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공의를 신속히 행하리라" 2014년 9월 25일 새벽 설교

2014-09-25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5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40925 목요일 새벽기도회  ----------------------------------------------------- 이사야 16장 5절, 이사야 강해135  공의를 신속히 행하리라 * 설교 음성 :  https://www.4shared.com/mp3/etaWLtQTce/20140925_.html 이사야서 백서른다섯 번째 말씀으로, ‘공의를 신속히 행하리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모압의 피난처 역할을 할만한 여유가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유다가 그 사명을 감당하게 될 날이 곧 올 것임을 오늘 5절을 통해 분명히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이제 다윗의 장막에 세워질 새로운 왕의 모습 때문인데요, 그 왕을 묘사하는 표현들은, ‘충실함,’ ‘정의,’ ‘공의’ 등입니다. 이사야서를 묵상해오면서 자주 읽고 나눴던 표현들이기에, 오늘은 따로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그 말들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한 단어에 초점을 두고 싶은데요, 바로 5절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신속히 행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새번역 성경의 경우, 이 5절을 이렇게 옮기고 있습니다. “다윗의 가문에서 왕이 나와 신실과 사랑으로 그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 옳은 일이면 지체하지 않고 하고,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다.” 후반부의 말씀, “옳은 일이면 지체하지 않고 하고,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다.”라는 말씀에 오래도록 마음이 머물게 됩니다. “옳은 일이면 지체하지 않고,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다.”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께서는 아마 이 말씀을 들으면서, 지난 8월 24일 주일 설교였던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라는 제목의 말씀이 기억나실 수도 있겠습니다. 솔직히 생각이 나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말씀을 드리게 됩니다. 기억을 한 번 더듬어 보겠습니다. 옥에 갇혀 있던 사도들이 한밤중에 천사의 도움으로 옥을 빠져나오게 됩니다. 그러면서 천사가 사도들에게 말하지요.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전하라.” 그때 사도들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옥에서 나온 사도들은 날이 밝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채 여명이 밝아오기도 전에 주신 말씀에 순종하여 성전으로 나아가 말씀을 전했습니다. 단 몇 시간도 지체하지 않고, 그 말씀을 듣는 즉시로 순종을 향해 달려 나아간 것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매우 부적절하고 과도한 순종인 듯 보이는 그러한 신속한 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은 복음의 주도권이 완전히 사도들에게로 넘어오게 하시는 일을 이루어 가셨던 것을 여러분은 아마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때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진 그 자리에는 사탄도 주목합니다. 어떻게든 그 말씀이 깊이 심겨지지 못하게 하기 위해 혈안이 된 마귀는, 우리가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지체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실 것 같던 그 말씀도, 순종 없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서서히 틈이 벌어지고 색이 바래진다는 것을 마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순종에 있어서 최적의 타이밍이란 언제나 ‘즉시’임을 말씀드렸습니다. 말씀이 선포되는 즉시로 순종이 일어날 때, 비로소 그 말씀은 나의 삶이 되고, 능력이 됨을 잊지 마십시다. 오늘 본문에서 공의를 신속하게 행한다는 것도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의는 율법보다 더 나아간 자비요, 약자를 향한 초법적인 편들기입니다. 따라서 그 공의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서는 머뭇거리거나 주저하지 않는, 신속한 실행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합니다. 냉정한 법과 제도, 그리고 속히 식어버리는 백성의 양심 등으로 인해 공의는 시간이 지날수록, 바르게 선포되고 온전히 성취되기가 너무나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도와주려 할 때, 누군가 약한 자를 편들어 주려 할 때, 아파하는 이들을 위로하려 할 때, 우리는 이 ‘신속함’의 원리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작금의 세월호법 논쟁을 지켜보노라면 이 말씀이 말 그대로 뼈에 저며지게 될 만큼 깊이 와 닿곤 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온 국민이 희생자와 유가족의 편에서 무엇이든 할 것처럼 유난스러웠는데, 지금은 어떤 모습입니까? 정부는 죄인에서 심판자로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고, 국민들은 사분오열 되어 서로를 향해 날선 칼끝을 겨눕니다. 모든 언론들은 세월호의 상처와 아픔에 입을 닫았고, 우리도 덩달아 그날의 기억을 이미 닫은 지 오래입니다. 그리고 이제 학교에서는 더 이상 세월호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마음의 상징인 노란리본을 달지 못하게 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학생 다섯, 교사 둘, 일반인 셋 등, 아직 열 명이나 저 바다에 누워있는데 말입니다. 이처럼 공의가 바로 세워지지 않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두말 할 것도 없이, 그 공의를 행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를 우리가 이미 놓쳐버렸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도, 우리의 기억은 희미해지지 않으리라 착각했고, 언제든 그들의 편에 서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 잘못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저 조금 더 잘 먹겠다고, 조금 더 잘 살겠다고, 공의를 이처럼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세월호는 그 세월 앞에 우리의 결심과 결단이 얼마나 나약한 것인가를 그 이름으로 말해주는 또 하나의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준 것은 아닌가, 안타깝고 씁쓸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나라와 공의를 향해 우리가 가진 열정의 유통기한이 이렇게 짧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마십시다. 우리의 믿음과 결단이 얼마나 부실하며 나약한지, 겸손히 인정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합시다. 그리고 할 수 있을 때, 해야 할 때, 그 공의를 행하고 이루어 가십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공의일진대, 그것을 행하는 우리의 모습에 조금의 주저함이나 망설임을 남겨두지 마십시다.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만이라도 지체하지 않는 순종으로 그 어떤 다른 여지도 남겨두지 마십시다. 약하고 외로운 이들의 벗이 되는 일 앞에서 우리의 주머니를 뒤적이는 일 따위는 하지 마십시다. 공의를 신속히 행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대로 닮은 주님의 아들, 딸들이 되십시다. 어른들의 게으른 마음과 나태한 움직임으로 희생된, 수많은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죄스런 마음이 유난히 더해져만 가는, 너무나 좋은 계절에, 더 빨리, 더 신속히 작은 노란리본이라도 하나 더 달지 못한 것이 끝내 후회됩니다. 부디 오늘의 교훈과 이 말씀을 잊지 말고,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저와 여러분의 삶, 그리고 우리 고백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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