 패권을 가지고 있던 앗수르에 맞서 유다를 지켜낸 현군(賢君)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 몇 안 되는 유다의 왕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그런 히스기야의 등장은 사실 그 자체로 하나님의 은혜와도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다는 그런 온전한 왕이 나올 어떤 배경이나 합리적인 근거나 소망이 전혀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버지인 아하스 왕은 성경에서 가장 악한 왕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재위 기간 내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고, 하나님 대신 이방 강대국의 힘에 의존했습니다. 당연히 그 이방의 신들과 종교 관습들을 닥치는 대로 들여왔고, 예루살렘 성전은 거의 폐허나 다름없이 버려졌습니다. 심지어 그는 하나님이 가장 가증하게 여겼던 가나안의 풍습을 좇아서, 자기 아들을 산 채로 불살라 몰록이라는 우상 신에게 제물로 바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그의 아들이 히스기야이고, 히스기야는 그런 아버지 아하스 왕과 함께 1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함께 나라를 통치하는, 이른바 섭정을 통해 정치를 배우고, 신앙을 배우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스기야는 아버지 아하스의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인데요, 그 이름의 뜻이 ‘여호와는 강하시다’인데, 자기 이름의 뜻 그대로, 강하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에 기초하여 나라를 다스립니다. 다시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하게 정돈했고, 예배를 회복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이사야서를 기록한 이사야 선지자와 또 오늘 사죄의 말씀이기도 했던 미가 선지자와 힘을 합쳐, 유다의 영적 각성을 주도해 나갔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히스기야와 그가 다스리는 유다를 신실하게 보호하셨습니다. 앗수르의 가장 유명한 왕 산헤립이 유다를 쳐들어왔을 때, 예루살렘 성이 완전히 포위되어 백척간두의 위험에 놓이게 됩니다. 그 때에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런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결국 앗수르는 하룻밤에 의문에 싸인 185,000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고국으로 퇴각합니다. 이때의 충격적인 패배로 인해 기세가 꺾였기 때문이었을까요, 자국으로 돌아간 산헤립은 결국 얼마 되지 않아 측근의 암살로 인하여 목숨을 잃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히스기야는 질병으로 인하여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도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로 15년이라는 시간을 연장 받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죽을 것을 정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소위 면벽기도라 알려진 그의 절박한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게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주신 15년의 세월 동안, 그는 자신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아들 므낫세를 얻는 축복도 받습니다. 물론 그 아들은 아버지가 아닌 할아버지 아하스 왕을 닮아, 다시 유다는 므낫세 때에 최악의 영적 어둠의 시기를 보내게 되는 것은 또한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히스기야 왕의 이야기들이, 이사야 36장부터 38장에 걸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39장, 그러니까 오늘 읽은 40장의 바로 앞에는, 그렇게 앗수르와 죽을병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히스기야 왕에게 일어난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요, 이 사건은 실상 이후 유다 역사의 중요한 변곡점이 된다는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요하는 이야기입니다.
아시는 대로 이사야 40장 이후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유다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간 바벨론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것에 대한 위로의 말씀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비극의 시작점에 이 39장이 있습니다. 남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수많은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70년의 세월을 보내게 되는 역사의 시발점이 39장에 나타나는 히스기야 왕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 본문의 내용이 그리 길지 않으니까, 이사야 39장의 말씀을 다함께 읽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 같이 확인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39장 교독]
이제 저를 다시 봐 주시기 바랍니다. 당대에 유명했던 히스기야 왕이 죽을병에서 회복되어 건강해졌다는 소문이 근동에 돌자, 당시 바벨론 왕이었던 므로닥발라단이 축하 사절단을 유다로 보냅니다. 주전 712년의 일입니다. 이때만 하더라도 바벨론은 앗수르의 패권 아래 있던 작은 나라에 불과했습니다. 근동의 小國 유다의 왕에게 예물과 함께 축하 사절단을 보낼 정도로 말이지요.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사절단을 보낸 것은 단지 축하의 목적만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거기엔 철저한 외교적 계산이 깔려 있었는데요, 앗수르를 견제할 ‘反 앗수르 동맹’을 제안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유다가 앗수르의 산헤립을 물리쳤다는데, 과연 유다가 그렇게 강한 건지, 정말 앗수르에 대항할 동맹국으로서의 자격이 있는지를 확인코자 함이었습니다. 사절단을 맞은 히스기야 왕이 그들에게 자신의 모든 보물 창고와 무기고, 궁중의 온갖 소유를 다 열어 보여준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우리가 이 정도의 국력을 가지고 있고, 그대들이 하고자 하는 반 ‘앗수르 동맹’에 참여할 충분히 자격이 있는 나라임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사절단이 왔다 간 직후, 곧바로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방문한 그들이 누구고 왜 왔으며, 그들이 무엇을 보았는지 묻습니다. 히스기야가 모두 대답하지요. 그러자 이사야가 하나님의 충격적인 메시지를 대언합니다. “(당신이 그렇게 자랑삼아 보여준 모든 것들) 왕궁에 있는 모든 것들, 선조들로부터 오늘날까지 고이 간직하였던 모든 것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바벨론으로 옮겨지는 날이 올 것입니다. 당신에게서 태어날 친아들 중 더러는 바벨론 왕궁으로 끌려가 내시가 될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백성은 포로가 될 거라는 끔찍한 예언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이 말씀 앞에서 히스기야가 취했던 태도입니다. 히스기야가 뭐라고 이사야에게 대답했습니까? “당신이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적어도)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말합니다. 내 생전에는 평안하다, 그러니 무슨 상관이냐, 나쁘지 않다고 하는, 참으로 말도 안 되는 무책임한 반응이었습니다.
이런 상황들은 우리에게 여러 의문들을 제기합니다. 히스기야가 행한 그 일이 그토록 큰 잘못인가, 또 어째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무런 조치나 기도나 변명이 없는가? 왜 하나님의 심판을 좋다고 하는가? 정말 그것이 진심이라면, 도대체 히스기야가 갑자기 왜 이렇게 되었는가? 오늘 읽은 본문에 등장하는 한 포기 ‘풀’처럼, 너무나 쉽게 넘어지고, 메말라 버린 이유가 무언가?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아시는 대로 이 말씀은 역사 속에서 그대로 현실이 되어, 유다는 120년 뒤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 70년의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우리가 일본의 압제 아래 놓인 시간의 거의 두 배에 해당합니다. 그 시간이 지난 후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가 올 한 해 묵상하고 암송하는 이사야 40장인 것입니다.
신실했던 히스기야가 어쩌다 그렇게 갑자기 넘어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성경이 자세히 언급하고 있지 않기에, 사실 우리로서는 그 내막을 다 알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모든 위험과 고난을 이겨낸 후의 방심과 교만으로 인해 그리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고전 10:12, 선 줄로 생각한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히스기야가 바벨론의 사절단에게 취했던 그 태도를 하나님은 대단히 싫어하셨다는 것이고, 그냥 싫어만 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심판하시고, 또 고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점입니다.
왜 히스기야가 바벨론의 사절단 앞에서 방심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러내는 비상식적인 행동을 했을까요?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이만큼 강하다는 과시였기도 했겠지만, 실상은 더 이상 긴장할 필요도, 또 기도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라는 자각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결국 히스기야의 신앙의 목표가 거기였습니다. 나라는 평안해졌고, 자신은 부요하고 건강해졌습니다. 히스기야 입장에서는 다 이루었습니다. 더 이상의 목적이 없으니 기도도 없습니다. 기도로 생명이 연장되고, 기도로 나라가 위기를 극복하고, 기도로 기적을 맛보았던 히스기야인데도, 더 이상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은 이제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지점까지 이미 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내면에는, 이제 충분히 스스로가 안전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벨론이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겠지요.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가 보기에 이제 유다와 자신의 삶이, 자신이 생각하는 곳까지 다 와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염려하고 근심했던 것이 다 사라졌고, 이제 그는 신앙의 목적지에 다다랐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서 방심이 시작됩니다.
작년 영국의 프리미어 축구리그에서는 동화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팀 창단 132년 만에 처음으로 우승한 레스터시티라는 팀 때문인데요, 그 일로 영국은 모든 전 세계 축구 팬들이 흥분했습니다. 그런데 우승 직후인 올해는, 마치 작년이라는 시간은 없던 것처럼, 다시 팀이 옛날로 되돌아갔습니다. 더 이상의 목표가 사라진 것처럼, 그들은 다시 평범한 팀이 되었고, 지금은 강등의 위기에 처해 감독은 이미 경질이 되고 말았습니다. 목적이 아닌 과정에 취하고 거기에 안주하는 한 언제나 위기는 찾아옵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이 죽을병에서 치료를 받고, 또 누란의 위기를 맞은 나라가 승리하고, 국고가 풍요와 번성으로 채워지는 그 자리가 마치 자신이 가야 할 목적지이고, 마치 거기가 하나님이 자신을 인도하시는 궁극적인 자리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게 신앙의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는 응답을 받았고 원하던 평안을 가졌으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히스기야에게 신앙이란, 언제나 지금 당장의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해주시는 것에 불과하고, 기도란 지금 내가 필요한 그것을 공급하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자신과 유다를 택한 목적이 그런 현실적인 풍요의 자리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끔찍한 심판의 메시지 앞에서도 그는 한없이 태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목적은 다릅니다.
이사야 40장에서 우리는 그 하나님의 생각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이루기를 원하는 진정한 목적은, 오늘 39장 속 히스기야의 그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께 복을 받아 자랑하는 거기가 아니라, 그것은 그저 하나의 과정일 뿐, 더 큰 부르심의 목적은, 우리가 오늘 읽은 말씀처럼, 이 설교의 제목처럼, 우리 모두는 풀이요, 모든 인생과 모든 권력은 다 한갓 풀이요, 그것을 영원하게 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호흡이시며 하나님의 생명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시요, 하나님의 은혜이심을 우리의 삶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거기까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자랑하는 것이 우리 신앙과 삶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자랑하는 데까지 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목표입니다. 이 둘은 분명히 구별이 됩니다. 설사 우리가 세상적인 복을 받지 못하는 자리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을 자랑하고 기뻐할 수 있기 때문이고, 그런 복을 받은 그곳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그 목표를 향해 여전히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히스기야에게 그것은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고, 나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는 얼마나 좋은 기회가 히스기야에게 찾아 온 것입니까? 유다가 바벨론과 다르다는 것을, 그들이 의지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그는 분명히 말할 수 있었습니다.
바벨론과 손을 잡고 평안을 유지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것이 목표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바벨론이나 앗수르나 유다나 모두 다 바람 불면 소멸하는 풀에 불과할 뿐, 그 모든 생명의 주권이 영원하신 하나님께 있음을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바벨론이 믿는 신들 또한 그저 풀 한포기에 불과하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이 땅의 아버지이시며, 참 하나님이심을 그는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좋은 chance를 히스기야는 그와는 정반대의 길로 이끌고 간 것입니다.
결국 히스기야와 유다는 다른 방법으로, 그들이 원치 않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들이 목적으로 삼았던 그 모든 평안과 번영과 힘들이 한갓 풀에 불과함을 드러내심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언하게 됩니다. 그들이 의지했던 바벨론 역시 잡초에 불과함을 보여주시고, 망한 유다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드러내시게 됩니다. 그것이 오늘 이사야 39장과 40장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삶이 이와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결국 우리의 목적지는 히스기야의 평강과 건강과 승리가 아닙니까? 우리가 거기서 드러내려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힘과 노력과 의지이지 않습니까? 기껏해야 우리가 가진 종교적 열심과 내가 가진 기도의 능력이 아닙니까?
우리가 누리는 행복과 축복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하나의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될 때, 우리는 유다와 히스기야의 전철을 똑같이 밟게 됩니다. 목적을 잃고 신앙은 방황하며, 진정한 기쁨 없이 늘 만족 없는 허무감에 시달립니다. 그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고, 한갓 풀에 불과한 존재들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히스기야의 삶과 유다의 역사가, 실패와 패망으로써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거룩하심을 드러내는 것처럼, 우리도 늘 넘어지고 또 무너지면서 우리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 세상을 향해 날마다 이야기하며 살아갑니다. 내가 이렇게 형편없는 신앙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토록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는 삶을 삶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시 나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며, 나를 고쳐 가신다, 그것 밖에 남는 게 없습니다. 고난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너무 고됩니다. 또 그것이 믿지 않는 이들에게 얼마나 영향력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풀에 불과하며 하나님과 잇대어 있지 않는 한 거기엔 어떤 소망도, 만족도 없음을 드러내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저 풀에 불과한 나 자신을 드러내려고 애쓰는 삶이 아니라, 우리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 있는 존재임을 드러내려고 애쓰는 삶이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의 인격과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선하심이 세상에 선포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모세라는 위대한 선지자는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앞에서 죽음을 맞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모세가 가나안 땅이 보이는 느보산 위에서 죽임을 당한 이유에 대해 성경은 명확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32장) 그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내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까닭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건이 기록된 민수기에 보면 모세가 광야에서 바위를 쳐서 그 바위에서 물을 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찾지는 않겠습니다만, 민수기 20장인데요, 광야 40년 세월이 거의 끝나갈 무렵, 사막에서 물이 없으니 백성들이 모세에게 몰려와 따져 항변합니다. “우리가 너 때문에 여기서 다 죽게 생겼다. 왜 우리를 데리고 나와 여기서 죽게 하느냐?” 따집니다.
그러자 모세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회막으로 가서 기도하지요.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들의 목전에서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조금 다른 행동을 합니다. 난데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높입니다.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라고 말한 뒤에,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내려칩니다. 그러자 그 반석에서 물이 많이 솟아나와 사람과 짐승이 그 물을 마시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물이 나왔으니 됐습니다. 그런데 과정은 달랐고, 이것에 대해 하나님이 모세에게 진노하십니다. 너는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청천벽력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모세, 너는 나를 믿지 않았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게 이유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처음에 분명히 모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그들의 목전에서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나의 말을 대언함으로 물이 있게 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오직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이해하시며 긍휼로 먹이심을 선언하라는 것이고, 그 모든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옴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항변하고 불평한다고 백성들을 향해, 믿음이 없다고 정죄하거나 모세 자신의 행위를 더하지 말고, 그저 말씀을 대언하고, 은혜를 선포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먹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가서 일단 분노합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가,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입니다. 그저 먹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모세는 자신의 권위로 그들을 정죄하고 훈계합니다. 그리고 마치 그들이 먹을 자격이 없는 것처럼 반문합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주랴!” 너희처럼 믿음이 없는 반역자들에게도 내가 물을 내야 하겠느냐, 역정을 냅니다.
모세는 그것이 자기 나름대로의 의분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아닙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반역자라고 정죄해 버립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태어난 출애굽 2세대입니다. 그들은 출애굽 당시의 열 가지 기적도 경험하지 못했고, 홍해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자신들의 부모 세대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하고 충분히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세는 그들과 다른 존재인 건 아닙니다.
모세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고, 그 역시 반역자였으며, 살인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그 또한 그가 반역자라 부르는 이들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냥 풀일 따름입니다. 그는 그의 나무 지팡이와 모세 자신의 신실함에 기적이 있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마치 풀에 불과한 자신이 들고 있는 그 나무 지팡이가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는 것인 양 말입니다.
모세는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내려칩니다.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는 많이 다릅니다. 왜 지팡이로 두 번이나 내려쳐서 물을 내게 했겠습니까? 그의 분노와 그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것이고, 하나님보다 자신의 능력과 위엄이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모세가 그런 목적이 설사 없이 했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자기 자신을 드러냈고, 마치 자신은 반역자가 아니며 거룩한 존재인 것인 양, 그는 형제들을 정죄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거룩하심이 선포될 자리는 없었습니다. 모세는 거룩했고, 백성은 부정했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그곳에 없었습니다.
모세가 내려친 지팡이는 그가 40년 동안 행한 모든 기적의 상징물입니다. 지팡이가 뱀이 되어 그가 처음 소명을 받았고, 그 지팡이를 나일강에 넣었을 때 그 강이 피가 되어 백성들을 자유케 했습니다. 지팡이로 인하여 홍해를 건넜고, 지팡이로 인하여 광야를 지나왔습니다. 그러나 지팡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의 상징이지 모세의 거룩함과 의로움의 상징이 아닙니다. 모세가 드러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로우심과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이지, 마른 막대기가 아닙니다.
결국 모세는 하나님의 은혜와 거룩하심을 드러내는 데 실패합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가나안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이지요. 모세가 반역자라 명했던 이들은 들어가는 가나안이지만, 모세는 들어가지 못한 곳이 가나안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드러내는 데 목적을 두지 못하고, 결국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의로움과 거룩함을 드러내는 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사도행전의 바울을 봅시다. 바울은 이제 채찍질을 당할 위기에 처합니다. 로마의 천부장이 그를 채찍질하여 심문하라 명령합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바울은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로마 시민의 적법한 권리를 주장하여 채찍질을 면하게 되지요.
사실 이건 이치 상 당연한 일입니다. 로마 시민으로서 굳이 당하지 않아도 될 일을 당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울이기 때문에 우리는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됩니다. 바울은 일찍이 빌립보에서도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었습니다. 16장이었는데요, 당시 바울은 빌립보의 로마 관리들에 의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당연히 로마의 시민으로서 법적 절차에 따라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바울은 그 사실을 숨긴 채 매를 다 맞고 감옥에 갇힌 후에,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옥에서 나온 뒤에야 비로소 그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그랬던 바울이 오늘은 맞기도 전에 자신이 로마의 시민임을 공표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단지 맞는 게 두려워서였을까요?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기꺼이 순교할 수 있는 기회라 여기고 그것을 기뻐할 사람이 우리가 아는 바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닙니다. 마치 그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인 양 채찍질을 피하고, 로마의 요새 안으로 숨어들어가는 모습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와서 배운 게 하나 있습니다. 자신은 예루살렘에서 죽으면 죽으리라, 그 각오로 들어왔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원하시는 건 그런 각오가 아니었음을 우리는 이미 확인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아직 믿음이 연약한 이들의 결례를 위해 머리를 깎는 비용을 감당하는 소소한(?) 일을 맡기셨고, 바울 자신의 오랜 헌신이나 희생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을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아울러 바울은 예루살렘이 자신의 순교지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은 과정일 뿐, 최종적인 목적지가 아님을 말씀합니다.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로 가야함을, 거기서 황제에게까지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은 그의 헌신과 그의 각오와 그의 거룩함을 드러내며 그의 인생이 끝나는 공간이 아니라, 그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그와 동행하시며 그를 붙드시는 하나님을 드러내야할 공간임을 그는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만약 그가 로마 시민임을 감춘 채 채찍질을 그대로 받았다면 십중팔구 그는 사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른 누구보다 먼저 몇 시간 만에 운명하신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채찍질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의 채찍질은 그냥 가죽이나 fabric으로 만든 게 아니라, 그 끝에 날카로운 금속이나 동물의 뼈를 붙여 만들었습니다. 한 번 채찍이 지나간 자리에서는 뼈가 드러날 만큼 큰 상처가 생겼고, 실제로 기록에 따르면 이 채찍질만으로 목숨을 잃는 이들이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지금 바울은 유대인들의 폭력으로 인해 이미 죽일 목적의 폭력을 당한 직후이지요. 여기에 채찍질까지 당했다면, 그는 아마 스데반과 집사와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에서 순교를 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길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지, 자신이 얼마나 의로우며 얼마나 담대한지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가진 권리로 채찍질을 피함으로써 어쩌면 비겁하고 연약하게 보일 수도 있는 풀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의로움을 다 열어 내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가야 할 길이 있었기 때문이고, 지금 드러나야 할 것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면 족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결국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는 데까지 가야 합니다. 인간은 모두 풀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그것은 죽은 것임을 드러내는 데까지 가야 합니다. 그 길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도 있고, 하나님이 허락한 고난도 있습니다. 그것은 다 과정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내도록 해야 합니다.
마치 내 의로움과 나의 능력이 내가 받은 축복의 근거인 양 교만을 떨어서도 안 되며, 마치 내가 당하는 고난이 내 연약함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인 것처럼 고통과 슬픔으로 고난 앞에 서도 안 됩니다. 어느 상황에서나 하나님과 잇대이는 그것만이 나의 소망임을 증언하면 족합니다.
내 기준에서 나보다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 의롭지 못하며,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마치 내가 그들보다 더 나은 의로움을 가진 양 정죄하며 비난하는 것도 안 됩니다. 그 보잘 것 없는 풀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음을, 하나님의 은혜가 그 풀을 영원한 생명이 되게 하심을 증언하면 족합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길을 가실 때, 한 사람이 뛰어와 예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묻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때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네 맞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였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아버지의 영광과 거룩하심을 드러내셨고, 당신이 가진 인간으로서의 연약한 모습을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사람들의 환호를 받거나 십자가의 고난 그 자체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과정일 뿐, 결국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었음을 주님은 한 번도 잊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지금 거기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그 믿음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지금의 우리가 겪는 여러 과정들이 목적지인 것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축복 앞에서 허세를 부리지도 말며, 이젠 다 이루어진 것처럼 다시 세상과 손을 잡지도 마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여전히 길 위에 놓여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곧 메마르게 되는 한 포기 풀에 불과함을 기억하십시오. 어떻게 하면 문제를 해결하고, 어떻게 하면 복을 받으며, 어떻게 하면 고난을 이길까 고민하지 말고, 어떻게 해야 나로 인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게 될까를 고민하십시오.
말씀 없는 풀 한포기의 삶을 계속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현재가 아닌 영원에 잇대게 하실 수 있습니다. 떡만 있으면 충분한 것처럼 그렇게 우리를 드러내고 살지 마십시다. 우리를 살게 하는 그것이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임을 드러내며, 우리 교회에게 주신 사명처럼, 삶으로 복음을 고백할 수 있는 길을 걸어가십시다.
저와 여러분의 삶을 통해 오직,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그분의 거룩하심이 나타날 수 있는, 복된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