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2014년 9월 21일 주일 설교
2014-09-21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6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40921 성령강림 제16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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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6장 8~15절,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 설교 음성파일 : https://www.4shared.com/mp3/VgH5QTdpba/20140921__33____.html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주중에 한 뉴스 기사 중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부산 한 파출소에 신고 하나가 들어왔는데요, 어떤 할머니 한 분이 보따리 두 개를 들고 한 시간째 동네를 서성이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출동한 경찰이 그 할머니를 파출소로 모셔와 왜 거기 그러고 계시냐고 질문하자, 할머니는 “딸이 아기를 낳고 병원에 있다”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할머니는 그 말만 되풀이할 뿐, 자신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고 울기만 하는, 치매 환자였습니다. 경찰은 수소문 끝에 인근 동네 아는 이웃을 찾았고 6시간 만인 오후 8시쯤 딸이 입원한 부산진구의 한 병원으로 할머니를 모셔갈 수 있었습니다. 병원에 도착한 할머니는 딸을 보자 보따리를 풀었는데요, 그 보따리 안에는 출산한 딸을 위해 준비한 미역국, 나물반찬, 흰 밥, 이불 등이 곱게 싸여 있었습니다. 물론 이미 다 식어버린 채였지만 말입니다. 비록 치매로 모든 기억을 잃었지만, 딸의 출산만큼은 끝내 잊지 않았던, 아니 놓지 못했던 할머니의 모습에서 참 애잔한 감동이 느껴졌습니다.
어떻게 치매를 앓고 있던 어머니가 딸에 대한 기억을 놓지 않고 그렇게 집을 나설 수 있었을까? 두말 할 것도 없이 딸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 그 어머니의 머리는 물론이고 온 몸을 다 채우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 작고 희미한 기억 전부가 딸의 출산과 아픔으로 전부 채워져 있었겠지요. 그저 머리로만이 아니라 온 몸에 그 일에 대한 기억이 새겨져 있었겠지요. 할머니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는 그 사랑이 그렇게 할머니를 몸의 저항마저 이기게 할 수 있었던 것일 겁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그와 전혀 다르지 않음을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겼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사49:16) 하나님의 지문이 다 여러분의 이름이요, 삶입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시선에는 단 1초의 멈춤이나 쉼이 없습니다. 여러분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고 하시니까요(시121:4). 말 그대로 하나님은 여러분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거지요. 단 한 순간도 우리를 향한 마음을 놓지 않으시고, 온통 우리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계십니다.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이렇게도 말씀하셨는데요,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3:17) 여러분을 바라보시며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하나님. 여러분 때문에 기뻐 즐거워하며 콧노래를 부르고 계신 하나님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여러분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서 그 사랑에 어쩔 줄 몰라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그 모습을 바라보고 느끼는, 온전히 누리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로 그 주님의 사랑 안에 완전히 잠겨 살아가던 한 사람, 스데반이라는 이름의 한 사람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씀을 전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조금 특별합니다. 9절에 보니 “이른 바 자유민들”이라고 소개된 사람들이 나오는데요, 그 출신지가 다양합니다. 구레네, 알렉산드리아, 길리기아, 아시아 등입니다. 여기 아시아는 오늘날의 아시아가 아니라, 지중해 북쪽에 위치한, 일곱 교회가 자리한 바로 그 지역입니다. 또 길리기아는 사도 바울의 고향이지요?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이집트의 수도로 아프리카 지역이고, 구레네는 그보다도 더 내륙으로 들어간 북아프리카의 도시 이름입니다.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이, 얼마나 멀리까지 노예로 끌려가서 살았는지 알 수 있기도 한데요, 그런데 그렇게 한때는 노예였다가 자유롭게 된 사람들이 이제 고향을 찾아, 그것도 예루살렘 성전 근처로 돌아온 것입니다. 지난 주 말씀드린 것처럼, 자신이 이방 땅에서 이룬 모든 것들을 버려두고 하나님을 향한 열망과 성전을 향한 그리움으로 이곳에 돌아온 것이지요.
그런 그들이었기에 성전에 대한, 율법에 대한 충심은 그 누구 못지않았습니다. 보통 우리가 외국에 나가 있어보면 애국심이 생긴다고 하지 않습니까? (종성) 타지에 나가서 듣는 애국가, 감동 그 자체이지요. 이들이 그러했습니다. 긴 외국 생활을 통해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졌고, 성전을 사랑하는 마음도 전통적인 유대인들이 댈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와서 자신들만의 회당을 정해 그곳에서 모여 말씀을 나누고 예배와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스데반 집사는 바로 그 회당에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지난 일곱 집사의 선출을 다룬 본문의 설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스데반 역시 이방 출신의 헬라파 유대인으로서 주님을 영접한 사람이었기에, 그 회당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로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그 회당에, 히브리출신의 성도들은 쉽게 찾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들 모두가 히브리파였으니, 사도들도 마찬가지였겠지요. 늘 방언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런 이유로 스데반과 같은 헬라파의 역할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중요했습니다.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고 그들의 마음을 공감해줄 수 있는 전도자, 얼마나 소중한 사역자였겠습니까?
우리는 이 장면을 보면서,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주신 바 고유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은 각각의 나름의 은사와 특성들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출신 지역, 경험과 전공, 등등 자신만이 가진 독특함들이 다 있습니다. 물론 객관적으로 다 좋은 독특함만 있는 건 아닙니다. 때로는 열등감의 이유가 되기도 하고, 삶의 큰 상처이기도 한 그런 것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애써 숨기려는 분들도 보게 됩니다. 혹시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다르게 보면 어쩌나, 혹시 이걸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면 어쩌나, 염려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스데반의 경우처럼, 비록 그것이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별 볼 일이 없는 것이며, 오히려 감추고 싶은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반드시 이루시려고 하시는 목적과 뜻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전하는 데 방해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용하실 겁니다. 하나님은 연약해도 사용하십니다. 왜냐하면 연약함의 문제는 하나님이 감당하시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안에 하나님의 목적이 있음을 믿고 기다리며 때를 구하는 마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으며, 감사함으로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뜻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4에,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고 하신 말씀처럼, 감사하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면, 반드시 귀히 쓰실 때가 올 것입니다. 내가 부끄러워했던 바로 그 모습이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사용하시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부디 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나라를 위해 귀히 쓰임 받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자유민들의 회당에서 선 스데반이었지만, 결코 그들의 반응은 유화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스데반이 말하는 요지가 무엇입니까? 당신들이 애써 찾아 온 이 성전이 이제 그 효력이 끝났다. 율법, 곧 토라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으로 대체되고 완성되었다. 이제 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가 무시하고 미워하는 이방인과 똑같은 신세다. 이런 내용이니 스데반을 향한 그들의 분노는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스데반이 그런 내용을 조목조목 설명을 하고 있으니 아무도 스데반을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11절 말씀처럼, 스데반을 고소하고, 사람들을 매수해서 공회 법정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증언을 하도록 사주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고소와 증언의 과정 속에서 그 공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이제 스데반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의 얼굴을 보게 되었는데, 그의 얼굴이 어떤 상태였다고 성경은 기록합니까? 그렇습니다.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입니다(15절). 대충 지나치듯 본 게 아니라, 유심히 자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법정에 선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얼굴을 하면 천사 같은 얼굴이 될까, 여러분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물론 잘생기고 예쁘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그런데 이건 전적으로 상상의 영역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 사람들이 천사의 얼굴을 보았겠습니까? 아닙니다. 상상이나 그림에서나 보았을까, 실제 천사를 목격한 적이 없는 사람들의 입에서 저 모습이 흡사 천사의 얼굴 같다,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아마도 스데반에게서 자신들이 신령하게 여기는 모습, 예컨대 하나님의 빛과 같은 광채나 거룩한 어떤 아우라가 느껴졌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천사와 같은 모습이 정확히 어떤 것이냐에 대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을지 몰라도, 우리는 그가 어떻게 그와 같은 모습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결과와 영향을 끼치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충분합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모습이 어디서 기인했는지가 중요할 텐데요, 그러려면 본문의 시작인 8절로 다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8절을 다시 읽습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그리고 15절을 보면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이번에는 이 둘을 함께 연결해서 읽어보십시오. 그러니까 8절과 15절을 한 번에 이어서 읽어보겠습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어떻습니까?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습니까?
실은 이 두 절은 그냥 문법적으로만 잘 연결되는 문장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원인과 결과의 구조입니다. 은혜와 권능으로 충만한 모습, 그것이 바로 그를 천사의 얼굴처럼 빛나게 만든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글쎄요, 여러분은 과연 그 정도의 원인이 사람을 천사처럼 만들 수 있는가, 의구심을 가지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여기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다는 말을 주의 깊게 보시길 바랍니다. 은혜와 권능, 다 아시는 단어이지요? 너무나 잘 아는 은혜가 스데반 안에 넘친 것이구요, 권능은 무엇입니까? 성령이 임하시고 그로부터 주어지는 능력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그렇게 낯설 것이 없는 말입니다. 우리 역시 다 소유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 문장에서 우리에게 가장 낯선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충만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충만, 가득 찰 充, 가득할 滿, 가득하고 가득한 상태. 헬라어 ‘플레로’의 번역인데, 정말 물통의 아귀까지 완전히 차서 이제 막 넘쳐흐르기 시작하는 모습이 바로 이 ‘충만’입니다. 아시는 대로 신약성경에는 이 단어가 상당히 자주 사용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5:18) ‘성령충만’이라는 말, 너무나 익숙한 말이지요.
당연한 말이지만, 이 표현은 예수님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인데 요한복음 1장 14~16절을 잠깐 찾아보시겠습니다.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아멘. 여기 14절에 제자들이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았을 때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요, 어떻습니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앞서 스데반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16절에도 비슷한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우리가 은혜를 주님께 받는데, 그 받는 은혜의 근원이 어디입니까? 주님입니다. 더 정확히는 ‘주님의 충만’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 안에 가득 채워진 은혜, 곧 쏟아질 것처럼 가득한 바로 그 은혜로부터 우리가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주님께 받는 그 은혜로 우리 역시도 충만하게 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를” 것이라고 말씀합니다(엡4:13). 우리가 온전한 사람을 이루게 되는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새번역 성경이 옮긴 것처럼, 쉽게 말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그 충만함으로 채워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충만함의 모습이 놀랍게도 우리 교회를 향한 명령이기도 하다는 것을 아십니까? 에베소서 1장으로 가봅니다. 23절인데요 함께 읽겠습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영어 성경으로는 칠판에 쓰여진 대로입니다. “which is his body, the fullness of him who fills everything in every way. 모든 것을 모든 방법으로 채우시는 분의 그 충만하심이 바로 교회라는 말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그 충만하심을 담은 몸이라는 의미이며, 만물 역시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의 그 충만함으로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각 사람이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으로 충만한 모습. 그리고 그 각각의 성도들이 함께 모여 더욱 큰 충만으로 넘쳐흐르는 모습. 그래서 다른 이의 충만에 더해져 더 새로운 충만의 세계로 나아가는 모습. 그렇게 충만한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 앞에 가난하고 비어 있는 저 세상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가득히 채워가는 바로 그 모습. 그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소망이며, 꿈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과 우리 교회의 말씀이 되길 원합니다.
여러분, 은혜의 본질은 충만입니다. 실상 충만하지 않은 것은 온전한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은혜는 흘러넘쳐야 은혜입니다. 가득 차고 또 가득 차는 게 은혜의 본성입니다. 여러분 은혜를 제대로 받은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입니까? 은혜를 더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졌을 때, ‘충분한 사랑’이란 없어집니다. 더 갈망하고, 더 원합니다. 그게 사랑의 본질입니다. 은혜를 사모하고 충만해지고 하는 그 마음이 실은 성령충만함의 증거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그 일을 하십니다. 우리의 가난함을 보게 하시고, 그것을 채워 가십니다. 주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고 말씀하신 게 그 의미입니다. 내 안에서 성령이 충만을 향해 나를 채워 가십니다.
그러니 은혜는 적당히 받고 적당히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충만을 향하여, 가득 채워지는 것을 향하여 쉼 없이 전진해 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여러분은 그 충만함을 사모하고 계십니까? 우리의 신앙에 가장 심각한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스데반과 우리가 다른 지점이 여기입니다. 성도 중 정말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 충만함을 사모합니다. 여러분에게 한 번 물어봅시다. 정말 여러분은 성령이 여러분 안에 가득 차서 충만하게 되기를 사모하십니까? 물론 은혜도 받고 싶고 하나님을 만나고도 싶고 믿음도 자라고 싶겠지요. 그런데 정말 그 은혜가 여러분을 가득 채워서, 여러분 자신을 은혜에 잠겨버리게 하길 원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은혜를 받기는 받되 아귀까지 꽉 차오르는 은혜가 아니라, 조금 적당히, 허리쯤, 아니 그것도 불편하니 무릎 정도까지면 충분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제한합니다. 정직하게 말해서 여러분은 성령으로 충만할 수 없는 게 아니라, 그 충만함을 원치 않는 것입니다. 거부하는 것이며,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마음은 필시 사탄이 주는 마음입니다. 은혜 안에 이미 거하고 있는 성도에게 주어지는 가장 탁월한 사탄의 전략이 충만함을 멀리하게 하는 것입니다. 늘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것으로 되었다, 나는 이미 부요하다, 이런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겁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거기 놀아나면서, 정말 성도로서 누려야 할 성령의 넘치는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고 삶의 순간마다 메마름을 경험합니다. 성도가 성도답게 살아갈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가 거기서 기인합니다. 은혜를 받되, 충만히 받지 않는 것입니다.
왜 멈추는 겁니까? 왜 충만을 사모하지 않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여러분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길까, 걱정되어서입니까? 왠지 하나님이 여러분더러 목사를 하라, 선교사를 하라, 삶을 드려라, 그럴 것 같아서입니까? 아니면 지금 여러분이 모아 놓은 재산을, 물론 그런 것도 없겠지만, 다 하나님께 드리라고 할 것 같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이 어떤 혼돈으로 빠져들어 갈 것 같습니까? 여러분이 무슨 광신도가 되어 사람들에게 조롱이나 당하는 인생이 될 것 같습니까? 그래서 충만을 사모하지 못합니까? 그래서 적당히 그렇게 눈치만 보고, 발만 담가보고, 맛만 보고 있는 겁니까? 아닙니다, 진실은 정반대입니다.
충만하지 않으면 성령이 주시는 참된 자유함을 누리기도 어렵고, 온전한 기쁨이나 감격도 느끼지 못합니다. 상황과 조건에 따라 감정이 수시로 흔들리고, 당당함과 담대함도 사라집니다. 삶을 이끌어가는 지속적인 열정과 소망이 쉽게 식어버립니다. 성도로서 매가리가 없어집니다. 물론 생명의 어떤 영향력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생명의 은혜가 넘쳐흘러야 거기 생명이 자라고 열매가 맺혀지는 건데, 자기 마시고 살기도 급급한데, 무슨 생명의 열매가 생기겠습니까? 그런 성도는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하다가 그 얼마 있지도 않은 은혜마저도 소멸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충만하지 않은 이들이 주의 일을 감당하다 성령을 다 소멸해버리고 믿음의 큰 후퇴를 오히려 겪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흘러넘쳐서 하지 않으면 늘 힘들고 피곤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얼굴로도 은혜를 끼칩니다. 그의 숨소리만으로도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충만해지면 반드시 은혜가 흘러갑니다. 향유 옥합을 깨어 주님의 발에 쏟아 부은 마리아처럼, 그래서 그 집 안 천지사방에 그 향유의 향기가 넘쳐흐르던 것처럼, 충만한 사람은 삶의 전부를 통해서 주님의 향기를 발합니다. 향수가 무슨 일을 해야 향기입니까?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향수는 존재로 빛이 납니다. 건드리면 아름다움이 흐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그러합니다.
여러분, 무엇으로 여러분이 충만합니까? 여러분의 젊음이 무엇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까? 여러분을 툭 치면 뭐가 흘러나옵니까? 여러분이 하는 이야기가 다 뭐에 대한 말입니까? 여러분의 행위 하나하나가 누구의 모습입니까? 죄의 것들, 더럽고 추한 것들,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만 햇던 바로 그것들만 가득 흘러넘치는 인생은 혹시 아닙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가득 채웠으면 좋겠습니까? 돈입니까? 누가 그러더군요. 돈벼락 좀 맞으면 좋겠다고. 저는 성령의 벼락을 맞았으면 좋겠습니다. 차고 넘쳐서 질질 흘리며 다니고 싶습니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천사의 얼굴과 성령의 감동으로 세상을 적시며 다니고 싶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얼굴을 한 번 비춰 보십시오. 서로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십시오. 거기 천사의 얼굴이 있습니까? 넘치는 빛의 광채가 있습니까? 천사의 얼굴은커녕 막 수영을 마치고 나온 고 목사 같은 얼굴은 아닙니까? 그래서는 누가 여러분을 통해 영향을 받으며, 누가 여러분을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를 맛볼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는 마음이 먼저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사모하지 않으면 충만함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그 사모함이 이미 사라져 있다면,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그 사모함을 회복하십시오.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사모하면 반드시 충만해집니다. 그것이 주님의 약속(눅11장)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13) 항변하십니다. 이미 그 성령을 여러분은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성령은 내가 다시 받고 채우는 게 아니라, 이미 내 안에 흐르고 있는 성령의 샘이 솟아나도록 그분을 응시하고, 느끼고, 인정하고, 누리면 됩니다. 구하면 주시는 게 성령이요, 원하면 이루어지는 게 충만함입니다. 이보다 쉬운 게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지 않고 구하지 않는 겁니다. 이 고달픈 모습에 이미 길들여져서 성령의 충만함을 낯설어하는 그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의 가난을 정직하게 바라보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부디 문제 앞에 정직하게 반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충만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분별해 보십시오. 무릎까지입니까, 허리까지입니까, 아니면 목까지입니까? 아니면 아예 잠겨 있는 상태입니까? 더 큰 은혜를 사모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함을 사모하는 마음이 여러분에게 회복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수시로 여러분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 볼 때마다, 내가 천사의 얼굴 같은가, 정말 내게서 성령의 충만함이 느껴지는가, 나는 충만함을 사모하며 살아가는가,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또한 우리 고백교회가 각각의 성도, 그 충만함의 충만이 되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충만하고 충만하여 함께 충만해지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서로 함께 충만하면 우리를 통해 그 충만함의 지경이 이웃과 온 열방을 덮을 것입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성령의 은혜가 여러분의 삶의 지경을 넘어, 우리 고백교회의 지경을 넘어, 주변을 모든 땅을 적시고 물들이는 저와 여러분, 우리 고백교회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