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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눈물을(2)' 2015년 6월 29일 새벽 설교

2015-06-29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6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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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29 월요일 새벽기도회  ---------------------------------------------- 이사야 38장 1~6절,  이사야 강해298  기도를, 눈물을(2) * 설교 음성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50629.mp3  이사야서 이백아흔여덟 번째 말씀으로, ‘기도를, 눈물을’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지난 주 우리가 묵상한 37장의 끝은 아시는 대로 앗수르의 패배로, 더 정확히는 앗수르의 왕 산헤립의 죽음으로 끝을 맺습니다. 37장 38절이 그 내용입니다. 이어지는 38장 역시 한 나라의 왕의 위기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삶의 끝을 마주한 산헤립과 달리, 지금까지 유다를 다스려온 시간을 다시 한 번 더 은혜로 거저 받습니다. 37장의 내용과 명백한 대조를 이룹니다. 저도 한 번 상상을 해봤습니다. 만약 고백교회를 15년 목회했을 때, 그러니까 제 나이가 마흔 네다섯 살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이렇게 히스기야에게 하신 것처럼 말씀하신다면, 그리고 제가 하나님께 매달려 다시 15년의 시간을 덤으로 받는다면, 그땐 어떤 마음일까. 물론 그래봐야 너무 젊은 나이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해지리라 생각합니다. 고백교회를 섬겨 온 그 시간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해주신 것이 못내 마음에 감동이 되리라, 여겨집니다. 오늘 히스기야도 그랬을지 모릅니다. 더구나 그는, 그의 오늘 기도에도 나타나듯, 자신의 인생에 대한 나름의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었기에, 더욱 오늘의 응답에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히스기야의 기도가 소위 말하는 ‘자뻑’의 모습만은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난주 금요일에도 잠깐 살펴본 대로, 그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라는 분명한 기준이 있었고, 그 기준 아래 많은 선하고 바른 일들을 행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늘 히스기야의 기도에 15년의 보상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기준은 그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습니다. 히스기야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면, 5절인데요, 15년 이야기 바로 앞에는,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기도 중에 강조했던,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한 것,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에 관한 이야기는 없고, 다만 지금 히스기야가 눈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그것만을 언급하실 뿐입니다. 분명한 관점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가 지금까지 잘 해왔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그 일로 인해 응답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 그 문제로 인하여 눈물로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두고 계십니다. 그러고 보면 37장에서 앗수르의 위협 앞에 있을 때 드린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이 하셨던 말씀도 이와 같은 뉘앙스였음이 생각이 납니다. 37장 21절이었지요.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사람을 보내어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네가 앗수르의 산헤립 왕의 일로 내게 기도하였도다 하시고.”입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첫 마디는, “네가 이 문제를 가지고 나에게 기도했다.”입니다. 히스기야가 할 수 있는 다른 모든 선택지들 가운데, 기도라는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온 것, 그것이 하나님께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깊은 통곡의 눈물로 기도해보신 적이 근래 언제였는지요? 그것이 회개의 눈물이든, 아니면 오늘 히스기야처럼, 정말 간절한 소망의 눈물이든,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이 열려져 하나님을 전심으로 구하고 찾았던 그런 경험이 언제 있으셨습니까? 벽과 같은 꽉 막힌 상황 속에서, 하나님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함과 깊은 신뢰감으로 뒤덮여, 하나님을 찾기 위해 몸부림치던 일이, 여러분 언제였습니까? 우리는 뭔가를 구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할 때마다 오늘 히스기야처럼 기도하게 되곤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께 뭔가 잘한 것, 그래도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괜찮은 모습일 때를 떠올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부족한 모습이라고 스스로 판단될 땐 기도도 잘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기도를 잘 못하고, 왠지 하나님이 더 기도를 잘 들어줄 것 같이 생긴 누군가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그게 사람 사는 도리 같기도 해서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히스기야 같은 훌륭한 사람이 기도해도 응답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이유입니다. 그가 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늘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교회 와서 기도를 배울 때 제일 먼저 하는 게 기도를 마무리하는 그 방법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의 말씀,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는 이 말씀이 그 근거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내 이름으로 하나님께 보내지는 편지가 아닙니다. 아마 내 이름으로 사인 된 요청서라면 모두 반송일 겁니다. 구하는 내용은 다 내 간구이지만, 마지막 끝은 예수의 이름으로 사인되어 보내집니다. 그게 우리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반송하실 수 없습니다. 나의 이름으로, 나의 정체성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으로, 그분의 의와 그분의 자격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하니, 그분의 뜻에 따라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내는 사람의 이름과 내용이 일치해야 함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 중 누가 어떤 기도의 제목이 100% 예수님의 뜻과 맞는지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늘 그 뜻을 구하고 깨달아가야 하지만, 뜻에 다 맞는 기도를 할 때까지 기도를 미뤄두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기도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기쁨이며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증거이자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표증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기도하지 못할 내용은 없음을 오늘 히스기야는 보여줍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사야가 전한 내용에 대해서도 그는 반대의 응답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그런 모습이 그저 좋고 기쁘셨을 겁니다. 무엇이든 구하면 주시는 하나님으로 믿는 히스기야의 순수한 마음, 그리고 눈물로 간구할 수 있는 진실한 마음이, 그동안 그가 잘했다고 자랑하는 그 별 것 아닌 삶보다, 훨씬 더 사랑스럽고 예뻐 보이셨을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기도 맨 뒤엔 언제나 주님의 이름이 있음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무엇이든 마음껏 구해 보십시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못 살았으면 못 산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간구합시다. 기도 외에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이 일하지 않으심을 기억하며, 다시 주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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