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그가 사랑하시는 자

2026-09-06 · 설교 원고 · 9쪽 · 약 17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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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백교회 - 1 - 오순절 후 열다섯 번째 주일 [요한복음 강해 45 요한복음 13:12~30 (신약 170쪽) 그가 사랑하시는 자 본문 23절의 ‘그가 사랑하시는 자’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다 씻어 주시고, 중단됐던 식사가 다시 시 작됩니다. 주님께서 옷을 입고 식사 자리에 앉으셔서, 비스듬히 누우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지 요.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처럼 너희도 행하게 하려고 본을 보였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 하십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이세요. 이것이 제자 모두를 향해 하신 말씀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이 택하신 사람들을 다 잘 ‘알고’ 있는데,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든다고 했던 성 경의 말씀이 주님에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다윗이 쓴 시편 41편을 가리킵니다. 다 윗이 가장 신뢰했던 전략가이자 아내 밧세바의 할아버지이기도 했던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반란 에 가담해서 다윗을 배신했습니다. 함께 떡을 나눠 먹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가족이 나를 대적 하여 그의 발꿈치를 든 겁니다. 누가 나에게 발꿈치를 들면 어떻게 되지요? 네, 나를 발로 가격 하거나, 걸려 넘어지게 한다는 의미처럼 들립니다만, 당시 근동에서는 이렇게 발꿈치를 들어 상 대에게 발바닥을 보이는 것 자체가 아주 모욕적인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말씀이 주님께 이루어지게 될 거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 그 룹 안에서, 주님께 발꿈치를 드는 사람이 나올 거래요. 그걸 주님이 ‘안다’ 말씀합니다. 그럼 이 걸 왜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주실까요? (네, 오늘은 규복 집사님이 안 계시지요?) 19절에 보니까,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라고 하세요. ‘내가 그인 줄’이 라고 번역했지만, 사실 이 부분은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예요. 나는 나다, 그랬지요. 그래서 새 번역 성경은, “내가 곧 나임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정리해 보면 이런 거지요. 예수님이 지금 제자들에게 이런 배신의 이야기를 하시는 것은, 제자들 을 당황하게 하거나 마음을 어렵게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또 그 배신 자체를 막으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성경이 예언한 그분이심을 제자들 이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일,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어떻게 자기 제자가 배신할 것도 모르실 수가 있나? 제자를 잘못 택하신 거 아닌가?’ 생각하면서 실망하고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오히 려 이것은 성경의 말씀이 응하는 것이고, 주님이 알고 계신 일이니 오히려 그 일을 보게 되면, ‘아, 주님이 말씀하신 게 이거구나. 주님이 정말 이미 다 알고 계셨고, 주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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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구나.’ 하면서, 예수님을 더욱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이런 말씀을 하시는 주님의 마음은 괴롭습니다. 21절에 이렇게 되어 있지요. “예 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 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그랬습니다.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세요. ‘증언’은 무척 무거 운 단어지요. “심령이 괴로워 말씀하셨다.” 그러면 되는데, 그걸로는 이 말의 무게를 표현하기 부족한 거예요. 증언, 아주 분명하게 단정적으로 말씀하셨다는 거지요. “다른 제자들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바로 너희 열둘 중의 하나가 나를 배신할 것이다. 그냥 어쩌다가 나를 등지고 떠나는 게 아니다. 나를 고의로 팔아넘기는 일이 일어난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너무 당황스럽지요. 도대체 우리 중에 누가 그런 일을 할 거라는 말씀인가. 이게 말이 되는가. 서로 쳐다보며 당혹스러워합니다. 본문에는 제자들이 ‘의심했다고’ 나옵니다(22절). 주님 말씀이지만 의심했어요. 방금 ‘증언’이라고 했잖아요? 예수님의 증언을 믿지 못했습니다. ‘에이,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날까? 이건 주님이 좀 지나치신 거 아닌가?’ 제자 중 누구도 유다의 배반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요한에게 머릿짓을 해서, 고개를 끄덕여서 신호를 보냅니다. 도대체 누가 배신하 는 건지, 예수님께 네가 한번 물어보라고 한 겁니다. 본문에는 ‘요한’이라고 하지 않고, ‘그가, 주 님이 사랑하시는 자’라고 되어 있지요. 요한복음에서 요한이 자신을 가리길 때 사용하는 표현입 니다(19:26, 20:2, 21:7 등). 베드로는 좀 떨어져 있고, 요한은 주님 바로 옆에 있었던 거지요. 심지어 주님 쪽으로 바싹 붙어 있었나 봐요. 23절에 보면, 요한이 주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워 있 었다고 나오고, 25절에도 요한이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했다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 딱 붙어서 식사했던 거예요. ‘참 불편하게도 먹는다’ 싶은데요, 요한이 얼마나 주님을 좋 아하고, 또 주님의 사랑을 사모했는지 느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또 그런 요한을 굳이 뭐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불편하니까 먹을 때만이라도 좀 떨어져서 먹자.” 하지 않으시고, 그렇게 서로 기대서 식사하세요. 당시 비스듬히 누울 때 왼쪽으 로 이렇게 기대서 먹는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러니까 요한은 예수님의 바로 옆 오른쪽에 있었겠 지요. 그런데 최대한 주님 쪽으로 가까이 가서 정말 주님 품에 있는 것처럼 해서 먹었습니다. 아 마 요한의 머리가 주님 가슴이나 배 위치 정도에 있었겠지요. 예수님의 바로 오른편에는 요한이 있었고, 그럼 왼편에는 누가 있었을까요? 네, 바로 가룟 유다 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떡 한 조각을 초에 적셔 유다에게 주시고, 그걸 유다가 받아먹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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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했으니까요. 그렇게 적신 떡을 주고받을 수 있는 위치는 주님 바로 왼쪽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 좌우에 유다와 요한이 있었던 겁니다. 제자 공동체 안에서 유다가 차지하는 역할, 비중이 어땠는 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최측근이었어요.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었고, 그래서 공동체의 재정까지 맡았습니다. 누가 주님을 팔지, 이렇게 요한이 알게 됩니다. 베드로의 머릿짓을 보고 주님께 여쭤봤더니, 내 가 떡 한 조각을 적셔서 주는 자라고 대답하시고, 실제로 떡을 적셔서 유다에게 주십니다. 이렇 게 직접 떡을 적셔서 누군가에게 건네주는 것은 당시에는 특별한 애정의 표시였는데요, 그런데 그 떡을 받고 유다가 어떻게 됐다고 성경은 말합니까? 네, 놀랍게도 사탄이 곧 유다 속으 로 들어갔다고 나옵니다. 주님 주시는 떡을 받고 사탄에게 붙잡힙니다. 예수님과 요한이 나누는 대화를 곁에서 들었다면 수치심과 두려움을 느껴서 그렇게 됐을 수 있겠지요. 굳이 엿듣지 못했 다고 해도,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 거라고 주님 말씀하세요. 자기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지 다 알고 계시면서도 자기에게 떡을 주시는 주님 모습이 더 이상 은혜로 다가오지 않고, 오히려 책망이나 정죄로 느껴지면서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지 않았을까, 결국 유다는 그렇게 사탄에게 사 로잡히고 맙니다. 사실 유다가 사탄에게 붙들리게 된 것은 이날 밤 갑자기 일어난 일은 아니었습니다. 앞의 2절에 보면,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기 전에 마귀가 ‘벌써’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 그랬습니다. ‘벌써’부터 그런 생각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차이가 있지요. 그때는 유다에게, 주님을 팔 ‘생각’을 넣었던 것인데, 이제는 아예 사탄이 유다 속으로 들어갔습 니다. 완전히 그를 장악했다는 뜻입니다. 잘못된 ‘생각’이 들어왔을 땐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내 머리 위로 새가 날아다니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그 새가 내 머리 위에 앉아서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고, 루터가 말했습니다. 사탄이 주는 생각이 내 마음에 들어왔을 때, 그걸 내버려 두지 말고, 힘껏 그 생각을 내쫓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내쫓으실 때처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내게서 나갈지어다!” 선포해 야 합니다. 저를 따라 해 보세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내게서 나갈지어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어둠은 떠나갈지어다!” 네, 때마다 들어오는 부정적이고 믿음 없는 생각들, 사탄이 주 는 마음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강하게 꾸짖어 내쫓아 내시길 바랍니다. 물론 사탄이 주는 생각을 내쫓는 것만으로 싸움이 끝난 건 아닙니다. 실은 그다음이 더 중요하다 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 하신 말씀이지요. 귀신이 그렇게 쫓겨났는데,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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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저기 다니다가 머물 곳을 찾지 못하고, 결국 다시 원래 있던 사람에게 되돌아온 겁니다. 와봤더 니, 그 집이 글쎄 비어 있고 수리까지 되어 있어서 예전보다 살기가 더 좋아졌더라는 거지요. 그 래서 귀신이 어떻게 한다고 해요? 네, 가서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함께 산다는 거예요. 하나를 내쫓았더니 여럿이 들어와서는, 그 사람의 형편이 전보다 더 나빠지게 된 다고, 이 악한 세대가 그렇게 될 거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귀신을 내쫓아 주시지만, 그게 끝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악한 생각을 몰아내도 다 끝난 게 아니에요. 그 귀신과 나쁜 생각이 다시 또 나에게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 집이 비어 있 으면 더 센 놈들까지 함께 데리고 와요. 귀신을 쫓아내고 집을 깨끗이 청소하는 게 다가 아닙니 다. 그 집을 빈집으로 두면 안 되는 거예요. 그 안에 주님의 영이 머무셔야 합니다. 깨끗한 빈집 이 아니라, 성령께서 머무시는 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깨끗한 집이 목표가 아니에요. 거룩한 집이 목표에요. 나쁜 생각을 몰아낸 게 끝 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이 거기 채워져야 안전한 것입니다. 미움을 몰아냈다면 다시 더 큰 미움 에 휩싸이지 않도록 사랑으로 채워가야 합니다. 어떤 욕심을 내려놓았다면 더 큰 욕심이 나를 잠 식하지 못하도록, 감사로 내 마음을 조금씩 채워야 하는 거예요. 어떤 것에 대한 중독을 잠시 끊 어냈다면, 거룩한 습관으로 내 삶을 채워야 합니다. 내 뜻을 내려놓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하 나님의 뜻을 찾고 구해야 합니다. 거룩함을 추구하지 않으면 정결함을 지킬 수도 없기 때문입니 다. 유다도 처음부터 이렇게 무기력한 모습은 아니었을 거예요. ‘왜, 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지? 내가 주님을 배신한다고? 내가 미쳤구나.’ 고개를 흔들면서 사탄이 주는 생각을 떨쳐 냈겠지요. 하지만 그게 다였던 거예요. 잠시 그 생각이 떠났을 때 주님의 말씀으로 내 생각을 채 워서 사탄이 더 이상 틈타지 못하도록 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거지요. 지금처럼 충분히 스스 로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공동체에서 신뢰와 인정을 받고, 주님 바로 옆에서 밥도 먹고 중요한 일도 감당하면서, 나는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 착각한 겁니다. 하지만 유다에게는 사실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고 성경은 말하지요. 그가 돈을 너무 사랑한 것 입니다. 성경은 그를 ‘도둑’이라고 얘기하지요. 공동체의 돈을 몰래 훔쳐 갈 만큼 돈에 집착했습 니다. 유다가 언제 예수님을 팔려고 결단했느냐? 마가복음에 보면, 베다니에서의 그 향유 사건 직후라고 나옵니다. 왜 이런 좋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고 이 렇게 허비하냐고 유다가 말했었지요. 주님이, 아니라고, 이 향유는 나의 장례를 준비하는 거라고 말씀하셨을 때, 곧바로 유다가 밖으로 나가서 대제사장들에게로 갑니다. 가서 예수를 넘겨주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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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약속해요. 그때 이미 넘어간 거지요. 나갔던 마귀가 더 센 놈 일곱을 데리고 와서 그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의 약점인 탐심을 틈타서 말입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겨야겠다는 생각을 잠깐 내쫓는다고 해서 유다가 안전한 게 아닙니다. 그에게는 치명적인 연약함이 있고, 사탄은 그걸 너무나도 잘 알아서, 언제든 그를 다시 자기의 수족처럼 부릴 수 있습니다. 죄의 종에서 벗어난 걸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 되실 때 진정한 자유가 있고, 그때 죄가 틈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거룩’이에요. 내 마음을 깨 끗하게 하는 것, 무슨 명상이나 요가 이런 걸로 내 마음을 비우는, 그게 끝이 아니라, 그 마음을 주님이 채우시는 것,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는 그것이 ‘거룩’이고, 마귀를 이기는 성도의 능 력인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마음과 내 삶이 비어 있지 않는 것 입니다. 내 안에 주님의 말씀이 채워지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대한 소망과 기대가 있고, 주 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충만해야 합니다. … 부부가 서로 바람만 안 피운다고 행복한 결혼 생활이 되는 게 아니지요. 서로에게 관심도 없고, 함께하는 시간도 없고, 서로를 통해 아무 기쁨을 느끼 지 못한다면, 그건 행복하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을 겁니다. 함께 누리는 기쁨이 있고, 상대를 향한 마음으로 내 마음이 채워지는 것이 복이고, 그러면 엉뚱한 생각은 자연히 안 하게 됩니다. … 예수님 믿었으니 됐다, 주님과 결혼했으니 다 됐다, 이게 아닙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하 고 신뢰하면서, 주님과의 친밀함으로 내 삶이 채워져 갈 때, 우린 비로소 주님과 상관하는 삶,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오늘 주님 품에 안겨서 밥을 먹고 있는 이 요한, 자신을 표현하면서 ‘주님 이 사랑하시는 자’라고 하는 그의 모습이 참 인상 깊습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자, 히브리어로는 ‘여디디야’라고 해요.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주신 이름이기도 한데요, 아마 요한도 그걸 생각해서 자신을 그렇게 불렀을 겁니다. 어쨌든 참 유별나지요. 주님이 자기만 사랑하시는 것도 아닌데 말 이지요. 하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은 그걸 유별나다고 안 하세요. 요한을 품에 두고 식사하 십니다. 그렇게 가까이 있으니까, 제자들이 요한을 통해 소통해요. 베드로마저도 요한을 통해 주 님께 물어보잖아요. 요한만 들을 수 있는 말씀이 있고, 요한만 누릴 수 있는 은혜가 있다고요. 나중에 예수님이 어머니 마리아를 그에게 맡기고 운명하세요.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고,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시 107:9).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 안에, 여러분이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여 살아가시기 를,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을 거룩하게 지켜내시길 간절히 축복합니다. 귀신이 잠깐 나간 걸로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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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족하면 안 됩니다. 그 집이 빈집 되지 않도록, 성령과 말씀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채워 가십시오. 우린 다 각자의 연약함이 있고, 그 연약함이 사탄에게 다 노출되어 있습니다. 언제든 사탄이 틈 을 탈 수 있고, 그것은 심지어 은혜의 조각을 받았을 때도 마찬가집니다. 사탄이 넣어 준 좋지 않은 생각이 있다면, 주님의 이름으로 즉시 꾸짖어 내쫓으십시오. 그리고 그 마음을 주님으로 채 우십시오. 마귀 하나가 일곱을 더 데리고 오는 게 아니라, 한 길로 왔던 마귀가 일곱 길로 도망 가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신 28:7). 내가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임을 믿고 누리며 살아가는 저 와 여러분 되기를 다시 한번 간절히 축복합니다. 떡 조각을 받고 사탄에게 사로잡힌 유다에게 주님이 마지막으로 말씀합니다. “네가 하는 일을 속 히 하라.” 정말로 주님의 마지막 권면입니다. 하려면 빨리하라는 건, 단지 배신을 재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다시 생각해 보라는 마지막 권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유다는 밖으로 나가지요. 유다가 떡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빛이 있는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하셨는데, 유다는 결국 어둠으로 붙잡혀 들어가고 맙니다. 이런 유다의 행동을 보면서도 제자들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예수 님이 유다에게 뭘 속히 하라고 하신 건지도 몰랐고, 그가 예수님을 팔기 위해 나갔다는 것도 몰 랐습니다. 유월절에 쓸 물건을 사 오라고 하셨거나, 가난한 자들에게 뭘 좀 가져다주라고 하신 줄 알았다고 하지요. 유다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주님 홀로 모든 것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사실 오늘 본문이 가장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유다는 결국 어둠에 붙잡혔고, 제자 들도 여전히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주님이 그 모든 상황을 ‘아시고’, 모든 일을 주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요한복음 13장의 핵심 동사는 ‘안다’ 입니다. 주님이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 해야 할 일들을 행하고 계십니다. 제자들 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앞으로 다가올 배신과 십자가의 순간에 제자들의 믿음을 지켜내기 위해 일하십니다. 사실 배신은 모르고 당해야 배신이지요. 그러니 주님 입장에서 보면 이건 배신이 아 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작은 퍼즐 조각에 불과합니다. 사탄이 유다를 완전히 사로잡고, 의기양양하게 자기 뜻을 이루어 가고 있는 이 상황 속에서도 변 하지 않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여전히 주님으로서 그 상황을 알고 계시고, 모든 걸 주관하셔서, 사탄의 그런 계획까지도 능히 그분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주도권을 뺏기지 않으십니다. 유다의 계획을 알고 계시고, 그 일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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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제자들에게 경고하시고, 그 일을 속히 하라고 유다를 재촉하십니다. 주님이 다 주도하세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가 허를 찔린 그런 배반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괴로워는 하실지언정 놀라지는 않으십니다. 그렇지요? 놀라움은 예상하지 못했 던 일이 일어났을 때 생기는 반응입니다. 모든 상황을 친히 알고 다스리고 계신 예수님은, 그러 니까 놀라지 않으세요. 괴로워는 하실 수 있지요. 미리 알고 준비하지만, 그러나 실제로 겪는 그 현실 자체는 괴로울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놀라지는 않으세요. 모든 것이 주님의 주권 아래 있 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하나님이 놀라셨다고 하는 구절 기억나세요? 네, 아무리 찾아봐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놀라지 않으세요.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에게도 놀라지 말라고 하시지요. 하나님 이 그들의 주가 되셔서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 성경에서 예수님이 놀라셨다는 것이 딱 한 번 나옵니다. 자기 하인을 너무나 사랑하는 로마의 백부장이, 그 하인이 병들어서 예수님께 고쳐 달라고 하는데요, 글쎄 주님이 직접 오실 필요가 없고, 그냥 멀리서 말씀만 하셔도 하인의 병이 나을 거라는 거예요. 그때 주님이 놀라세요. 어떤 이스라엘 사람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 지 못했다고 하시지요(마 8:10). 그게 예수님이 놀라신 유일한 사건이에요. 우리의 믿음만이 예수 님을 놀라게 할 수 있나 봐요. 우리의 믿음이 부족함을 주님이 아시고 헤아려 주시기 때문이겠지 요. 그 외에는 아무것도 예수님을 놀라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기 때문이에요. 모 든 걸 아시고, 통치하셔서, 반드시 주님의 뜻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뜻하지 않은 일들 앞에서 우리는 놀라고,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 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세요. 내 가 다 알고 있고, 다스리고 있다. 놀라지 말고, 두려워 말라. 네가 나의 사랑 받는 자임을 기억해 라, 하십니다. … 그 어떤 일도 주님의 계획과 통치 너머에서 일어날 수 없고, 그 모든 상황 속 에서 주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무지함과 믿음 없 음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반드시 구원의 길을 찾아내시지요. 그게 십자가입니다. 내가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으면, 우리도 놀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때론 괴로운 일도 생기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고, … 누가 내게 발바닥을 들 때도 있고, 세상이 나를 속일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능히 담대할 수 있는 것은, 나를 사 랑하시는 예수님이 주님으로서 여전히 그것들을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허를 찔린 게 아니라고 하세요. 일어나야 할 일들이고, 주님이 알고 계시고 준비하시니, 두려워 말고 놀라지 말라고 하십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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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사람이 놀라고 당황하면 서두르게 되지요. 급하면 사람은 뜁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서 하나 님이 달려가시는 적이 없다는 거 아십니까? 하나님은 뛰지 않으세요. 성경에서 하나님의 움직임 을 가리키는 동사는 ‘거닐다’, ‘걷다’입니다. 모든 상황을 당신의 완벽한 주권과 시간표 가운데 다스리고 계셔서 서두르실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딱 한 번 예외가 있지요. 예수님이 하신 탕자의 비유에서입니다. 집 나간 탕자가 멀리서 오고 있을 때, 그걸 알아보고 아 버지가 측은히 여겨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 맞췄다고 나옵니다. 비유이지만, 그때가 성경에서 하나님이 뛰시는 유일한 경우입니다. 주님이 놀라고, 주님이 뛰시는 건 다 우리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좋으면 주님 놀라시고, 우 리가 주님께로 가려고 하면 주님은 우리를 향해 뛰어오십니다. 그거 외에는 놀라지도, 뛰지도 않 으십니다. 서두르거나 조급해 하지 않으세요. 모든 걸 알고 계시고, 다스리고 계시고, 여호와 이 레,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주님께 사랑받는 우리에게도 더 이상 놀라거나 두려워해야 할 일이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괴로운 일을 당할 수 있지만, 주님은 오히려 그 일을 속히 하 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주도권을 빼앗길 마음이 없으세요. 다 일어나야 할 일들이고, 우리는 여 전히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입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우릴 아시고 사랑하셔서, 저와 여러분을 택하여 부르셨습니다. 주님이 택하셨으니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계획대로 우리를 완성해 가십니다. 이게 너무 중요한 거지요. 우리가 주님을 선택한 게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택하셨고, 그래서 우리의 운명이 우리의 어떠함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 것입니다. 열두 제자 중에서 그 누구도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와 제자가 된 사람이 없습니다. 다 주님이 찾 아가서 제자로 부르십니다. 원래 유대인 랍비들은 제자들을 그렇게 세우지 않습니다. 제자가 되 겠다고 랍비를 찾아오면, 랍비가 그를 보고 제자로 받아들일지 결정합니다. 제자가 선생을 택하 여 찾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반대지요. 주님이 찾아가서 제자를 택하십니다. 니고데모 나 어떤 서기관처럼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도 있지만, 그들은 신기하게 제자도 아니고, 열 두 사도도 아니지요. 주님이 택하여 부르신 사람들만 지금 제자로서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주님 이 택하시고, 주님이 부르셔서, 주님이 세우시고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부족한 우리 자신에게 실망하고 낙심될 때가 있지만, 그런 나를 아시고 택하신 주님을 우리는 놓 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임을 믿고, 주님께로 더 가까이 가야 합니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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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 님 품 안으로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먹고 주님이 하시는 얘기를 듣고, 그렇게 주님과 상관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할 일이고, 사탄에게 틈을 내어주지 않는 유일한 길입니다. 자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얹고 저를 한 번 따라 해 보십시오. “나는,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입니다. 주님이 택하셨으니, 주님이 이루실 것입니다.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 내 마음을 빈집으로 두지 않겠습니다. 정결함이 아니라 거룩함을, 적당함이 아니라 충만함을 사모하겠습니 다. 예수님, 나의 주님으로 계셔서, 나를 온전히 다스려 주십시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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