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여호수아 24:1~28 (구약 356쪽)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2025-06-29 · 설교 원고 · 9쪽 · 약 19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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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오순절 후 세 번째 주일 [여호수아 강해 39] 여호수아 24:1~28 (구약 356쪽)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본문 19절의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을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 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 죽음을 앞둔 여호수아가 다시 한번 메시지를 전합니다. 지난주 이 스라엘의 지도자들만을 향해 이야기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일반 백성에게 전한 고별 메시지 입니다. 모든 지파, 모든 백성이 세겜에 모여, 여호수아의 마지막 메시지를 들었다고 성경은 말 합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불러 모은 장소가, 현재 회막이 있는 실로가 아닌, 도피성 세겜이라는 점이 눈에 띕니다. 세겜이 가나안 중앙에 있어 모이기 쉬운 것도 있고 도피성이라 길이 좋은 것도 있 습니다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 또 그 역사에서도 세겜은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처음 약속한 곳, 그에 대한 반응으 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첫 제단을 쌓은 곳이 세겜입니다. 이번 가나안 전쟁이 시작된 후 여호수 아가 유일하게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곳도 바로 이 세겜인데요, 아이 성 전투의 승리 이후, 여호 수아는 직접 이곳에 제단을 쌓고 예배한 후, 특별한 방법으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 했습니다. 지리적으로 세겜은 북쪽의 에발산과 남쪽의 그리심산 사이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에발산 은 산세가 험한 바위산이라 저주의 느낌이 강하고 그리심산은 완만하고 푸르른 산이라 축복의 이미지가 강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과거 모세의 명령대로) 이스라엘 지파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서게 한 후, 자신은 세겜에서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낭독했습니 다. 그러니 이스라엘에게 있어 세겜은 예배의 자리이면서 동시에 신앙적 결단의 장소인 셈입니 다. 마지막 메시지를 이곳에서 전하는 여호수아의 의도가 엿보이지요. 단지 하나님을 열심히 잘 믿으라고 권면하고 축복하는 게 아니라, 다시 한번 결단과 선택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 나님을 믿는 신앙의 본질을 명확히 하지요. 선택해야 한다는 것, 하나는 택하고, 다른 건 버려야 한다는 것, 신앙은 ‘우리 자신의 어떠함’으로써가 아니라, ‘우리의 선택’으로 판가름 난다는 것, 단호한 선택 없이는 능히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을, 단지 그 메시지만이 아니라, 그 메시지 가 선포되는 장소를 통해서도 강조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2절부터 13절까지의 전반부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여호수아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이고, 14절 이하 후반부에서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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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그들과 함께하셨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출애굽 과정, 또 요단강 동편과 가나안 땅 각각의 전쟁까지, 그간의 역사가 망라되어 있는데요, 이 전반 부 내용에서 유독 한 단어가 반복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단어지요? 네, 거의 매 절마다 맨 앞에 나와 열 번 이상 반복되는 ‘내가’라는 주어입니다. 아브라함을 유프라테스강 너 머에서 이끌어낸 것도, 이삭에게 야곱과 에서를 준 것도, 에서에게 세일산을 준 것도,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과 그 자손에게 모세와 아론을 보내고 재앙과 기적으로 그들을 인도해 낸 것도, 그들 을 요단강 동편으로 인도하고, 왕벌을 미리 보내 아모리 족속을 내쫓아 그 땅을 넘겨주신 것도, 발람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신 것도, 수고하지 않은 땅과 건설하지 않은 성읍과 심지 않은 열매 를 누리게 하신 것도, 모두 ‘내가’ 한 일이라고, 하나님은 대놓고 강조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해 놓고 보니, 그게 결국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기 록하는데, 주어가 다 ‘하나님’이세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존재 근거가 어디 있느냐,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인도하심에 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로봇이었느냐? 그런 게 아니지요. 하나님이 길을 내시고 인도하시면, 이스라엘은 그 길을 따라가며 ‘순종의 역사’를 써 내려갑니다. 하지만 그 순종조차, 인간의 결단 이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시작됩니다. 아브라함 이 하나님을 믿고 순종했지만,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을 찾아가십니다. 누구나 그럴 겁니다. 처 음엔 내가 주님을 믿은 줄 알지만, 실은 주님이 먼저 나를 찾아오신 거였음을 점점 더 분명하게 알아가게 됩니다. 신앙은 결국 이 하나님의 ‘내가’를 (실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찾고 기도하 면 응답하시는 그런 정도의 하나님이 아니라, 그가 나를 먼저 부르셔서, 인도하시고, 내 삶을 친 히 완성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그분의 뜻과 인도하심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 의 기대나 계획, 혹은 세상의 어떤 정해진 패턴대로 가는 인생이 아님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하 나님이 에서에게는 세일산을 소유로 주었으나 야곱과 그의 자손들은 애굽으로 내려갔다고 4절은 이야기하지요. 에서는 일찌감치 자기 기업을 차지하여 에돔이라는 나라를 세웠고, 안정과 번영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야곱은 애굽으로 내려가지요. 거기서 그 후손이 400년을 얹혀살고, 그 후에도 긴 광야와 전쟁의 시간을 거쳐 오늘 여기까지 왔습니다. 길이 다르고 시간표가 다릅니 다. 하나님의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삶은 복을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끝나면 안 됩니다. 그는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 름하며 복을 요구했고, 또 결국 그 복을 약속받았지만, 그 사건의 핵심은 ‘복’이 아닙니다. 야곱 이 이스라엘이 되지요. 이름이, 존재가 바뀌고, 삶의 주어가, 목적이 바뀝니다. 그는 ‘복’이 ‘되어 야’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살아내고 증언해야 합니다. ‘복을 받고 누리는 삶’만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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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니고, ‘복이 되는 삶’입니다. 목적이 다르니 과정과 시간표가 다르다는 사실을 야곱은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복을 받는 삶’과 ‘복이 되는 삶’은, 단순히 받은 복의 양으로 구별되는 게 아닙니다. 단순히 누가 더 빨리, 더 많은 복을 받았느냐의 기준이 아니라, 그 삶의 주어가 누구인지가 드러 나야 합니다.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선하심이 고백되는 인생입니다. 그래서 성도 의 삶은 한편으로 고단하고 한편으로 영화롭습니다.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여러분 인생의 주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저와 여러분의 인생을 책으로 써 내려간다 해도, 문장의 주어들이 ‘하나님’으로 기록되겠습니까? 세상과는 다른 방향, 다른 속도로 가는 삶을, 조급함 없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걸어가시겠습니까? … 그렇다면 우리는 본문의 계속되는 메시지를 읽어나갈 수 있습니다. 14절은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그러므 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그러므로 이제는’, 네 삶의 주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렇다면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고 온전함과 진실함 으로, ‘오롯이 또 참되이’(새한글 성경) 그를 섬겨라. 그럼 어떻게 섬기는 게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섬기는 것인가,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 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겨라. 하나님을 여러 신 중의 하나로 섬기지 말고, 너희가 의지할 수 있는 많은 것들 중의 하나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해라. 너희 마음과 삶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하나님께 맡기고 드려라. 그것이 온전함과 진 실함으로 섬기는 신앙이다. … 만일 그렇게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인다면, 별로라고 생각된다면, 지금이라도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이곳 가 나안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해라.’ 다만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다, 여 호수아는 이야기합니다. 그랬더니 백성들이 어떻게 대답합니까? 네,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 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셨고 우리에게 이 땅을 주셨으니, ‘우리 도’ 여호와를 섬기겠습니다. 그는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대답합니다. 참 좋은 대답이고, 얘기가 잘 마무리되는 듯 보이는데요, 그런데 여기에 대한 여호수아의 반응이 이상합니다. “좋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꼭 그렇게 하십시오.” 이게 아니지요? 뭐라고 합니까? “너희가 여호와를 능 히 섬기지 못할 것이다.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이다.” 매우 부정적이고 불길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거예요, 없다는 거예요? 네, 섬길 수 없다고 합니다. 자신과 자기 집은 여호와를 섬길 거 라더니, 백성들은 섬길 수 없을 거랍니다. 우리가 ‘결단코’ 하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단단히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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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백하는데도, 너희가 능히 하나님을 섬기지 못할 것이고, 결국 하나님의 질투가 너희를 멸하게 될 거라고 경고합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너희가 능히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고 하자, 백성들은 재차, “아닙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섬길 것입니다.” 항변합니다. 그러자 여호수아가 다시 말하지요.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고 그를 섬기겠 다 했으니, 스스로 증인이다.” “네, 우리가 증인입니다.”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 을 ‘치워 버리고’, 너희의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여러분 이해되시는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고백하는데 왜 여호수아는 너희가 능히 섬길 수 없다고 말합니까? …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가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고백과 백성들의 고백이, 비록 표현은 같지만, 그 내용이, 뭔가 의미가 다르다는 뜻이겠지요? 하나님을 섬기겠다 는 백성들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게 아닙니다. 진심이긴 한데, 지금의 모습, 지금의 방식, 지금 의 태도로는 그 진심을 살아낼 수 없을 거라는 안타까운 진단입니다. 게임을 너무 좋아해서 공부는 안 하고 늘 게임만 하는 학생이, 하루는 단단히 마음먹고 엄마에게 결심을 고백합니다. “엄마, 나 오늘부터 게임 그만하고 정말 공부 열심히 할 거야. 그래서 이번 기말고사에서 평균 90점 받을 거야.” 진심인가요, 아닌가요? 네, 진심이지요. 그런데 엄마는 압 니다. 아들이 결국 공부에 집중하지 못할 것을 말입니다. 왜요? 게임을 포기할 마음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미안하지만 너는 능히 공부하지 못할 거야. 공부는 그런 결심으로 되는 게 아니거 든.” “무슨 소리야 엄마. 나 이번에는 진짜야. 정말 공부 열심히 할 거야!” “그래? 그러면 이제, 방에 있는 게임기 다 치워 버리고, 오직 공부에만 집중하자.” 그 뒤는 어떻게 됐을까요? 우리가 결단코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지 않겠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백이 진심이라 는 걸 여호수아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결국 그 일에 실패할 것이라는 사실도 이미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그들이 여전히 이방의 신들을 섬기고 있고, 그것을 포기할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듭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말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치워 버리라고 여호수아는 명령하지요(23절).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치워라, 20년 안식의 세월 동안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겼는지 드러납니다. 그들 가운데 이방 신들을 간직한 채로 하나님도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게 아닙니다. 게임도 하고, TV도 보고, 놀러도 가 고, 그리고 공부도 하듯이, 하나님도 그렇게, 바알도 섬기고 아세라도 섬기고 몰렉도 섬기고, 하 나님도 섬깁니다. 그들이 능히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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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본문에 나오는 여호수아의 말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한 가지 미 묘한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여호와‘만’ 섬기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다른 것들은 치워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는 걸 결단하고 애를 씁니다. 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습니까? 그들도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하나님‘만’ 섬기겠다고는 하지 않습 니다. 우상을 치워 버리라고 두 번이나 여호수아가 명령하지만(14, 23절),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런 반응이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을’ 섬기겠다, 말할 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만 섬기는 신앙이 참 쉽지 않다는 걸 느끼면서, 동시에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가던 고대 사회에서, 유일신을 믿는다는 것이 얼 마나 낯선 일이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그들에겐 단 하나의 신을 섬긴다는 개념 자체 가 없었습니다. 세상엔 사람 수만큼 많은 신이 있고, 여호와도 그런 신들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동시에 여러 신을 섬기는 일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습니다. 마치 보험 여러 개를 동시에 들어서 보장 범위를 최대한 넓히는 것처럼, 신을 믿는 것 역시 그런 차원에서 생각한 것입니다. … 아브 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다고 2절은 말합니다. 신이 단수가 아니고 복수지요. 애굽의 신, 가나안 땅에 있는 신, 다 마찬가집니다. 고대인에게 신이란, 곧 ‘신 들’입니다. 오늘 우리 내면에 각인된 ‘신 개념’도 어쩌면 그럴지 모릅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고향으로 되돌아올 때, 아내 라헬이 자기 집에서 아버지 물건 하나를 훔쳐 가지고 나옵니다. 그게 뭐였습니까? 네, 무슨 금반지나 귀고리 가지고 나온 게 아니 라, 가정의 수호신 역할을 하는, 아버지의 ‘드라빔’[테라핌] 하나를 도둑질해서 들고나옵니다. 가 장 대중적인 우상이 드라빔이고, 집집마다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드라빔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그걸 라헬이 훔쳐 와요. 자신의 드라빔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라반이 급히 뒤쫓아가서, 왜 내 신을 훔쳐 갔냐고 야곱에게 따지지요. 야곱은 영문도 몰랐지만, 라헬은 기어이 그걸 숨겨 가나안 땅까지 가지고 들어옵니다. 그때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 일 이후 야곱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정착한 곳이 바로 오늘 세겜입니다. 거기서 딸 디나가 욕 보임을 당하고 그의 오빠 시므온과 레위가 가서 세겜 족속을 살육하자, 야곱이 주변 민족들의 보 복을 크게 두려워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벧엘에 제단을 쌓으라고 명령하시 고, 야곱이 모든 가족과 가솔들을 이끌고 벧엘로 향합니다. 그런데 출발하기 전에 야곱이 자신의 모든 집안사람을 모으고 이야기하지요. 이제 하나님께 예배하러 갈 테니,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라고. 그러자 자기들이 지니고 있던 모든 이방 신상을 꺼내 오는데요, 야곱이 그걸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벧엘로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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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오늘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마지막으로 하는 일도 비슷합니다. 우상을 치워 버리라고 말하고, 세 겜에 있는 한 상수리나무 아래에 큰 돌을 가져다가 그 언약의 증거로 삼습니다. 이번에도 백성들 의 우상을 거기 묻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역사는 반복되고 신앙은 계속 재현되지요.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우리 안의 우상을 끊임없이 치워 버리며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결단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을 능히 예배하고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그 마음이 진심이 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여호와만 섬기겠다는 결단으로, 매 순간 무엇을 섬길지 선택하고 나머지 는 치워 버리지 않으면, 능히 하나님을 섬길 수 없고, 결국 하나님의 질투에 소멸되고 말 거라 고, 여호수아는 경고합니다. 우상은 질투하지 않습니다. 다른 신에게 어떻게 하든 하등 상관없고, 단지 나에게 잘해주기만 하 면 됩니다. 그 신을 사람이 만들었고, 그 사람들이 처음부터 다른 신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 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닙니다. ‘오롯이, 참되이’ 섬기기를 원하시고, 그게 안 되면 질투하십니다. … ‘질투’라는 히브리어 명사 ‘카나’는 본래 ‘열정’, ‘열심’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질투 이면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열정과 열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일 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이 나 아닌 다른 이에게 향하는 걸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열정과 질투가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호수아서를 거의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저는 과연 우리의 신앙이 지금 어떤 모습이고, 또 우리는 어떤 태도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따르고 있는지,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싶습 니다. … 우리는 지금도 분명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고,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만’ 섬기고 있습니까? 다른 신뢰할 만한 것들을 모두 치워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예수 그 리스도를 나의 유일한 주님으로 섬기며 따르고 있는지요?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는지는, 내가 뭘 치워 버렸는가, 내가 뭘 포기했는가를 보면 알 수 있 을 겁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치워 버린 게 없고, 내가 뭘 포기했는지 명확하지 않다면, 실은 우리도 하나님을 여러 우상과 함께 섬기고 있을 가능성이 높겠지요. 한 가지 좋은 걸 하려면 반 드시 다른 뭔가를 포기해야 하는 게 우리 삶입니다. 책을 읽으려면 스마트폰을 내려놓아야 하고, 운동을 하려면 SNS나 TV를 포기해야 합니다. 바쁜 세상에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수가 없습니 다. 묵상을 하고 기도를 하려면, 정말 실질적인 뭔가를 일상에서 잘라내야 하지요. 신앙도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고 결단하지 않는 한, 아무리 진심이고,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능히 주님을 좇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갈 때, 주님이 뒤를 보시며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겁니다. “무릇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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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 지 못하리라.”(눅 14:25~26) 여러분, 말이 안 되는 얘기지요. 세상 그 어떤 신이, 부모와 처자, 형제자매를 미워하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단언하세요. 미워하지 않으면, 미워하는 게 없다면, 능히 제자가 될 수 없다,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하시지요(마 6:24). 재물에 대한 욕심을 때마다 치워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하지 못하면, 우린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도 도무지 섬길 수가 없습니다. 재 물을 택하면 불행해진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돈으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재물을 택 하는 삶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며 사는 삶이 불행한 것입니다. 재 물도 얻지 못하고, 하나님도 얻지 못할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돈이면 다 되고, 행복도 돈으로 사는 이 세상에서, 재물에 대한 욕심을 치워 버린다는 것은, 너 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정말 날마다 말씀을 붙잡고 그 욕심을 계속 치워 버리지 않는 한 불가능 한 일입니다. … 저는 요즘 들어, 그리스도인은 ‘행복’이라는 가치를 상대화해야만 되는 게 아닌 가, 행복이라는 말이 가진 그 공허함과 막연함을 해체해야 하지 않나 생각하곤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그런 성경 구절 여러분 혹시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마 없을 겁니다. 행복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성경이 행복 자체를 목적으로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실 때 행복해야 한다고, 꼭 행복하라고 명령하시지 않습니다. 대신 생육 하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세요. 어떤 부르심, 소명을 주시지 요. 행복이 있다면 그게 어디 있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행복을 약속하고 자극하는 우상과는 근 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 우상은 행복을 약속하지만, 하나님은 생명을 약속합니다. 우상은 우 리의 욕망을 자극하지만, 복음은 부르심을 자극하고, 그 부르심 앞에 우리의 존재를 요구합니다. 행복은, 그걸 얻기 위해 노력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아 사는 그 삶에 깃 드는 것임을 알 수 있지요. 이스라엘이 승리가 아닌 거룩을 목표로 삼았을 때 가나안에서 승리했 던 것처럼 말입니다. 행복은 열심히 좇아가면 좇아갈수록 오히려 더 잡히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행복에 대한 집착을 잠시 내려놓고 우리에게 주어진 뭔가에 충실할 때 오히려 뜻하지 않은 행복을 누립니다. 요즘은 ‘소확행’ 대신 ‘아보하’가 중요하다는데,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아보하’, ‘아주 보통의 하루’입니 다. ‘소확행’,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는 것도 이젠 지치고 힘든 거예요. 그저 내게 주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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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삶을 받아들이고, 그 삶을 충실히 살아내는 ‘아주 보통의 하루’, 그 안에 깃드는 어떤 충만함이, 바로 행복이라는 걸 세상 사람들도 깨달은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그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는 약속도 그런 것입니다. 행복이 아 니라,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면, 행복은 그 나라에서 찾아진다고 주님은 약속하십니다. 성도는 그걸 믿는 사람들이지요. 우리는 다만 예수를 좇고, 그 주님이 가까이 와 있다고 말씀하신 하나 님의 나라를 살기 위해 노력할 뿐이고, 거기서 누리는 열매가 행복일 겁니다. 행복도 좇고 예수 님도 좇는 그런 길이 아니라, 행복은 잠시 잊어버리고, 행복하기 위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그런 삶이 아니라, 오직 예수를 좇기 위해, 다른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제거해 가 는 것, 거기에 주님이 약속한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은 쉽지만 실제로는 너무나 어려운 얘기일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를 따 르려면, 우리는 먼저 뭔가를 치워 버려야 합니다. 자꾸 뭘 더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일단 이미 있는 것들에서 뭔가를 ‘빼야’ 합니다. … 여러분, 우리 몸이 건강해지려면, 두 가지 길이 있을 겁 니다. 하나는 내 몸에 좋은 것을 더하는 것과 하나는 내 몸에 안 좋은 것을 빼는 것입니다. (그 렇지요?) 그럼 어느 것이 더 효과가 좋으냐, 건강하기 위해 뭔가를 더 하는 것과 건강에 좋지 않 은 것을 빼는 것, 어느 게 더 건강에 효과가 있겠습니까? 네, 몸에 좋은 열 가지를 하는 것보다, 몸에 나쁜 한두 가지를 하지 않는 것이 더 근본적인 치료가 된다고 의사들은 한결같이 말합니다. (동한 집사님, 맞지요?) 오늘 여호수아도 뭔가를 더 하라는 게 아닙니다. “치워버려라! 하나님에 대한 ‘Yes’ 이전에 먼저 ‘No’라고 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것을 힘써 치워버려라. 그리고 너희 마음을 하나 님께로 향해라. 그러면 능히 여호와를 섬길 수 있다.”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 메시지 이후에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이 뭔가를 치워 버렸다는 얘기 가 성경에는 거의 나오지 않지요. 대신 능히 섬기지 못한 얘기, 끝내 우상을 치워 버리지 못한 채 우상과 함께 치워 버림을 당한 얘기들만 가득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우린 부디 그러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다른 신들은 치워 버리고, 여 호와만 섬기겠습니다. 고백하고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그런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잊지 않으셨고, 언약대로 그들을 신실 하게 구원하셨고, 또 그들을 통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 이 없고, 하나님은 모든 걸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라는 뜻은 전혀 아닐 겁니다. 이스라엘의 넘어짐이

원고 9쪽

- 9 - 세상의 풍섬함이 되고,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랴, 바 울은 말합니다(롬 11:11~12). 그들이 실패했어도 이렇게까지 하나님이 큰 은혜를 베푸셨는데, 만 약 그들이 만약 충만했다면, 이스라엘이 정말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섬겼다면, 그 복이 얼마나 더 엄청났겠느냐, 반문하는 거예요. 우리의 실수와 연약함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이만큼 은혜를 베푸셨다면, 우리가 오롯이 그리고 참되이 하나님을 섬길 수만 있다면, 얼마나 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통해 흘러가게 될지, … 그 놀라운 일들을 우리가 꼭 보게 되기를 축복 합니다. 삼국사기에 보면, 김유신의 유명한 일화가 나오지요. 그가 젊었을 때 ‘천관’이란 기생의 집에 자 주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천관’(天官), ‘하늘의 관리’라는 뜻이니 단순한 기생이 아니라, 신전에 서 일하는 무녀나 여성 사제였고, 당시 그런 여성들의 역할에는 성(性)적인 부분까지 포함되어 있는데요, 김유신이 그런 천관에 너무 빠져 사니까, 어머니가 눈물로 타이릅니다. 다시는 그 집 에 가지 않겠습니다, 김유신이 맹세하지요. 하지만 김유신이 술에 취해 말에 오르자, 말은 늘 하 던 대로 다시 천관녀의 집으로 향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곳에 와있는 걸 알고는, 김유신이 어 떻게 했다고 하지요? 네, 칼로 말의 목을 베어버리고 그 집을 떠났다고 합니다. 괜히 왜 엄한 말에게 화풀이하고 그러냐 싶습니다만, 그렇게라도 뭔가를 실제적으로 끊어냈기에 능히 돌이킬 수 있었다는 얘길 하고 싶은 거겠지요. 어쩌면 우리의 신앙도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 다. 우리 안에 있는 욕심과 염려를 날마다 성령의 칼로 베고 자르며, 또 우리의 우상들을 수없이 상수리나무 아래 묻으며, 그렇게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주님을 섬기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며 살아 가는 것이지요. 과연 지금 내 믿음의 고백은 어떤 모습인지, 오늘 여호수아의 마지막 메시지 앞에 우리 자신을 잘 비춰보고, 그저 마음으로만 결단하고 고백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정말 치우고 버리고 잘라내 면서, 그렇게 주님만 섬기는 삶을 우리 모두 힘껏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 니다. 아멘.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