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하늘에서 주신 바

2025-10-26 · 설교 원고 · 9쪽 · 약 18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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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오순절 후 스무 번째 주일 [요한복음 강해 12] 요한복음 3:22~36 (신약 146쪽) 하늘에서 주신 바 본문 27절의 ‘하늘에서 주신 바’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삶 이 되기를 바랍니다. …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긴 대화가 마무리되고, 예 수님과 제자들은 이제 유대 땅으로 향합니다. 물론 예루살렘도 유대 땅에 속한 곳이긴 합니다만, 본문에서 말하는 유대 땅은 예루살렘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을 의미합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의 여정이 의미심장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 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주님의 마지막 말씀처럼, 요 한복음은 그 순서대로 예수님의 여정을 기록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로, 그리고 4장에서는 사마리아로, 이후에는 갈릴리를 지나 세상 끝, 곧 이방인들을 향해서, 복음의 지평이 점점 확장되어 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유대 땅에 머무시면서 무엇을 하셨다고 본문은 말합니까? 네, 세례를 베푸셨습 니다. 대단히 놀라운 내용이지요. 예수님이 세례를 베풀었다고 나오는 성경의 유일한 기록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4장 2절에 가서 보면, 이때 세례를 베푼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제자들이었음이 밝혀집니다. 예수님의 초기 제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세례요한의 제자들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어 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 진지하게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어서 예수 공 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세례요한에게 배운 대로 한 거지요. 제자들이 베풀었다고는 하지만, 예수님도 어느 정도 그 방식을 인정하셨던 걸로 보이고, 예수님의 초기 사역이 얼마나 세례요한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렇게 유대 땅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을 때, 그럼 세례요한은 뭘 했느냐, 요 한 역시 ‘애논’이라는 곳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기 전이었다고 24절은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데요, 그러니까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세례를 받고 공생애 를 시작하신 후에도 여전히 세례 베푸는 일을 멈추지 않았던 것입니다.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 체 포되어 죽임을 당하기 전까지, 요한은 계속 사역을 이어갔고, 그러다 보니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동시에 사역했던 때가 존재하게 됐습니다. 두 분의 사역이 겹치는 일종의 과도기라고 할 수 있겠 고, 본문의 뉘앙스로 보면, 사역의 장소도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누군 가의 눈에는 경쟁 아닌 경쟁처럼 보였을 수도 있겠지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세례를 베풀다 보니, 그런 인상이 더 강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대인 사이에 논쟁이 벌어집니다. 사람의 부정함을 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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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끗하게 하는 ‘정결 예식’에 관한 것인데요, 그 자세한 내용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만, 그 변론 이후에 곧바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에 관해 세례요한에게 이야기하는 걸로 봐서는, 이 또한 예수님과 무관하지 않은 논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율법 안에 정결 예식이 엄연히 존재 하는데, 도대체 세례가 왜 필요하냐고 따졌을 수도 있고, 예수도 세례를 베풀던데, 도대체 너희 세례와 차이가 뭐냐, 지금은 예수가 대세인 거 같은데 예수의 세례와 세례요한의 세례 중에 어느 쪽이 더 능력이 있는 거냐, 물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 논쟁 이후에 제자들이 세례요한에게 이야기합니다.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 편에 있던 사람, 선생님이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했던 이가 세례를 베풀고 있는데, 사람들 이 다 그에게로 가고 있습니다.” 뭔가 속상하고 답답한 마음이 담겼지요? ‘예수’라고 하면 누군 지 바로 알 텐데, 이름은 말 안 하고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이’, ‘선생님이 증언하 시던 자’라고 굳이 풀어서 말하는 건, 그만큼 마음에 안 든다는 얘기고, 예수님이 결국 세례요한 과 연관된 존재요, 요한의 덕을 보고 그 자리까지 이르게 됐음을 드러내려는 의도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거지요.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이 어떻게 똑같이 세례를 베풀어서 사람들 을 모을 수 있는지, 그것도 가까운 유대 땅에서 그러고 있으니, 요한의 제자들 입장에선 마음이 좋을 리 없습니다. 하려면 좀 멀리서 하든가 해야지, 가까운 데서 자꾸 이쪽 사람을 뺏어 가는 건, 세상 말로 ‘상도덕’에도 맞질 않습니다. 상도덕 하니까 생각나는 게, 저희 교단 규정에도 보면 그런 게 있습니다. 교회를 세울 때, 기존 통합 측 교회와 최소한 500m 이상 떨어진 곳에서 해야 합니다. 500m보다 가까우면 교회 설립 자체가 아예 불가능합니다. 500m 이상 떨어진 곳에 세울 때도, 교단 불문하고 근처에 있는 교회 들을 미리 찾아가서 일종의 양해를 구하고, ‘설립 동의서’도 받아와야 합니다. 저희 교회도 구로 에 있을 때 정확히 640m 거리에 저희 교단 교회가 있었거든요. 아슬아슬했지요. 떨리는 마음으 로 찾아가서 동의서를 받으러 왔다고 말씀드렸더니, 다행히 목사님이 너무 좋으시더라고요. 열심 히 하라고 격려하시면서 기도도 해주시고, 가면서 고기 좀 사서 가라고 하시면서 봉투도 챙겨주 셨습니다. 주변의 큰 교회 두 곳도 있어서 찾아갔는데, 거긴 담임목사님이 만나주지도 않더라고 요. 그냥 대충 사무실에서 도장만 찍어 주고 맙니다. 아무튼 이런 거리 규정이나 동의서 그런 게 다, 소위 동업자로서 최소한의 예의이고 배려인데요,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이 지 금 너무 심한 거예요. 예수님의 제자로 있는 사람들도 다 원래는 자기 동료였지요. 지금 누구 덕 분에 그렇게 됐는데, 적어도 상도덕은 지켜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서운하고, 사랑하는 스승의 쇠락에 못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데 정작 세례요한은 뭐라고 합니까? 네, “만일 하늘에서 주시지 않으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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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을 수 없다. 이 모든 게 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거다. …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분 앞에 보 내심을 받는 자라고 너희에게 말했으니, 이제 그걸 증언할 사람도 너희다. … 그분은 신랑이고 나는 신랑의 친구일 뿐이다. … 그는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해야 한다.” 이야기합니다. 그는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해야 한다, 참 기막힌 말입니다. 여기 ‘흥하다’라는 동사[악사노]는 ‘증 가하다’, ‘커지다’라는 뜻이고, ‘쇠하다’라는 동사[엘라토오]는 ‘감소하다’, ‘작아지다’ 그런 뜻입니 다. 마치 달이 점점 차오르고 또 점점 기울어 가는 것처럼, 점진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지금의 상황에 대한 세례요한의 인식이 명확하게 드러나지요. 예수님이 등장했으니 세례요한이 바로 사 라지는 게 아닙니다. 한쪽은 증가하고, 한쪽은 감소해 가는, 어떤 하나의 ‘과정’으로 요한은 생각 합니다. ‘Fade in. Fade out!’이라고 하지요. 예수님은 점점 더 흥해져 가고, 자신은 조금씩 쇠 해져 갑니다. 두 분이 함께 사역하는 과도기의 시간도 그래서 존재하게 됐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사역을 시작하셨지만, 요한은 자신에게 주어진 부르심을 내려놓지 않습니다. 아직 사역이 남아있다고 믿기 때문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박수칠 때 멋지게 떠날 수가 없습니다. … 얼마 전에 삼성의 오승환 선수가 은퇴식에서 그런 얘길 하더라고요. “어떤 이는 박수칠 때 떠나 라고 말하지만, 저는 끝까지 박수를 얻기 위해 노력한 제 길에 후회가 없습니다.” 참 멋진 말이 라고 생각했는데요, 요한은 다른 이유로 은퇴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직도 예수님이 누 구신지 모르고 있고, 예수님께는 여전히 자신의 증언이 필요합니다. 억울해하는 제자들에게 자신 의 증언을 계속 이어가라고 당부도 해야 하지요. 결국 요한은 언제 은퇴합니까? 네, 죽음이 곧 그의 사명이 끝나는 자리였습니다. 나보다 훌륭한 후임자와 함께 일하며 계속 비교당하는 일, 인간적으로 참 괴로운 일입니다. 나중 에 제 뒤에 어떤 목사님이 우리 교회 담임목사로 오셨는데, 모든 면에서 정말 훌륭하고 탁월한 분이 오셔서는, 일정 기간 저와 공동 목회를 하게 된다면, 그래서 모든 면에서 제가 계속 비교를 당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사역을 시작했는데, 그럼 나는 물러나는 게 제일입니다. ‘fade out’, 천천히 사라지는 게 아니라, ‘switch out’, ‘cut off’, 단번에 물러나야 지요. 그래야 비교도 덜 당하고, 예수님과 경쟁한다는 오해도 안 받고, 여러모로 깔끔합니다. 만 약 그렇게 물러났다면, 그 허망한 죽음도 피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요한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고, 자신은 그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그보다 앞서 보냄을 받은 자인데, 아직 주님의 길이 충분히 예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됐지만, 요한이 보기에 아직 세상은 그분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 니다. 그러니 예수님 앞에서 그분의 길을 준비하는 자신의 부르심도 당연히 끝나지 않은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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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요.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도 선택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예수를 뒤에서 따르 는 자’가 아니라, ‘그 앞에서 예수를 증언하는 자’로 부름 받았음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요한의 확신이 잘 드러나는 아주 흥미로운 비유 하나가 오늘 29절에 나옵니다. “신부를 취 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다.” 세례요한은 이야기합니다. … 세례요한의 생각이 압축되어 있는 구절인데요, 예수님 이 오신 지금의 상황을 요한이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또 거기서 자신의 역할은 뭐라고 생각하 는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신랑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신랑과 신 부가 혼인을 통해 하나가 되듯,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연합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이제 그 혼인 잔치가 시작되고 있다고 요한은 이해합니다.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내용이기도 하고, 또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도 정확히 일치합 니다. 첫 기적이었던 가나 혼인 잔치를 통해서,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신지, 왜 오셨는지를 명확 히 드러내셨고, 또 천국을 혼인 잔치에 비유하신 것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왜 예수님의 제자들 만 금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답하시면서도,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고,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그날에는 금식할 거라고 하시면서, 주님이 곧 신랑이요, 그 백성이 신부임을 직접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요한의 역할이 중요하지요. 세례요한은 이 상황에서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네, 신랑 되신 예수님의 친구이자, 서서 신랑의 음성을 기다리는 신랑의 ‘들러리’로 여깁니다. 당시 유대인의 풍습에는, 신랑이 신부의 집에 가서 인사하고 신부를 데려오는 것으로 결혼식이 시작됩니다. 이때 신랑의 가장 친한 친구가 들러리가 되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요, 신랑보다 먼 저 신붓집에 가서 결혼식의 시작을 알리고, 신랑이 도착할 때까지 결혼식의 흥을 돋웁니다. 우리 나라도 결혼식 사회는 보통 신랑의 친구가 맡는 경우가 많지요. 예식이 시작되면 제일 먼저 사회 자가 등장해서 인사도 하고, 부모님 소개도 하고, 신랑 신부 입장도 시키고 하는데요, 당시 신랑 의 들러리도 비슷했습니다. 신랑이 도착하기 전까지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 위해 축복의 인사나 기도도 하고, 노래와 연주도 하고, 춤도 직접 췄다고 하는데요, 축가에 축사까지 도맡아 한 셈이 니, 지금의 사회자보다 훨씬 더 비중 있는 역할입니다. 당연히 그는 신랑이 오기만을 고대하겠지요. 마침내 신랑이 도착하고 그의 음성이 들리면 누구보 다 크게 기뻐할 겁니다. 신랑을 가족과 하객들에게 멋지게 소개하고, 조용히 무대 뒤로 퇴장하면 됩니다. 자신을 향했던 모든 이목이 신랑에게 향하는 걸 보면서 들러리가 실망할까요? 전혀 아니 지요. 신랑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이 결혼식에 누구보다 깊이 관여한 사람으로서, 그보다 더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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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레고 기쁜 일은 없습니다. 세례요한이 지금 그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예수님은 흥하고 자신은 쇠 하는 게 당연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부르심을 맡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의 기쁨입니다. 기다리던 신랑이 도착했는데 들러리의 마음이 불편하다면 그건 좀 이상한 일이겠지요. 신랑이 왔 음에도 불구하고, 들러리가 계속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면, 그건 뭔가 문제가 있는 결혼식입 니다. … 결혼식에 가는 신부 친구들이 신부보다 너무 예쁘고 화려하게 하고 가면 민폐라고 하던 데, 맞습니까? 가급적 하얀 드레스는 입으면 안 되겠지요. 신랑보다 사회자가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도 안 됩니다. 가끔 뉴스에 어떤 결혼식 사회를 유재석이 봤다, 축가를 성시경이 불렀다, 그 런 기사가 나고, 그래서 정작 신랑 신부가 누군지는 관심이 없게 되는 경우도 있던데, 사실 그러 면 곤란한 일입니다. 더구나 신랑의 들러리가 신부의 관심을 받는다면, 신부가 신랑이 아니라 신랑 친구에게 시선을 뺏긴다면, 이건 곤란한 정도가 아니라, 막장 드라마가 되고 말겠지요. … 여러분, 요한은 지금 그 런 마음가짐입니다. 그도 흥하고 나도 흥하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미 결혼식이 시작 됐고, 신랑이 도착했습니다. 신랑은 흥해야 하고, 들러리인 자신은 쇠해야 합니다. 더 이상 사람 들의 주목을 받는 일은 없어야 하지요. 나는 들러리이지 신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 이후 세례요한은 더 이상 요한복음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이 세례요 한의 마지막 모습인 셈인데요, 자신이 누구인지, 하나님이 어떤 부르심을 주셨는지 명확히 깨달 았던 요한은, 그렇게 신랑의 음성을 들은 친구의 기쁨으로 충만한 채, 조용히 무대 뒤로 사라집 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제자들의 끊임없는 오해와 불평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세례요한이 자 신의 자리를 지키고, 점점 흥해가는 예수님과 함께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겠지 요? 예수님이 누구시며, 또한 자신은 누구인지, 내가 어떤 부르심을 받았는지 명확히 알고 있었 고, 또 끝까지 그 부르심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겠다는 말은 단순히 자신을 낮추거나 비하하는 그런 겸 손의 표현이 아닙니다. 예수가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 또 내가 누구이고, 어떤 부르심을 받았는 지 아는 사람의 담대한 확신입니다. 지금 요한은 억지로 예수님을 증언하고, 힘들게 자신의 쇠락 을 견디고 있는 게 아니지요. 기뻐합니다.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의 기쁨으로 충만하지요. 예 수를 알고 나의 부르심을 아는 것, 그보다 더 큰 자유와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단락이지요. 31절부터 36절까지, 요한이 그 제자들에게 예수님에 관해 증언 하는 내용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세례요한의 이해가 얼마나 깊고 정확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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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나중에 여러분이 직접 다시 읽어 보셔도 좋겠는데요, 거기 보면, 마치 앞에서 예수님이 니고데모 에게 하셨던 말씀의 요약본 같습니다. ‘일부러 그 내용을 압축해서 여기에 기록한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 니고데모가 이해하지 못했던 그 말씀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시고 왜 이 땅에 오셨는지, 그를 향한 태도가 어떻게 심판이 되는지, 요한은 꿰뚫 어 보고 있지요.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는데, 이 정도면 바로 그 영생을 가장 먼저 누렸던 사람이 바로 요한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알고, 또 자신에게 주신 부르심을 깨달아 끝까지 순종했으니, 누구보다 그 영생을 온전히 누렸을 것입니다. 오늘 세례요한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내가 누구이고,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받았는지를 아는 것이, 우리 삶과 신앙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제 자들이 요한에게 와서 사람들이 다 예수께로 간다고 푸념했을 때, 요한이 제일 먼저 했던 말이지 요.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저 를 한 번 따라 해보실까요?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 라.” (아멘) 저는 이 한마디에 우리 신앙의 핵심이 담겨 있다고 느껴지는데요, 요한은 지금 예수님이 받고 있 는 어떤 영광이나 명성, 또 그전에 자신이 받았던 인정과 칭찬 모두가, 인간의 어떤 실력이나 노 력이기 이전에,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제자들 앞에 고백합니다.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 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이 주셨으니 받아 누렸고, 이제는 하나님이 다른 이에게 주셨 으니 그 또한 받아들일 따름이라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나중에 예수님도 똑같은 말씀을 하시지요. 아버지께서 나에게 이끌지 않으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고(요 6:44) 하십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너를 풀어줄 권한도,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 도 나에게 있는 줄 알지 못하냐고 할 때도, 위에서, 하늘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 한이 너에게 없었을 거라고 이야기하세요(요 19:11).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내가 지금 누리고 있다는 것, 또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기에 내가 가질 수도, 누릴 수도 없다는 이 고백이야말로, 어쩌면 우리 신앙의 기본 중의 기본이고, 바로 거기서부터 성도의 진정한 겸손과 평안이 시작될 것입니다. “천재는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라는 에디슨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 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 진짜 의미를 오해한다고 하지요. 노력이 99%니까, 노력하면 누구나 천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원래 의미는 정반대라는 거예요. 아무리 노력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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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안 되는 마지막 1%가 있는데, 그것이 영감이고, 그것은 내 노력이 아니라 주시는 분께 달렸다는 것, 그것이 에디슨이 정말 하고자 했던 얘깁니다. 노력이 필요 없다는 게 아니지요. 노력도 중한 데, 사실은 노력이라는 것도, 성실함도 하늘이 주는 재능인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엔 엄연히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도 있고, 두 달란트 받은 사람도 있고, 한 달란트 받은 사 람도 있습니다. 그건 나의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도 있고, 은그 릇도 있고, 나무 그릇, 질그릇도 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왜 나는 금 그릇이 아니고 질그릇이냐 고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건 다만 토기장이의 권한일 뿐이고, 나는 그저 주인이 귀하게 쓸 그릇이 되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을 감당할 뿐입니다. … 어느 집 이나 주방에 가보면 그렇지요. 비싸게 주고 샀지만 거의 한 번도 안 쓰는 그릇도 있고, 값싸고 평범한 그릇이어도 귀히 쓰임 받는 그릇이 있듯이, 인생도 그렇습니다. 내가 금 그릇이어서 행복 한 게 아니라, 주님께 쓰임 받는 그릇일 때 행복합니다. 내가 남보다 더 많은 달란트를 받아서 존귀한 게 아니라, 주신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지 않고, 주신 분을 위해, 그분의 나라를 위해 힘 껏 사용되어 뭔가를 남기며 살아갈 때, 그래서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는 삶이 될 때, 진정 복 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바가 무엇인지, 여러분은 잘 헤아리고 계십니까? 또 그것들을 어떻게 누리고, 사용하고 계신지요? … 하늘이 나에게 주신 것을 아는 데서 성도의 사 명이 시작됩니다. 그러니 여러분, 주님 주신 달란트를 꼭 발견하길 바라고, 그것들을 땅에 묻어 두는 일이 없기를 축복합니다. 간혹 아주 늦은 나이에 자기 달란트를 발견한 분들의 이야기를 접하곤 합니다. 평생 한 번도 미 술교육을 받지 못했다가 일흔여덟의 나이에 붓을 들기 시작해서 미국의 국민화가가 된 Grandma Moses 같은 분이 그렇습니다. 평소에 자수 놓는 걸 즐겨 하셨다는데, 관절염에 걸리 면서 더 이상 할 수 없게 돼서 대신 잡은 게 붓이었는데, 거기서 천재적인 재능을 발견했다고 하 지요. … 그런 분들의 얘기를 듣다 보면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런 기회를 끝내 얻지 못하고, 평생 하늘이 주신 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을 알고, 감사하며, 그것을 통해 세상을 섬기며 오직 나만의 인생을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가장 존귀한 삶이겠지요. 여러 분, 꼭 그런 인생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늘이 내게 주신 것은 깨닫지 못하면서, 괜히 남이 받은 것만 쳐다보고,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 하며 사는 것보다 불행한 삶은 없을 겁니다. 우린 보통 내가 받은 건 하찮게 여기고, 남이 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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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건 대단하게 여길 때가 참 많지요. 그래서 차라리 남들이 받은 것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사는 게 성도의 지혜일지 모릅니다. 상대보다 뭔가를 더 잘하는 게 우리 삶의 목적이 아니니까 요. 나는 그냥 하나님이 주신 바 나의 삶을 살아내면 족하고, 그럴 때 가장 존귀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그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지 알려주셨을 때, 베 드로는 옆에 있던 요한의 삶은 어떻게 될지 예수님께 물어보지요. 그때 주님이 뭐라고 하시지요? 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냐.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요한이 살아 있는 게 내 뜻이라고 해도, 너 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니, 너는 그저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오래 사는 것도 하나님께 달렸다고 하시지요. 실제로 요한이 제자 중에 제일 오래 삽니다만, 그게 베드로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요한이 노력해서 오래 사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주셨으니 받아 누리는 것일 뿐인데, 요한은 요한의 길을 가고, 베드로는 베드로의 길을 걸어갈 따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을 가지고, 너무 여러분 자신을 힘들게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자기가 이룬 걸로 착각하면 안 되듯,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을 내가 부족한 걸로 오해해도 안 됩니다. 잘했을 때 겸손하려 애쓰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뭔가 부 족할 때 자기 비하에 빠지지도 않아야 합니다. 결국 하늘에서 주신 바가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 나에겐 주시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우린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지요. 나에게 주신 많은 것에도 딱히 이유가 없는 것처럼, 주시지 않은 것에도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신 것과 주시지 않은 것이 합해진 그 존재가 바로 나 자신일 뿐입 니다. 그걸 온전히 받아들여서, 나에게 주신 것으로는 사명을 이루며 살고, 주시지 않은 것에서 는 은혜를 구하고 살면 족한 것입니다. 사람은 참 이상해서, 부족함이 없을 땐 오히려 은혜도 잘 깨닫지 못합니다. 광야에서 먹는 만나 조차도 ‘하찮은 음식’으로 여기는 존재가 인간이지요. 그래서 뭔가 결핍을 경험할 때, 어떤 힘들 고 어려운 순간에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에 눈을 뜨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픈 데가 없을 땐 건강에 감사가 잘 안 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거나, 몸 어딘가에 문제가 생기게 되 면 비로소 알게 되지요. ‘숨 쉬는 것도 은혜였구나.’ ‘걷고 뛸 수 있는 게 기적이구나.’ 깨닫게 됩 니다. 하나님이 많은 걸 주신 사람이 은혜를 알고 감사하며 살 것 같지만, 꼭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게 받은 것 같은 사람이 더 감사하고 더 깊은 은혜를 고백하며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 은지 모릅니다. 우린 그저 감사하는 만큼, 딱 그만큼 누리고 살뿐이지요. 받은 만큼이 아니라, 감 사한 만큼 누려지는 것이 인생임을 알고, 날마다 주신 것을 헤아리며 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나도 흥하고 주님도 흥하는 길이면 참 좋겠지만, 나는 쇠하고 주님은 흥하는 그 길을 가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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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 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신랑이 아님을, 내 삶을 통해 영광 받으 실 분이 따로 계심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고, 주님을 위해서 내가 흥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내려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바가 무엇인지, 꼭 찾고 누리며 사시길 다시 한번 진심으로 축복합니 다. 관절염에 걸리면 붓도 한 번 들어봐야지요. 나이 불문하고 하늘이 주신 것을 열심히 찾아야 합니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내는 상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품으로 빚어진 유일무이한 존재 임을 잊지 마시고, 다른 누구의 삶도 아닌, 오직 여러분만의 부르심을 찾고 완성해 가시길 바랍 니다. 하나님이 주신 바를 땅에 묻어두지 말고, 힘껏 장사하고 많은 열매를 남겨서, “잘하였도다, 착하 고 충성된 종아.” 주님께 칭찬받는 인생 되십시다! 우리를 판단하실 분은 주님이시니, 사람의 인 정과 비판에 너무 흔들리지 말고, 세상이 정한 성공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성공으로 믿고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 되면 좋겠습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자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생은 하나님이 나에 게 주신 은총과 부르심을 알고 누리는 데서 완성되지요. 그 영생의 삶이 우리의 일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