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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18:11~19:9 (구약 347쪽) 자기들에게 너무 많으므로
2025-04-13 · 설교 원고 · 9쪽 · 약 19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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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여섯 번째, 종려 주일 [여호수아 강해 32]
여호수아 18:11~19:9 (구약 347쪽) 자기들에게 너무 많으므로
본문 9절의 ‘자기들에게 너무 많으므로’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
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 ‘정복’된 땅을 ‘점령’하러 가지 못했던 일곱 지파의 기업이 드디
어 분배됩니다. 각 지파에서 선정된 세 명의 정탐꾼이, 일어나서, 두루 다니며, 그 땅을 일곱 부
분으로 그려서 돌아왔고, 그것을 실로의 여호와 앞에서 제비 뽑아 각 지파에게 분배했습니다.
그 첫 번째 순서로 베냐민 지파의 기업이 18장에 설명되어 있고, 다음은 시므온 지파인데요, 이
런 분배 순서에 큰 의미는 없겠지만, 다만 야곱의 열두 아들, 열두 지파 중에서, 두 아내, 즉 라
헬과 레아의 자손들이 먼저 나오고, 그 후에 그 여종 실바와 빌하에게서 태어난 후손들, 아셀,
납달리, 단 지파가 이어집니다. 그중에서도 오늘 베냐민 지파가 가장 분량이 많고 자세한데요,
요셉 지파의 친형제이기도 하고, 또 훗날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될 때, 유일하게 유다 지파의
편에 서서 남 유다의 일원이 되어, 최초의 왕 사울을 배출한 지파이기 때문일 겁니다. 현재 이스
라엘의 총리인 베냐민 네타냐후의 이름에도 이 지파의 흔적이 남아 있지요. 비록 인구도 적고 분
배받은 기업도 많지 않지만, 아주 비중 있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베냐민 지파의 기업을 지도에서 보면, 북쪽으로는 에브라임 지파, 남쪽으로는 유다 지파 사이에
있어서, 뭔가 큰 지파들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실제로 베냐민의 삶이 그
랬지요. 어머니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길에서 죽은 뒤, 12남 1녀 중 막내로서 아버지 야곱과
친형 요셉은 물론 유다, 르우벤 같은 형들의 각별한 돌봄 속에 자랐습니다. 막내는 그런 존재지
요. 뭔가 더 챙겨줘야 할 것 같고, 보호해 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고, 오늘 베냐민 지파의 기업
을 유달리 자세히 설명하는 본문에도, 왠지 그런 분위기가 짙게 배어 있습니다.
열두 지파를 향한 모세의 축복을 기록한 신명기 33장에도 베냐민은 이렇게 묘사됩니다. “베냐민
에 대하여 일렀으되,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분) 곁에 안전히 살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마치도록 보호하시고, 그를 자기 어깨 사이에 있게 하시리로다.”(신 33:12) 뭔가 사랑받고,
돌봄 받는 느낌이지요?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하나님 ‘곁에’ 안전히 살리로다, 했는데 하나
님의 회막을 모신 실로에서 아주 ‘가까운’ 위치에 베냐민의 기업이 있습니다. “그를 자기 ‘어깨’
사이에 있게 하시리로다.” ‘어깨 사이’라고 했는데, ‘어깨’가 어딜까, 생각해 보면, 왼쪽 어깨는
에브라임, 오른쪽 어깨는 유다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북쪽은 에브라임, 남쪽은 유다, 동쪽은 요
단강, 서쪽은 단 지파로 둘러싸인, 작지만 사랑받는 지파의 기업, 그것이 베냐민 지파가 분배받
은 땅이구나,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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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으로 기업이 기록된 지파는 시므온입니다. 19장에 전반부에 아주 간결하게 기록되어 있어
서, 앞의 베냐민 지파의 자세한 기록과 크게 대비됩니다. 기업의 경계선에 대한 설명 없이, 할당
받은 열여덟 개 성읍 이름만 나오는데요, 전체 지파 중 인구도 가장 적고 힘도 미약했기 때문인
걸로 보입니다. 원래는 꽤 큰 지파였습니다만, 광야 생활 동안의 범죄에 깊이 연루되면서, 처음
인구의 약 3분의 1토막이 났습니다. 이후에도 그 상처를 온전히 다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유명
무실한 지파가 되고 마는데요,
이런 시므온 지파의 기업 분배에 있어 가장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아무래도 본문 마지막 절, 19
장 9절일 겁니다. “시므온 자손의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 취했다. 이는 유다 자손의 분
깃이 자기들에게 너무 많으므로 시므온 자손이 자기의 기업을 그들(유다)의 기업 중에서 받았
다.” 하는 내용입니다. 지도에서 보시는 것처럼, 시므온 지파의 기업은 유다 지파의 기업 안에
있습니다. 열두 지파가 분배받은 모든 기업 중에 유일한 경우인데요, 성경은 유다 지파의 땅이
그들에게 너무 많았다는 이유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런 분배 결과도 뜻밖이지만, 과연 이렇게 결정된 과정은 또 어땠을지, 그것도 궁금해집니다.
일곱 지파에서 세 명씩 선정된 사람들이 가서, 유다, 에브라임, 므낫세 절반 지파가 가진 기업을
제외한, 나머지 가나안 땅의 지도를 그려서 돌아왔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땅을 일곱 부분으로 나
눠 그려 오라고 지시했는데요(수 18:6), 시므온 지파가 유다 지파의 땅에서 기업을 받았다면, 실
제 그들이 그려 온 지도는 몇 부분으로 분할되어 있었겠습니까? 네, 여섯 부분으로 나눠 그려 왔
을 것이고, 실제 분배도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시므온 지파도 분명히 제비를 뽑았다고 1절에서 말합니다. 처음부터 제비뽑
기 없이 그냥 유다 지파의 땅을 따로 받은 게 아니라, 유다의 기업 일부도 제비뽑기의 대상이었
다는 뜻입니다. 이런 부분을 고려하면 이번 분배 과정이 조금 더 복잡해집니다. 일곱 지파에서
뽑힌 스물한 명이 가나안 땅을 다니며 지도를 그리는데, 아무리 봐도 일곱으로 나누기에는, 남아
있는 땅이 부족해 보입니다. 그래도 일곱으로 나눠야 하니, 이렇게도 그려보고, 저렇게도 그려보
고, 애를 많이 썼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해도 만족스런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고, 결국 돌아와 사
실대로 보고합니다. “유다, 에브라임, 므낫세 절반이 받은 기업을 제외하니, 땅이 부족합니다. 여
기 일곱 부분으로 나눠 그려 오긴 했지만, 이렇게는 어렵겠습니다. 적어도 하나의 기업은 더 필
요하니, 다른 대안을 마련해 주십시오.” 제안했을 겁니다.
이런 보고를 들은 여호수아와 엘르아살, 그리고 각 지파의 지도자들이 고민에 빠집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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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숙의 끝에 유다의 기업 중 일부를 떼어 그 땅도 제비뽑기의 대상으로 삼을 것을 결정합니다.
그 스물한 명이 미리 요청했을 수도 있겠지요. 어디서 갑자기 땅이 추가로 생길 수도 없고, 지금
유다 지파의 기업이 상대적으로 너무 많으니, 그쪽에서 어떤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지, 그들
이 따로 그려 온 ‘Plan B’ 지도가 하나 더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렇게 유다 지파의 땅
일부가 포함된 일곱 개의 분깃이 확정됐습니다. 일곱 지파가 제비를 뽑았고, 유다에게 속했던 기
업 일부는 결국 시므온 지파에 돌아가게 됩니다.
결과적으로는 일곱 지파 모두 부족하지 않은 기업을 분배받게 됐지만, 사실 그 과정은 그리 간단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한 지파의 큰 결단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받은 기업 일부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요. 처음부터 그렇게 받았다면 모를까, 이미
받은 것을 내놓는다는 건, 매우 힘든 일입니다. 줬다가 뺏으면 더 화가 나는 게 사람 마음이지
요. … 어쩌면 유다 지파 안에서도 이미 세부 분배가 진행됐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친족별로, 가
족별로 기업을 나누기 시작했다면, 받은 땅을 어떻게 활용하고 경영할지, 저마다 희망에 찬 미래
를 그려보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땅이 갑자기 확 줄어든다니, 여러분 납득이 가겠습니까?
처음 분양받을 땐 분명 방 세 개, 화장실 두 개 30평 아파트였는데, 나중에 입주하려고 보니 방
둘에 화장실 하나면 여러분 어떨 거 같으세요? 네, 물어보나 마나입니다.
더구나 지금 유다 지파가 분배받은 땅은, 남아 있는 일곱 지파가 받은 기업과는 성격 자체가 다
릅니다. 어떻게 다르지요? 네, 유다 지파의 땅은 ‘정복’만 된 게 아니라, ‘점령’까지 끝난 땅입니
다. 예루살렘의 여부스 족속을 제외한 모든 가나안 족속을 이미 다 몰아냈고, 이젠 정말 누리기
만 하면 되는 땅입니다. 아직 전쟁이 남아 있는 일곱 지파의 다른 기업과는 상황이 완전히 다릅
니다. 그런 땅을 다시 토해내는 겁니다. 피땀 흘려 정복한 내 기업, 내 땅을, 다른 사람의 기업으
로 내놓는 일입니다. 정말 어려운 결단이고, 섬김일 수밖에 없습니다.
유다 자손의 분깃이 ‘자기들에게’ 너무 많았다고 9절은 말하지만, 사실 유다 지파가 내놓은 기업
의 크기도 결코 작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므온에게 주고
남은 땅을 다시 분배하면서, 남은 땅이 너무 좁은 게 아니냐고, 유다 지파 안에서 다툼이 있진
않았을지 걱정될 정도입니다. … 더구나 그 땅에 직접 살아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 기업이 자기에
게 너무 크다는 걸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유다는 인구도 가장 많고, 그 기업
안에 척박한 땅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큰지, 작은지는 살아봐야 아는 일입니다. 저희 집
전용면적이 74제곱미터(22평)인데, 살아보니까 정말 넓습니다. 대화 소리가 ‘웅웅’ 울리기도 하
고, 방에서 방으로 가려면 한참 걸어가야 합니다. 처음에는 몰랐지요. 이게 이렇게 넓은 줄 모르
고, 두 가지 크기 중에서 좀 더 넓은 걸 선택해야 하나, 싶기도 했습니다. 살아보기 전에는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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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겁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오늘 유다 지파의 모습은 참 놀랍고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자기가 힘들게
차지한 땅을 도대체 어떻게 다른 지파의 기업으로 거저 줄 수 있었을까요? 어떤 영어 성경
(NASB)은 9절을 번역하면서, “유다의 분깃이 그들이 필요로 했던 것 이상이었다.”(Judah's
portion was more than they needed) 옮겼던데요, 어떻게 내가 가진 것이 나의 ‘필요’보다 더
많다는 걸 인정할 수 있고, 또 그 많은 것을 어떻게 스스로 내려놓을 수 있었을까, 정말 진지하
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여러분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으십니까?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여겨져서, 그것이 필요
이상이라고 생각돼서, 그 일부를 남에게 거저 준 적 있으십니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필요
한 것에 비해 내 월급이, 내 소유가 너무 많다.’ 필요 이상의 물질은 하나님께 드리든, 다른 사람
을 위해 주든, 그렇게 물질을 사용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 가지면 더 가지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지요. 일상의 필요가 아니라 욕망을 기준으로 살고, 그래서 뭔가 늘 부족하다고 여깁니다.
필요 이상으로 많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설사 그렇게 여겨지더라도 그걸 ‘누구와 어떻게 나눠
야 할까?’ 생각하기보다는, 그냥 미래를 위해 창고에 쌓아두거나, 투자를 통해 더 많은 물질을
쌓는 일에 분주한 것이, 저와 여러분의 모습일 겁니다.
‘자기들에게 너무 많으므로!’ 여러분, 이 고백을 과연 우리도 품을 수 있을까요? “너는 부족하게
가졌다. 아직 한참 더 가져야 한다. 이것도 너에게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할 거다! 남들 좀 봐라.
너도 더 가져야 한다. 나중을 생각해서 더 창고에 쌓아두어야 하지 않느냐?” 끊임없이 우리를 채
근하는 이 세상 속에서, 그리고 그것에 매번 강력하게 반응하는 우리의 욕망 앞에서, 과연 이런
유다 지파의 믿음을, 어떻게 우리의 삶으로 고백할 수 있을까요?
최근 문형배 헌법재판소장의 재산 관련 이야기가 언론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지난 2019년 국회
인사청문회 때 신고한 재산이 6억 7천만 원이었다고 하지요. 헌법재판관들의 평균 재산이 20억
원쯤 되는데, 27년을 재판관으로 근무한 것치고 재산이 너무 적은 거 아니냐고, 한 국회의원이
물었더니, 그건 아버지 재산이 포함된 것이고, 자기는 4억이 조금 못 된다, 그런데 그것도 국민
의 평균 재산, 그땐 3억 원 정도였다는데요, 그걸 좀 넘은 것 같아서 반성하고 있다고 답했습니
다. 처음 들어보는 대답에 오히려 질문한 의원들이 부끄러워했다고 하지요. … 어릴 적 너무 가
난한 형편에 친척들 도움받아서 학교 다니고, 또 독지가 김장하 선생의 장학금으로 대학까지 나
오고 법관도 돼서, 자기는 꼭 대한민국 평균인처럼 살겠다고 다짐했다고, 그래서 퇴임 후에도 영
리 목적의 변호사 활동은 하지 않겠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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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러분 재산은 어느 정도 되십니까? 대한민국의 가구당 평균 순자산이 약 4억 3천만 원 정
도라고 합니다만(by 인공지능 CLOVA X), 여러분은 그보다 더 많으십니까? 적으십니까? 혹시
많다면 그것이 죄송하여 반성하고 계십니까? 질문이 너무 노골적인가요? … 재산이 평균보다 많
으냐, 적으냐 하는 것도 중요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보다는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내가 가
진 것이 나의 ‘필요’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가, 그리고 그 ‘필요’라고 하는 지극히 사적인 기준이,
과연 우리 안에서 어떻게 통제되고 다스려지고 있는지가 훨씬 더 중요할 겁니다. ‘자기들에게 너
무 많으므로’ 이 마음을 품을 수 있고, 그것에 대하여 안타까워하고, 기어이 ‘왜?’라는 질문을 던
질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요. 6년 전 재산이 4억 조금 못 된다고 했던 문형배 소장의 현 재산
은 현재 15억 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분의 필요가 그새 많이 늘어났거나, 아니면 많아진 재산
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지 고민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지금 어떻게 우리의 필요를 결정하고 있고,
또 어떤 태도로 우리의 소유를 바라보고, 사용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우리의 생명과 일상의 필
요를 하나님이 은혜로 주셨다고 믿고, 오늘도 그 믿음을 예배로 고백하고 있는 저와 여러분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그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그리고 그런 삶에는 과연 하나님 나
라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 얼마나 깊이 누려지고 있을까요?
저는 갈렙과 유다 지파가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자기 기업을 믿음으로 점령한 것도 참 대단하지
만, 자신의 욕심을 정복하고 그 필요를 다스릴 수 있었다는 것이야말로 진정 위대한 신앙이 아닌
가, 새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를 통한 어떤 상대적인 기준이나 자기 욕심
을 좇은 것이 아니라, 내 필요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세우고, 그 앞에 자신의 이기심을 쳐서 복
종시켜, 마땅한 자기 권리를 스스로 내려놓은 것인데요, 이런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정복이요, 참
된 승리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제목의 톨스토이 단편집이 있습니다. 그 책 안에 있는 열한 편의
소설 중에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라는 작품이 있는데요, 말씀을 준비하다
그 소설 생각이 나서 다시 한번 읽어봤습니다. 소설의 주인공 바흠은 가난한 농부로, 땅이 조금
만 더 있으면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거라고 늘 생각합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점점 더 많은 땅을
가지게 되지만, 충분하다고 여겨지진 않는 삶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시키르 족’이라는 어떤
유목민들로부터 흥미로운 제안을 듣게 됩니다. 일천 루블, 지금으로 치면 1억 원 정도의 돈을 주
면, ‘하루치의 땅’을 살 수 있다는 겁니다. ‘하루치의 땅’이란,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사람이
갔다 온 만큼의 땅입니다. 내가 걸었던 길을 경계로 해서, 그 안에 있는 모든 땅을 얻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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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출발한 지점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조건이 있습니다. 고민 끝에 바흠은
그 땅을 사기로 결심합니다. 나름 철저하게 계산하고 준비해서, 드디어 땅을 사는 날이 되어 걷
기 시작하는데요, 최대한 넓은 땅을 얻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걷습니다. 꽤 멀리 걸었고, 이대로
면 아주 넓은 땅을 가지게 될 상황인데, 생각보다 빨리 해가 지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급해진 바
흠은 서둘러 출발지로 되돌아갑니다. 해가 지는 그 순간 겨우 출발지에 도착합니다만, 너무나 탈
진한 나머지 바흠은 돌아오자마자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맙니다. 사람들은 그 자리에 무덤을 파
고 바흠의 시신을 묻었는데요, 그가 차지한 땅은 그 무덤의 길이인 ‘3 아르신’, 약 2m 10cm였
다는 얘기와 함께 소설이 끝납니다.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물론 무덤 크기만큼만 있으면 된다는 얘기는 아니지
요. 다만 내 욕심을 정복하지 못하면, 내 필요를 다스리지 못하면, 내가 얼마나 넓은 땅을 소유
하고, 얼마나 많은 물질을 가졌든 간에, 내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그 땅은 결국 나를 죽음으로
이끄는 자리일 뿐임을, 톨스토이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
요할까요? 그리고 우리는 그 땅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나라로 누릴 수 있을까요?
저는 유다의 기업 정중앙에 자리한 시므온의 기업을 보면서, 문득 신약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혹시 여러분도 이 지도를 보다가 생각난 구절이 있으신지요?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
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
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가 잘 아는
빌립보서 2장의 말씀입니다(빌 2:5~8).
자신이 수고하여 얻은 기업 한가운데를 비워 가장 연약한 형제를 그곳에 품고 섬기는 유다 지파
의 모습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진 예수님의 모습과 겹쳐 보입니다. 진정한 기독교는 성
령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의 탐욕을 비워 내고, 이웃과 하나님을 섬기려는 사랑과 열망으로 가
득 채워주시는 것이라고 했던 대천덕 신부님의 말도 생각납니다. 결국 예수님은 유다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시지요. 오셔서 말씀하시길,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십니다(마 25:40). 자기를 비워 누군가를 섬기는 삶이 곧 메시아의 삶이고,
그런 삶의 기업은 영원히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오늘 유다 지파의 운명이 증언합니
다. 부디 저와 여러분의 삶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종려 주일’입니다.
다 아시는 것처럼, 예수님은 당시 왕들이 탔던 말이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고 성으로 들어가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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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힘과 권력을 통한 통치가 아니라, 자기를 비우는 겸손과 온유한 섬김을 통한 통치가, 예
수님이 이 땅에서 이루시고 살아내신 하나님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
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말씀하시
지요. 어떻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주님이 누린 그 하나님 나라의 쉼
을 누리고 계십니까? 혹시 나귀가 아닌 백마 탄 예수님을 믿고, 찾고, 예배하고 있지는 않습니
까? 승리와 번영을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이제 구원하소서!” “호산나, 호산나!” 외치
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내 필요가 아니라, 내 욕심을 채워줄 그런 메시아를 지금도 원하고, 기
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과연 오늘 한국 교회와 성도들은 예수님이 누리고 외친 그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경험하고 있
을까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귀 탄 예수님을 끝내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나귀
를 탈 때라고 하셨지만, 그들은 주님이 말과 병거를 타야 할 때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님은 당신을 통해 하나님의 평화가 이미 그들에게 임했다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아직 그 평화가
오지 않았다고 외쳤습니다. 그 괴리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요. ‘호산나’의 외침은
일주일 만에 저주의 외침이 됐습니다. 어떻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이 바라보는 세상과 우리의
삶은 어떤 상황이고, 또 우리는 어떤 메시아를 지금 따르고 있습니까?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마 5:5) 주님은 말씀합니다. “복이 있다,
온유한 자여. 그들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사실 이건 세상 이치와 크게 배치되는 말입니다.
온유한(헬, [프라우스]) 사람, 부드럽고 온화한 사람이 어떻게 땅을 차지하겠습니까? 악착같고 집
요하고, 재리에 밝고 냉혹한 사람이 땅을 가지는 것 아닙니까?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많은
사람과 두루 잘 지낼 것이다, 이런 거면 또 모를까요. 온유한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차지한다니,
상식과는 전혀 맞지 않는 얘깁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말씀합니다. “온유한 자 복 되니,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스스로 땅을 차지하
는 게 아니라, 땅을 ‘받는다.’ 하나님이 ‘주신다.’ 온유한 자의 삶을 그렇게 복이 되게 하신다, 약
속하십니다. 여러분, 이 약속을 믿으실 수 있길 바랍니다. 이런 삶의 성경적 예시가 있다면 아마
이삭을 떠올리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모리아 산에서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신을 번제로 드
리려 할 때 보여 준 그의 온유한 모습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예표하지요. 그런 이삭의 삶을 돌아
보면, 주님의 말씀이 조금은 이해되기도 합니다.
한 번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그가 죽고 난 후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다 흙으로 메워버려 이
삭이 사용하지 못하게 된 일이 있습니다. 그러자 이삭은 평지가 아닌 골짜기로 피해 가서 그곳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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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 다른 샘의 근원을 얻었는데요, 그걸 알게 된 블레셋(그랄) 목자들이 와서는 다시 한번 이삭
의 목자들과 다툽니다. “이 땅은 우리 것이니, 여기서 나온 물도 우리 것이다. 내놔라.” 다툼이
계속되자, 이삭은 그 우물 이름을 ‘에섹’, ‘다툼’이라 짓고, 다시 다른 곳으로 피해 가서 새로 우
물을 팝니다. 이번에도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다투게 되자, 거기 이름도 ‘다툼’[싯나]이라 짓고,
또 다른 데로 옮겨 새 우물을 팝니다. 그제야 다투지 않게 되니, 그 우물 이름을 ‘르호봇’이라,
‘넓은 장소’라고 부르는데요, 그렇게 간 땅이 아주 넓은 땅이었고,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
다, 이삭은 고백합니다.
그때 이삭이 정착한 곳이 바로 오늘 2절에 나오는 브엘세바입니다. 유다의 기업이었다가 시므온
의 기업이 된 성읍 중 가장 먼저 나옵니다. 이삭이 거기서 평생 처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
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네게 복을 주고,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겠다.” 말씀
하시고, 이삭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 블레셋의 왕
아비멜렉이 군대 장관을 이끌고 이삭을 찾아옵니다. 내가 너희를 피해서 왔는데, 왜 또 내게 왔
느냐고 이삭이 물으니, 그들의 대답이 기가 막힙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
명히 보았다. 그러니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계약 맺길 원한다.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다.”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평화의 맹세를 맺게 되는데요, 그래서 이
삭은 그곳을 가리켜, ‘브엘세바’, ‘맹세의 우물’이라 이름 짓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그런 길을, 거기까지 가고 있습니다. 온유한 자 복 되니, 그는 반
드시 땅을 기업으로 받는데, 자기가 가진 힘이나 능력으로만 기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
고 복 받아 넓은 땅 받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을 받게 되고, 그를 통해 그 땅에
다툼이 그치고 평화가 임하는 거기까지입니다. 성도는 세상만사 다 참고 견뎌야 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받는’ 땅이 우리가 ‘얻은’ 땅과 늘 같지는 않다는 것, 우리는 내가 ‘얻은
땅’으로만이 아니라, ‘받은 땅’으로 평가받는 존재라는 것, … 어떤 땅을 얼마나 소유하느냐만큼
중요한 것이, 그 땅을 누구와 함께 누리고, 그 속에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와 평화가 임하고 있느
냐, 우리는 그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질문을 우리가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며 살 수 있다면, 내게 주신 하나님의 기업이 이미 나에
게 너무 많다는 사실에 조금씩 눈이 열리게 될 겁니다. ‘자기들에게 너무 많으므로’ 이것이 모든
일의 출발점이지요. 거기서 시작된 그 길을 멈추지 않고 걸어간다면, 우리도 온유한 자에게 약속
하신 그 땅을 받아 누리게 될 겁니다. 내 기업만 얻는 삶이 아니라,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이 기업
을 얻게 되고, 그 땅에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는, 참으로 복 되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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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미 많은 우리 성도님들이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신 삶에 자족하고 감
사하며, 내 필요를 쉽게 늘리지 않고, 자기를 비워 시므온을 품고 섬기는 유다의 삶을 힘껏 살아
내고 계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함께 예배하는 탄자니아 성도들 역시 그런 삶의 열매겠지요.
저는 그런 성도들의 모습이 한편으론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걱정될 때도
많습니다. 그 삶이 너무 고되지는 않나, 너무 많은 기업을 시므온에 떼어 주고 사는 것은 아닌
가, 마음이 무겁고, 이제 그 정도면 됐으니, 앞으론 본인 몫도 좀 챙기며 살라는 말이, 늘 제 목
에 가시처럼 걸려 있습니다.
주중에 한 집사님이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회사가 요즘 많이 어려워서 이번 달부터
10~20% 정도 월급을 적게 받을 것 같다고. 그러면 이제 목사님 신수비랑 비슷해질 것 같다고
웃으며 얘기하는 겁니다. 그 말을 듣는 저는 가슴이 철렁해서, 그러면 정말 큰일 아니냐, 제가
열심히 기도하겠다고 했더니, 집사님이 그러셔요. “뭐, 그 정도만 받아도 잘 살 수 있습니다. 그
거면 충분하지요.” 제가 속으로 ‘목사보다 훨씬 낫다.’ 그랬습니다.
나에게 너무 많으므로 자기를 비우는 것, 그것은 꼭 돈이나 물질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에게 충분히 많다고 여겨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시간이나 여유든, 평안이나 쉼이든, 건강
이나 자유든, 이미 나에게 풍족하다고 느껴지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비우고 나누어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마음을 잘 지켜내는 게 어렵고 중요하지요. 아무리 가
져도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끼게 하고 새로운 욕망을 강요하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우리의 마
음을 주님의 온유함으로 채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롬 12:2).
사람의 눈에는 우스꽝스럽고 초라해 보이지만,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이, 그분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했고, 하나님 나라 기업의 분배가 벌써 시작됐습니다. 결국
유다는 홀로 온 이스라엘을 기업으로 누리는 유일한 지파가 되지요. 모든 지파 중에 오직 유다만
이 남아, 가나안을 다스립니다. 온유한 자 복 되니,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웁시다. 우리의 필요를 풍성히 누리되 욕심은 다스려서, 온유한 자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기업과 복을, 일평생 부족함 없이 누리며 사는 저와 여러분, 우리고백교회 되길 소망합
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