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2026-07-12 · 설교 원고 · 9쪽 · 약 20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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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백교회 - 1 - 오순절 후 일곱 번째 주일 [요한복음 강해 39] 요한복음 11:41~57 (신약 166쪽)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본문 52절의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마르다, 마리아를 만나고 비통함의 눈물을 흘리신 주님께서 마침내 나사로를 살려내십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보면 한 가지 특이한 점이 나타나는데요, 나사 로를 살리시기 전에 예수님은 먼저 기도를 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 기도를 통해서 나사로 를 살리시는 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를 살리시는 방법은 나사로를 향해 큰 소리로 외치시는 겁 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고, 그 음성에 죽은 나사로가 반응합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죽 었는데 듣습니다. 죽었는데 들립니다. 그 부르시는 분이 그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나중에 그렇게 부활할 거라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고, 그때 부활이 있을 거라고 하십니다(요 5:28~29). 그리고 그런 구원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그 냥 육체적인 생명 말고요. 겉으로야 다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죄와 죽음의 권세에 매 여 사는 인생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주님의 말씀이 들려지면 참으로 살아납니다. 무덤 같은 어둠에서 스스로 걸어 나옵니다. … 수족이 묶이고 얼굴이 수건에 싸인 나사로를 풀어주라고, 풀 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주님이 사람들에게 말씀하지요.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곳에 풀어 놓임의 자유가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 가운데도 주님의 그 음성이 들려지기를, 그래서 우리를 얽매고 있던 것으로부터 자유와 생명을 얻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에 기도하십니다. 기도로 살려내시는 게 아닌데도 기도하세요. 기도의 내용도 신비로운데요,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 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라고 하십니다. 내 말을 들으셨다고 할 때, ‘들으신’이라는 동사의 시제는 ‘(부정) 과거’입니다.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사로를 위해 주님이 기도하셨고, 하나님이 들으신 때가 이미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감사해하십니 다. 아버지께서 항상 주님을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내 기도대로, 내 뜻대로 해 주 시는 게 아니라, 그분이 나를 ‘들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그분의 뜻대로 이루십니다. 두 가지 뜻이 일치할 때도 있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미 기도하셨는데 왜 사람들 앞에서 다시 기도하시는지, 이것 또한 기도로 말씀하십니다. 이것 이 누구를 위함이라고 하시지요? 네, 둘러선 무리를 위함입니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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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세요, 기도하세요. 그러니까 주님의 지금 기도는, 주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사로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사람들, 그리고 오늘 이 말씀 을 듣고 있는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하신 기도예요. 우리 들으라고 하신 기도지요. 듣고 믿으라 고 기도하셨어요. 하나님이 주님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셔서, 그의 음성 을 듣는 자가 살아나게 됨을 믿을 수 있도록, 주님이 기도하십니다. 지난 설교 때도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은 계속 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계십니다. 나사로를 살리는 일과 사람들을 믿게 하는 일입니다, 성경의 기록도 이 두 가지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 니다. 나사로가 살아났고, 많은 유대인이 주님을 믿었다, 이게 이 사건의 결론이자 주된 내용입 니다. … 그 외에는 다 생략됩니다. 살아난 나사로가 무슨 말을 했고, 냄새가 났다던 그 몸은 어 떤 상태였고, 그가 죽은 동안 무슨 체험을 했고, 사실 궁금한 게 많잖아요? 마르다, 마리아가 나 사로를 보고 뭐라고 했는지, 나사로가 주님 앞에서 어떤 감사의 고백을 했는지, 사람들은 뭐라고 반응했는지, 여러분 궁금하지 않습니까? …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요. 사람이 죽은 지 나흘 만에 살아났어요. 썩어 냄새나던 몸이 무덤에서 걸어 나와요. 기겁할 일이지요. 그걸 보고 있던 사람들이 느꼈을 그 충격이란, 놀라움을 넘어 정말 공포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습니다. 그런 내용들이 있었으면 더 실감도 나 고, 이 사건에 대한 신뢰도 커질 텐데 말입니다. 사건의 충격에 비해 너무 건조하게 기록했어요. 나사로는 살아났고, 사람들은 믿었다. 그러니 다 됐다. 이런 식인데요, 신문기자도 이렇게는 안 쓸 거예요. … 그러니 우리도 성경이 강조하는 것에 주목해야 해요. 믿음에, 주님의 분노에 집중 했던 성경이 이제는, 이 사건이 예수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는지 이야기하지요. 나사로를 살리신 일이 결국 주님의 죽음으로 이어져요. 그리고 성경은 그 과정을 매우 비중 있게 기록합니 다. 살아난 나사로의 이야기보다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자세하게 나오는 데요, 여기에 담긴 의미가 뭔지, 그 부분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려내신 일이 알려지자, 산헤드린 공회가 소집됩니다. 대제사장들, 귀족의 대 표 사두개인들, 평민의 대표 바리새인들이 중심이 된 유대인 최고 의결 기구지요. 그렇게 예루살 렘 성전에 70명이 모이는데요, 처음엔 서로 답답함을 토로할 뿐입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죽은 사람까지 살린 상황에서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체념하듯 말합니다. …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메시아로 믿게 될 것이고, 그러면 다시 로마가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다 빼앗아 갈 거라고 걱정하는데요, 비록 오래전에 나라를 빼앗겼지만, 로마가 상당한 자치권을 허용하면서, 그 권한을 산헤드린 공회에 줬거든요. 그거 뺏길까 두려워합니다. 겉으론 민족 걱정, 나라 걱정 같지만 실은 자기들 기득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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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걱정입니다. 여기 ‘땅’이라고 번역된 단어[토포스]는 원래 그냥 ‘장소’, ‘여기’라는 뜻이거든요. 지 금 그들이 모여 있는 산헤드린 공회를 뜻하고, 그 회의가 진행되는 장소인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 킵니다. 이 상황에서 무엇이 백성에게 좋은 일인지 고민하는 게 아니라, 단지 자신들이 누리는 권세와 특권을 뺏기지 않을까, 온통 그 걱정뿐입니다. 그때 한 사람이 일어나서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합니다. 그 공회를 대표하는 대제사장 가야바입니 다. 너희들 참 답답하다. 이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그렇게 고민하고 있냐. 한 사람이 백성을 위 해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거 아니냐. 책망하듯 말합니다. 어 떻게 하라는 겁니까? 네, 그냥 잡아다가 죽이면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한 사람 희생해서 온 민 족이 살면 되고, 그것이 우리에게도 이익이니 아무 문제 될 게 없다는 것입니다. 참 냉혹하고 대범한 논리이지요. 한 사람의 생명쯤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얼마든지 희생해도 좋다는 얘깁니다. 그러고는 바로 그날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해 버립니다(53절, ‘모의하다’로 번 역된 [에불류산토]는 ‘결정하다’라는 뜻). 사실 이 가야바라는 사람 자체가 대단히 정치적인 인물 이에요. 당시 대제사장은 로마에 의해 임명되고 해임되는 자리였는데요, 나중에 빌라도와 함께 해임될 때까지, 20년 넘게 대제사장의 자리를 지킨 사람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만약 예수로 인 해 로마가 개입할 경우 가장 먼저, 가장 크게 타격 입을 사람이 바로 자신이지요. 그러니 누구보 다 이 일에 적극적입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여러분 이 건 순전히 정치적인 계산에서 나온 말이지만, 그런 의도와는 상관없이, 결과적으로는 예수님에 관한 중요한 증언을 한 셈이 됐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온 백성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것이 그가 대제사장인 것과 관련 있다고 합니다. 해마다 한 번씩 온 백성의 죄를 위해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제사 장이, 이제 그 제물로 예수를 바치겠다고 선언한 셈이라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이 말이 스스로 한 말이 아니래요. 하나님이 대제사장의 입을 빌려 증언하게 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야바의 말과 성경의 표현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가야바는 자기 민족의 구원만 얘기하지만, 이 복음서를 기록한 사도 요한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서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한 죽음이라고 결론 내린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기록될 때만 해도 기독교는 이미 유대인 중심의 종교가 아니었지요. 예수님의 죽음이 단지 유대인들을 위한 희생 제물이 아니라, 세상 곳곳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러 모으고, 그들을 하나의 공동체가 되게 하는 그런 구원과 연합의 죽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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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가야바의 말과 여기에 대한 성경의 해석에서 나타나는 차이가 얼핏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실은 복음의 본질과 관련된 결정적인 차이이지요. 한 민족만을 위한 메시아에서 온 세상을 위한 메시 아로, 나와 우리만을 위한 메시아에서 흩어진 모든 하나님의 자녀를 위한 메시아로, 그 구원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이고, 그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 중에는, 유대인이 말도 섞지 않는 이방인은 물론이고, 그들을 핍박하는 당시 로마의 백성들까지도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관한 얘기를 계속하기 전에, 먼저 가야바의 말에 담긴 위험성을 좀 더 생각해 보고 싶은 데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이 말은 한편으로는 예수님에 관한 진실을 일부 담고 있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에 정면 으로 반하는, 대단히 위험한 인식이라는 걸,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수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한 사람의 무고한 희생쯤은 괜찮다는 건,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는 논리입니다. 바로 그 하나가 내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아예 배제하는 지극히 이기적이 고 폭력적인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가야바와 산헤드린은, 결국 예수님에게서 어 떤 죄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민족의 안위라는 명분 아래 오직 자신 들의 기득권을 위해서, 죄 없는 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너무나 악하고 비겁한 행태지요. 희생을 하려면 힘 있고 권세 있는 본인이 해야 그게 희생이지, 힘없고 죄 없는 자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은 그저 폭력이고 착취일 뿐입니다. … 유대교 경전 탈무드에도 보면 이런 문제에 관한 분명한 가르침이 나옵니다. 만약에 전쟁에서 이 긴 적(敵)이 유대인을 겁박해서, 너희 중 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내주지 않으면, 너희 모두를 죽이 겠다고 위협할 때,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모두가 함께 죽는 일이 생기더라도 절대로 하 나를 골라내어 넘기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 누구도 다수를 위해 희생돼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에요. 어떤 경우에도 생명은, 거래의 수단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훨씬 더 철저하고 급진적입니다.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를 잃으면 어떻게 한다고요? 네,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양 한 마 리를 찾아 나섭니다. 그 한 마리가 아흔아홉 마리와 비교되는 지극히 작은 숫자가 아니라, 목자 가 반드시 찾아야 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 양 하나를 쉽게 포기하는 목자라면, 공동체라면, 나머지 아흔아홉 역시 언제 같은 운명에 처해질지 모르는 거지요. 하나를 귀히 여기는 사회일 때 만이 아흔아홉도 안전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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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죄인을 위한 희생양이 되신 것은, 그 누구도 더 이상 그렇게 희생되 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생명의 주인이 희생함으로 더는 그 어떤 생명도 희생당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을 여신 것입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희생 제물로 바쳐지는 짐승의 생명도 마찬가 집니다. 얼마나 많은 생명이 지금도 인간의 죄와 욕망을 위해 희생당합니까? 솔로몬은 한 번에 천 마리를 잡아 제사하는데요, 그 생명들은 아무 죄가 없잖아요. … 성경을 찾아보면, 구약에 매 우 자주 등장하는 ‘희생’이라는 단어가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자취를 감춥니다. 단 세 번 등장하 는데요, 한 번은 구약을 인용할 때 나오고(행 7:42), 나머지 두 번은 모두 예수님을 가리켜 표현 할 때 사용됩니다. 그리고 더는 나오지 않습니다. 누구를 향해 희생하라거나, 하나님을 위해 누 가 희생했다는 말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의 희생이, 더는 누구도 희생하지 말 것을 선언하는, 궁극적인 희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희생’이라는 말을 우리가 여전히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건 아닌가, 성경에도 없 는 말이 아직도 교회 안에는 남아 있진 않은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공동체를 위해 누군가는 희 생해야 한다거나, 대(大)를 위해 소(小)가 희생해야 한다거나, 그냥 네가 십자가를 지라거나, 너만 참으면 다 은혜롭게 넘어간다거나, 네가 좀 희생하면 다들 편해진다거나 하는, 그런 가야바식 이 야기들이 은연중에, 혹은 대놓고 나타납니다. … 물론 기꺼이 헌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 가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도 희생을 요구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 잃지 않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교회도 마찬가 지지요. 하나의 생명을 위해 아흔아홉이 함께 고생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어쩌면 교회 안에는 아직도 ‘희생’이라는 말에 대한 낭만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희생’ 그러 면 뭔가 가슴이 뜨거워지고 왠지 거룩하고 숭고한 느낌이 듭니다. 삶을 바친 선교사님들의 이야 기, 또 자기 삶은 돌보지 않고 헌신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감동이 일어나지요. 그래서 ‘희생’이라는 단어 자체를 뭔가 아름답고 신앙적인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 습니다. 너무 위험한 말이고, 실은 그 낭만이 문제입니다. 그 낭만 때문에, 정작 그 희생을 누가 요구하고 누가 감당하고 있는지를 따져 묻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희생’이라는 말로 곱게 포 장되지만, 정작 그 짐을 지는 사람은 늘 같은 사람일 때가 많습니다. 내가 받은 은혜와 부르심으 로 기쁘게 섬기는 것인지, 아니면 강요받은 헌신인지, 아니면 어떤 영웅적인 자기만족을 위해 희 생을 자처하는 것인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우리 성도님들은 어떠신가 요? 혹시 내가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를 위해 억지로 뭔가를 포기하고 있다고 생 각하시나요? 정말로 여러분의 그 헌신이 기쁨이고 힘이고 은혜라고 여겨지십니까? 자신이 희생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헌신하고 있다면, 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본다면, 우리는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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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심해야 합니다. 자신이 희생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남의 인정과 보상을 바라게 되고, 희생 하지 않는 다른 사람을 원망하거나 또 다른 희생을 강요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신앙이 아 니지요. … 예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지만, 부모가 자녀를 위해 희생하는 거라고 스스로 생각하면 자녀와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누가 봐도 희생의 모습이 맞지요. 하지만 그걸 사랑 에서 나오는 기쁨의 헌신이 아니라 ‘희생’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관계가 이상해집니 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위해 희생하길 원하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헌신하지만, 자식은 내 부모가 나를 위해 희생하길 바라지 않습니다. 사랑하 니까요. 그 둘의 관계가 희생으로 엮이는 순간, 자식은 늘 부채 의식을 가지고 살게 되거든요. 하는 것마다 자식은 다 빚 갚는 심정이 돼요. 진심 어린 효도도 그냥 의무가 되고, 빚 갚음이 되 지요. 진심과 진심이 만나질 못하니 부모도 자식도 행복할 수 없게 됩니다. 나이 50이 넘어가면서 제가 한 가지 깨달은 건, 누군가로 하여금 나에게 미안한 감정, 빚진 감정 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게 성숙한 관계라는 겁니다. 나에게 자꾸 미안해하게 만들면 그 관계는 오래갈 수가 없습니다. 서로 대등한 관계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안함보다는 차라리 고마움 을 느끼게 하거나, 제일 좋은 건 서로 고마워하는 관계지요. 누군가 나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할 때 사람은 진정으로 충만해지니까요. 여러분, 희생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 여러분이 원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세요. 남들이 보기에는 희생 같은 헌신일지 몰라도, 여러분 자신은 희생이 면 안 됩니다. 희생하면 반드시 서운하고 억울할 때가 와요.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을 요구합니 다. 주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주님을 위해 희생하지 마세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즐겁 게 헌신하세요. 희생은 주님이 하시지 우리가 하는 게 아니에요. 하면서 자부심을 느끼고 영광스 럽다고 여겨지는 일들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서, 그것도 여러 가지가 아니라 한 가 지라도 족하니, 그걸 기쁨으로 하시길 바랍니다. 희생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서로를 진심으로 위하는 관계가 뭘까, 고민하다가, 문득 예수님이 나사로에게 가실 때, ‘우리 친구 나사로’라고 부르신 말이 생각났습니다. ‘친구’가 그런 거지요. 희생이라는 말 없이도 기꺼이 줄 수 있고, 그러면서도 함께 즐겁습니다. 주님은 나사로를 ‘친구’ 라고 부르세요. 다른 제자들에게도, ‘내 친구’라고 부르신 경우가 성경에 많이 나오는데요, 왜 그 렇게 부르셨는지, 이번에 말씀 준비하면서 조금은 이해가 됐습니다. 친구 사이에는 희생이 없거 든요. 그냥 서로 좋아서 하는 거고, 그래서 막 비장해지거나 하지 않습니다. … 예수님은 그러세 요.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에게서는 도망가시고, 예수님을 친구로 여기는 사람들하고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을 사람들이 뭐라고 불러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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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그래요. 놀라운 얘기지요? 그냥 친구예요. 너무나 편하고 쉬운 관계지 요. 어떤 목적을 위해 서로 비장해져서, 서로 막 희생하고 헌신하는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그 관 계 자체가 목적이고, 함께 있으면 좋은 그런 친구로서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성경을 찾아보면, 예수님이 누군가를 향해 ‘나의 제자 누구’ 이런 식으로 부르신 적이 단 한 번 도 없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물론 ‘제자’라는 말은 사용하셨어요. 그런데 그때 나오는 동사 는 늘 ‘되다’입니다. 이렇게 하면 내 제자가 되리라, 저렇게 하면 능히 제자가 되지 못한다, 이렇 게 말씀하세요. 제자는 ‘되는’ 것이지, 처음부터 제자로 ‘세운’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그 냥 친구가 되셨습니다. 성경은 훗날 그들을 제자라고 부르지만, 주님은 ‘될’ 거라고 하세요. 그렇 게 주님과 친구로 지내다 보면 되어지는 그런 무언가가 제자라는 뜻입니다. 얼마 전에 한 신문의 칼럼을 아주 인상 깊게 읽었는데요, 친구와 동지의 차이에 관한 내용이었습 니다(by 한동대 손화철 교수). 여러분 ’동지‘랑 ’친구‘는 좀 다르지요. “親舊는 그야말로 오래 친 한 사람이지만, 同志는 목적이나 뜻을 같이하는 사람입니다. … 물론 친구는 동지가 되기 쉽고, 동지가 결국 친구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둘이 같은 건 아닙니다. 친구가 아니어도 어 떤 뜻을 위해 같이 일할 수 있고, 친구라고 해도 서로 뜻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제 친구들만 봐도 그래요. 너무나 다른 가치관이지만, 그냥 친구입니다. 물론 그 ’다름‘ 때문에 가끔 속이 터 질 때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그 사람이 좋은데 어떻게 합니까? 하지만 동지는 뜻이 같아야만 유 지되는 관계입니다. 관계보다 서로를 묶는 그 뜻이 더 중요해요. 그래서 때론 서로에게 엄격해집 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하십니다. 친구와 동지의 가장 큰 차이는 ‘너그러움’이라고 그 글은 이야기합니다. “남이 했다면 크게 비난 할 일도 친구가 하면 이해하려고 애를 씁니다. 친구가 잘못하면 화를 내기보다 슬퍼하거나 실망 하고, 자기도 모르게 용서할 핑계를 찾습니다.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고도 우리는 친구에게만은 너그러운 용서를 기대합니다. 잘못이 작아서가 아니라,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동지의 종교가 아니라, 친구의 종교입니다. “우리가 죄인일 때 예수님이 오셔서 나의 친구가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동지의 엄격함이 아니라 친구의 너그러움으로, 지금도 주 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 … 그러니 그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가야 할 방향도, 누군가를 동지 삼는 엄격함이 아니라 그의 친구가 되는 너그러움입니다.” 기독교를 자꾸 ‘동지의 종교’로 만드는 사람들이 많은 요즘입니다. 뜻이 맞는 사람끼리만 모여 교회를 이룹니다. 작은 차이만으로도 선을 긋고 마치 그 선이 넘을 수 없는 벽인 것처럼 느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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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게 만듭니다. 그러면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을 수가 없습니다. 모으기는커녕 모인 사람들 도 흩어버립니다. 오늘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주님은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 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입니다. … 흩어진 자들을 어떻게 모 을 것이냐? 그것은 잃어버린 생명 하나하나를 귀하게 여기고, 친구로 받아들이는 너그러운 마음 에서 시작됩니다. 전체를 위해 하나가 희생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를 위해 전체가 친구가 되 는 그런 공동체 말입니다. 우리 교회가 꼭 그러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피해 광야 가까운 에브라임으로 가셔서 거기 머무르셨다고 나옵니다. 에브라임은 산악 지형인데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늘 ‘에브라임 산지’라 고 나옵니다. 예수님이 그럼 거기 들어가셔서 숨어만 계셨냐? 그렇지 않습니다. 마지막 유월절에 다시 사람들 앞에 나타나시기까지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 다른 복음서에 나옵니다. 열 문 둥병자를 고치시고, 소경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해 주시고, 삭개오를 만나 그의 친구가 되십니 다. 그렇게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으세요. 특별히 병들고, 장애가 있고, 또 세상에서 소외 된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들도 그런 거겠지요. 어떻게 하면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을 수 있 을 것인가? 우리는 어디까지 친구로 삼을 수 있는 공동체인가? 그리고 우리는 정말 이 안에서 그런 친구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고 있는가? 저와 여러분이 직면하고 있는 중요한 질문들입니다. … 하지만 그게 그렇게 또 어렵고 심각한 일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친구가 되고, 또 그렇게 서로 친구로서 함께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너무 비장해질 것 도 아니고, 또 너무 심각해질 일도 아닙니다. 나는 이것만은 절대 포기할 수 없어, 그런 것부터 하나씩 내려놓으면 됩니다. 우린 다만 서로가 곁에 있어 행복하고, 같이 해서 즐거운, 그런 신앙 의 여정을 함께하는 친구이면 충분합니다. 주중에 한 역사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요즘 월드컵에서 잘 나가는 프랑스, 그 나라의 상징이 왜 닭인가, 그 역사적 배경에 관한 내용이었는데요, 여러분 궁금하지 않습니 까? 다른 멋진 동물도 많은데, 사자도 있고, 독수리도 있고, 호랑이도 있는데, 왜 하필 프랑스는 닭을 국조(國鳥)로 삼았을까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요, 그중 유력한 것 하나가, 16세기 말 오 랜 종교전쟁으로 나라 전체가 피폐했던 시절, 그 전쟁을 끝내고 종교의 자유를 선언한 앙리 4세 와 관련이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였던 프랑스를 가장 찬란한 시대로 이끌어낸 사람이 앙리 4세인데요, 그 는 프랑스 서남부의 작은 변방, 나바르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가톨릭, 어머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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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 개신교였어요. 그땐 그렇게 온 유럽이 가톨릭과 개신교로 나뉘어 전쟁을 했지요. 프랑스도 오랜 세월 전쟁으로 고통받았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개신교를 가리켜 ‘위그노’라고 했는데요, 오늘 우 리 장로교의 신학적 뿌리인 칼뱅의 후예들입니다. 이 위그노들과 프랑스의 전통 가톨릭 사이에서 자그마치 36년간의 종교전쟁이 벌어집니다. 수많은 개신교도가 학살당하고, 또 피의 보복이 이어 졌어요. 그런 상황에서 이 앙리 4세가 나바르 왕국을 넘어 프랑스 전체의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 부모가 다 왕의 혈통이었거든요. … 하지만 가톨릭 국가였던 프랑스는 그의 왕권을 인정하지 도 않았고, 위그노에 대한 박해도 계속됐습니다. 그때 이 앙리 4세가 결단을 내립니다. 자신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대신, 위그노들의 신앙적 자유를 허용해 달라고 한 겁니다. 그걸 가톨릭 측 이 받아들였고, 결국 그 긴 종교전쟁이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후 유럽 역사상 최초로 개인의 신 앙적 자유를 허용한 ‘낭트 칙령’이 선포되지요. 나라는 안정을 되찾고, 경제도 급속도로 성장하면 서, 그의 손자 루이 14세 땐 프랑스가 유럽 최강대국 지위에 오르게 됩니다. 당시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하면서 앙리 4세가 이렇게 맹세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다면, 나는 모든 국민이 일요일마다 닭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하겠다.” 전쟁과 기근으로 백성들이 너무 굶주리니까, 어떻게든 일주일에 한 번은 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하겠다는, 통치자의 결단이었고, 그 중심에 ‘닭’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인들에게 ‘닭’은, 백성을 사랑하는 통치자의 애민 정 신을 의미합니다. 지금도 거기서 유래한 ‘코코뱅’이라는 닭 스튜가 있다고 하는데요, 종교로 인해 갈라진 백성들을 하나로 모으고, 그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윤택하게 하려 했던 그의 삶에서 우리 는 무엇이 진정한 희생이고, 누가 희생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왕의 왕 되신 그리스도께서, 그 백성을 살리시고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기 위 해 완전하고도 궁극적인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메시아를 믿는 백성이고, 그분의 친구들입니다. 우리가 양보하지 못할 신념이란, 그 하나뿐이지요. 예수가 우리의 친구가 되어 친 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보다 더 정확하게 우리 공동체를 규정하는 가치는 없습 니다. 그러니 여러분, 죄송한 말씀이지만, 동지는 세상에 가서 찾고, 교회 와서는 친구를 사귀십 시오. 그리고 흩어진 자들을 모읍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를 희생양 삼는 일에 서로 동지가 됐던 가야바와 바리새인의 길이 아 니라, 더는 아무도 희생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위해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되시고, 흩어진 하나 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 되도록 죄인의 친구가 되신 예수의 길을 우리가 함께 걸어가기를, 그런 믿음의 벗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