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칭찬 받는 사람 일곱" 2014년 9월 7일 주일 설교

2014-09-07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5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40907 성령강림 제14주  ----------------------------------------------------- 사도행전 6장 1~7절,  칭찬 받는 사람 일곱   * 설교 음성파일 : https://www.4shared.com/mp3/gXVzr9xjba/20140907__31_____.html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설교를 통해 함께 해 온 사도행전 초반부의 이야기를 돌이켜보면, 초대교회 공동체에 찾아 온 안팎의 위기들을 어떻게 교회와 성도들이 극복해 나갔느냐에 관한 내용이 사도행전의 핵심적인 주제였음이 드러납니다. 교회를 향한 관리들과 지도자들의 핍박에 이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내부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를 해결한 직후 다시 사도들이 옥에 갇히고 처음으로 태형을 당하고 풀려납니다. 그 후 발생한 사건이 바로 오늘 본문인데 이제는 다시 내부적인 문제로 방향이 전환됩니다. 안과 밖의 문제가 교차되고 심화되면서 교회 공동체를 위협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교회 공동체는 그 위기들을 극복하며 지속적인 성장과 성숙의 과정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도 매우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누가 하신 말씀인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만, 오래 전에 위기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진짜 위기는 위기인데도 불구하고 위기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위기가 뭔 줄 아십니까? 위기인 줄 알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큰 위기입니다.” 한 개인의 인생에서도 그러하고, 또 공동체나 국가의 경우에도 충분히 한 번쯤 되새겨 볼 훌륭한 지혜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사실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신문 사회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건, 사고들, 다 위기를 인식하지 못한 데 일차적인 원인이 있겠지요. 특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에서처럼, 모든 것이 잘 되어가는, 이른바 호기에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여기 ‘그 때에’는 지난 주 나누었던 말씀에서처럼, 사도들이 매를 맞고 공회에서 풀려난 그 때를 일컫습니다. 비록 외부의 박해와 핍박이 있었지만, 놀랍게도 공동체는 더 큰 부흥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호기에 교회 내부에 또 하나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모든 것이 잘 되어 가는 때에 찾아온 성도 간의 불협화음이었는데요, 그렇게 잘 되던 시기에 발견된, 어찌 보면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될 법도 한 그런 일이었습니다. 앞서 우리가 살펴 본 다른 위기들과 비교해 볼 때, 이게 정말 위기가 맞나 싶을 그런 문제로 성경은 오늘 긴 기록과 설명을 전합니다. 동서고금 어느 교회나 한 번쯤은 경험해 봤을, 그리고 우리 고백교회도 앞으로 반드시 겪게 될, 아니 이미 지금 겪고 있을 지도 모르는 그런 평범한 문제 하나가 초대교회 공동체 안에 일어났는데 말입니다. 위기에 대한 인식의 차이, 오늘 말씀의 가장 원초적인 메시지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디아스포라’ 혹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흩어짐’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가 바로 ‘디아스포라’인데요, 이스라엘의 땅이 아닌 이방인의 땅에 거주하며 살아가던 유대인들을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 부릅니다. 아시는 대로 르호보암 왕 때에 남북으로 분열된 이스라엘은 북쪽은 주전 8세기에 앗수르에, 남쪽은 주전 6세기 바벨론에 의해 멸망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땅을 버리고 지중해 인근 다른 나라들로 이주하여 살아가게 되는데요, 지중해의 패권이 로마로 넘어간 뒤인 오늘 사도행전 시대에도 여전히 그들은 각지에 흩어져 이방의 문화 속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한 힘겨운 노력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커진다고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이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삶의 후반부에 이르러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내일이 추석) 그렇게 뒤늦게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유대인들 가운데도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있었는데요, 바로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본문 1절처럼, ‘헬라파 유대인, 그리스도인’이라 불렀습니다. 그들이 사용하던 언어가 당시 지중해를 비롯한 로마의 영역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던 헬라어, 그리스어였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지요. 반대로 평생 이스라엘의 영토 안에서 살아온 유대인들, 그리고 그들 중에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한 사람들을, ‘히브리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히브리어 혹은 아람어를 주로 사용하는, 일반적인 성도들이었습니다. 바로 이 두 부류가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공동체가 바로 초대교회 예루살렘 공동체였습니다. 비록 문화적인 차이는 있었지만 양쪽이 신앙 안에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상황에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소수인 헬라파 유대인들에게서 불평과 원망이 나온 것입니다. 내용인 즉은, 교회에서 날마다 먹을 것을 책임져주는 과부들의 구제에 있어서, 헬라파 유대인 과부들이 차별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수적으로 볼 때 절대 다수에 해당하는 히브리파 유대인 과부들에게 구제가 집중이 되면서 마이너리티에 해당하는 헬라파 유대인들이 상당한 소외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이 일이 정말 심각한 위기로 느껴지십니까? 이 일이 정말 성경에까지 기록되어 오늘 우리에게 전해져 올만큼 크고 중대한 사건으로 여겨지십니까? 만약 후에라도 우리 고백교회 안에 어떤 계파가 생기고, 또 거기서 어떤 갈등이 유발된다면, 그런데 그것이 예컨대 먹는 문제나 말씀과 같이 구제 혹은 식사에 있어 어떤 문제가 발생했다면, 여러분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떠했을까요? 요즘 흔한 말로 덕을 세우기 위해 그저 그런 불평을 잠재우고 문제를 은폐하고 자연스럽게 넘어가려고 하지는 않을까요? 그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산적해 있다고 여기며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지는 않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예루살렘 공동체의 반응과 대처는 그런 우리의 상식을 훨씬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이 내용을 이 문제를 둘러싼 사건의 전개로 구분하여 생각해보면, 이렇게 각 절을 나눠볼 수 있습니다. 먼저 1절은 현재의 문제제기입니다. 내용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2절은 이에 대한 진단에 해당합니다. 이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어디가 잘못되어 이런 일이 생겼는지를 진단합니다. 3절과 4절은 그 진단에 근거한 치료방법의 선택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5절과 6절은 실제 치료의 과정이고, 마지막 7절은 그 치료의 최종적인 결과입니다. 하나씩 한 번 살펴보십시다. 먼저 이 문제에 대한 진단입니다. 2절인데 함께 읽습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여기 열두 사도가 다 모였습니다. 이 문제가 결코 가벼운 몸살이 아니라는 판단이 이미 서 있는 겁니다. 마치 대학병원의 학과장들이 다같이 모여 논의하듯, 열두 사도 전부가 모여 문제에 대한 논의를 하고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모든 제자들을 다 불러서 말하기를 자신들이 접대 곧 재정출납을 맡았던 것이 마땅치 않았다고 말합니다. 의외의 진단이었습니다. 1절을 다시 보시면 원망이 어디에서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유대파에서 히브리파로 향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지금 이 문제의 핵심이 바로 자신들에게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잘못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재정 출납에 신경을 썼던 것이 이 문제의 시발점이었다고, 이 일을 맡은 사람이 우리 사도들인데, 결국 사도들의 잘못이라고, 일종의 공동체 앞에 공적 회개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쉽지 않은 일 - 사도의 권위) 그러면서 사도들은 자신들이 판단한 치료방법에 대해 3절과 4절에서 이야기합니다. 함께 두 절을 읽습니다. “3.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사도들이 제시한 해결책은 이제 그 일을 전문적으로 담당할 일곱 명의 사람을 새로 선출하는 것이었는데요, 그러면서 자신들은 기도와 말씀 사역에만 힘쓰겠다고 말합니다. 계속해서 문제의 핵심에 사도들 자신이 있음을 인정하는 대목입니다. “우리가 본질에 충실하지 못했다, 우리가 우리 일이 아닌 것에 집중하는 우를 범했다.”고 잘못을 시인합니다. 따라서 이제 사도들은 집사를 선출하는 일에 대하여 전권을 내려놓습니다. 사람을 뽑고 세우는 일은 사도들의 손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온 성도가 사도들이 세운 기준에 따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가려 뽑게 되었는데요, 말씀드린 대로 5절과 6절은 그 치료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장면입니다. 함께 5절, 6절을 읽습니다. “5.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이제 성도들이 민주적 절차에 의거하여 선출한 일곱 명의 집사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 성경에 더 등장하는 이름은 스데반과 빌립 정도인데요, 이 명단 안에는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숨어 있습니다. 여기 기록된 일곱 명의 집사의 이름은 전부 다 헬라파 유대인의 이름입니다.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이제 교회의 재정과 구제를 감당할 사람 전부가 헬라파 유대인으로 꾸려진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정말 놀라운 결과 아닙니까? 말씀드린 대로 헬라파는 절대적으로 마이너리티입니다. 히브리파 사람들이 수적으로 절대적 다수에 해당하는 상황에서 집사 전원이 헬라파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히브리파 성도들 전부가 모종의 결단으로 마음을 모았음을 의미합니다. 아예 헬라파에게로만 표를 몰아주기로 한 것입니다. 그 많은 히브리파 성도들 가운데 왜 훌륭한 일꾼이 없었겠습니까? 열두 명의 사도 전부가 히브리파인 것만 봐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헬라파만이 선출되었다는 것은, 당시 예루살렘 공동체가 얼마나 자신의 기득권에 집착하지 않았었는지, 또 그들이 교회의 이 갈등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흡사 사도들의 회개와 권위 포기라는 선창(先唱)에 이어지는 히브리파 성도들의 놀라운 겸손과 신앙의 합창이 어우러지는 한 편의 아름다운 하모니를 보는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7절은 이러한 문제 해결의 결과입니다. 7절 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앞서 1절에 등장하던 말, ‘제자가 더 많아졌다’는 내용과 같으면서도 다른, 더 깊어지고 심화된 부흥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사람의 소리나 권위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지고, 제자의 수는 ‘심히’ 더 많아지며, 심지어 허다한 제사장들조차도 주님을 믿게 되었다고 성경은 오늘의 결론의 부분에 적고 있습니다. 이처럼 초대교회는 다시 한 번 찾아 온 교회의 위기를 성령 안에서 멋지게 극복해 내고 하나님나라의 모습으로 교회를 한 발 더 진일보하게 하는 새로운 기회의 교두보로 만들었음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기의 극복 과정을 살펴보며 우리는 참으로 여러 가지 은혜와 도전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무엇보다 주목하기 원하는 것은, 우리 안에 발견된 문제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무엇이 교회의 정말 큰 문제인가, 본문은 사람의 마음이 상처입고 시험당하는 그것이 가장 큰 문제임을 말씀합니다. 교회가 건물이 없고, 재정이 모자라고, 어떤 준비한 일들이 잘 처리되지 않고 하는 그런 문제가 진정한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한 사람의 마음이 상하고 다치는 것, 그것이 비록 힘없는 소자라 할지라도 그가 주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소외되는 것이 그 교회의 가장 큰 시험이요 위기임을 오늘 사도들은 말해줍니다. 여러분, 교회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교회이며, 성도가 교회입니다. 공동체 안에 누군가 원망과 불평의 마음이 생겼다면 교회라는 몸 어딘가에 병이 생기고 상처가 난 것입니다. 몸 어디 한 군데가 아픈데,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어디 있습니까? 건강이 최고라 하지 않습니까? 건강이 망가졌는데, 무슨 일을 하고 사역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건강이 상하면, 건강보다 큰 일이 없는 것이지요. 내 지체가 아파하는 그 모습을 외면하고 무시하고 덮으려 하는 것은 결코 정상적인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성도가 아프면 온 사도들과 성도들이 전부 나서야 합니다. 그것도 철저하게 상처 받은 이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편에서, 논의해야지요. 일찍이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마18:6)고 경고하지 않으셨습니까? 교회는 이 관점이 필요합니다. 여기 일곱 명의 집사가 전부 헬라파임을 보면서 여러분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수적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홀수이니 4:3 정도만 되면 그래도 헬라파를 배려했다고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굳이 7:0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그게 사랑이고, 그게 공동체인 거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법이 어쩌고 원칙이 어쩌고 하면 안 됩니다. 법대로 하면, 원칙대로 하면, 결과는 뻔합니다. 정반대의 7:0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도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압도적인 7:0이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헬라파를 제외한 전 히브리 성도의 표가 모두 헬라파에게 던져졌을 겁니다. 상식대로 하자, 법대로 하자, 이것과 믿음으로 하자, 근본적으로 다른 겁니다. (세월호 특별법의 문제, 검사 추천 문제, 교회의 입장) 이것이 교회이며, 이것이 신앙입니다. 누군가를 세우려면 누군가는 힘을 빼야 합니다. 사람을 세우기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누군가를 세워주기 위해 내가 가진 힘을 나 자신이 내려가는 데 써야 합니다. 내가 가진 힘을 나누기 위해 힘을 사용하는 것, 기득권을 포기하기 위해 기득권을 사용하는 것, 그게 그리스도의 도입니다. 타락한 인간, 타락한 공동체는 절대로 낮아지는 데 힘을 쓰지 않습니다. 오직 십자가 은혜를 깨달은 성도만이,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믿는 성도만이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기 위해 자신의 권리를 사용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정말 은혜 아래 있는 성도인지, 여러분은 여러분이 가진 그 힘을 어디에 사용하고 있는지, 정말 내려가기 위해 힘을 기울이는지 주의하십시오. 문제를 발견하고 난 이후, 그것을 처리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오늘 사도들과 성도들의 모습은 너무나 좋은 교훈이 됩니다. 그들은 무엇보다 위기와 문제 앞에서,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보았습니다. 사도들은 이것이 자신들이 기도하지 못한 죄라고 고백했고, 성도들도 헬라파 유대인들을 모두 일꾼으로 세움으로써 그 회개에 동참했습니다. 인간적인 기준에서 잘잘못을 굳이 따져 묻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런 일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나 자신이어야 합니다. 모든 교회의 문제가 전부 나와 연관된 문제이며, 나로부터 기인한 문제임을 인정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어떻게 발이 아픈 것이 발만의 문제이겠습니까? 눈의 잘못, 손의 잘못, 다른 부위의 잘못이 모두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겠지요. 허물을 내게서 찾고 나부터 먼저 회개하는 것이 교회의 위기를 대하는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이 자신을 돌아볼 때 무엇에 주의했습니까? 바로 본질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선택과 집중에 있어 명확한 분별을 내리는 겁니다. 4절에 보니 사도들은 ‘오로지’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겠다고 말합니다. 그게 교회의 본질, 사도의 본질, 성도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건 사도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일이 많아지면 기도와 말씀은 뒷전으로 밀리게 됩니다. 그러나 본질을 잃는 그게 위기입니다. 다른 건 다 못하고 안 해도, 기도와 말씀은 포기하면 성도로서 살아갈 수 없으니까요. 성공하는 사람들이 늘 하는 이야기가 선택과 집중 아닙니까? 다 할 수 없으니 우선순위를 정해라,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 그 순서대로 해야 한다, 위기에는 더욱 이 순서를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신앙의 우선순위를 생각하는 지체들을 그리 자주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제 자신을 돌아보면, 늘 불평과 원망, 짜증으로 위기를 채우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감정과 기분이 앞서고 당장의 필요가 눈에 들어와서 본질은 언제나 뒷전이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생각하는 백성이어야 합니다. 잠시 멈춰서 말씀을 생각하고 본질을 생각해야 합니다. 편한 대로가 아니라 우선순위에 따라 본질을 지켜내야 성도답게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부디 삶의 우선순위를 점검하고 본질에 집중하십시오. 하고 싶은 일들 다 하고, 놀 것 다 놀고, 그러면서 기도하지 않고 말씀도 안 보면, 결코 성도로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벌써 묵상의 계절, 가을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무엇이 채우고 있습니까? 어디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까?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것이 아닌 영원에 대한, 생명에 대한 여러분의 열정이 회복되길 원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 새벽기도에 새벽 잠 없으신 할머니 할아버지만 와서 앉아 있는 꼴, 죽어도 못 봅니다. 세상의 지식으로만 가득하고, 말씀 묵상도 안 하는 청년들 꼴 역시 저는 못 봅니다. 기본과 본질에 있어서만큼은 양보와 타협이 없는 그런 성도, 그러 목사, 그런 교회가 되십시다. 기도하자, 말씀 보자, 이런 권면이 필요 없는 그런 교회가 되십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을 나눕니다. 이 위기의 결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위기가 바르게 극복되고 난 후 공동체는 빠르게 회복의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단지 과거의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 온전하고 더 강력한 모습의 공동체로 변해갑니다. 이것이 믿음의 신비입니다. 여러분 이제 사도행전 6장 이후의 이야기 속에 누구의 이름이 등장합니까? 스데반, 빌립, 바울, 바나바, 모두가 다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의 활약으로 인해 교회는 새로운 지평으로 전진해 들어갑니다. 첫 번째 순교자가 등장하는데, 그게 누구입니까? 오늘 집사의 명단 첫 머리에 기록된 스데반입니다. 이제 아울러 예루살렘에 교회가 머물러 있지 않고, 헬라파의 활약상으로 말미암아 사마리아는 물론 온 열방으로 복음이 전진해 나아갑니다. 주님이 사도들에게 부탁하셨던 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라는 그 초대교회의 선교가 이제야 드디어 시작되는데, 그 중심에는 바로 헬라파 유대인들이 있었던 겁니다. 히브리파 성도들은 성숙한 반성과 선택을 통해 그렇게 하나님나라의 일을 이루어가고 있었습니다. 아울러 오늘 이 위기가 공동체를 완전히 새롭게 하는 역전의 기회가 됨에 주목해야 합니다. 세상사도 그러하지만, 하나님의 일에는 언제나 위기가 가장 좋은 chance입니다. 성도에게 위기는 반드시 호기를 향한 하나님의 사인입니다. 위기를 통해서 하나님은 새로운 전진의 디딤돌을 놓으십니다. 우리 인생도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이 위기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은 그 위기의 시간을 통해 반드시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믿음의 지경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불평하지 말고 위기를 귀히 여기십시오. 본문 어디에도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지 않습니까? 위기는 실패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느 공동체나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을 오늘 위대한 초대교회는 말합니다. 우리도 문제가 있었다, 아니 그 문제 덕분에 오늘 우리가 아는 초대교회가 가능했다, 말합니다. 문제는 발견하고 극복하면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 더 큰 호기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됨을 기억합시다. (위기가 없다면 오늘의 초대교회도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디 위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정직하고 당당하게 맞서십시다. 그래서 주님이 예비하신 더 넓고 큰 은혜의 지경을 맛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십시다. 혹 우리 고백교회 안에도 그러한 위기를 경험하고 있지는 않은지, 문제없이 잘 전진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도 다시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또 언젠가 그런 위기에 처했을 때 오늘 말씀과 같은 성숙한 모습으로 해결해 나가십시다. 또한 오늘 말씀을 통해 어떤 공동체로 우리가 빚어져 갈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동시에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에 비추어, 어떤 위기는 없는지, 본질을 놓치고 있는 스스로의 삶을 반추하는 이 계절이 되길 바랍니다. 믿음의 결단으로 위기를 호기로 바꾸어 새로운 도약의 역사를 써내려가는 우리의 복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