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여호수아 17:1~6 (구약 344쪽) 말라, 노아, 호글라, 밀가, 디르사

2025-03-23 · 설교 원고 · 9쪽 · 약 18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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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사순절 세 번째 주일 [여호수아 강해 29] 여호수아 17:1~6 (구약 344쪽) 말라, 노아, 호글라, 밀가, 디르사 본문 3절의 ‘말라, 노아, 호글라, 밀가, 디르사’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저 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 갈렙의 유다 지파, 여호수아의 에브라임 지파의 기업 분 배가 끝나고, 이제 므낫세 지파가 기업을 제비 뽑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므낫세는 에브라임과 함 께 요셉의 아들입니다. 므낫세가 장남이고, 에브라임이 차남이지요. 요셉이 애굽에서 겪은 고난을 하나님이 다 잊어버리게 해 주셨다는 의미에서 첫째를 ‘므낫세’라 이름했고, 둘째는 하나님이 애 굽에서 주신 축복을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두 배의 열매’, ‘풍성한 열매’라는 뜻을 가진 ‘에브라 임’이라고 지었습니다. 야곱은 훗날 이 두 손자를 자기 아들로 입양하여 요셉에게 두 몫의 분깃을 줌으로써 그에게 실 질적인 장자의 권리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그런 야곱이 병들어 죽을 때가 가까이 오자, 요셉은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아버지를 찾아가 문안하고, 야곱은 그런 요셉과 두 손자를 마지막으로 축복하는데요, 그런데 이때 야곱이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하면서 손을 반대로 해 서 기도합니다. 힘의 상징인 오른손이 권위와 축복을 의미하고, 실제 생활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왼손은 그보다 덜한 축복의 의미가 있어서, 보통 장남에게 오른손으로 축복하는데, 야 곱은 반대로, 장남인 므낫세에게는 왼손으로, 차남인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으로 안수하면서, 임의 로 그 위치를 바꾼 겁니다. 당시 야곱은 눈이 어두워 앞을 거의 볼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요, 그러니 이것을 하나님의 계획이 담긴 예언적 행위로 볼 수도 있고, 또 야곱 자신과 형 에서의 운명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섭리지 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되는 성경의 일관된 섭리를 재현한 모습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겁 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역사는 사람이 정한 어떤 전통이나 관습, 또 인간적인 기대를 넘어서 이 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행위인 거지요. 야곱이 억지로 둘의 서열을 바꿨다기보다는, 야곱 자신이 축복의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더 나아가 사람의 어떤 연약함이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복이 되게 하신다는 것, 끝내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완성해 내고야 마신다는 믿음을, 이 마지막 축복의 행위 속 에 담아 고백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그로 인한 결과였는지, 이제 가나안 정복의 과정에서 에브라임 지파가 당당히 리더로서 자리매김하게 되는데요, 여호수아가 속한 지파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나안 남쪽에는 유다, 북쪽에는 에브라임, 자연스럽게 양자 구도가 형성되고 결국 훗날 남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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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로 갈라진 이스라엘의 국가명도 모두 이 두 지파의 이름을 따르게 됩니다. 오늘 가나안 땅을 분 배하는 순서 역시 마찬가진데요, 에브라임 지파의 기업이 앞의 16장에서 먼저 나왔고, 므낫세는 그 후에 땅을 분배받습니다. 하지만 기록의 분량으로 보면 오히려 성경은 므낫세를 더 강조합니 다. 에브라임 지파의 기업은 단 여섯 절(16:5~11)에 기록된 반면, 므낫세는 열여덟 절 분량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만큼은 므낫세 지파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훨씬 중요하다는 뜻인데요, 오늘과 다음 주일, 그 내용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시는 것처럼 므낫세 지파의 절반은 이미 요단강 동편에서 기업을 분배받았습니다. 그 일의 중 심에 누가 있었는지가 본문에서 밝혀지는데요, 므낫세의 장남 ‘마길’이라고 나옵니다. 1절에 보면 마길을 ‘용사’라 칭하지요.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전쟁의 사람’(a man of war)입니다. 대단히 호전적이고 용맹한 사람이라는 얘긴데, 마길의 가문 자체가 그러해서 그 후손들의 이야기가 성경 에 자주 나옵니다. 사사기에서도 유명한 여성 사사인 드보라와 함께 가나안 족속의 억압으로부터 백성들을 구원해 내지요. 이런 마길의 자손이 요단강 동편의 땅, 본문에서는 ‘길르앗과 바산’이라 고 나오는 넓은 땅을 주도적으로 정복하고, 자신들이 그 땅에 거주하길 모세에게 요구하여 결국 분배를 허락받았습니다. 그래서 마길이 ‘길르앗의 아버지’, ‘길르앗의 조상’으로 불렸다, 1절은 말 합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요단강 동편의 분배에 관한 성경의 입장이 점점 더 긍정적인 쪽으로 그 평가가 바뀌고 있다는 점입니다. 처음에 요단강 동편을 정복하고 분 배를 요구했던 때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전쟁을 앞둔 형제들을 외면하고 자기 기업만 챙기려는 모습이, 이른바 ‘집단 이기주의’처럼 여겨졌던 사건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 의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모습을 더 부각합니다. 대부분의 지파가 분배와 정복을 머뭇거리고 있어 서 더 확연히 구별되는 모습인데요, 이 미묘한 관점의 변화가 오늘 본문과 17장은 물론 여호수 아 전체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쨌든 오늘 읽은 본문은 그런 마길과 그 아들 길르앗 자손을 제외한 므낫세 지파의 남은 자손 의 기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엘리에셀, 헬렉, 아스리엘, 세겜, 헤벨, 스미다, 이렇게 여섯 가문, 여섯 씨족이 가나안 땅 중앙 부분을 분배받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17장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성경의 초점이, 그들이 분배받은 ‘땅’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므낫세가 받은 땅에 대해 7절에서 11절까지 기록되어 있지만, 그 앞뒤 대부분의 내용은 므낫세 지파에 속 한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어떤 땅을 분배받았느냐?’보다 ‘그 땅을 분배받은 사람들의 모습이 어떠했느냐?’, ‘그들이 무슨 일을 했고, 어떤 말을 했느냐?’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크게 보면 세 가지 정도의 내용이 나오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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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제일 먼저 등장하는 사람들은 슬로브핫의 딸들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므낫세의 남은 여섯 씨족 중 하나가 ‘헤벨’인데, 그 아들이 ‘슬로브핫’입니다. 그런데 그는 아들 없이 딸만 다섯을 낳고 광 야에서 죽었습니다. 문제는 당시 기업은 아들에게만 물려준다는 겁니다. 앞서 갈렙의 딸 악사가 남편 옷니엘이 받은 네겝 땅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딸은 처음엔 아버지의 기업에서, 나중엔 남편 의 기업 안에서 살아가지요. 그러니 아들 없이 죽은 슬로브핫은 애초에 가나안 땅에서의 기업 분 배 대상에서 제외될 상황입니다. 다섯 딸들이 모두 다른 집안에 시집가고 나면, 결국 슬로브핫이 라는 가문 자체가 소멸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 죽은 남편의 형제를 통 해 아들을 낳아 기업을 보전하는 규례도 있었지만, 슬로브핫의 아내 역시 광야에서 이미 사망한 뒤라, 그마저도 불가능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슬로브핫의 다섯 딸들이 일찍이 광야에서 모세와 지도자들에게 이 문제에 대한 조치를 호소합니다. “우리 부모, 우리 가문도 하나님의 기업을 받아 마땅한 하나님의 백성입니 다. 우리도 다른 이들처럼 광야에서 태어나 광야를 걸었고, 이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 가나안 땅을 분배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비록 집안에 아들은 없지만, 딸인 우리가 낳을 아들들을 통해 서, 이 가문의 기업을 이어받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모세와 온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대담하게 자신들의 입장을 피력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은, 만약 이렇게 딸들을 통해 기업을 분배하게 되 면, 기업 분배 제도 자체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지파별로 유지되어야 할 기업의 경 계가 무너질 위험이 있습니다. 예컨대 슬로브핫의 딸 호글라가 유다 지파의 남자와 결혼해서 아 들을 낳았다고 하면, 그 아들은 당연히 유다 지파에 속하는 게 되는데, 그러면 결국 슬로브핫의 땅도 유다 지파로 넘어가게 됩니다. 사실상 슬로브핫에게 땅을 분배하는 의미가 사라지게 되고, 결국 슬로브핫 가문이 소멸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슬로브핫의 딸들은 그러면 안 된다는 뜻인데요, 그렇다고 다른 지파 남자를 므낫세 지파로 데려와 흡수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요즘 같으면 남자더러 몸만 오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엄연히 자신의 기업이 있고, 속한 지파가 있는 데, 그 근본을 버리고 결혼할 남자가 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만약 모세였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겠는지요? 어찌 됐든 아들 없이 아버지가 죽었으니 그냥 원칙대로 할 수도 있었습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슬로브핫에게 분배할 기업은 없다. 너희들은 다른 데 시집가서 그 남자, 그 지파의 기 업 안에서 살아라.” 할 수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모세가 이 문제를 그렇게 스스로 판단하여 결정 하지 않습니다. 그녀들의 이야기가 일면 옳다고 여겼는지, 일단 하나님께 여쭤봅니다.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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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습니까? 아들에게만 땅을 주는 규례를 따르려고 하니, 므낫세 지 파의 ‘슬로브핫’이라는 하나의 출애굽 가문 자체가 땅을 분배받지 못한 채 소멸하는 문제가 생기 게 되고, 반대로 그 딸들에게 기업을 주어서 그 가문과 기업을 지키려고 하니, 아들 분배의 기존 원칙이 깨질뿐더러, 결과적으로 다른 지파의 남자가 므낫세 지파로 귀속되거나 아니면 딸들이 결 혼하여 다른 지파로 흡수되어 결국 기업을 준 것 자체가 무의미해집니다. 이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겠습니까?” 하나님께 여쭤봅니다. 참 놀랍고도 중요한 얘기지요. 이것이 사소한 문제가 아님을 알아차리고, 모세는 하나님께 묻고 들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시 119:105) 말로만 그런 것이 아 니라, 실제로 말씀이 자기 삶을 비추는 등불이요, 자신의 결정과 판단을 인도하는 빛이라고 인정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 겁니다. 솔로몬이 구한 바로 그 ‘듣는 마음’이지요. 그것이 지혜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 지혜가 우리에게도 있길 바랍니다.) 여기에 대해 하나님은 뭐라고 답하시냐면, 슬로브핫 딸들의 말이 옳다고 하십니다. 슬로브핫의 형제들이 기업을 받을 때, 너는 반드시 그들에게도 기업을 나눠주라고, 슬로브핫의 기업을 그 딸 들에게 주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민 27:7). 그 가문과 기업을 지켜줘야 한다고 하세요. 다만 이 딸들은 므낫세 지파 안에서만 결혼하라고 하시는데요, 그녀들이 받은 기업이 다른 지파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는 조치입니다. 실제로 슬로브핫의 딸들은 친척과 결혼하게 되고, 그렇게 사라 질 뻔한 슬로브핫 가문과 그 기업이, 그 딸들이 낳은 아들들을 통해서 보존되고 계승되게 됩니 다. 오늘 읽은 본문은 그 분배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므낫세 지파의 기업 을 분배하는 상황에서, 슬로브핫의 딸들이 엘르아살과 여호수아와 지도자들 앞에 나아가서, 하나 님이 모세를 통해 하신 약속을 이제 지켜달라고 다시 한번 요청하고, 그렇게 자신들의 기업을 받 게 됩니다. 약속했다고 누가 알아서 챙겨주는 게 아니지요. 이번에도 딸들이 스스로 나서서 자신 들의 기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놀라운 부분은 이것입니다. 그녀들이 아버지가 받을 한몫을 받아서 다섯이 그것을 나눠 가진 것이 아니라, 다섯 명의 딸들이 각자 한몫씩, 총 다섯 분깃을 받았다는 점입니 다. … 4절 마지막에 보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그들에게 그들의 ‘아버지 형제들 중에서’ 기업 을 주므로, 요단 동쪽 길르앗과 바산 외에 므낫세에게 ‘열 분깃’이 돌아갔다고 나옵니다. 다시 말 해 슬로브핫의 다섯 딸들은, 아버지 항렬에 있는 다섯 명의 큰아버지, 작은아버지와 동일하게 하 나의 분깃을 각각 분배받았습니다. 슬로브핫의 딸로서 1/5의 기업을 나눠 받은 것이 아니라,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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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각 한 기업의 주체로서, 아버지와 동일한 권리를 인정받은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슬로브핫 혼자 다섯 몫을 받은 셈이고, 그의 형제 다섯이 받은 기업을 포함하면 총 열 분깃이 헤벨 자손에게 돌 아갔습니다. 여섯 명이던 형제가 열이 된 셈이지요. 마치 야곱이 손자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입양 하여 야곱의 아들이 열셋이 된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처음부터 이런 결과를 바라고 기업을 요청한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녀들은 다만 아버지의 기업이 없어지지 않길 바랐을 뿐이고, 그 하나의 기업을 다섯이 나눠 받으면 된다 고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녀들 모두에게 각각의 기업을 주라고 하십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요셉의 기업을 나눠 가지는 게 아니라, 각각 하나씩 기업을 받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한몫만 주고 딸 다섯이 나눠 가지라고 하시 면 그걸 나누는 과정에서 다툼이 생길까 봐 그런 건 아니겠지요. 사람의 생각으로는 그 뜻을 다 헤아리기 어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이 그 다섯 명의 딸들 모두를 각각의 상속 주체로 세우셨다 는 사실입니다. 슬로브핫이나 그의 아들 ‘대신’ 기업을 받았다기보다는, 그녀들 자신이 상속의 주 체가 됐습니다. 딸도 독립적인 상속자로 인정하는 새로운 기준이 세워졌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 언한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는 아들이 없이 아버지가 죽으면 그 딸에게 기업이 돌아가게 됩니다 (민 27:8). 슬로브핫의 딸들에게만, 그 가정에만 적용되는 단순한 예외 조치가 아니라, 여성 또한 기업의 대상이 되는, 새로운 법적, 사회적 질서가 확립된 것입니다. 성경은 그 일이 바로 슬로브 핫의 다섯 딸들, 말라, 노아, 호글라, 밀가, 드리사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민수 기에서도, 여호수아서에서도 이들의 이름이 여러 번 나오는데요, 그만큼 이 일이 이스라엘 공동 체 안에 미친 영향이 컸다는 뜻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그녀들은 자신들의 어떤 이익이나 기업을 원해서 이 일을 시작한 것이 아니었 습니다. 본인만 생각했다면 어차피 시집가면 그만입니다. 아버지의 기업이 있으나 없으나, 결국 자신은 남편의 그늘에서 살게 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네겝 땅으로 보내시오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자신의 필요를 요청했던 악사와는 경우가 또 다릅니다. … 본문을 읽을 때 여성의 권리 나 이런 부분을 강조할 수도 있겠고, 실제로 그것이 이 사건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것 이 본질은 아닙니다. 원래 이들이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은, 남녀평등, 여성 인권, 이런 문제가 아 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와 주실 기업에 대한 소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그녀들이 이 문제를 제기했던 때로 돌아가 보면, 그들은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어찌하여 아들이 없다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그의 종족 중에서 삭제되리이까? 우리 아버지의 형제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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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소서.”(민 27:4) 여러분, 그들은 누구의 이름, 누구의 권리를 이야기합니 까? 네, 아버지 슬로브핫을 언급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가문에서 사라지고 잊히는 것, 아버지 가 마땅히 받아야 할 기업을 잃어버리는 것, 거기에 초점이 있습니다. 목적이 ‘자기’가 아닙니다. 아버지 슬로브핫이고, 그의 믿음과 삶입니다. 오늘 3절에 ‘슬로브핫’을 소개하면서, 그 조상의 이름을 길게 나열하지요. ‘헤벨의 아들, 길르앗 의 손자, 마길의 증손, 므낫세의 현손 슬로브핫’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당시에 한 사람을 정의 내리는 방식이었습니다. 제 이름이 ‘준석’이고 성이 ‘고’이지만,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성(姓)’ 대 신에 이런 식으로 선조들의 이름을 자기 이름에 죽 붙여 썼습니다. ‘고준석,’ 이게 아니라, 아무 개의 현손, 아무개의 증손, 아무개의 손자, 아무개의 아들 준석, 이렇게 이름을 기록한 겁니다. 조상의 이름이 후손들을 통해 기억됨으로써 그 신앙과 삶이 계속 보존된다는 믿음을 가진 건데 요, 슬로브핫의 딸들은 아버지의 존재와 삶이 잊혀 사라질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녀들은 아버지가 불신앙의 사람이 아니었음을 강조합니다. “우리 아버지가 광야에서 죽었으나 여호와를 거슬러 모인 고라의 무리에 들지 아니하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죄 로 인하여 죽었을 뿐입니다.”(민 27:3) 이야기합니다. 아버지를 향한 인정과 존경이 담겨 있지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이름이 기억될 만하고, 마땅히 하나님의 기업을 받을 만한 그런 신앙과 삶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딸들에게, 가족에게 이렇게 신앙을 인정받는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지요. 딸들이 한마 음이 되어 아버지의 기업을 찾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 중에 오직 슬로브핫만 아들 없이 죽었을까요? 다른 수많은 사람이 그렇게 광야에서 생을 마감했 을 겁니다. 하지만 슬로브핫의 딸들만 용기 있게 나섭니다. 딸들도 훌륭하지만, 아버지 슬로브핫 의 삶도 참 귀했다는 뜻입니다. … 여러분, 이게 참 쉽지 않습니다. 밖에서 인정받는 것만큼이나 가족에게 신앙과 삶을 인정받는 게 참 어렵습니다. 특별히 자녀들에게 존경받는 믿음의 부모가 된다는 것, 정말 어렵지요. 하지만 순서가 그렇습니다.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라고, 가정에서 먼저 삶으로 믿음을 고백할 때 세상에서도 그 믿음이 살아 역사하고, 하나님은 그런 삶을 통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일들을 이루어 가십니다. 교회나 세상에서보다 가정에서 어떤 신앙을 고백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밖에서는 신사이 고, 교회서는 천사인데, 집에서는 이상하면 그건 좀 곤란합니다. 실은 가정에서 더 잘해야 하고, 그게 훨씬 힘듭니다. 만약 슬로브핫이 가정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면, 오늘 이 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딸 다섯이 합심하여 아버지의 기업을 찾고자 합니다. 솔직히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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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남편, 내 아내, 내 자녀, 내 부모에게 이렇게 그 신앙과 삶을 인정받는다면, 그보다 더 귀한 삶이 없을 겁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진실한 삶이고, 하나님은 그런 삶을 통해 한 공동체와 사회를 변 화시켜 가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 모두 그런 믿음, 그런 가정으로 자라가길 소망 합니다. 슬로브핫의 다섯 딸이 했던 이 요청이, 한 가정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음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아마 이 딸들은 이런 결과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겠지요. 어떻게든 요구는 해보겠지만 아 마 받아들여지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껏 누구도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으니까요. 아들이 없는 가정은 전부 다 기업을 잃을 위기에 처했지 만, 다들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오직 슬로브핫의 딸들만 문제를 인식했고, 용기를 가지 고 하나님 앞에, 공동체 앞에 섰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왜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을까요? 그냥 당연하게 받아들인 면도 있지만, 그만큼 가나안 정복과 그 기업이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너무 먼 이야기 라고,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지고, 곧 이루어질 나의 일이라 고 여겨졌기에, 슬로브핫의 딸들은 용기를 내어 믿음의 발걸음을 내디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런 믿음, 그런 기도를 통해 일하시지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그 복을 힘껏 찾고 구하는 신앙 말입니다.) 사실 ‘무엇을 요구하느냐’, ‘어떤 내용을 기도하느냐’보다, 어떤 마음, 어떤 동기로 기도하느냐가 하나님께는 훨씬 더 중요한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보신다고 하지요. 왜 그걸 구하는지, 무엇을 위한 기도인지, 하나님은 사람이 보지 않는 것을 보십니다. … 한밤중에 친구를 찾아가서 떡을 빌려달라 요구하는 사람의 비유 아시지요? 다른 친구가 여행 중에 찾아와 배가 고프다고 하니 그를 위해 실례를 무릅쓰고 자고 있을 친구를 깨웠다면, “비록 벗 됨으로 인 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눅 11:8) 하십니다. 친구여서가 아닙니다. 그 요구가 공의와 사랑에서 나왔고,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 에 합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내 기업, 내 밥그릇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를 위해, 그 이 름을 위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대로 구할 때, 하나님은 그 간구에 응답하실 뿐만 아니라, 그 간구를 통해 하나님의 새로운 일들을 시작하십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만약 그런 간구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만일 슬로브핫의 딸들이 이야기하지 않 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어땠을까요, 여러분? 네, 그냥 그대로 살았겠 지요. 그것이 옳은 줄 알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모세도, 여호수아도, 이스라엘 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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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들도, 계속 그렇게 아들 없는 집의 기업을 몰수하거나 또 임의로 사고팔며 지냈을 것입니다. 누 군가의 용기 있고 적극적인 모습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하나님의 공동체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아는 하나님의 규례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현실이 완전하지 않기에, 그 현실 속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도 완전하 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불완전하신 게 아닙니다. 다만 언어로 표현된 하나님의 말씀, 언어라는 감옥 안에 갇힌 하나님의 말씀이 불완전합니다. 우리에겐 그것을 성령의 인도하심을 좇아 해석해 내야 할, 풀어 자유하게 해야 할 믿음의 책무가 남아 있습니다. 종들은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고 기쁘게 하고 거슬러 말하지 말라는 디도서 말씀(2:9)이 나,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라는 디모데전서의 말씀(6:1)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노예 제도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듯, 성경은 그 시대적 한계 속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를 말해주는 책이지, 역사와 시대를 초월한 완전무결한 삶의 법칙을 이야기하는 책이 아닙니다. 지금도 성경은 슬로브핫의 딸들처럼, 진리 안에서 내가 지금 과연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도전하는 이들을 통해서, 새롭게 해석 되고 적용되고 있다는 것, 그렇게 하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가 이 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진지하게 고민했다는 것 역시 우리는 주목해야겠지요.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했고, 백성들은 그 결과를 받아들였습니다. 여기 있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마음에 담아두어야 할 그런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자기 맘대로 판단하지 않 고, 기도하면서, 신중하게 적은 무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잘 모르겠으면 하나님께 여쭤 봐야 합니다. 전통대로, 관례대로, 내 생각대로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 리고, 함께 듣는 것,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일이 시작됩니다. 이번 결정을 슬로브핫의 형제들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역시 중요한 부분입니다. 결국 여섯 자 손이 나눠 가질 기업을 열로 쪼개야 했으니 어느 정도의 희생은 불가피했을 겁니다. 그런 희생 없이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지 않지요. 누군가는 자기 몫을 내려놓아야 하기에 공동체가 변화 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기 욕심을 내려놓으면, 욕심을 죽이면, 반드시 하나님의 생명으로 풍 성히 결실합니다. 그게 십자가지요. 그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함께 변화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시에는 딸들의 소리였다면, 지금 우리 공동체에는 어떤 사람들의 목소리가 묻히기 쉽고 누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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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 기업이 무시당하기 쉬운지, 한번 잘 생각해 봅시다. 우리 교회가 귀담아들어야 할 ‘슬로브핫의 딸들’이 과연 누구인지, 어떻게 하면 그 적은 무리의 목소리를 듣고 온전히 반응할 수 있을지, 이 공동체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자라게 할 것인지, 함께 고민해 보십 시다. 우리 자신이 슬로브핫의 딸들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조금은 더 적극 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이 계속해서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신앙을 강조 하고 있음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갈렙과 마길과 슬로브핫의 딸들을 칭찬하고, 그들의 삶을 통 해, 머뭇거리고 주저하고 부정적인 생각에 갇힌 이들을 책망합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우리도 기업을 받을 수 있나요?” 묻지 않았습니다. 대신 “우리에게 기업을 주십시오!” 담대히 요구했습 니다. 광야에서 모세가 기업을 주기로 약속했지만, 어떻습니까? 여호수아가 알아서 슬로브핫의 딸들을 챙겨줬다고 본문은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다 잊어버렸고, 다섯 딸이 다시 공동체 앞에 서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에게 기업을 주십시오.” 거듭 요청합니다. 스스 로 일어서 요구하지 않으면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누가 대신 해주지 않고, 하나님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나에게 해주시겠지’가 아니라, 직접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 다. 그게 여호수아서의 근본적 주제 중 하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조금 더 능동적인 믿음으로, 스스로 도전하며 개척하는 삶을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지금도 가나안 땅에는 이 다섯 딸의 이름으로 된 여러 지명이 존재하고, 성경에도 노아, 호글라, 디르사와 같은 지명들이 등장하는데요, 이렇게 딸들의 긴 이름을 성경이 기억하는 경우가, 제 기 억으로는 욥의 세 딸 외에는 전무한 것 같습니다만,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이 이름과 삶을 우리도 기억하길 원하고, 그 삶을 우리도 함께 살아내길 바랍니다. 저와 함께 한번 같이 되뇌어 볼까요? ‘말라, 노아, 호글라, 밀가, 디르사’ 네, 저와 여러분의 삶과 가정이, 또 우리 교회가, 그녀들의 믿음을 함께 기억하고 살아내길 기도합니다. 아멘.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