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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은혜에 부탁함' 2016년 6월 12일 주일 설교

2016-06-12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7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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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2 오순절 후 네 번째 주일 설교 --------------------------------------------- 사도행전 15장 30~41절, 주의 은혜에 부탁함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60612.mp3 (사도행전 강해 110) ‘주의 은혜에 부탁함’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김수영 시인의 유명한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하략)” 자유와 역사, 민주주의와 같은 뭔가 심오한 것을 위해 분노하며 싸우지 못하고, 참 별 것 아닌 것에 마치 목숨을 걸 것처럼 반응하는, 시인의 자괴감과 부끄러움이 그려진 시인데요, 우리네 삶이 다 그렇지요. 정말 중하고 큰일에는 무심하고, 소소하다 못해 유치하기까지 한 일에 일희일비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돌이켜보면 매일 같은 시를 쓰고 삽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바울과 바나바 같은, 훌륭한 사도들에게도 그런 부끄러운 기억이 있음에, 그래도 조금 위안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교회 역사상 큰 획을 긋는 크고 어려운 과제를 잘 마무리하고, 화합의 새 길을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함께 해 온, 교회의 두 리더는 결국 서로를 향해 등을 돌린 채, 각자의 길을 갑니다. 어떻게 보면 참 별 것도 아닌 일로 말입니다. 교회의 큰 문제를 해결하고, 바울은 바나바에게, 이전에 말씀을 전한 교회들을 다시 방문해서 성도들의 형편을 살피고 오자고 제안합니다. 이때 바나바는 1차 전도 여행에서 동행했던, 그러나 중간에 자기 멋대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간, 조카 마가도 데리고 가자 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번 여정 역시 어떤 위험한 상황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한 번 사역에 큰 어려움을 끼친 경험이 있는 마가를 다시 데려가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라 여겼습니다. 두 리더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는 상황이 됐고, 앞서 이방인의 할례 문제에서와 같이, 양쪽의 입장은 단호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둘의 입장 가운데 어떤 쪽이 더 옳은 결정이라 여겨지십니까? 만약 우리 공동체에도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우리 교회는 어떤 판단을 내려야 옳습니까? (여러분이 교회의 리더라면 어떤 결정을 내렸겠습니까?) 바울과 바나바는 결국 타협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39절은 두 사람이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섰다고 되어 있습니다. 결국은 결별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 ‘심히 다투어’라는 말이 나옵니다만, 헬라어로는 조금 다른 의미, 좀 더 심각한 의미입니다. 우선 심하게 다투었다는 동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두 사람이 ‘어떠어떠한 상태가 되었다,’고 되어 있어서, 그 결과에 좀 더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이때 어떤 상태인지를 표현하는 단어가 헬라어 ‘파록시스모스’입니다. 영어로 ‘발작’을 뜻하는 ‘paroxysm’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두 사람 모두 극도로 격앙되고 흥분하여,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의미합니다. 아마 옆에 있는 사람들도 말릴 수 없었을 겁니다. 결국 두 사람은 그렇게 갈라 서 각자의 길을 가게 됩니다. 성경은, 두 사람의 갈등과 다툼을, ‘파록시스모스’와 같은 심각한 단어를 통해 가감 없이 밝힙니다.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영적으로 성숙한 두 사도의 모습이어서, 더구나 바나바는 위로의 대명사로 통하는 사도이니, 한편으로는 충격적입니다. 복음을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는 열정과, 병자를 치유하고 신으로 추앙받을 정도의 놀라운 은사와, 강력한 말씀의 권능과, 성도를 돌보고 섬기는 겸손함을 가진 사도들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날개 달린 천사는 아니었습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죄인이요, 여전히 성숙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 가운데 있는 상처 입은 치유자였음을 오늘 말씀은 감추지 않습니다. 이런 본문을 보면서 어떤 분들은, 이런 두 사람도 그러니 나는 당연히 그럴 수 있겠다, 이런 방향의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만, 그래서는 곤란합니다. 반면교사로 삼고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기록된 말씀으로, 내 연약함을 무마하기 위한 핑계로 삼는 건 안 될 일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태복음 7:6a) 주님이 말씀하셨는데요, 우리 스스로 그런 개와 돼지로 전락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 역사 상 가장 위대했던 두 신앙의 거인의 넘어짐을 잘 분별하고 경성하여, 이 시간 그들의 어깨를 짚고, 더 온전한 성도의 모습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사건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가 가장 먼저 신경 써야 할 것은, 이 일이 일어난 시점입니다. 교회가 직면한 큰 어려움을 지혜롭게 처리한 직후에 이와 같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이방인의 할례 문제를 해결한 이 회의 이후, 300년 간 그와 같은 회의가 열리지 않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 완전하게 해결이 된 것입니다. 본문 36절은 ‘며칠 후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앞서 있던 예루살렘 회의와 의도적으로 긴밀하게 연결하려는, 저자 누가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된 부사입니다. 그처럼 큰 화해와 성취, 그토록 강력한 성령의 일하심이 있은 지 며칠 되지 않아, 지금의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믿음의 여정에 있어서, 각 개인의 삶이나 교회적인 부분에서, 뭔가 중요한 일을 이루거나, 근사한 무언가를 해냈을 때, 또 신앙적인 큰 진보와 성숙을 경험했을 때, 거기엔 반드시 큰 위기 또한 도사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의 큰 역사하심이 있은 후, 반드시 사탄의 반격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장 의로운 자로 인정받은 노아가 인류의 대홍수가 끝난 직후, 사소한 문제 앞에 넘어집니다. 술을 거하게 먹고, 벌거벗은 채 잠이 들어, 결국은 자신의 수치를 가리지 않은 둘째 아들을 향해 저주를 내려버립니다. (그때도 가족과의 문제였지요.) 다윗의 인생에서 행한 가장 큰 허물 역시 그가 가장 높은 곳에 있을 때, 그의 삶이 가장 평안해졌을 때, 그가 모든 원수의 손에서 자유하게 되었을 때였다고 기록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사탄이라고 책망 받은 때 역시, 베드로가 주님의 가장 큰 칭찬을 받았을 때임을 또한 기억합니다. 우리가 가장 거룩하고 온전할 때, 주님 앞에 그래도 존귀한 모습으로 서게 되었을 때, 거기 사탄이 틈을 노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화 ‘곡성’에 보면 ‘역살(逆殺)’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어떤 영적 대상을 향해 치명적인 공격이 가해질 때, 그냥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상대에게서도 역시 가장 위험한 공격이 되받아쳐 온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무속에서 쓰는 말이지만, 저는 그런 말을 통해서라도 여러분이 이 교훈을 꼭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봐도 잘했을 때, 잘 이겨냈을 때, 누가 봐도 이젠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할 때, 반드시 사탄의 역살이 날아옵니다. 교회나 개인의 삶과 사역 모두에서 그렇습니다. 특별히 가족처럼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는 누군가를 통해 그런 일들이 일어남을 기억하십시오. 미리 알고 깨어 경성하지 못하면, 한 발 전진하고 계속 후퇴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이미 사탄의 역공을 받았고, 그래서 깊은 침체로 빠져 들어가면서도, 아예 인식조차 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방심은 늘 금물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한 것처럼, 우리가 이미 바르게 서 있다고 생각할 때, 그때가 가장 위험한 때임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늘 머물려는 노력, 은혜가 떨어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주기적으로 점검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부디 늘 깨어 조심함으로 사탄에 맞설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볼 문제는, 본문이 정말 바울과 바나바 둘을 같은 관점에서 바라보는가, 하는 것입니다. 형제가 치고받고 싸워서 부모에게 꾸중을 들을 때, 물론 함께 싸웠으니 둘 다 잘못한 것은 맞습니다. 그래서 같이 혼도 나고, 손도 들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지혜로운 부모는 분명히 누구의 잘못이 더 본질적인지, 그리고 더 심각한 문제인지를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다투고 갈라섰으니 무조건 둘 다 잘못이다, 이건 아닌 겁니다. 본문을 유심히 살펴보면, 바나바와 바울의 이후 사역에 대한 성경의 접근이 조금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조카 마가를 데리고 자신의 고향 구브로로 갔다고 간단히 기록하는 데 반해서, 바울의 경우는 여러 공식적인 과정이 추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동번역 같은 성경은 조금 더 신랄하게 둘을 구별합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를 타고 구브로로 떠나가 버렸다. 한편 바울은 ….”이라고 해서, 두 사람을 대조적으로 그리고 있는 겁니다. 물론 바나바와 마가도 구브로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돌보았을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바나바와 마가의 사역에 대해 침묵하는 데 비해, 바울과 실라는 41절에서처럼,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했다고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음을 봅니다. 이제 이 사역의 무게중심이 바나바에게서 바울에게로 옮겨갔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16장의 첫 주어가 ‘바울’인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나바와 마가의 사역에 대해서는, 교회의 공식적인 파송 과정이 생략된 채 기록되었다는 점입니다. 40절 말씀처럼, 바울과 실라는, 성도들의 기도와 인사를 정식으로 받고,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교회를 대표하고 대리하는 정식 사역으로 인정되었음을 의미하고, 결국 하고자 했던 사역이 바울을 통해 이루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고 결별한 일에 대해 누가 더 잘했고 잘못했고를 지적하지 않는 성경이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는 분명히 하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마가를 결코 데려갈 수 없다는 바울의 고집을, 그저 매정한 거절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사랑이 없고, 이해가 부족한 모습을 부각시키기보다, 하나님의 일에 대한 엄중하고 충성된 모습으로 존중함과 동시에, 그의 이후 사역에 신앙적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적으로만 보면, 바울은 바나바에게 이런 식으로 대하면 안 됩니다. 오늘의 바울을 있게 한 장본인이 바나바이기 때문입니다. 바나바는 사실 그래서 더 바울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겁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에 대해 믿지 못할 때, 그를 변호하고 보증해주었던 사람도 바나바였고, 바울이 고향 다소에 처박혀 사람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져갈 때, 그를 다시 사역의 장으로 이끌어준 사람도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가 없었다면 오늘의 바울은 불가능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더구나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 가족입니다. 마가의 어머니가 바나바의 누이인데, 마가의 어머니는 사실 모든 사도들의 어머니이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집에 모여 사도들이 성령을 기다렸고, 그녀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기도 합니다. 그걸 생각한다면 마가에 대한 단호한 거절은 너무 매정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족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나 자신의 문제이면 차라리 괜찮지만, 가족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아무리 효자가 아니어도, 부모 이야기에는 욱 하기 마련이고, 아무리 못난 부모여도 자식 욕 먹는 것은 참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워 합니다. 마가 문제에 바나바가 예민한 것도 그래서였을 겁니다. 차라리 자기 자신 문제였으면 모를까, 조카 마가에 대한 그런 태도는, 못내 섭섭하고 서운한 마음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그랬기에 더 그 결정에 있어 신중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인간적인 마음들, 또 관계적인 미묘한 문제들보다, ‘더 중한 것’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주의 일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과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초점을 맞춥니다. 주의 일을 감당하는 그것이 얼마나 영적으로 위험하고 심각한 일인지, 진리를 따르고 전하는 그 일이 얼마나 영적으로 민감한 문제인지, 성경은 이 시점에서 마가를 통해 분명히 강조하려 하십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 사탄도 역사합니다. 젊은 호기에 그냥 한 번 나도 해볼까, 이런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선교가 아닌 겁니다. 많은 청년들이 젊을 때 단기 선교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평생 짊어지고 가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그냥 한 번 그랬을 뿐입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그냥 그 선교의 기억으로 ‘추억팔이’만 하며 살아갑니다. 주의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마음은 점점 사라지고, 그건 한 때의 일로 넘깁니다. 이젠 일하는 일꾼이 아니라, 누리는 성도에 머물고, 충성이 아닌 평안에 초점을 맞춘 신앙이 됩니다. 바울은 그래서 마가를 데리고 갈 수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이, 내가 가고 싶다고 가고, 안 되면 포기하는, 그런 일이 되는 선례를 남길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갈 수 없고, 그 은혜에 갚을 수 없는 종의 매임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주의 일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마 마가 본인은 이 일을 통해 한 단계 더 성숙하는 계기가 되었을 겁니다. 자신으로 인해 평생의 동역자였던 바울과 바나바가 완전히 결별하는 걸 보며, 자신이 가고자 하는 그 길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자신이 선택한 그 길이 얼마나 존귀한 것인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을 겁니다. 바울을 향한 교회의 공적인 승인은, 마가의 문제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께는 훨씬 더 무거운 것임을 보여줍니다. 어리니까, 아직 부족하니까, 괜찮은 게 아니라, 주의 일은 언제나 분명한 원칙과 기준 속에, 충성된 종의 모습으로 감당해야 함을, 우리로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많은 성도들이 주님의 일을 대하는 마음에서, 어린 마가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바울을 통해서, 오늘 사건을 통해서 일어나는 심각한 거절을 경험하지 못하고 그냥 위로만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겐 더욱 중요합니다. 마가가 훗날 마가복음을 기록하고, 바울에게도 소중한 동역자로 다시 일어서게 되는 데 있어서, 저는 오늘 이 바울의 선택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사랑의 표현이 다를 뿐입니다. 누군가는 원칙을 지키는 악역을 맡아야 하는 겁니다. 여러분, 혹시 주의 일에 대해 마가와 같은 마음이지 않습니까?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되도 그만, 안 되도 그만, 그런 마음이지는 않습니까? 이런 일이 생길까 아예 주의 일을 멀리하지는 않습니까? (혹 그렇다면 여러분 제 말을 잘 들으십시오.) 그 마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성령이 우리의 삶 가운데 맺는 열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충성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을 기뻐하는 마음은 자연스럽게 하나님나라와 주님을 위한 거룩한 열정과 책임감으로 이어집니다. 헌신은 우리의 감정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이 싸워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5절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향해 예루살렘 교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 바울이 고백하기를,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사도행전 20:24)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경험하고 누리는 이라면 누구나 이르게 되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들을 향해 말씀합니다. “너희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요한계시록 2:10) 부디 이 말씀 앞에 ‘아멘’이라고 고백하는 데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한 영혼이 주께로 돌아오고, 그 영혼이 교회를 통해 자라고 열매를 맺는 존귀한 모습에 이르는 데, 얼마나 많은 기도와 손길이 필요하겠습니까? 충성된 종이 그래서 필요한 겁니다. 마가의 모습은, 우리가 얼마나 형편없는 기준으로 하나님의 일 앞에 서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만듭니다. 세상에서는 감히 하지도 못하는 행동이 교회에서는 사랑을 핑계로 서슴지 않고 행해지고, 세상에서는 감히 생각도 하지 못하는 게으름과 충성되지 못한 모습이, 주님 앞에서 버젓이 행해지고 있는지,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 주보에 있는, 잠언 25장 13절에 보면,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 했습니다. 중동의 뜨거운 태양 아래 추수하는 사람에게, 시원한 얼음냉수 같은 존재, 그가 충성된 주의 일꾼이라 말씀합니다. 사실 여기 ‘얼음냉수’라는 말은 지나친 번역인데요, 본래는 ‘눈’(snow)입니다. 일 년 내내 눈이 내리지 않는 이스라엘에서, 눈이라는 말을 사용할 만큼, 충성된 종이 하나님께 귀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여러분, 부디 주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우리 고백교회를 그런 ‘얼음냉수’ 같은 충성된 주의 일꾼으로 인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주의 충성된 종의 모습을 위해 본문이 강조하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 내용은, 비록 심각한 문제가 생기고, 어려움이 생겨도 처음의 그 방향을 잃지 않고, 가던 길을 계속 전진해 가라는 메시지입니다. 큰 시험에 빠진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이 그래도 정말 잘 한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방향을 잃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아마 저였다면 그 일이 마음에 걸려 다음 스텝을 계속 밟지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했을 겁니다. 우리는 보통 첫 단추를 잘 꿰는 게 중요하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반드시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일, 주님의 나라입니다. 그걸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말이 바로 은혜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죄로 인해 첫 단추가 잘못 꿰어졌지만, 하나님이 그걸 바로잡으시는 일, 그걸 성경은 은혜라 합니다. 인간이 엉망진창으로 만든 하나님나라를 하나님 스스로 회복시키는 일, 그걸 성경은 은혜라 합니다. 주님 스스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잘못 꿰어진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신비한 계획, 그걸 은혜라 합니다. 우리가 다시 넘어지고 다시 실패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사탄이 우리를 다시 넘어뜨릴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최후의 반격이 바로 은혜입니다. 우리가 잘해도 교만해지지 않고, 우리가 못해도 절망하지 않으며, 언제나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 그것이 은혜입니다. 사탄이 아무리 강력한 역살을 날려도, 우리로 아무런 해를 입지 않고, 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게 하는 능력,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오늘 안디옥의 성도들은 바울과 실라를 향해 그 은혜에 부탁한다, 인사합니다. 비록 시작은 부족했지만, 그것을 하나님이 더욱 놀라운 열매로 바꾸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현실이 됩니다. 바울이 바나바가 아닌, 로마 시민권을 가진 실라와 동역하게 되면서, 둘은 단순히 1차 여행 때의 선교지를 돌아보는 데 멈추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곳을 개척하여 전진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반대편의 마가는 이 일을 통해 더 성숙해져서, 결국 마가복음을 기록하는 충성된 종이자, 훗날 베드로가 자신의 아들이라 부를 만큼(베드로전서 5:13), 성숙한 모습으로 거듭납니다. 잘못 꿰어진 첫 단추로 인해 옷 전체를 새롭게 디자인하는 기회가 생긴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을 돌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잘못 꿰어진 첫 단추에 대해 끊임없이 상기시키며, 아픈 과거에 우리의 발을 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과거가 아닌 미래에서 오십니다. 어떻게 잘못 꿰어진 단추가 바르게 엮이는지 현재에 머문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이 아름답게 완성된 미래에서 우리에게로 오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천지의 창조주 여호와라고, 내가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이며, 모든 구원의 시작과 마침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 잘못 꿰어진 첫 단추로 인해, 네가 입고 있는 옷 전체를 바꿀 지혜와 능력이 내게 있노라고, 이미 아름답게 완성된 옷을 입은 존귀한 네가 내 안에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인간의 가장 큰 어리석음과 죄에서도 최고의 선을 이끌어내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심”(T. Wright)을 증언하는 책입니다. 여러분, 이 말은, 그 은혜를 핑계로 더 아무렇게나 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그 은혜를 핑계로 우리의 허물을 가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엎질러진 일들에 휩쓸려 앞으로 행하실 주님의 은혜를 무시하거나 애써 거절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사탄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은, 바울과 바나바를 갈라서게 하는 일이 아니라, 그 일로 인해 처음의 목표를 잃게 만드는 일이었음을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인생의 첫 단추를 꿰고 있는 여러분. 어쩌면 뭔가 잘못 꿰어졌다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잘못 꿰는 것은 우리 일이고, 그것을 회복시켜 이루는 것은 주님의 일입니다. 다투고 싸워 발작이나 다름없는 부끄러운 모습으로 시작했지만, 그러나 그때도 은혜를 의지하고 앞에서 오시는 하나님의 미래를 바라봐야 합니다. 잘못 꿰어진 그 첫 단추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정말 당신이 하고픈 일을 이루실 수 있음을 믿는 것, 모든 게 뒤죽박죽되고 모든 게 엉망진창인 게 아니라, 이제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일이 시작일 뿐임을 믿는 것, 그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심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기를 원합니다. 서두에 이야기한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는 이렇게 끝납니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성도는 그만큼 작아도 괜찮습니다. 그 작은 힘으로 세상의 크고 놀라운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고, 그것이 은혜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모래처럼, 바람처럼, 먼지처럼, 풀처럼, 작고 보잘 것 없는 우리의 삶을, 지금도 붙드시고 이끄셔서, 우리를 결국 주님의 충성된 종으로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 오직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만 당신의 일을 이루시겠다 하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에 저도 여러분을 다시 한 번 부탁하며 오늘 말씀을 맺습니다. 주님의 변함없는 십자가의 은혜가 여러분과 매순간 동행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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