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하셨느니라(1)" 2015년 1월 2일 새벽 설교
2015-01-02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6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50102 금요일 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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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24장 1~3절, 이사야 강해195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하셨느니라(1)
* 설교 음성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50102.mp3
이사야서 백아흔다섯 번째 말씀으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하셨느니라(1)’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해가 바뀌고 새 날이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이사야서에 머물고 있고, 또 며칠 째 24장 1절부터 6절까지의 말씀을 계속 묵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소 긴 시간 24장 도입 부분을 묵상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지난 수요일 새벽에 말씀을 드린 바가 있었습니다. 축복의 말씀은 좋아라 하고, 또 늘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의 음성에 대해서는 귀를 닫거나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 모습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좀 더 돌아보며, 다시 오늘 본문 앞으로 가까이 갔으면 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말씀드린 대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하셨느니라’입니다. 본문의 3절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구절인데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말씀은 사실 사족에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성경 어느 것 하나가 하나님 말씀이 아닌 것이 있습니까? 다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특히나 이사야서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대언해 전하는 경우는 더더욱 다른 여지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사야의 입술을 통해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하셨느니라’고 말씀하는 것, 그 이유가 분명히 따로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사야를 통해 이 말씀을 들었을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타국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오늘 24장과 같은 말씀은 그저 정신 나간 사람의 넋두리에 불과하다 여기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현실의 모습을 보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꿈같은 이야기를 지금 이사야가 하고 있는 것이지요. 더구나 이사야, 그는 미친 사람처럼 몇 년째 그러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까? 벗은 몸과 벗은 발로 3년씩이나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 말씀입네, 하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이니 오죽했겠습니까? 아마 오늘 같았으면 경찰들이 잡아 가서 유치장에 가둬, 3년을 다 채우지도 못했을 겁니다.
상황이 그러하니, 이사야는 더 간절해집니다. 나를 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라,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이 내용은 그냥 축복도 아니고, 평범한 내용도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말씀이다, 꼭 들어야 할 말씀이니, 제발 귀를 좀 기울여달라, 간곡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자신의 이상한 모습과 힘없고 설득력 없는 선포에 이사야는 또 얼마나 답답했을까, 헤아려집니다.
사실 설교를 전하고 있는 제 마음도, 이유는 다르지만, 비슷한 심정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다만 소리를 전하는 악기의 울림통과 같은 존재에 불과할 따름인데, 하나님의 말씀이 나로 인해 집중력이 흐려지고, 설득력도 약해져서 제약이 생기는 건 아닌가, 늘 마음 한 견이 무겁습니다.
반드시 전해야 할 말씀인데, 일단 저 자신의 삶이 그 말씀 앞에 거리낌이 많아, 차마 양심상 전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럴 땐 정말 저 스스로의 모습이 한없이 미워지고 싫어집니다.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가 메시지의 걸림돌이 되는 구나. 자괴감이 들어 힘이 빠질 때도 많습니다. 말씀을 전할 때마다 실은 오늘 이 말씀,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하셨다’라는 구절을 설교의 행간마다 넣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건 제 말이 아닙니다. 부족한 사람의 모습을 보지 말고, 부디 이 말씀만, 이 말씀을 하신 하나님만 보십시오, 이렇게 외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사실 말씀을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게 정말 쉬운 일은 아닙니다. 보통은 메시지와 메신저가 분리되지 않는 게 우리의 언어생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말씀을 전하는 목사와 메시지는 같은 게 아니지요. 우리는 그 둘을 마치 하나처럼 여겨서 그 말씀이 아무개 목사의 설교, 이렇게 말하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목사는 메시지가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그냥 소리를 내는 성대 정도에 불과하다고 할까요?
물론 성대가 좋아서 아름다운 소리, 신뢰감을 주는 소리를 낸다면 같은 말이라도 더 잘, 더 호소력 있게 들릴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음색이 진실을 규정하지는 못합니다. 좋은 소리가 곧 좋은 내용은 아닌 거지요. 그래서 음색이 너무 좋으면 실은 내용을 한 번 더 의심해 보는 게 맞습니다. 목소리가 너무 좋은 남자, 그래서 거기 끌렸다면, 그가 한 말의 내용과 그것의 진정성을 한 번 더 숙고하는 것이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너무 설교를 잘 하려고 하는 욕심을 내려놓아야 하고, 성도 역시 설교를 평가하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목사는 그저 설교를 바르게 전하면 족하다, 여겨야 하고, 거기 만족해야 울림통의 역할, 거기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는 잘 하는 것보다 바르게 하는 게 수만 배 더 중요하니까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신앙이 지나치게 목사의 설교에 의존하고 있는 건 아닌가, 감동이 되어야 순종하는, 그 일반적인 방식이 내가 설교를 대하는 태도는 아닌가, 늘 주의해야 합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성도는 가슴이 뜨거워질 때만 순종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머리로 이해되어야만 순종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그러면 금상첨화이지만, 신앙은 결코 그렇게 완전한 조건에서 자라는 게 아닙니다. 감동 안 되고, 이해 안 되도,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에 내가 굴복하고 복종하는 신앙이, 말씀 앞에 감동하고 눈물 흘리고 그렇지만 순종과는 거리가 먼 신앙보다 훨씬 더 온전하고 바른 신앙입니다. 감동이, 눈물이 때로 얼마나 진실과 멀리 떨어질 수 있는지, 우리는 현실에서 자주 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자신의 감정이나 이해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믿고 의지할 수 있느냐, 그게 우리 성도들이 풀어야 할 어려운 숙제입니다.
세상에 물컹이는 씨앗, 부드러운 씨앗을 보신 적이 있는지요? 말씀의 씨앗은 늘 단단하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그 씨앗을 받아들이는 우리 마음의 밭이 얼마나 부드러운가, 얼마나 기경이 되어 갈아져 있는가, 그것입니다. 때로 목사가 그 단단한 씨앗을 삶고, 찌고, 갈아서 먹여야 할 때도 있지만, 조미가 되고 뭔가가 첨가 되면 될수록, 본래의 맛과 의미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가 단단한 식물, 있는 그대로 먹을 수 있도록 돕는 게 목사의 역할이기도 하지요. 저는 우리 교회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는 말씀 있는 그대로 바르게 전하려 애쓰고, 성도는 그 단단함을 견디려 애쓰는, 그래서 인간적인 수사나 꾸밈 없이도 전하고 듣는 사람 모두 함께 순종할 수 있는, 그런 저와 여러분이면 좋겠습니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원치도 않는 말씀을 전했던 요나. 그러나 그 적국의 수도에 살던 이방인들이 그 말씀에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무미건조하기 이를 데 없었을 그 말씀.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회개하지도 않던 그 말씀. 그러나 누군가는 그 말씀 앞에 통곡하며 회개하였고, 자신들의 삶을 고치기로 결단합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 모두, 요나와 니느웨 백성처럼, 바르게 전하고, 바르게 듣는, 순종하며 전하고, 순종하며 듣는, 그런 목사와 성도이길 원합니다.
올 한 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그 앞에 늘 이 구절을 기억하고 넣어서, 듣고 순종합시다.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하셨느니라.” 아멘.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