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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2014년 11월 30일 주일 설교
2014-11-30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4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41130 대림절 첫 번째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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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장 1~25절,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 설교 음성파일 :
http://gobackch.iblug.com/index.jsp?cn=FP133544AN0145446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41130.mp3
대림절 첫 번째 주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태양 주위를 지구가 365일 만에 한 바퀴 돈다는 사실에 입각한 태양력은 1월 1일이 시작이지만, 또 달이 대략 29.5일마다 차고 기우는 것에 기초한 태음력의 시작은 내년 2월 19일이지만, 교회가 사용하는 이른바 교회력의 시작, 그 첫날은 바로 오늘, 대림절 첫 주 주일입니다. 대림절 첫 주가 교회력의 시작이라는 사실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으며, 왜 교회는 그렇게 대림절로부터 모든 한 해의 신앙적 히스토리가 시작되도록 한 해를 구성해왔을까, 한 번 쯤 생각해보게 되는데요, 주님이 오신 날, 크리스마스로부터 시작하면 좋았을 것 같은, 교회력. 오히려 그게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 주님을 기다리는 기다림의 시작인, 대림절이 모든 교회력의 출발점입니다. 기다림이 시작이다, 기다림이 출발이다. 참 미묘한 울림을 줍니다. 기다림이 곧 현실이라는, 그 기다림을 믿음으로 색칠하면, 그것이 이미 현실임을 말씀하는 바로 오늘 대림절, 부디 2천 년 동안 지켜온 이 절기를 통해 여러분의 삶이 주님의 은혜로 더 깊어지길,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런데 아마 여러분 가운데는, 오늘 이 시점에서 이 대림절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알겠는데, 어쨌든 그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오셨고, 다시 아버지 곁으로 가셨다가, 언젠가 다시 오실 그런 상황인데, 우리가 굳이 오신 날을 기념하는 것도 아니고, 그 이전의 기다림의 절기까지 지켜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사랑을 해서 결혼을 했는데, 매년 결혼기념일을 기억하고 지킵니다. (연애의 경우에는 만난 지 100일, 1,000일, 뭐 이렇게 되는 거지요.) 그런데 지금 대림절은 그 결혼기념일을 지키는 게 아니라, 결혼 이전의 시간들, (애인 관계라면) 어쩌면 만나기 전의 시간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려 하는 것입니다. 이건 분명 다소 비상식적인 부분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더구나 우리는 주님을 만나기 전 주님을 진정으로 기다려 본 적이 없습니다. 솔직히 여러분 주님을 기다려서 만났습니까? 오늘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도 그렇지 않습니까? 요셉이 주님 오심을 기다리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어느 날 갑자기 정혼한 여인, 사랑한 여인의 배가 불러오더니, 그렇게 아들이 태어날 거라고, 그게 메시아라고, 이름을 예수라고 지으라고, 주의 사자가 찾아와 말합니다. 요셉이 기다린 건 마리아였지 아들 예수가 아니었던 겁니다. 마리아도 마찬가지였겠지요. 역설적으로 우리는 다 주님을 만나고서야 주님을 기다립니다. 이것에도 주님이 필요하고, 저기에도 주님이 필요하고, 그래서 주님을 기다리지, 만나기 전에는 오히려 주님을 기다려 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우리가 주님이 누구인지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주님이 찾아오셔서 우리를 안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걸 우리는 은혜라고 부르지요.
그러니 대림절은 더 낯설기만 합니다. 기다려본 적 없는 분을, 이미 와 계신 분을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오시기 전으로 가서, 이제 그분을 기다리는 마음이 되자고 하니, 이게 참 낯섭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이 절기가 의미가 있는 것 아닐까요? 우리는 기다려 본 적이 없기에, 이미 누리고서야 비로소 그 은혜를 깨닫기에, 우리가 죄인 되었던 그 시간, 우리가 주님을 모르고, 기다리지도 않았던 그 시간으로 되돌아가서, 주님을 기다려보는 것은, (마치 영화 ‘interstellar’의 아빠) 모르고 누리는 은혜이지만, 그것이 얼마나 큰 가치와 의미를 가지는지, 그 기다림으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하며, 얼마나 감격이면, 그 사람을 만나기 전의 시간들을 기억하고, 의미를 담아 보낼까?) 우리의 기다림의 모습과 간절함이, 그 대상의 가치를 결정할 수도 있기에, 우리는 다시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이 대림절을 대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 1장의 전반부 내용은 사실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의미를 전해줍니다. 마태복음 1장에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록하는 이야기가 18절부터 시작됩니다. 요셉에게 주님의 사자가 꿈으로 말씀하시는 장면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25절에 보면, 아들을 낳고, 이름을 예수라고 짓는 장면까지 등장합니다. 2장에는 이제 그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기뻐하는 동방박사들, 실은 동방에서 온 점성가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그러고 보면, 사실 주님의 탄생에 대한 기록은 1장 25절 이 한 절인 셈입니다. 그 앞에는 예수님이 탄생하기 전의 이야기들이 길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독특한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예수님의 계보가 적힌 긴 족보 이야기입니다.
사실 자주 읽게 되는 본문은 아니지요. 사람 이름, 그리고 낳고, 낳고 또 낳고 하는 이 본문은 그냥 대충 읽어 내려가는 게 보통입니다. 읽는다는 표현보다는 거의 그냥 훑어 지나간다고 하는 게 더 맞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은 이 긴 족보에서 무엇이 보입니까? 저는 하나님의 긴 기다림을 봅니다. 이 땅에 아들 예수를 보내실 것을 기다리시는 하나님. 속히 아들을 보내셔서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오게 하시고, 구원의 길이 열리기를 갈망하시는 하나님. 그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17절에 보면, 마태는 이렇게 정리하여 기록합니다.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열네 대가 세 번 이어지는 과정이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있었다고 말하는데요, 마치 하나님이 정한 대, 곧 generation이 있어서, 그 기간을 하나님이 정하시고 기다리신 것 같은 느낌을 던져줍니다. 그 긴 세월 하나님은 아들 예수의 보내심을 기다리며 아파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오심에 관심이 없던 그 때, 이미 예수의 보내심을 향한 하나님의 기다림이 거기 있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 주님이 찾아오신 것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우리가 주님을 몰랐던 그 시절에도, 주님은 수많은 세월, 아니 이 땅이 만들어지기도 전부터 우리를 아시고 기다려오셨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그 주님의 기다림을 온전히 바라보며, 우리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온전히 알고자 애쓰는 시간, 그것이 우리의 대림절인 것입니다. 부디 이 대림절 기간을 통해서 여러분의 인생을 다시 새롭게 써 갈 수 있는, 주님의 계획하심 안에서 새롭게 여러분의 삶을 바라보고 규정할 수 있는, 그래서 진정으로 거듭난 자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여러분의 복 된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의 요셉은 참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사람입니다. 사실 대림절, 성탄절, 그러면 마리아가 거의 주인공이지요. 예수님을 낳은 어머니.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마리아가 보통 인간과는 전혀 다른 모습임을 강조하게 되기까지 했는데요,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우리는 마리아처럼 쓰임받기보다는 요셉 같이 주님 앞에 서 있을 때가 많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 무슨 큰 역할을 감당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사실 많지 않을 겁니다. 그냥 다 자기 일 바쁘게, 평범하게 살다가, 갑작스레 주님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겠지요. 다 마리아처럼 되면 좋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더구나 요셉의 입장에서는 예수의 탄생이 처음부터 그리 기쁨이고 소망이 아닐 수도 있었습니다. 기쁨은커녕, 마리아의 잉태는 결혼을 기다리고 있던 요셉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과 정혼을 했는데, 갑자기 임신이 되어 배가 불러옵니다. 정말 난감했을 겁니다. 유대인의 정혼은 오늘날 우리의 약혼이랑 비슷하지만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날의 약혼이 법적인 효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과는 달리, 당시의 정혼은 법적인 구속력이 있었습니다. 결혼만 안 했지 사실 법적으로는 부부입니다. 정혼한 상태에서 서로의 호칭도 남편과 아내이고(19절에도 아예 요셉을 마리아의 남편이라고 부르지요.), 약혼 중에 상대가 죽으면 과부, 홀아비가 되는 것입니다. 부부관계만 하지 못할 뿐, 실질적인 부부인 셈입니다. 그렇게 1년 정도를 정혼한 상태로 지내다가, 1년이 지나면 남자가 여자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옵니다. 그게 결혼입니다. 18절에 보면,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라고 되어 있는데요, 지금 그 상황인 겁니다. 그런데 아마도 거의 1년이 다 된 시점인 걸로 보입니다. 24절에 보면 꿈에서 깬 요셉이 마리아를 데려왔다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 여자가 간음을 해서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졌다, 율법적으로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신명기 22장에 보면, 돌로 쳐 죽이라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19절에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을 때, 그 ‘의’가 무엇을 말하는지 우리는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 ‘의’는 헬라어 ‘디카이오스’의 변형 ‘디카이오쉬네’인데요, 단지 ‘정의롭다’는 의미 이상의 단어입니다. 사랑 안에서의 의로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요셉이 그저 융통성 없이 그저 율법에 충실한 사람이라고만 했다면, 이때 어떻게 했을까요? 아마 당연히 “가만히, 조용히 끊고자 하지” 않았을 겁니다. 요셉이 아내 마리아를 배려하여 조용히 끊고자 했던 것이 주의 사자를 만나기 전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내의 부정이 밝혀졌지만, 그는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녀를 끝까지 보호해주고자 했습니다. 남자로서의 복수심보다, 마리아를 지켜주고자 했던 마음이 더 컸던 것입니다. 그만큼 사랑하고 또 그 사랑 안에서 온유한 마음을 가진 요셉이었던 것이지요. 만약 이 상황에 요셉이 가만히 끊고자 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정말 상상하기도 무서운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겁니다. 마리아가, 마리아가 될 수 있었던 데는, 요셉의 사랑과 의로움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셉은 그렇게 마리아를 데려 온 이후에도 그녀와 동침하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메시아. 처녀가 아들을 잉태할 것이라는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게 하기 위해, 요셉은 끝까지 참고, 아내 마리아를 지켜주었습니다.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당연한 권리로서의 욕망으로부터도 요셉은 인내하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남자, 얻으셔야 합니다. 의로운, 그리고 진심으로 사랑하여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아내의 혹 있을 지도 모르는 약점을 끝까지 본인이 끌어안고 갈 수 있는, 그런 남자를 부디 분별하고 구하시는 여러분 자매들 되기를 바랍니다.)
기다렸던 메시아가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무사히 탄생하고, 요셉은 21절에서 천사가 말해준 대로, 그의 이름을 예수라 짓습니다. 예수, 정확히는 ‘예수스’로 ‘여호수아’의 헬라식 이름입니다.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지요. 마리아도 원래는 미리암, 모세의 누이였던 그 이름의 헬라식 이름입니다. ‘높아진’이라는 의미이지요.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을 짓는 것은 아버지만의 특권입니다. 이 아이가 어떻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 그 소망과 꿈을 담아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겁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 특권마저도, 내려놓습니다.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함을 들었기에, 내가 가진 권리, 당연한 특권을 기꺼이 포기합니다. 남편으로서의 특권, 그리고 아버지로서의 특권을 모두 내려놓고 그는 이 하나님의 긴 기다림에 동참합니다. 남편으로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그리고 아버지로서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하나님의 뜻 앞에 잠잠히 머무릅니다.
이렇게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시는 데 있어서 요셉은 결코 적지 않은 일을 감당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딱 여기까지였지요. 성경에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 부분을 제외하면, 아버지 요셉의 이름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완전히 사라져버립니다. 마치 요셉은 이 역할만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그렇게 사라져버립니다. 마리아는 아니지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그 이후의 모든 과정에서도 마리아는 늘 중심에 서 있습니다. 그러면 요셉이 무의미한 역할이었느냐, 아닙니다. 사실 성도는 잊혀져서 기억되고, 잊혀져서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 왼손이 모르게, 자기가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서 더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그런 존재가 바로 성도입니다. 예수님의 육적인 아버지로서, 그리고 메시아를 기다리는 의로운 성도로서, 그는 충분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의 기억에, 또 하나님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사람의 기억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기억되는, 그런 인생이길 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 1장 전반부의 예수님의 계보를 좀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앞서 말씀드린 대로 마태는,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의 연대를, 총 14대의 세 번의 반복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 다윗부터 바벨론 포로기까지 열네 대, 그리고 바벨론 포로기부터 예수님까지 열네 대라고 분명히 적고 있습니다(17절). 한 번 확인해 보실까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몇 명입니까? [아브라함-이삭-야곱-유다-베레스-헤스론-람-아미나답-나손-살몬-보아스-오벳-이새-다윗, 총 14대입니다.] 그럼 다윗부터 바벨론까지는요? [(다윗-)솔로몬-르호보암-아비야-아사-여호사밧-요람-웃시야-요담-아하스-히스기야-므낫세-아몬-요시야-여고냐, 총 14대입니다.] 그럼 바벨론 포로기부터 예수님까지를 봅시다. [(여고냐-)스알디엘-스룹바벨-아비훗-엘리아김-아소르-사독-아킴-엘리웃-엘르아살-맛단-야곱-요셉-예수님] 총13대입니다. 이 generation에 문제가 생깁니다. 실제로는 14-14-14가 아니라, 14-14-13입니다.
학자들이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에 관한 학설들도 여럿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비학문적인, 아주 비논리적인 견해 하나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왠지 이 1장 전체가 요셉이 마리아를 마리아 되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 같은 뉘앙스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아담에게서 하와가 나오는 것처럼, 비록 낳고 태어나는 관계는 아니지만, 아담의 사랑과 자기 죽음과 비하 안에서 하와가 비로소 하나의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교회가 태어나는 것처럼, 오늘 요셉의 사랑과 자기 포기 안에서 마리아가 진정 예수의 어머니로 태어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런 요셉의 잉태를 통해 오늘 예수의 오심이 이 땅에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하고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의 오심은, 예수와 같은 삶으로 예수를 기다리는 사람들에 의해 예비되고 열려지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마땅한 권리요, 당연한 특권이지만, 누군가를 구하고 살리기 위해, 누군가를 세워주고, 그를 그리스도 안에서 잉태하기 위해, 기꺼이 그것을 내려놓는 삶을 살아내는 바로 그 사람을 통해서, 예수는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오신 예수님은, 다시 그렇게 이 땅 가운데 오실 것을 믿습니다. 그렇게 오신 예수님의 영, 성령은 그렇게 우리의 삶에 임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러한 삶에는 주연과 조연이 따로 없습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것은 마리아이지만, 그를 낳은 것은 요셉이기에, 그 역시 성령 안에서 예수를 낳은 자입니다. 어차피 예수는 육체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된 분이 아닙니까? 성령 안에 주연이니 조연이니의 차별은 없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세우기 위해 가장 큰 자가 그를 섬기는 것이 바로 하나님나라가 아닙니까? 저는 여러분이 굳이 주목을 받고 화려한 조명을 받는 자리를 꿈꾸며 사모하는 삶을 내려놓기를 원합니다. 모든 이의 조연으로 살아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며, 하나님의 존귀한 자가 될 수 있음을 오늘 요셉의 삶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에, 왜 주님의 나라가 오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가, 왜 예수님은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주님의 평화를 선언해주지 않으시는가, 왜 우리 가정에는 하나님의 평강이 없는가,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삶으로 예수를 기다리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낮아지려 하지 않고, 누군가를 세워주려 하지 않고, 내가 마리아가 되려고, 내가 예수를 낳으려고만 하니까 진정한 예수의 마음은 사라지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처럼 예수를 기다리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거룩한 모습으로 주님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예수를 낳을 수 있도록, 누군가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누군가 주님의 큰 일꾼이 되게 할 수 있도록, 그의 곁을 지키며, 그를 섬기는 일, 그 일이 사라지고 있기에, 오늘 우리의 가정과 일터에, 그리고 교회에 주님의 나라가 소원하기만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기다리되, 주님의 모습으로 기다리십시오. 그렇게 예수의 길을 예비하는 이들을 통해 오늘도 하나님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예수의 삶을 사는 이들을 통해 오늘도 하나님은 성령의 권능을 부으사 이 땅을 주님의 나라로 회복시켜 가심을 믿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는 주님의 성도들이 없다면 아들 예수는 이 땅에 다시 오실 수가 없습니다. 때가 되니 그냥 오심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악해지니 주님의 다시 오심이 임하시는 것이 아니라, 정결하고 의로운 주님의 백성들이 주님을 기다리기에,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주님을 기다리되 주님의 모습으로 누군가를 낳으며, 세우며 기다리기에, 주님, 이 땅에 다시 오십니다. 기다리는 동안 이루어진 그 수많은 섬김과 사랑 안에서 주님 이 땅에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부디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 이 한 달 간 우리의 모습이, 마리아 옆의 요셉처럼 될 수 있기를, 요셉처럼, 나보다 남을 더 세워주고 빛나게 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의 권한과 권리를 내려놓을 수 있는, 그래서 주님을 다시 오시게 하는, 아름다운 기다림의 모습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