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은혜' 2016년 4월 3일 주일 설교

2016-04-03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1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60403 부활절 두 번째 주일 --------------------------------------------- 사도행전 13장 38~52절, 은혜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60403.mp3 포도 과수원을 가진 한 주인이 일꾼이 필요해서 이른 새벽 인력시장에 나갔습니다. 거기서 일감을 기다리던 사람 몇을 데려다가 일당 10만원을 주기로 약속하고 자기 과수원에 데려가 일을 시켰습니다. 아침을 먹고 아홉시쯤 주인이 광장에 나가보니 일이 없어 무료하게 놀고 있는 사람들이 보여, 그들에게 자기 과수원에서 일하면 정당한 삯을 쳐 주겠노라 말하자, 그들도 좋아하며 과수원으로 갔습니다. 점심때가 다 돼서 다시 나가보니 또 그런 사람들이 있었고, 주인은 같은 방법으로 일꾼들을 불렀고, 오후 세 시에도 주인은 똑같이 사람들을 고용해서 일을 맡겼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루해가 다 져 가는 오후 늦게도 다시 광장에 나갔습니다. 역시나 그 시간까지도 일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한숨을 쉬며 광장을 서성이고만 있었습니다. “왜 그러고 있느냐?”는 질문에, “우리를 써 주는 사람이 없어 이러고 있소.” 대답하는 그들을, 주인은 다시 한 번 자신의 포도원에 고용했습니다. 날이 다 저물어서 일과가 끝나자 주인은 일꾼들을 차례로 불러 일한 삯을 나눠줍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가장 늦게 온 사람들부터 역순으로 차례대로 일당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오후 늦게 저녁이 다 돼서 일을 시작한 그룹, 고작 한 시간 일한 사람들에게 먼저 하루치 일당 10만원을 줬습니다. 이게 웬 횡재냐, 오늘 땡잡았다, 신이 난 얼굴을 하고 사무실에서 나오자, 기다리던 다른 일꾼들의 마음도 덩달아 설렙니다. 그런데 사무실에 들어가 보니 역시나 일당 10만원을 줍니다. 한낮에, 그리고 아침 일찍 와서 종일 수고하고 더위를 견딘 일꾼들은 금방 입이 댓 발 나옵니다. 그리고 결국 주인에게 가서 따져 물었습니다. 이건 정말 unfair한 처사라고. 주인이 답합니다. “친구여, 도대체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10만원으로 정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가지고 돌아가시오. 당신에게 주는 것과 똑같이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주는 것이 내 뜻이오. 내 것 가지고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선한 처사가 당신의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물었습니다. 그렇게 일꾼들은 아무 대꾸도 못한 채, 그렇게 모두 일당을 받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물론 모두 다른 마음으로 말입니다. 아시는 대로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사랑하는 친구들,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얼마 전에 종려주일, 부활주일을 지냈습니다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직전, 그러니까 십자가 사건이 있기 바로 전에 이 대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런 질문을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희를 좀 보십시오. 저희는 저희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러니, 저희가 무엇을 받겠습니까?” 주님이 대답하십니다.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첫째였다가 꼴찌가 되는 사람들도, 또 꼴찌였다가 첫째가 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면서 하신 비유가 오늘 포도원 일꾼의 비유입니다. (어떤 의미인지 이해가 좀 되십니까?) 그런데요 여러분, 제자들이 주님을 따르는 자신들의 보상에 대해 질문한 데는 그 나름의 배경이 또 있습니다. 마을에서 가장 돈이 많기로 유명한 부자 청년 하나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답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잘 지켜라.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하지 마라, 부모를 공경해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해라, 하시는 계명이다.” 청년이 다시 묻습니다. “저는 그 모든 것을 다 지켰습니다. 그런데 제가 더 해야 할 뭔가가 아직 있습니까?” 주님이 그의 진심을 보셨고, 그를 깊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구나. 그러려면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서 그걸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어라. 그러고 나서 나를 따라와라.” 재산이 많던 이 청년은, 이 말씀을 듣고 풀이 죽어 근심하며 주님을 떠나갔습니다. 그가 다시 주님께로 돌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그렇게 떠나고 나자, 주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분명히 말해 두지만, 부자는 천국 가기가 어렵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놀란 제자들이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주님의 대답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였습니다. 율법적으로 거의 완전한 모습이던 그 청년이 그렇게 돌아가고, 제자들은, 그 청년이 하지 못한 그 일을 지금 자신들이 하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주님께 드러내며 질문했던 거였습니다. “저희는 어떤 보상이 있겠습니까?” 하고 말입니다. 시간을 한 번만 더 거슬러서, 그 청년이 주님께 찾아오기 전으로 가보면, 주님은 한 어린아이, 한 ‘파이디온’을 제자들 앞에 세우고 화를 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아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 하나님나라는 이런 자의 것이다. 내가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하나님나라를 이 ‘파이디온’과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 대화의 맥락 안에, 한 부자 청년이 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여러분 이 여러 장면들을 하나의 시퀀스 안에 잘 담아두시기 바랍니다. 처음 그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 따른다면, 아마 이 어린아이는 해가 다 져서 포도원에 왔던 일꾼, 오기만 했지, 사실 잠깐 일하는 시늉만 하고 일당을 받아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아마 광장에서 포도원으로, 포도원 입구에서 일하는 현장으로 그냥 이동하다가 하루 일과가 끝났을 겁니다. 아무 것도 한 것 없이 그냥 주인의 은혜로 일당을 받고 기뻐한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잘 지킨 부자 청년은 아마 점심 때 쯤 포도원에 왔던 일꾼들일 겁니다. 주인을 위해서 뜨거운 태양 아래 나름의 수고를 하고 순종하며 일당을 받았습니다. 비록 충분히 일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또 처음부터는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 분발하여 열심히 일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받은 일당도 같았습니다. 주님을 위해 많은 것을 버리고 지금 주님을 따르고 있다는 제자들은 아침 아홉시 쯤 광장에서 불려온 일꾼들입니다. 새벽시장에서는 잘 팔리지 않던 일꾼들. 뭔가 잘 안 되던 사람들, 뭔가 부족했고, 뭔가 모자란, 사람들, 그래서 새벽부터 주인들이 고용하지는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루치의 수고를 충분히 했다고 자부할만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정확히 10만원 하루 일당이었고, 그런 주인의 은혜에 가장 크게 불만을 제기한 사람들 속에 그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본문에는, 가장 이른 새벽, 제일 먼저 주인에게 픽업되었던 일꾼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안디옥의 한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과 바나바에게 ‘시기’가 북받쳐 올라, 욕설을 퍼부으며 반대하던 바로 그 유대인들 무리입니다. 가장 먼저 주인을 만났던 사람들, 이른 새벽부터 주인의 택함을 받아 주인의 포도원에서 수고한 사람들, 그리고 역시나 동일하게 약속한 하루치의 보상을 받았지만, 주인의 호의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들이, 오늘 하나님의 은혜가 이방인들, 파이디온들을 향해 선포되는 자리에서, 분노와 시기로 열폭하고 있는 바로 그 유대인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하나님을 알고 섬겼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할 때, 우리는 모두가 처음엔 파이디온입니다. 새벽에 오든, 아침에 오든, 한낮에 오든 저녁 무렵 오든, 주님이 우리를 택하실 땐 누구나 은혜요, 누구나 감사입니다. 그런데 잠시 후 또 다른 누군가가 내 뒤에 들어오고, 훨씬 더 후에도, 또 누군가가 은혜를 입습니다. 그동안 내가 흘린 많은 땀과 수고가 왠지 아깝고, 왠지 억울한 느낌이 듭니다. 그래도 뭔가 더 주겠지, 뭔가 다를 거야, 혹시 다른 보상이 없으면 어떻하지, 생각하다 결국 같은 은혜 앞에서, 주인은 악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사람은 누구나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이 아니라, 나보다 나중에 온 사람의 기준에서 나를 바라봅니다.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이 10만원 받았으니, 나도 10만원만 받으면 너무나 감사하다 생각하지 않고, 늦게 온 저 사람이 10만원이면 나는 15만원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어느 새 자신이 새벽에 온 사람이라고 확신해 버립니다. 한 시간 어영부영하다가 일당 받은 파이디온이 아니라, 열두 시간 내내 일한 사람이 바로 나라고 여깁니다. 나중 된 사람이 처음이 되고, 처음이었던 사람이 벌써 나중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껏 기다려온 메시아가 자신들은 물론 자신들을 그렇게나 억압하고 괴롭힌 이방인들에게까지도 동일한 천국을 선포하시는 것을 보며, 들고 있던 종려가지를 버리고 칼을 들었고, 호산나 대신 십자가를 외쳤습니다. 그런 unfair한 주인, 우리에겐 필요 없다고, 스스로 심판자가 되어, 주인을 정죄하고 주인을 찾아가 칼을 들이댔습니다. 새벽 미명에 희미한 빛으로 보이던 그 반가운 얼굴, 일당을 주고 살아갈 힘을 주기 위해 자신을 택하고 기회를 준 그 고마운 주인이 그렇게 원수가 되어 십자가 매달려 죽은 것입니다. 그런 유대인들의 모습에 대해 오늘 바울과 바나바는 이렇게 말합니다. 46절을 함께 보십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그렇게 이방인을 시기하는 유대인들은,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라고 그들은 어느새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의 메시지를 듣고 있던 사람들에게, 그래서 그 메시지를 다음 주에도 다시 전해달라는 사람들에게, 43절 끝에 보면,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합니다. 지금의 그 마음으로,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라는 의미로 읽힙니다. 주님의 은혜를 은혜로 여길 수 있는 파이디온의 모습으로 하나님과 주변의 동료들을 바라보라, 그렇게 들립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메시지로 주님 말씀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항상 주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러 사십시다. 나를 주님의 자녀 삼고 먼저 택하셔서 먼저 일하게 하신 그 은혜 가운데 늘 머물러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한 작가가 그랬습니다. 인간의 언어 가운데 가장 많이 오염된 말이 ‘은혜’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최악의 오용은, ‘은혜를 갚는다.’라는 말이라고. 애초부터 갚을 길이 없고, 갚을 것을 요구하지도 않는 것이 은혜인데도, 우리는 그런 ‘은혜’ 뒤에 ‘갚는다’는 말 붙이기를 너무나 당연하게 여긴다고 그는 말합니다. 부모의 은혜, 스승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 모두 그렇습니다. 물론 갚고자 하는 감사함으로 살 수 있다면 좋고, 그 마음가짐으로 겸손히 살면 다행인데, 어느 순간 우리는 은혜를 주신 하나님이 아닌, 또 다른 은혜의 수혜자들을 바라보며, 점점 스스로 그 은혜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전락해버립니다. 서로의 흘린 땀을 내 잣대로 비교하고, 내 기준에 맞추어 상대방의 땀을 비판하며, 은혜를 갚고자 하는 그 노력 자체를, 마치 내 인격이요 자랑이요, 은혜의 조건인 것처럼, 처음과 끝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린 채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은혜를 은혜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기뻐하며 감사하며 사는 것, 그뿐입니다. 간혹 살다가 누군가가 나의 은혜를 필요로 할 때, 비록 주님이 내게 베푸신 일만 달란트 은혜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것이지만, 그 작은 은혜라도 누군가에게 베풀며 살라고, 정말 은혜로 그냥 주며 사는 그런 존재가 되라고,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그 사람이 돌아가는 길에 백 데나리온 빚 진 사람에게 왜 그토록 가혹하게 대했을까, 그것에 대해, 누군가는 그런 답을 했습니다. 그는 일만 달란트의 탕감을 탕감으로 여기지 않고, 일종의 집행유예로 여겼다. 언젠가는 갚아야 할 빚으로, 언젠가는 인사치레라도 해야 할 신세로, 사람 마음 어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그렇게 했다. 그래서 백 데나리온을 받아내서라도 기어이 뭔가 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은혜를 은혜로 인식하지 못하고 결국 다시 은혜는 빚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했습니다. 혹시 우리가 그렇게 예수를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차피 못 갚을 은혜, 굳이 신세지기 싫어, 굳이 탕감 받은 자로 살기 싫어서, 되지도 않는 은혜 갚는 흉내를 내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크든 작든, 주님을 위해 내가 하는 일들이 마치 응당 해야 하는 빚쟁이의 의무처럼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그러다가 잘 은혜를 누리고 사는 사람들을 향해, 왜 너희는 그러냐고, 왜 그냥 기뻐하고 감사하고만 있느냐고, 괜히 정죄하고 비난하지는 않습니까? 어느새 우리의 헌신과 섬김, 그리고 우리의 관계, 또 이 예배마저도 그런 모순적인 ‘은혜’의 늪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에 합당한 술어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를 은혜로 여기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사의 샘에서 ‘기쁨’을 길어 올리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이 전한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바로 그것이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혹시 받고, 감사하며, 기뻐하는, 이 세 가지가 여러분 마음 가운데 잘 보존되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받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으로 족한 것이 우리의 신앙이요, 우리의 삶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항상 머물러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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