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담대히 말하고" 2015년 3월 22일 주일 설교

2015-03-22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20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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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22 사순절 다섯 번째 주 ----------------------------------------- 사도행전 9장 23~31절, 담대히 말하고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50322.mp3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 말씀으로 ‘담대히 말하고’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많은 책이 나오고 또 소비되는 큰 서점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의 좋은 지표 역할을 할 때가 많습니다. 예전에는 그래서 자주 대형서점에 들러서, 꼭 책을 사지 않더라도, 책도 보고, 사람도 보고, 그러면서 사회도 보는 그런 경우가 많았는데요, 말씀을 준비하면서 직접 가보지는 못해도 인터넷 서점은 한 번 좀 둘러봐야겠다, 생각이 들어 차분히 인터넷 서점을 묵상을 했더랬습니다. 그렇게 책의 이름들만 쭉 확인을 해도 확실히 요즘 사회와 서민들의 삶의 모습이 느껴집니다. 여러분 요즘 베스트셀러의 어떤 흐름, 또는 핵심적인 키워드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용기’입니다. ‘미움 받을 용기’, ‘버텨내는 용기’(이상 기시미 이치로), ‘인생에게 지지 않을 용기’(알프레드 아들러), ‘나와 마주서는 용기’(로버트 스티븐), ‘1그램의 용기’(한비야) 등 ‘용기’라는 말이 들어간 책들이 베스트 목록에 쭉 들어와 있습니다. [인화와 성환 형제의 이야기도 생각이 났습니다.] 서민들의 삶이 팍팍해지고 청년들의 미래가 불확실해지면서, 한쪽에서는 그러한 아픔과 버거움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그걸 이겨내고 극복하는 용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건데, 지금은 후자의 목소리가 훨씬 더 큰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아프니까 청춘인거다, 이렇게 말하는 것보다는, 없는 용기라도 짜내서, 이 파도를 넘어가자는 소리가 훨씬 더 건강해 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태생적으로 용기가 없으면 안 되는 족속입니다. 성경에 담대하라는 말씀 천지입니다. 앙고 없는 찐빵, 그게 용기 없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쥐뿔 아무 것도 없어도,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8:38~39)는 믿음, 죽음 너머의 부활을 믿는 믿음, 그 보이지 않는 무기로 눈에 보이는 모든 칼날과 맞서는 존재가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는 1)용기 있는 성도의 모습이 어떠한지, 2)어떻게 그 거룩한 용기를 가질 수 있는지, 그리고 3)그 용기는 어디에,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관한 메시지로 가득합니다. 내용은 간단하고, 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울이 3년간의 아라비아와 다메섹의 생활을 마감하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서 거기의 제자들과 사귀려고 시도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 자체가 녹록치 않았고, 막상 예루살렘에 갔지만, 거기 제자들 역시 다들 믿지 않고 두려워합니다. 바로 그때 바나바가 나타나 사울의 보증인을 자처하고, 결국 사울이 제자들과 자유롭게 교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줍니다. ■ 그런데 본문의 이러한 내용 뒤로 미묘한 두려움의 그림자가 느껴집니다. 1)사울을 죽이려는 다메섹(23절)과 예루살렘 사람들(29절)의 살기가 있기 때문이고, 또 2)사울의 변화를 신뢰하지 못하는 예루살렘의 제자들이 사울에게 가진 두려움이 보입니다. 그리고 3)제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사울이 가진 관계에 대한 두려움도 느껴집니다. 사울은 예수를 믿고 얼마 되지 않을 때부터 목숨의 위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급격하게 회심을 했고, 또 그 변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위협이 되었는가를 반증합니다. 여러분 혹시 누군가가 여러분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한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그런 미움을 받아보신 적은요?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저도 그런 경험은 없습니다.] 사실 그래서 이 대목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와 닿지 않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1)같은 신앙을 가진 우리의 모습을 한 번 더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예수를 믿고 어떻게 그 믿음을 삶에서 살아냈기에 죽음의 위협을 늘 받고 살았는가, 우리는 사울의 인생 앞에 자연스럽게 조용해집니다. 또 2)그러한 위협 속에서도 사울이 무엇을 말하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주목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 사도 바울이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한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게 몸 편하고 마음 편하여 한 고백이 아님을 우리는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기쁨이 감정의 한 형태가 아니라, 깊은 신앙의 열매라는 것을, [Talk Bible, 성령의 열매] 바울의 이러한 삶과 고백이 그대로 보여줍니다. 삶의 형편과 조건이 아니라, 그가 가진 믿음의 조건과 상태에 따라, 성도의 기쁨과 행복이 결정됨을 삶으로 증언할 수 있는 우리의 삶이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울은 다메섹에서 생의 첫 번째 죽음의 위기에 직면합니다.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한다고 본문 23절은 이야기하는데요, 사실 유대인들만 죽이려고 한 게 아닙니다. 지난 주 설교 시간에도 잠깐 언급을 드렸습니다만, 이 부분을 언급하고 있는 고린도후서 11장 32-33절에 보면, 아레다 왕의 방백이 사울을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키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안에서는 유대인들이 밖에서는 아레다 왕의 군사들이 겹겹이 사울을 둘러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4절에 보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진 것입니다. 헬라어 성경에 보면, 1)이 알려졌다는 동사가 문장의 가장 앞으로 나와 강조되어 있습니다. 알고 있는 사울이 강조되는 게 아니라, 알게 된 그 사실 자체가 강조되는 부분입니다. 2)더욱이 여기 ‘알려졌다’는 단어 ‘기노스코’는 대충 그 사실만 알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남녀 사이에 사용될 때는 성적 연합을 가리킬만큼, 깊고 자세한 앎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울이 그들의 모든 전략과 음모를 샅샅이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3)그런데 본문에도 나타나는 것처럼 그것은 철저하게 수동적인 의미입니다. 사울이 알게 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통해 그 사실이 사울에게 알려진 것입니다. 나중에 사울의 다른 편지들을 보시면 알겠지만, 사울이 누구 눈치 보며 그들의 음모나 계략을 캐고 다니는 그런 위인이 되지를 못합니다. 더구나 알고자 한다고 조직적인 테러의 계획을 사울이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구체적인 경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사울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이 사울을 그 위험으로부터 건지시기 위해 전적으로 개입하셔서 그 모든 상황을 사울에게 알려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계교는 철저한 보안과 어둠 속에서 만들어지고 진행됩니다. 교만한 인간의 마음은 내가 은밀하게 행하면 그것이 은밀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성도들도 그렇습니다. 왜 그렇게 담대하게 죄를 짓습니까?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빛이신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떤 인간의 계교와 음모도 은밀할 수 없습니다. [전도서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예레미야 23:2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이사야 29:15~16, “15.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 16.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바로 그 불꽃 같은 눈동자의 하나님께서 사울을 지키시고 보호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다윗이 시편 27편에서 노래합니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이렇게 오히려 사람들에게 반문합니다. 그 빛이 사울의 눈과 귀가 되어주셨습니다. 그 깜깜한 밤, 제자들이 내려준 광주리에 담겨, 다메섹의 성벽 아래로 내려오던 사울이 무슨 노래를 부르고 있었을까, 어떤 기도를 드리고 있었을까. 분명 사울은 그 밤 내내, 이 시편 27편의 노래를 읊조리며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누리고 있었을 겁니다. “사람이 나를 해할 수 없구나, 군대가 나를 칠 수 없구나!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고, 나를 지키시는 이,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구나.” 아마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그 성벽을 내려왔을 겁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10:29~31) 성도에겐 이 믿음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기 전에는 그 무엇도 나를 만질 수 없다는 분명한 믿음 안에 의연히 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명이 끝나지 않는 한, 성도는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막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주의 일을 감당하는 사울을 하나님이 잡혀가도록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 말씀이 위로가 되십니까? 내가 이 땅에 있어야 할, 내가 살아야 할 이유, 내가 여기 있어야 할 이유가 남아 있는 한 결코 세상은 성도를 어찌할 수 없습니다. 내게 주신 이 땅의 사명이 끝나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면 그만입니다. 성도의 의연함이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 이 믿음 안에 있기에 사울은 죽음의 골짜기에서도 담대함 그 자체입니다. 본문 27절, 29절에 담대하다는 단어가 연이어 나옵니다만, 그 말의 주체가 누구입니까? 모두 사울입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 있는 사울이, 오늘 본문에서 가장 담대한 존재로 서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계교가 나를 어찌할 수 없구나. 나를 해하는 그 어떤 은밀한 계교도, 누구를 통해서라도, 반드시 하나님은 내게 알려지게 하시는구나.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반드시 피할 길을 허락하시는구나.” 깊은 확신 속에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하는 데 담대했던 이 사울의 용기가 부디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충만히 임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 땅의 변화와 많은 혼돈 속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의 소리와 세상의 계교 속에서도, 상황에 흔들려 일희일비 하지 않고, 늘 의연히 서서 여러분 각 사람을 향한 주의 뜻을 이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 이렇게 사울은 담대한데, 사울을 맞이하는 예루살렘의 제자들은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26절에 보면, “다 두려워했다.” 이렇게 나옵니다. 참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이 예루살렘의 제자들은 사실 좀 다른 사람들이 아닙니까? 여러분 스데반의 죽음 이후 예루살렘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대대적인 박해와 핍박이 시작되어서 사도들을 비롯한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그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어지간한 고난과 핍박 따위는 그냥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담대함을 그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말 말 그대로 믿음의 강심장을 가진 사람들인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울을 믿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에 휩싸입니다. 얼핏 이해가 되지 않지만, 공포가 각인되는 것임을 생각하면 조금은 그 마음이 헤아려집니다. 제가 얼마 전에 영화 ‘피에타’를 봤는데요, 이 대목에서 그 영화가 생각이 났습니다. 주인공 강도라는 남자는, 채무자를 협박해서 돈을 대신 받아주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잔인하냐면, 돈을 제때 갚지 못하는 사람을 찾아가 신체 보험을 들게 하고, 결국 팔이나 다리를 아예 못쓰게 만들어서 그 보험금으로 대신 돈을 갚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돈을 빌린 사람들은 강도를 거의 저승사자처럼 두려워합니다. 영화 후반부에는 강도가 마음을 돌이키고 자신이 피해를 준 사람들을 다시 찾아가 스스로 사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그때 강도를 다시 본 채무자들은 심지어 자기도 모르게 소변을 보기도 합니다. 과거의 공포가 그토록 강력하게 사람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사울을 두려워하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여기 26절에 ‘두려워하여’라는 말에 쓰인 단어가 헬라어 ‘포베오’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무슨 공포증으로 부를 때 사용하는 ‘포비아’ 그 단어입니다. 과거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 잡아갈 때 이미 너무나 큰 공포감을 느낀 겁니다. 그럴 만 합니다. 스데반이 사울의 주도 하에 돌에 맞아 죽었으니 말입니다. 그들은 모두 소위 ‘사울 포비아’에 사로잡혀 있는 겁니다. 사실 이러한 상황은 사울 입장에서도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내가 담대할 수는 있지만, 남이 나를 두려워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울이라지만,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아마 사울에게는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수많은 대적자들보다도 자신이 너무나 미안하고 부끄럽고 그러나 사랑하는 이 성도들의 이런 마음이 훨씬 더 두려운 문제였을 것입니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죄책감과 두려움, 그것이 바로 오늘 사울을 사로잡은 공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사울과 그 공동체를 위해, 진정으로 담대한 한 사람을 보내시고 위로하십니다. 사도행전 4장에서 처음 등장했다가 전혀 모습이 나타나지 않던 바나바. 그가 난 데 없이 이 두려움의 공간에 등장합니다. 말 그대로 ‘짜잔’하고 나타납니다. 그가 그간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성경은 말해주지 않지만, 그는 두려움으로 가득한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준비된, 진정으로 담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바나바에 대해 작은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바나바가 어떻게 생겼을지 한 번 머릿속으로 그려보십시오. 아마 KFC 정문 앞에 서 있는 할아버지 같은, 그런 모습을 상상하실 겁니다. 법 없이도 살 아주 착한 사람, 사람과의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실수나 잘못도 너그러이 용서해주는, 그런 사람이 바나바로 생각합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겠지만, 그러나 성경이 묘사하는 바나바의 모습은 그런 우리의 선입관과 달리, 다른 곳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바나바를 묘사하는 성경의 대표적인 구절이 사도행전 11:24입니다. 한 번 찾아보실까요?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아마 바나바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고정된 데는 이 구절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겁니다. 여기 보면, 바나바의 첫 번째 성품에 대해 ‘착하다’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아가도스’(άγαθός)를 번역한 말인데요, 이 말이 상대방을 향한 호의나 선한 행위를 의미하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 다른 곳에서의 용례를 생각해보면 이 말이 그저 착하다는 의미가 아님을 알 수 있는데요,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묘사에서 쓰이는 단어이기도 하다는 점을 일단 기억하고, 이것이 사람에게 사용된 경우, 여러분,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예수님의 시신을 빌라도에게 가서 달라고 해서, 자신의 새 무덤에 장사를 지냈던 사람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리마대 출신의 요셉입니다. 그를 누가가 묘사하는 누가복음 23장에 보면, 요셉을 향하여, 이 단어를 사용하는 걸 보게 됩니다. “50.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51.(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여기 ‘선하다’라고 번역된 단어가 바로 앞서 바나바를 묘사할 때 쓰였던 ‘아가도스’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착하다, 선하다는 말의 의미가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끼실 겁니다. 그냥 성품이 온화하고 착한 사람, 이게 아니라, 자신이 선이라고 믿는 바, 진리라고 여기는 바에 대해, 거리낌 없이 말하고, 행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 그런 사람을 성경은 ‘아가도스’, 곧 착하고 선하다, 말씀하는 것입니다. 바나바가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곳이 사도행전 4장의 내용입니다. 거기 보면,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들이 자신의 땅을 판 돈을 사도들 앞에 가져오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때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바나바였는데요, 그때 바나바를 묘사하면서 성경은,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대목에 대해서도 사실은 그냥 바나바가 참 착한 일을 했다, 이렇게 받아들이면 조금은 부족한 이해임을 예전에 말씀드렸습니다. 누가 착해서 자기 집을 팔겠습니까? 헬라파 유대인으로 타국에서 태어난 바나바의 그 집은 그가 타국에서 평생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이제 꿈에 그리던 고향에 와서 이후의 삶을 위해 직접 구매한 땅일 겁니다. 그런 땅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하나님께 드린다? 이건 우리가 보통 말하는 착한 것으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그가 밭을 판 이유, 그것은 그가 율법에 있어서 토지를 소유할 수 없는 레위인으로서 땅과 집을 가지고 있던 것을 회개하고, 그 말씀 앞에 복종한 행위였던 것입니다. 진리를 믿고, 그 진리 앞에 복종하여 온전히 살아내는 용기, 그게 바로 성도의 진정한 용기, 성도만의 용기인 것입니다. 오늘 사울과 제자들의 두려움을 깨뜨리고 나오는 이 대목에서 바나바가 취하고 있는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인간적인 호의나 립 서비스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살펴보심에 대한 진정성 있는 반응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십계명의 아홉 번째 계명이 무엇인지 혹시 기억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보통 다른 계명들에 비해 이 계명은 잘 모르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이런 건 잘 기억하는데, 이 부분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이 계명의 삶의 자리와 오늘날의 상황과는 많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고대 사회에는 범죄나 무슨 사건이 발생하면 그것을 조사하고 수사해서 범인을 가리는 일이 참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처럼 무슨 CCTV가 있는 것도 아니고, CSI처럼 과학수사가 가능한 것도 아니고, 순전히 정황과 상식, 그리고 재판관의 지혜에 근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아기를 두고 두 여인이 서로 자기 아기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솔로몬의 판결, 여러분 기억하실 겁니다. 그런 식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아니면 아예 주술적으로, 점을 치거나 하는 아예 비이성적인 방법으로 가는 경우인 것이지요. 그래서 당시에 판결에 있어서 증인의 증언이란 거의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증인이 몇이냐, 증인의 말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이 되는 것이지요. [제가 예전에 아내 회사가 강남에 있을 때, 아내를 회사까지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런 일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신호에 걸려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제 앞에 트럭 한 대가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트럭이 갑자기 점점 뒤로 밀려오는 겁니다. 거기가 살짝 오르막도로였는데, 기어를 중립에 놓고 브레이크를 안 밟고 있는지 계속 뒤로 밀려왔습니다. 참다못해 제가 경적을 짧게 울렸지요. 그런데도 멈추지를 않고 내려오더니, 결국 제 차를 들이받고야 말았습니다. 어이가 없어 차에서 내려 보니 트럭에서도 지긋한 연세의 아저씨 한 분이 내립니다. 내리더니 다짜고짜 저더러 상욕을 하며 왜 운전을 그 따위로 하냐고, 되려 성을 내는 겁니다. 저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아저씨가 뒤로 밀려서 저를 받았는데 어째서 적반하장이냐고 따졌습니다. 그분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말라고, 뒤에서 와서 받은 주제에 무슨 소리냐고 소리를 지르는 겁니다. 얼마나 그분이 강하고 크게 소리를 지르는지, 제가 순간, ‘정말 내가 뒤에서 박았나? 내가 실수한 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할 정도였습니다. 제 차에는 Black Box도 없었거든요. 그렇게 실랑이가 오가는 와중에 갑자기 두 차선 옆에 있던 다른 트럭 한 대의 운전기사분이 운전석 창문을 내리고 이쪽을 향해 이야기를 하는 거였습니다. “저기, 트럭 아저씨! 당신 차가 밀려서 받은 거잖아. 우길 걸 우겨야지, 나이 꽤나 잡수신 양반이 그게 뭐야, 창피하게. 얼른 사과하고 보험사 부르시오.” 그걸로 모든 싸움이 끝나버렸습니다. 방금 전까지 사람을 잡아먹을 듯이 소리를 높이시던 트럭 운전사 분은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서, 젊은 사람, 미안하게 되었다고, 한 번만 봐달라고, 사정을 하는 모드로 돌변을 한 겁니다. 뭐, 어떻게 하겠습니까? 범퍼가 찌그러진 것도 아니고, [제가 또 워낙 사람이 ‘아가도스’ 하지 않습니까? ^^] 알았다고, 그냥 가시라고, 그렇게 말을 하고 돌아섰습니다. 차에 다시 타서 생각해보니 옆의 그 트럭 운전사 분이 너무 고맙더군요. 그리고 증인이 정말 무섭다, 하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이런 상황이 고대에는 훨씬 더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 결과는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심각한 것이었기에, 하나님은 아예 그 부분에 대한 계명을 십계명 안에 주신 겁니다. 타인에 대하여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라. 여러분, 이것은 그저 내가 적극적으로 그를 거짓말로 증거하는 것만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증언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내가 증인이 되어 그를 살려야 할 때, 침묵으로 일관하여 그를 곤경에 빠뜨리는 소극적인 회피 역시 거짓 증언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게 여러분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심지어 가정에서도 상황에 관계없이, 내가 받을 피해나 오해와 상관없이, 정직하게 증언한다?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아도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우리는 반드시 정직한 증언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만약 성도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 순간에 하나님이 나의 선택을 지켜보심을 믿을 수 없다면, 어떻게 온전한 순종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싸움은 하나님을 내가 두려워하느냐, 아니냐의 싸움이 되는 겁니다. 바나바가 지금 사울을 변호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바나바가 제자들에게 증언하는 내용을 보십시오. 거기 무슨 감정에 호소하는 말이나, 따뜻한 인정을 바라는 말이 하나나 있습니까? 전적으로 객관적인 데이터에 근거한 진술입니다. 두리뭉실하게 그냥 사울이 좋다고 편들어 준 것이 아닙니다. 1)그가 어떻게 주님을 만났는가. 2)주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3)다메섹에서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복음을 전했는가. 이것만을 전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과 홀로 만난 아라비아에서의 3년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내용까지만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겁니다. 지금 바나바는 맘 좋은 아저씨 모습으로 사울 편을 들어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써, 사람들의 두려움과 맞서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일은 대단히 수고스럽고 힘든 일입니다. 바나바도 사울과 같은 헬라파 유대인이어서, 오히려 이런 편들어 줌이 여러 오해를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일을 하려면 많은 수고와 에너지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바나바는 자기 땅을 팔던 모습 그대로 다시 용기를 내어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사울을 끝까지 책임져줘야 하는 문제도 남습니다. 그런데도 27절에 보면 사울이 바나바를 통해 위로를 받은 뉘앙스가 아니라, 전적으로 바나바의 주도 아래 이 일이 이뤄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일일이 설명을 한 것입니다. 바나바가 여기서 모른 척 한다고 누가 그걸 탓하겠습니까? 귀찮고 번거로워 조용히 넘어간다고 해서 누가 그 사실을 알고, 누가 바나바를 정죄하겠습니까? 그러나 바나바는 알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 속에도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불꽃같은 눈동자로 바나바의 선택을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을, 그는 분명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진정 삶으로 순종했던 바나바였기에 그는 담대히 사울을 위한 증언을 해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도의 진정한 용기는, 1)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울의 용기와 더불어, 2)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거룩한 순종의 용기임을 여러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흉내낼 수 없고,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용기, 진리를 향한 성도의 의연한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 땅을 주의 나라로 변화시켜 가고 계십니다. 바나바의 이 증언을 통해 두려움에 젖은 예루살렘이 기쁨과 평안의 도성이 되었습니다. 1)사울을 향한 공포에 떨었던 성도들이 사울을 형제로 받아들인 겁니다. 본문 30절, 예루살렘의 그 제자들을 뭐라고 부릅니까? ‘형제들’입니다. 아델포스, 무슨 뜻이라고 제가 그랬지요? 같은 자궁에서 나온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을 부를 때 사용한 바로 그 말, ‘형제 사울아’ 그 표현이 여기서도 이어집니다. 바나바를 통해 사울은 말 그대로 성도들의 아델포스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 말은 참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예루살렘 교회가 원래 모든 성도들의 모교회,. 어머니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2)사울이 성도들을 향해 가졌던 두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로 받아들여지면서, 어머니의 자궁 같은 예루살렘, 거기서 사울이 이제야 비로소 명실상부한 형제가 된 겁니다. 우리는 이 모든 상황이, 바나바 한 사람의 증언으로 역전된 것이라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말로 두려움의 두꺼운 얼음이 다 녹았습니다. 수백 대 일인데, 바나바 하나로 모든 게 끝납니다. 그의 평소 삶이 어떠했는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말씀 앞에 철저히 복종하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음을 우리는 고스란히 느낄 수 있습니다. 사울을 지키시고, 바나바를 주목하신 그 주님이 여러분을 지키시고, 돌보시고, 우리의 선택을 언제나 바라보고 계십니다. 오늘 이 말씀이 이제 우리의 담대함의 이유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마치 시대정신처럼 세상을 덮고 있는 이 시대 속에서도, 부디 성도의 용기로 세상에 담대하게 맞설 수 있는, 그래서 여러분을 통해 이 땅에, 그리고 우리 교회에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성취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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