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하나님의 일
2026-02-08 · 설교 원고 · 9쪽 · 약 17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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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백교회 고준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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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후 네 번째 주일 [요한복음 강해 23]
요한복음 6:22~35 (신약 153쪽) 하나님의 일
본문 29절의 ‘하나님의 일’을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
기를 바랍니다. … 제자들이 풍랑으로 고생하던 그다음 날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시선은 계속해
서 오병이어 사건이 일어났던 갈릴리 건너편, 그러니까 갈릴리 동쪽에 머물러 있는데요, 예수님
을 찾고 있는 사람들이 그곳에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배
가 한 척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또 어제 해가 저물었을 때 예수님 없이 제자들만 그
배를 타고 가는 것도 분명하게 목격했습니다. 어딘가 근처에 예수님이 홀로 계신 게 분명한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 당황해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찾는 또 다른 무리가 탄 배들이 디베랴 쪽에서, 그러니까 갈릴리 서쪽에서도 건
너왔다고 성경은 말합니다(23절). 다시 말해 그들은, 예수님 그리고 제자들과 길이 엇갈렸다는 뜻
이지요.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들이 갈릴리를 건너오면서 풍랑을 만났었다는 얘기는 없다는 점입
니다. 그들도 분명 제자들처럼 어제저녁부터 오늘 아침 사이에 호수를 건너왔을 텐데 말입니다.
23절에 보면, 그들이 타고 왔던 배가 나오는데요, 원문을 보면 특히 ‘작은 배’를 가리키는 단어
(πλοιάρια, boats)의 복수형으로 되어 있어서, 앞에 17절에 제자들이 타고 갔던, 크기가 좀 더
큰 일반적인 배(πλοῖον, ship)의 단수형과 구별됩니다. 영어로도 다른데요, 제자들이 타고 간 건
‘a ship’이고, 사람들이 타고 온 건 ‘boats’라고 나옵니다. ship과 boat, 대충 차이가 느껴지시지
요? 그런 작은 배들이 그 풍랑의 밤에 아무 문제 없이 갈릴리 호수를 건너왔다는 것이 좀 의아
하게 느껴집니다. 더 큰 배를 타고 갔던 제자들은 밤새도록 죽을 고생을 했던 바다인데 말이지
요. 그들이 가버나움으로 되돌아갈 때도 마찬가진데요, 별다른 문제 없이 신속하게 다시 갈릴리
를 건너 돌아갔음을 본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24절, ‘곧’).
‘제자’들에겐 폭풍인데, ‘무리’에겐 순풍이던 그날의 바다가 참 이상합니다. 본문이 ‘제자’와 ‘무
리’를 서로 구분하여 기록하듯이, 그들의 여정도 정반대의 모습을 보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
해서 떠난 제자들은 큰 풍랑을 만나고, 자기들 욕심대로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 하는 사람
들은 오히려 아무 문제 없이 그 바다를 건넙니다.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현실이지요. 어떻
습니까, 지금 여러분 인생의 배는 어떤 여정을 지나고 있습니까?
본문을 통해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처하고 있는 어떤 좋은 상황, 또 나쁜 상
황이 우리의 신앙을 온전히 증언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믿음과 현실을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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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대로 결부시킵니다. 환경의 형통함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고, 고난의 파도는 하나님의 외
면으로 오해합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무리’가 평안한 그 바다에서
‘제자’들은 고난을 겪을 수 있습니다. 무리와 제자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같지 않기 때문
입니다. 순풍에 돛단 듯 인생이 흘러간다고 해서 안심할 것도 아니고, 인생의 배가 거친 파도에
흔들리고 있다고 해서 무작정 나 자신을 탓할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때로 우리가 길을 잘못 들
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이 명령하신 대로 정확히 가고 있다는, 순종의 결과라고 성경은
말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마음가짐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머리로는 알아도 막상 풍랑을 당하고 나면 눈앞이 캄
캄해집니다. 풍랑의 원인이 전적으로 나에게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자책부터 하게 됩니다. 사람
은 누구나 눈에 보이는 대로 생각하게 되지요. 잘 되고 복 받아야 신앙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
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실은 꼭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르면 고난의 과정을 피할 수 없습니
다. 배의 목적이 항구의 안전함이 아니듯,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도 그저 평탄한 삶이 아
니라, 거룩함이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다르면 그 과정도 달라지는 게 당연한 이치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 운전 면허 학원과
그 학원에 등록한 사람의 목적이 뭡니까? 운전을 잘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운전 면허 시험에 합
격하는 것입니까? 네, 사람마다 차이가 좀 있긴 하겠습니다만, 합격해서 면허증 따는 게 목적입
니다. 그래서 면허를 따도 도로에서 운전을 제대로 못 합니다. 운전을 배운 게 아니라 시험에 합
격하는 걸 배웠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그러니 과정도 좀 이상합니다. 현실에서 주차를 잘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시험장 어디서 핸들을 어디까지 틀어서, 어깨가 어디 선에 맞춰질 때까지 후진하다가, 백미러에
뭐가 보이면 거기서 다시 핸들을 반대로 틀어서 뭘 하고, 뭘 하고, 그렇게 배운단 말이지요. 왜
그렇게 가르치고, 과정이 왜 그렇게 됐다고요? 네, 목적이 운전을 잘하는 게 아니라 시험에 붙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목적에 따라 그 과정도 달라집니다. 믿는 자가 겪는 삶의 과정이 세상과 다른 것은, 그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 때문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아무 문제 없던 바다가, 예수 믿고는 전혀 다
른 모습으로 돌변하지요. 더 이상 편하게 건너가는 게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정말로
믿는 게 목적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그 목적에 맞는 과정을, 믿음의 ‘기회’로 주시는 것입니다.
영화 ‘에반 올마이티’에 보면 그런 유명한 대사가 나오지요. 한 식당에서 근심 어린 표정으로 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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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있는 한 여성 손님, 여주인공 조앤에게 웨이터로 변장한 하나님이 다가와 말을 겁니다. 조앤
의 고민을 듣고 이런 얘길 하지요. “누군가 하나님께 인내를 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
에게 인내심을 덥석 주실까요? 아니면 인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까요? … 용기를 달라고 구
하면 하나님이 용기를 주실까요, 아니면 용기를 발휘할 ‘기회’를 주실까요? … 만약 누군가 가족
들이 서로 더 가까워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갑자기 가족들에게 어떤 묘한 감정이 생
기게 하실까요, 아니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까요?” … 여러분, 하나님은 어떻게 하
실까요?
네, 그래서 성도의 삶이 때때로 고단합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
시는 그 목적 앞에, 하나님은 양보가 없고, 후회가 없고, 타협이 없고, 또 포기가 없으시기 때문
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결코 실수가 없으시고,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허
락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삶이 우리를 속이려 할지라도, 성도는 이 진리 안에서 담대해야 합니
다. 삶의 현실을 따라 일희일비하며, 거기서 내가 누구인지 확인하려는 태도를 멈추고, 내가 지
금 누구의 뜻을 좇아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 분별하면서, 하루하루 묵묵히 믿음의 노를 저어 나
가야 합니다.
이번 동계 올림픽에서 우리나라에 첫 번째 금메달을 안겨준 최가온 선수, 다 아실 겁니다. 결승
세 번의 기회 중에서 첫 번째 라운드에서 크게 넘어져 부상을 당하지요. 두 번째 라운드에서도
다시 미끄러져 하위권으로 밀려나는데요, 그 괴롭고 두려운 상황에서 아빠가 최가온 선수에게 그
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포기하지만 말아봐.” 아빠의 그 말이 다시 딸을 일으켜 세웠고, 아시는
것처럼 마지막 라운드에서 최고점을 받고 기적처럼 금메달을 따게 됩니다.
“포기하지만 말아봐.” 아마 우리 주님도 우리에게 늘 그렇게 말씀하고 계실 것 같습니다. 비록
넘어질 때가 많고, 실패할 때가 많지만, 그러나 포기하지만 말아보라고, 그러면 반드시 이길 테
니까, 이미 주님이 이겼으니까, 다시 또 믿음의 발걸음을 내디뎌 보라고, 주님 말씀합니다. 사랑
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신 주님을 믿고, 다시 두려움 없이 주
님의 말씀을 좇아 바다로 나아가시기를, 그리고 그 풍랑까지 꼭 이겨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아멘.
디베랴, 그러니까 갈릴리 서쪽에서 사람들이 건너편으로 와서 보니 예수님도 안 계시고, 제자들
도 이미 다 떠나고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배를 타고 서쪽으로 되돌아갑니다. 앞서 이쪽에서 예
수님을 찾고 있던 사람들과 합류해서 다 같이 갈릴리를 건너갔겠지요. 가서 예수님의 주된 사역
지인 가버나움으로 향합니다. 그런 그들과 주님의 모습이 마치 숨바꼭질 같기도 하고, 술래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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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기도 하고, 주님을 찾는 ‘열심’만큼은 여느 제자들 못지않습니다.
기어이 예수님을 만난 그들이, 언제 여기 오셨냐고 주님께 물어봅니다. 그런데 주님은 거기에는
일절 답이 없으시고, 다른 얘길 하시지요. 반가운 인사 대신 그들이 왜 그렇게 주님을 찾는지,
그들의 속마음을 들춰내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하십니다. 그들이 정말로 찾고 있는
게 뭐라고 하십니까? 네, 열심히 주님을 찾았지만, 실은 주님이 아니라, 떡 때문이고, ‘떡으로 배
부른 삶’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표적을 행하셨는데, 정작 사람들은 떡에 시선을 빼앗깁니다. 왜 아니겠습니
까? 오병이어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인걸요. 우리도 만약 그 기적의 현장에 있었다면, 당연히 떡
에 마음이 쏠렸을 겁니다. 더는 먹고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얼마나 흥분됐을까요?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일평생 끼니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면 얼마
나 좋을까?’ 어디 떡뿐이겠습니까? 그런 주님을 임금 삼아 내 인생의 결핍을 해결 받고 싶은 마
음이 굴뚝같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무리를 향해 주님은 책망하듯 말씀합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표적의 의미를 깨닫고 주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떡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라고 탄식하십니다. 주님이 직접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무리를 먹이셨으면서도,
떡에 대한 그들의 집착을 경계하시지요. 그 떡이 아니라 다른 떡을 먹어야 한다고, 그래야 인생
의 허기를 채울 수 있고, 진정으로 살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 주님의 메시지가 27절에 응축되어 있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
치신 자니라.” 하십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
여 일하라. 참 놀랍고 어려운 말씀이지요. 과연 우리가 주님의 이 말씀을 믿고 살아낼 수 있을
지,
사람은 누구나 썩을 양식을 위해서 일합니다. 먹어야 살고, 그 양식이 우리 안에서 썩어야, 소멸
해야 비로소 우리의 육체가 소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보면 우리 육체도 다
썩게 되지요. 우리가 먹는 양식도, 그 양식을 먹고 지탱하는 육신도 결국은 다 썩어 소멸합니다.
그러니까 썩을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의 육체와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먹고살기 위해서 우린 일해야 하고, 누구도 그 숙명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그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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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주님은 그 썩을 양식을 ‘위해서’, 그것 ‘때문에’ 일하지는 말라고 하십니다. 일용할 양식이 필
요하고 그래서 일도 하고, 양식을 위해 기도도 해야 하지만, 너희가 일해야 할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알쏭달쏭한 주님 말씀에 유대인들이 질문합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
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하면, 그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얻기 위한 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까,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뭐라고 답하십니까? 무엇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시지
요? 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십니다.
이 대화에서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할 부분은, ‘일’이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할 때, 예수님과 유대인
들의 표현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점입니다. ‘일’이라는 단어 자체는 같지만(ἔργα), 원문을 보면,
그 ‘수’가 다릅니다. 유대인들은 ‘일들’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해서 물었는데, 예수님은 단수형을 써
서 답하십니다. 그런 차이를 살려 다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일
들을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 이것이 바로 유일한 하나님의 일이다.” …
예수님의 의도가 더 명확하게 느껴지시지요? 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얻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하나님의 일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앞에서, 썩을 양식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고’ 하셨지요.
그러니까 주님 말씀은 결국,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바로 그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 예수님을 열심히 좇아오는 무리의 문제는, 그들이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고, 썩을 양식을 위해 예수님을 찾고 있다는 것이지요. 여러 가지 하나님의 일, 종교적인 일
들을 하고자 하는 것도, 그러면 ‘썩을 양식’을 더 많이 하나님이 주실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일하는 목적과 본질을 바꾸라고 하십니다. 썩을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영생
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고, 또 그 일도 여러 가지를 하려고 하지 말고, 다만 예수를 믿
고 신뢰하는 하나의 일에 초점을 맞추라고 하십니다. … 지금도 우리는 인생의 결핍을 채우기 위
해 수많은 일을 하면서 살아갑니다만, 예수님은 주님을 믿는 한 가지 일이면 족하다고 말씀합니
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믿고 그분과 동행하는 것, 그것이 유일한 하나님의 일이며, 그 일
을 하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주님이 주실 거라고, 그래서 결코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게 될
거라고 약속하십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하는 모든 노동을
멈추라는 뜻이 아닙니다. 일은 다 그만두고 예수님만 계속 쫓아다니면 오병이어 기적으로 먹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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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라는 게 아니지요.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살후 3:10). 그
러니까 주님 말씀은, 우리가 땀 흘리며 감당하는 그 일을 그저 썩을 양식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주님을 신뢰하고 증언하며,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거룩
한 부르심으로 여기며 살라는 것입니다.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 따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 따로가 아니지요. 일
자체로 그 둘이 구별되는 게 아닙니다. 같은 일을 해도 어떤 목적과 의미를 두고 하느냐에 따라
그 일의 본질이 결정될 뿐입니다. … 제가 하는 이 설교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얻기 위한 하
나님의 일이고, 제가 집에서 하는 요리나 설거지는 썩을 양식을 위해 하는 사람의 일이냐,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해 설교할 수도 있고, 영생의 양식을 위해 설거지를 할 수도 있
습니다. 이것은 일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사람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아무리 하찮
아 보이고 세속적인 것처럼 보이는 일도 예수를 믿기 위해 한다면,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한다
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한다면, 그것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한
‘하나님의 일’이 되고, 그 일을 통해 주님 약속하신 영생의 양식을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시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도 기억하실 겁니다. 나에
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고 하시면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라고 하셨습니다(4:34).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기억할 것은, 사
실 주님에게는, 일과 양식이 분리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양식을 얻기 위한 수단이 ‘일’이 아
니고, 그 일이 곧 양식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을 그렇게 하셨습니다.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
버지의 뜻을 좇아 행하셨고, 그 일을 통해 영생이라는 양식을 늘 배불리 누리며 사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 보냄을 받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도 똑같습니다. 우리의 힘들고 지루한 일상과
노동을 단지 썩을 양식을 위한 수고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하나님의 일’로 여기며 감당할 수 있다면, 그 일은 단지 먹고살기 위한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
니라, 그 자체로 이미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 되어 우리를 참으로 배 불릴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만나는 여러 문제와 풍랑도 마찬가지겠지요. 거기서도 우리가 주님을 신뢰하는 ‘하
나님의 일’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우리를 위협하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주님을 더욱 깊이 의지하고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양식이 되어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입
니다. … 얼마 전에 묵상했던 가나 혼인 잔치의 마리아 모습도 생각납니다. 잔치에 포도주가 떨
어진 그 상황에서, 그리고 자신의 요청에 대한 주님의 거절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마리아는 많은
일과 고민 대신 자신이 해야 할 한 가지 일에 집중했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구하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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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었지요. 오늘 주님이 말씀하신 그 ‘하나님의 일’을 마리아는 그 순간에
도 힘껏 감당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은, 고단한 우리 삶에 어떤 종교적인
일들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가 감당하고 있는 모든 일을, 예수님을 믿고 증언하는 일로
새롭게 받아들이는 것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 썩을 양식을 얻기 위해 예수를 쫓아다니는 것
이 열심 있는 신앙인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신뢰하고, 무슨 일을 하든 주님을 위
해 감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최근에 우연히 어떤 교회의 표어를 보게 됐는데요, “신앙 생활하지 말고, 생활이 신앙이 되
게 하라.”(Re) 그랬습니다. 참 인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오늘 주님의 말씀도 그런 뜻입니다.
신앙 따로 생활 따로가 아니라, 생활이 곧 믿는 일이 되는 게 ‘거룩’이고, 예수님을 떡 주는 분이
아니라 떡 자체로 먹고 누리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 양식을
늘 배불리 누리며 사는 여러분 되길 축복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신 말씀이, 갈수록 실감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만,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예수 믿는 것이 정말 ‘일’처럼 여겨지십니까? 먹고사는 게
일이라는 말처럼, ‘예수 믿는 것도, 예수를 먹고사는 것도 큰일이구나!’ 생각되시는지요? … 예수
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주님 말씀은 그런 뜻이겠지요. 그것이 정말 ‘일’이고 ‘業’으로
여겨야 한다는 겁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며 사는 것이 단지 어떤 고상한 종교 활동이 아니라, 또
그냥 적당히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무슨 취미생활이 아니라, 정말 애를 쓰고 해야 하는, 말 그
대로 ‘일’이라는 사실을 주님은 다시 한번 제자들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예수 믿는 것을 ‘일’이라고, ‘업’이라고 여길 수 있느냐, 여기서 정말 많은 것이 달라지겠지요. 여
러분 직장에서, 또 집에서 하는 일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기분이 좋든 싫든, 몸이 고단하든
아니든 정해진 시간에 맞춰 우리는 날마다 일터로 향합니다. 오늘은 기분이 좀 별로라고 해서 내
팽개칠 수 없고, 어젯밤에 부부싸움 했다고 회사 안 나갈 수 없습니다. 어제 열심히 일했다고 오
늘 적당히 할 수도 없지요. 누가 특별히 인정해 주지 않아도, 별다른 성취나 성과가 잘 나타나지
않아도, 그저 오늘을 어제처럼, 내일은 또 오늘처럼 하루하루 인내하며 노력합니다. 그것이 ‘일’
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집니다. 그 일을 한다고 해서 날마다 가슴 벅차고 뭔가 내
삶이 달라지고, 대단한 은혜와 황홀감이 이어지는 게 아닙니다. 내 감정이나 기분과 상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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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역꾸역, 성실하게, 하루하루 주어진 자리를 지키고, 맡겨진 것들을 감당할 뿐입니다. 그것이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믿은 걸로 오늘 살아지지 않지요. 오늘 다시 믿는 ‘일’을 해야 하고,
믿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하루 열심히 했다고 티가 나지도 않습니다. 대신 대충 했다가는 대번
표가 나고 사달이 납니다. 세상일이랑 똑같습니다.
바울은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신앙을 올림픽 경기나 전투에 자주 비유했습니다. ‘싸우고’, ‘달리
고’, ‘힘을 다하고.’,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절제하고’, … 치열한 단어들이 그의 편지에 가득
합니다. 해보니까 그렇더라는 것이지요. 적당히 해서는 아무것도 되는 게 없고, 정말 올림픽에
나가는 선수처럼,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처럼 해야만, 예수 믿는 ‘일’을 해낼 수 있더라는 것입니
다.
물론 동아리 활동을 하듯 신앙생활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아무 유익이 없게 됩
니다. 믿음의 능력도, 승리도 경험할 수 없고, 인생의 갈증과 허기를 채울 수도 없게 됩니다. 예
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주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우리의 삶이 곧 믿음
의 일터라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직장 분위기가 좋고 환경이 좋아도 결국 직장은 직
장인 것처럼, 신앙도, 교회도 똑같습니다. 재미와 흥미로 가득한 곳이라기보다는 지루하고 힘든
일이 반복되는 거룩한 일터이고, 우리는 모두 언젠가 하나님 앞에서 결산하게 될 일꾼이고 청지
기라는 사실을, 우린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이 유일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일을 위
해 치러야 할 수고를 날마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감당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
주중에 흥미로운 기사를 하나 봤는데요,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의 장남 임모 군이 서울대에 합격
해서, 올해 입학하는 예비 고등학생 후배들에게 여러 조언을 했다는데요, … 내신과 수능은 어느
하나만 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끝까지 함께 가져가야 한다는 하나 마나 한 얘기도 있었습니다만,
한 가지 기억에 남는 내용은, 공부를 제대로 하려고 한다면, 고등학교 3년 동안 스마트폰과 게임
을 완전히 단절해야 한다는 얘기였습니다. 본인도 그렇게 공부했다고 하지요. 그렇게 뜻을 정하
고 절제하며, 시험을 다 마친 후 3년 만에 맛보는 즐거움도 괜찮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건
몰라서 못 하는 게 아니지요. 그 과정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하느냐, 전적
으로 거기에 달린 문제입니다.
이제 설 연휴가 시작되고 새해의 기회가 다시 한번 우리에게 주어집니다만, 예수를 믿는 것이 하
나님의 일이라는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께
구하는 것을 일이요, 업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기분 내킬 때만 기도하고 묵상하는 게 아니라,
원고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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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듯 성경을 읽고, 일하듯 기도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는 우리의 그 열심을 생각하면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지금 우리
가 어떤 마음가짐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시기를 부탁드리고, 대충 믿어도 하나님이 알아서 다
해 줄 거라는 안일한 생각과 때마다 올라오는 영적 게으름을 주님의 이름으로 꾸짖어 내쫓으시
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예수를 믿고 증언하는 하나님의 일이 되기
를, 그래서 주님 주시는 영생의 양식을 늘 배불리 먹고 누리며 사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