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여호수아 24:29~33 (구약 358쪽) 여호와의 종 여호수아

2025-07-06 · 설교 원고 · 9쪽 · 약 19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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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오순절 후 네 번째 주일 [여호수아 강해 40] 여호수아 24:29~33 (구약 358쪽) 여호와의 종 여호수아 본문 31절의 ‘여호와의 종 여호수아’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 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 두 번의 고별 메시지를 끝으로, 여호수아는 결국 자신의 표현대로, ‘온 세상이 가는 길’로 떠났습니다(수 23:14). 그의 나이 110세였습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태어나 살다가 출애굽을 경험하고, 긴 광야 생활 동안 모세의 종으로 섬기다가, 모세를 대신하여 이스라 엘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왔습니다. 7년여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쉽지 않은 기업 분배까지 잘 마무리하고, 결국 약속의 땅에서 받은 자기 기업에 묻혔습니다. 이 스라엘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삶이고, 그 역사를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녹아진 인 생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는 바울의 마지막 고 백이 생각나는, 참으로 아름답고 존귀한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여호수아를 사람들이 그의 기업 ‘딤낫 세라’에 ‘장사’했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우리도 그렇 지만, 성경은 시신을 땅에 묻는 ‘장사’(葬事)를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단순히 죽음 이후의 부 차적 과정이 아니라, 죽음을 확정하고, 완성한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는 ‘사 도신경’에서도,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다음은, 네, “장 사 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라고 나오지요. 죽음 다음에 곧바로 부 활이 아니라, 죽고 장사한 후에 부활입니다. ‘장사’라는 가장 어둡고 낮은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부활의 영광이 있고, 또 흙에서 온 육체가 흙으로 되돌아가는 ‘장사’를 통해 우리 인생이 마무리 된다는 것이, 무척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실 여호수아의 죽음과 장사 외에도 다른 두 사람의 죽음과 장사가 함께 기록되 어 있습니다. 먼저 애굽에서 죽은 요셉의 뼈를 세겜 땅에 장사하는 장면이 32절에 나오는데요, 요셉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훗날 자신의 시신을 반드시 가나안 땅에 묻어달라고 형제들에게 부탁합니다. “나는 비록 애굽에서 죽지만,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 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반드시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애굽을 나 갈 때 내 유골도 메고 가서, 꼭 가나안 땅에 묻어 주십시오.” 유언하는데요, 흥미로운 건 그렇게 죽은 요셉의 장례를 기록하면서, 성경은 “그를 장사했다.”라고 하지 않고, 다른 표현을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창 50:26)라고 해서, 창세기가 바로 이 구절로 끝납니다. 땅에 묻어 장례를 치른다는 동사 ‘카바르’ 대신에 그냥 “관에 넣었다.”라고만 표현해서 장사와 구별하는데요, 입관은 장사와 엄연히 다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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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요. 입관해서 나중에 발인하여 장사합니다. 그런데 애굽에서는 장사 없이 그냥 입관만 했다고 성 경은 말합니다. 물론 임시로 땅에 묻었을 수도 있겠지요. 당시 애굽 귀족들의 장례 풍습을 따라, 미라로 만든 시신을 관에 넣어 어딘가에 매장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 매장에 대해 서 따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단지 요셉의 시신을 입관했다고 함으로써, 그의 장례를 유예합니다. 그런 요셉의 유골이 언제 장사 되는가, 바로 오늘 요셉 지파의 후손인 여호수아의 죽음과 장례 장면에서입니다.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기 위해 직접 매입했던 이 세겜 땅에 묻히게 되지요. 요셉이 묻힌 세겜과 여호수아가 잠든 딤낫 세라 모두 에브라임 산지 성읍으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또 요셉과 여호수아는 죽은 나이도 같지요. 둘 다 110세까지 살았 는데요, 그들의 삶과 죽음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게, 참 신기하게 다가옵니 다. 사실 요셉이 죽고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게 아니지요. 요셉의 죽음과 출애굽 사 이에는 적어도 350년 이상의 시간적 간극이 있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후손의 후손들이 요셉의 유언을 잘 간직했다는 뜻이고, 그 다급한 출애굽 상황에서도, 요셉의 유골을 잊지 않고 함께 가 지고 나온 것입니다. 40년 광야 세월 동안에도 그 관을 내내 메고 다녔겠지요. 가나안 땅에 들어 온 후에는 어떻게 했는지 성경에 이야기가 없습니다만, 오늘에야 요셉의 장례를 이야기하는 걸로 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래 전부터 여호수아의 죽음과 요셉의 장례를 하나의 신앙적 맥락 안에서 바라봤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가나안 땅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담긴 요셉의 죽음이, 여 호수아를 통해 비로소 완성됐다는 고백이 담긴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받았고, 야곱과 요셉이 간직했던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모세가 그 구체적 여정을 시 작한 하나님의 언약이 드디어 여호수아를 통해 온전히 성취됐습니다. 창세기부터 시작된 그 약속 이 결국 여호수아의 죽음으로 일단락된 거지요. 하나님의 언약이 그렇게 이뤄집니다. 누군가의 믿음과 순종이 또 다른 누군가의 소망과 인내로 이어지며 그렇게 오랜 세월을 견뎌야 합니다. 바 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 있고, 절망의 자리에서도 그 약속을 간직하고 전 해준 사람들이 있고, 또 실제로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힘껏 감당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모든 믿음과 삶이 시간 속에 쌓이고 잇대어지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마침 내 현실이 됩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게 이 땅에 임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신뢰하여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고 믿은 누군가의 삶이 있고, 그 약속을 간직하고 견디며 전해준 사람 도 있고, 또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싸우고 승리한 사람도 있어서, 그렇게 저마다의 부르심이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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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이고 이어져, 지금도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고 있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도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오게 하는, 귀한 믿음의 징검다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 다.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 본문에는 세 사람의 죽음과 장사가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요셉 외에도, 대제사장 엘르아살이 죽어 에브라임 산지에 그를 장사하는데요, 한편으로는 여호수 아와 갈렙, 엘르아살로 대변되는 출애굽 세대의 완전한 퇴장을 의미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는, 엘르아살의 죽음이 제사장의 죽음이고, 여호수아를 지도자, 왕의 죽음으로 본다면, 기름 부음 받은 자들의 죽음이 하나의 장면에 함께 나옴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한 명의 죽음, 요셉은 하나 님의 약속을 증언한 선지자의 죽음으로도 볼 수 있겠지요. 왕과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까지, 이 른바 메시아의 세 가지 직분이 같이 나오고, 이는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여호 수아’라는 이름의 뜻이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인데요, 히브리어 이름 ‘여호수아’가 나중에 헬라어 이름 ‘예수’가 되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여호수아의 삶은, 우리 같은 새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신 예수님을 예표할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삶을 이렇게 예수님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보게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여호수아를 향한 본문의 표현 때문입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여호수아를 성경이 어떻게 부르는가, 29절에 보면, ‘여 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 여기 어떤 표현이 눈에 들어오지요? 네, ‘여호와의 종’입니다. 우리가 이 표현에 유독 주목하게 되는 것은, 지금까지 성경이 여호수아를 향해 단 한 번도 ‘여호와의 종’이라고 부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종, [에베드 야훼]라는 말은, 지금까지 주로 누굴 가리키는 표현이었습니까? 네, ‘여호 와의 종’ 그러면 늘 모세입니다. 살아생전에 ‘여호와의 종’으로 불린 사람이 성경에 둘 있습니다. 가장 자주 불린 사람은 역시 모세이고, 다윗도 그렇게 불리긴 하는데, 조금 애매한 부분도 있습 니다. 다윗을 가리켜 명시적으로 ‘여호와의 종’이라고 부른 곳은 없고, 대신 하나님이 다윗을 향 해 ‘나의 종’이라고 하거나, 다윗 스스로 ‘주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경우에는 객관적인 호칭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차원에서 ‘여호와의 종’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밖 에 ‘여호와의 종’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곳은 이사야서 정도입니다. 주로 장차 오실 메시아를 향해 하나님은 ‘나의 종’이라고 하시는데요, 오늘 여호수아의 경우에는 본문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으로 이 ‘여호와의 종’이라는 호칭을 듣게 됩니다. 여호수아를 향한 오늘 이 표현이, 그래서 저는 마음에 참 오래 남습니다. 그 호칭이 가진 무게 때문에도 그렇지만, 그것이 그의 생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삶을 마치고 난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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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들게 된 말이기 때문입니다. 평생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을 죽고 나서 하나님께 들었을 때 마 음이 어땠을까요? 아시는 것처럼, 그는 생애 대부분을 ‘여호와의 종’보다는 ‘모세의 종’으로 살았 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1장 1절이 이렇게 시작되지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 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수 1:1~2) 참 기막힌 얘기 아닙니까?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 끌고 요단강을 건너는 그때까지도, 그는 ‘여호와의 종’이 아니라 ‘모세의 종’으로 불립니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에 대해 성경은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었다.”라고 말합니다. 1장 첫머리에서 ‘모세의 종’이었던 그가 24장 끝에 와서 ‘여호와의 종’입니다. 그 스물 네 장의 내용을 그가 어떤 삶으로 채웠는지, 그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비록 명사로는 ‘여호와의 종’이 아니었을지 몰라도, 동사로 그 삶을 서술해 보면, 그는 늘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왔다는 뜻입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했던 그의 고백처럼, 그는 한결같이 ‘하나님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모세의 종’으로서 그를 섬길 때에도, 스 스로 리더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에도, 여호수아의 실존적 삶은 늘 ‘여호와의 종’이었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하기야 세상이 나를 어떻게 불러주든,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내 명함에 기록된 호칭이 뭐든,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부르든, 그보다 중한 것이 그 호칭을 살아내는 우리의 모습일 것입 니다. 명사가 중요한 게 아니라, 동사가 중요한 거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목사로서, 목사답게 살 아가지 않는다면, 호칭이 목사인들 무슨 소용이겠어요? … 네이버 검색창에 ‘목사’, ‘개신교 목 사’ 이렇게 쳐봤습니다. 제일 먼저 나오는 사람이 누구였을까요? 네, 전광훈 씨였습니다. 호칭이, 명사가 중요한 게 아니지요. 사람은 명사를 보겠지만, 하나님은 동사를 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 순간에 그분의 결론을 듣게 되겠지요. 우리가 뭐라고 불리는 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 리의 삶이 우리를 뭐라고 증언하고 있는지, 무엇의 종으로 살았는지, 그게 중요하고, 얼마 지나 지 않아 우리도 그 마지막 판단을 마주하게 될 겁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비록 우릴 부르는 호칭이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지만, 우리는 다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의 종’이란 말 그대로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종’에 대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 이스 라엘이다.”(사 49:3) ‘하나님의 종’이 어떤 존재냐? ‘그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자’입니 다. 자기 영광이나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그 삶에서 나타나는 존재, 그게 ‘하나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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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종’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여러분의 삶 속에 꼭 나타나길 축복합니다. 중요한 건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담고 있고, 그 영광을 나타낼 부르심이 있다는 걸 잊지 않고, 그에 합당한 삶을 날마다 선택해야 합니다, 먹든 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고(고전 10:31), 무슨 일을 하든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않으며(골 3:23), 늘 하나님을 자랑하고 찬송하며, 우 리의 언행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그 길을 늘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성도의 삶이요, 가장 존귀한 부르심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종 된 삶을 신실하게 살아가시길 다시 한번 축복합니다. 사람들 앞에 서는 비록 왕이어도 늘 하나님의 종 됨을 사모하며 살았던 다윗처럼, 우리 신앙의 초점이 항상 ‘하나님의 종 됨’에 맞춰지면 좋겠습니다. … 7월 들어 시작된 묵상 본문이 요한계시록이지요. 1 장 1절에 보니까 요한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 어 알게 하신 것이라.” 하나님의 ‘종’ 됨을 유독 강조하지요. 계시의 말씀을 듣는 것도 ‘종들’이 고, 요한도 자신을 ‘종’이라고 소개합니다. 내가 가진 능력과 지혜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는 건 실로 위대한 일 입니다. 그걸 깨달은 사람들은 주저 없이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삶을 결단하고 자랑합니다. …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자이자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일평생 한 지역교회(St. Thomas Kirche)의 음악 감독으로 섬기며, 매주 주일 예배와 절기를 위한 음악 들을 작곡하고 지휘했습니다. 그의 유해가 지금도 그 교회에 묻혀 있다고 하는데요, 내게 주신 은사와 힘으로 교회와 성도를 섬기는 일을 여러분 결코 가볍게 보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종’ 으로서의 삶이 거기서 시작되고, 또 완성됩니다. 잘하고 못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 가 누구를 섬기고 있는지를 잊지 않아야겠지요.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의 종 됨을 잊지 않고, 그 에 합당한 자부심과 열정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누군가 인생은 ‘B to D’라고 했습니다. B에서 D로 가는 여정이라고, B는 Birth, 태어나는 거고, D는 Death, 죽음, 그 사이에 C, Choice, ‘선택’이 있다고 해서, 인생은 ‘B to D’라고 합니다만, 여호수아의 삶과 죽음을 통해 배우는 바도 그렇습니다. 애굽에서 태어나, 뭘 섬길지 모르는 인생 으로 살다가, 드디어 누구를 섬겨야 할지 알게 되고, 그 섬김의 삶을 끝까지 힘껏 선택하며 살아 내는 것, 그게 신앙이고, 인생이구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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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왜 우리가 하나님만 섬기며 살아야 하는가? 그러지 않으면 모든 걸 섬기며 사는 종이 되기 때문 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했을 때, 아담은 다스림 의 자리에서 내려와 종이 됐습니다. 인간은 본질상 뭔가를 섬기는 존재지요. 하나님을 섬기든, 돈을 섬기든, 권력을 섬기든, 아이돌을 섬기든, 어떤 것에 집중하고 집착하며 시간과 에너지를 헌신합니다. 그리고 그 섬기는 대상을 닮아가지요. 그래서 뭘 섬기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섬 기는 삶을 선택하고, 그 길을 열심히 걷다 보면, 만물을 다스리는 참된 자유를 누릴 뿐만 아니 라, 어느새 우리 안에도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모습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호수아의 삶을 돌아볼 때 인상 깊게 느껴지게 되는 건,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가 끊임 없이 자라고 성장해 갔다는 점일 겁니다. 비록 처음엔 모세의 수종자였지만, 조금씩 자라고 온전 해져서, 마지막은 ‘여호와의 종’이었습니다. 원래 여호수아의 이름은 ‘호세아’였거든요. ‘구원’이라 는 뜻인데,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가는 과정에서 모세가 그의 이름을 ‘여호수아’로 바꿉니다(민 13:16). 너 자신이 구원받는 인생으로만 끝나지 않고, 여호와가 구원이라는 사실이 너의 삶으로 드러나길 바란다는 축복과 예언이 담겼을 거예요. 명사적 삶’이 아니라, 동사적 삶으로 바꿔 버 리지요. 그런데 정말 여호수아는 그렇게 자라갔지요. 하나님이 구원이 되신다는 사실을, 그의 삶 을 통해 똑똑히 증언하게 됐습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였어요. 철없는 부잣집 막내아들에서 많은 생명을 구원하는, 은혜의 통로로까지 자라갔지요. 어제 말씀에 보니까, 두아디라 교회도 자랐다고 하지요.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라고 이야기합니다(계 2:19).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은 삶, 여러분, 우리 모두 그렇게 자라 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지금은 좀 부족해도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조금씩 더 자라서, 정말 ‘여호와의 종’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그런 존귀한 인생 살아가길 바랍니다. 여러분도 느끼시겠지만, 저는 사람이 자라고 성장한다는 게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 각이 듭니다. 자라기는커녕 뒷걸음질 칠 때도 많은 거 같아요. 어릴 땐 나이만 먹으면 어른스러 워지고, 신앙도 깊어지고, 인격도 좋아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 저는 요즘도 아침 마다 시래기 해장국을 먹고 있습니다만, 최근에 한 가지 고민 아닌 고민이 생겼습니다. 사실 가 게가 정식으로 문을 열기도 전에 들어가서 먹고 있어서, 평소엔 저희와 같이 먹는 손님도 거의 없는데요, 그런데 최근 들어 저희보다 더 일찍 와서 식사하시는 한 어르신이 계시는데, 이분이 식사하면서 그렇게 트림을 세게 하세요. 공간도 별로 넓지 않은데, 옆에서 밥 먹고 있는 사람이 다 들리고도 남게, 아주 우렁차게 하시는데요, 제가 살짝 인기척을 드려도 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 아침마다 여간 고역이 아니에요. 시래기 해장국이 물려서가 아니라, 이분 때문에 다 른 식당을 알아봐야 하나 고민할 정도인데요, 연세도 지긋하신 분이, 왜 그렇게 예의가 없으실 까, 따지기도 그렇고, 참 마음이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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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사실 우리 주변을 보면, 연세 많으신 어르신 중에 겸손이 몸에 배서 남을 더 배려하고 언행을 조 심하는 분들을 만나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유교 문화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체로 어르신들은 나이가 어린 사람들에게나 공공장소에서 함부로 하는 경향이 많으세요. 물론 아닌 분들도 많습니다만, 대체로 그런 것 같아요. ‘왜 그럴까?’ 생각해 보면, 이젠 아무도 주변에 서 뭐라고 하지 않는 나이가 된 거지요. 누군가로부터 지적을 받고 훈육을 받은 경험 없이 오랜 세월을 지내다 보니, 자기를 객관화해서 볼 수 있는 능력이 점점 약해진 거예요. 아이들 키울 때 부모들이 수시로 잔소리하잖아요. 말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어른들에게 인사해라, 다시 똑바로 해라, 태도가 그게 뭐냐, 계속 지적하고 가르쳐서 아이들이 자라고 온전해져 갑니다만, 어른들은 그럴 기회가 이제 다 사라진 겁니다. 아무도 뭐라고 안 하고, 또 못하니까, 자기를 돌아보며 고 쳐갈 수 없게 되고, 그래서 점점 더 겸손하고 온전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철없는 어린아이 모 습으로 퇴보하는 게 아닌가, 저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계속 스스로 돌아보게 되는 요즘입니다. 여호수아가 일평생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삶으로 자라가서, 결국 마지막 순간에 ‘여호와의 종’으 로 완성되어 갔던 것을, 여러분 우리가 너무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용두사미가 아니라 사두 용미가 된 삶, 비록 처음은 미약해도 나중은 창대한 삶,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가는 삶, 그게 얼마나 힘들고 또 존귀한 삶인지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 말씀 앞에, 늘 우리 자신을 비춰보고, 더 이상 누가 날 훈계해 주지 않으니, 스스로 더욱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길 반복하면서, 하나님 의 종에 합당한 삶을 끝까지 붙들어야 합니다. 스스로 ‘종’이라고 믿고 산다면, 좀 더 겸손하고, 좀 더 절제하고, 좀 더 자중하며 살겠지요. 마 치 내가 주인인 것처럼, 함부로 내 삶을 판단하고 결정하고 주장하지 않을 겁니다. 내 삶을 향한 주인의 뜻이 무엇인가, 과연 내 삶이 주님의 영광을 담은 그릇이 맞는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 을 섬기며 사는 삶은 아닌가, 늘 조심할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죽음으로 여호수아서를 마무리하면서, 성경은 다소 불안한 여운을 남깁니다. 이스라 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섬기긴 섬겼는데,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들을 다 아는 자들이 사는 날 동안 섬겼다고 31절이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아는 장로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다는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 까? 네, 그들이 죽고 난 다음에는 상황이 달라졌다는 얘기겠지요. 그게 아니라면 굳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실제로 사사기에 보면, 이 31절 바로 다음에 어떤 내용이 생략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내용이 나

원고 8쪽

- 8 - 옵니다. 사시기 2장인데요, “7.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 겼더라. 8.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9.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 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10.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 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라고 해서, 오늘 31절과 똑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오늘 본문에는 없는 그다음 이야기도 나오는데요, “11.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12.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 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13.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 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14.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 주사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며, 또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의 손에 팔아 넘기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하지 못하였으며 15.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니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 하였더라.” … 그렇게 혼돈과 흑암의 사사 시대가 3백 년 넘게 이어집니다. 자란 게 아니라 시들 어 간 건데요, 여러분, 그런 인생이 되면 안 됩니다. 어쩌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이라도 하나님을 섬긴 게 다행인지도 모릅니다. 지난번에도 말씀 드린 것처럼, 신앙은 유전되지도, 세습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도 각자가, 때마다 자신이 섬길 자를 택해야 하고, 그것을 실제 삶으로 살아내면서, 가르칠 수 있을 때마다 자녀들에게 열 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해서, 자연스럽게 부모의 신앙을 보고 배울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 따름입니다. 내가 자라가면 자녀도 함께 자랄 가능성이 많겠지요. 내가 여호와의 종 된 삶을 선택하고,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늘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다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 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하신 약속대로, 우리의 가정도 믿음 안에서 함께 자라가게 될 겁니다. 우리 성도들의 가정이 그러기를 늘 기도하고, 아이들의 믿음이 자라길 바라 는 만큼, 먼저 우리가 자라기를 힘쓰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갈무리하면서, 여호수아서 강해도 모두 마치려고 합니다. 지난 1년간 함께 여 호수아서 말씀을 나누면서 여러분은 어떠셨는지요? 어떤 말씀이 여러분 마음에 새겨지고 또 삶 으로 고백됐는지 목사로서, 설교자로서 무척 궁금한 게 사실입니다. … 책의 제목이 ‘여호수아’인

원고 9쪽

- 9 - 만큼, 아무래도 여호수아의 신앙과 삶에 주목하게 되고, 그래서 한편으론 설교가 너무 한 방향으 로 흐른 건 아니었나, 늘 같은 얘길 반복하는 건 아닌가, 저는 개인적으로 고민이 많았습니다만, 여러분은 어떠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은 성령께서 꼭 다시 생각나게 하시고, 풀리지 않은 신앙적 고민과 질문들이 있다면, 이어지는 요한복음의 말씀 안에서 그 길을 함께 찾 아가게 되길 바랍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아주 가까이서 오래 바라볼 수 있어서 저는 개인적으로 좋았습니다. 인생은 시와 닮아서 멀리서 볼 땐 불가해한 암호 같지만, 이해해 보리라는 마음으로 들여다보면, 비로소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알게 된다는, 한 드라마(‘미지의 서울’) 대사가 생각납니다. 마치 시를 들여 다보듯 여호수아의 삶을 들여다본 것도 같고, 그러다 보니, 일평생 ‘여호와의 종’으로 살고자 했 던 한 사람의 진심과 마주하게 되고, 또 그런 여호수아를 하나님이 어떻게, 어디까지 자라게 하 시고, 완성해 가시는지도 볼 수 있어서 참 좋았던 것 같습니다. 올해 저희 표어가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인데요. 어떻게 하면 그에게까지 자랄 수 있는가, 예수님을 예표하는 여호수아에게서 우리는 작은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자신을 ‘여호와의 종’으로 인정하고, 내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담는 그릇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서, 지금 내 삶의 현실 속 에서 그 영광에 합당한 모습을 끊임없이 선택해 나갈 때, 우리는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주님께 까지 자라가게 될 겁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종’이기에, 우리의 삶과 죽음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꼭 잊지 말아야겠 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잊지 않으시고, 지금도 우리보다 앞서, 우리보다 더 열심히 우 리 삶을 인도하시고, 우리를 위해 친히 싸우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귀한 삶을 지금껏 충 성스럽게 살아온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오늘까지 행한 것처럼 끝까지 믿음의 길 완주하셔서, ‘여 호와의 종’이라 불리는 삶으로 마침내 완성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간절히 축원 드 립니다. 아멘.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