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증인이면 족하다" 2013년 12월 29일 주일예배 설교

2013-12-29 · 첨부 설교 원고 · 약 17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첨부 설교 원고

20131229 주일 설교 (성탄절 후 첫 번째 주) 고백교회 사도행전 1장 1~8절, 증인이면 족하다. 오늘 본문, 모두가 잘 아는 말씀인데, 사실 표면적으로만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실 유명한 본문일수록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읽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특별히 까다로운데요, 평소보다 좀 더 예민한 지성과 함께 풍부한 상상력도 요구됩니다. 그럼 가벼운 상상으로 오늘 말씀을 시작하려 합니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오늘 본문,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이 부활하셨고, 우리와 한참을 함께 계시며, 하나님나라에 대해 말씀하시다가 이제 승천하시려 하십니다. 글쎄요, 조금씩 지상으로 올라가시는 것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그런 상황에서, 무어라 주님께 마지막 말을 남기겠습니까? (답변들…, 아마 저였다면, 주님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오늘 제자들의 마지막 한 마디는 6절의 이야기였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이 질문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시는지요? 마지막 이야기라고 제자들이 의도하지는 않았겠으나 결국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한 최후의 한 마디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이 질문이 왜 그렇게 중요했는지, 우선 이 말을 했던 제자들의 마음부터 생각해 봅니다. 왠지 주님과의 이별이 가까워왔음을 느끼는 제자들, 이제 주님이 승천하실 때가 가까이 오자 제자들의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더 이상 주님이 곁에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들은 가장 궁금한 마지막 질문을 묻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는 것,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오늘 저와 여러분은 잘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역사를 다만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니까요. 고대 이스라엘이 사울에 의해 왕정에 들어가고, 이후 다윗과 솔로몬의 때에 최고조에 이르렀다가, 솔로몬의 노년, 그리고 그 아들 르호보암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모습으로 돌아서면서, 국가는 분단의 역사로 갑니다. 그렇게 남북으로 갈라져 내려오던 한 민족, 두 국가. 결국 외세의 침입에 의해 멸망과 회복을 반복합니다. 워낙 지정학적으로 불리한 위치, 가나안. 한국은 그래도 삼면이 바다이기나 하지, 여기는 사면이 뚫린 사막의 요지(要地) 중의 요지입니다. 아프리카의 축적된 힘이 유럽과 아시아로 가는 길목이자 역으로 아시아, 혹은 유럽의 거대한 힘이 더 넓은 곳으로 뻗어나가기 위해 그 힘을 터트릴 때, 가장 먼저 마주치게 되는 곳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와 같은 위치의 특성은, 앗시리아에서 바벨론으로, 바벨론에서 페르시아로, 페르시아에서 마케도니아로, 다시 로마로, 수많은 외침과 정벌에 말 그대로 산산이 부서지고 갈갈이 찢겼던 그들의 수백 년 역사에 고스란히 묻어있습니다. 우리가 겪었던 36년간의 일제 치하, 그리고 조선시대의 왜란, 호란 등을 고려할 때, 그리고 그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길었던 그들의 세월을 생각할 때, 그들이 주님께 이스라엘의 회복을 묻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고 보니, 아마 저였어도 그리 질문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러한 이스라엘의 회복은 단순히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나라 역사의 중요한 증거이기도 하다는 데서 그 영적 정당성도 가집니다. 예레미야(23:5~6, 5.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6.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에스겔(37:21~27), 다니엘(7:27)과 같은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 땅의 종말의 시작과 일치한다고 선포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주님의 승천 직전 이와 같은 질문을 한 것은 영적으로 보아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물론 그들이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나라의 확산과 번짐이라는 보다 큰 하나님의 섭리보다는 매우 지엽적인 그들만의 하나님나라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아직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 그들이 이사야의 예언, “…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는 말씀에 담긴 의미를 온전히 기억하고 제대로 질문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후에 성령이 예루살렘에서 임하시는 이유를 생각해 보아도 비록 제자들이 바라던 식의 회복은 아니었지만, 분명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었고, 그것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가 포기되지도, 변경되지도 않았음을 분명하게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시 자세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쨌거나, 이러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 7~8절이 그 대답인데요, 질문에 비해 답이 깁니다. 이유는 사실 질문은 하나인데 내포된 내용은 세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질문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실 것입니까? 두 번째는 그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회복은 지금 예수님께서 친히 하시는가? 이것입니다. 주님은 거기에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먼저 7절에서 하십니다. “시기는 나도 모른다. 성부만이 아신다.”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답도 하십니다. “이제 나는 간다, 그리고 성령이 오실 것이고, 그가 모든 일을 주도하실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남은 질문은 하나입니다. 첫 질문이자 핵심적인 질문이기도 한데요, “이스라엘은 회복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정작 없습니다. 그리고 난 데 없이 성령에 대한 말씀, 증인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단 이스라엘의 회복과 성령의 임재에 대한 관계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사실 이스라엘에게 본래 부여되었다가 그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보류된 하나님나라의 계획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을 택한 이유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제사장 나라가 되어서, 수많은 다른 이방 민족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복 받는 백성으로 되게 하기 위해 구별하여 세운 특별한 민족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 아래 말씀으로 다스려지고, 그로 인해 그들이 누리는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의 삶이 열방 가운데 선포되고 전파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셨던 것이지요. 오늘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증인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시는데, 본래 구약의 이스라엘이 바로 이러한 증인의 역할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이사야 43:10을 찾아 읽어보겠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 이처럼 하나님 없는 이방 민족과 그들이 믿는 신 앞에서 하나님을 선포하고 하나님나라를 증거하는 사명이 본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그러한 하나님의 계획에 부합하지 못하고 결국 우리가 이사야서 말씀(새벽기도회)을 묵상하면서 보게 되듯,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의 대상으로 전락하여 스스로 회복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면서 이제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보다 직접적이고 보다 완전한 모습을 띠게 됩니다. 바로 혈연이 아닌 믿음에 의한 새 이스라엘을 통한 구원의 계획이 그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이스라엘의 회복은 다른 국면을 맞게 됩니다. 이제 이스라엘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관심은, 그 정치적인 국가가 회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오늘 6절에 기록된 제자들의 질문은 약간의 번역 상의 수정이 필요합니다. 본래 헬라어의 이 문장을 직역하면, ‘이스라엘에게 나라가 회복되는 것이 지금입니까?’로 옮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조금 더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질문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질문이 되는데, 이러한 정치적인 관심으로서의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제 성령의 임재를 통해, 이스라엘을 통한 복음의 전파와 하나님나라의 증거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방법과 형태가 바뀌었다고 해서 구원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중요성이 줄어들거나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을 구원의 출발점으로 삼고 계시고, 유대 사람들을 통해 복음의 증인의 역할을 감당케 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임재 역시 다른 곳이 아닌 유대 예루살렘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에 있어서 이스라엘은 포기된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택하여 쓰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제자들이 한 질문에 대해 주님은 다 답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이 제자들이 생각하는 그러한 정치적인 회복이 아닌 영적 권능의 힘을 통해 회복되는 것임을 일깨우셨고, 그와 같은 일이 예수님이 아닌 성령을 통해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더불어 어쩌면 그들이 가장 원하고 기다렸을 이스라엘의 정치적 국가의 회복은 언제일지 모르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의 권한 아래 있는 것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잘 아는 이 본문에 담긴 조금은 복잡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본문의 내용을 통해서 몇 가지 중요한 영적인 교훈을 얻습니다.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한 이유, 그리고 저와 여러분을 주님의 자녀 삼은 이유 모두 동일한 하나의 목표, 즉 하나님의 증인이 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 ‘증인이 되어라’가 아니라, ‘증인이 되리라’입니다. 명령이 아니라 평서문 미래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화자의 의지가 담긴 미래입니다. 영어로는 ‘shall be'이지요(KJV). 공동번역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로 옮깁니다. 이것은 명령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강력한 신적 선언이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증인 아닌 다른 것으로 만드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증인으로 족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 증인이라는 말, 우리가 참 쉽게 사용하지만 또 반대로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증인의 헬라어는 ‘마르튀스’입니다. 영어에서 순교자를 뜻하는 ‘martyr’가 여기에서 나오게 됩니다. 참 무겁고 엄중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 역할과 사명은 너무나 단순합니다. 증인은 말 그대로 목격자입니다. 어떠한 사건을 눈으로 보고 경험한 사람들로서, ‘어떤 사실을 증명하는 사람’입니다. 법정에서 자신이 경험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증언하는 사람, 그가 증인입니다. 본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증언하는 증인이었고 이제 성령을 받은 저와 여러분, 새 이스라엘 역시 예수를 증언하는 증인이 되라는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참으로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하시는 일은 명확합니다. 우리에게 성령의 권능을 주셔서 우리로 그리스도의 증언자로 이 땅에서 살게 하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단 하나의 사명입니다. 전도, 선교, 하나님나라, 여러 이야기를 하지만, 결국 그 모든 말 속에 담긴 하나의 공통분모, 그것은 증인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증인은 그저 내가 목격한 바를, 본 바를, 들은 바를, 느끼고 경험한 바를 그대로 전하면 됩니다. 거기에 어떤 추가적인 것이 필요 없습니다. 법정에 나온 증인이 변호를 하겠다고 해서도, 무슨 주장이나 자기 자랑을 하겠다고 해서도 안 되지요. 증언을 미사여구로 꾸밀 필요도,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위증만 하지 않으면 됩니다. 증언에는 진실성이 생명이니까요. 증인에게 중요한 것은 정말 내가 보고 듣고 느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정말 내가 경험하고 만진 바 된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의 나라, 그것이 있느냐, 있다면 얼마나 강렬하게 진하게 각인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우리 믿는 신앙인의 최대 과제로 남습니다. 진정성이 담긴 온전한 증거, 고백, 거기 권능을 주신다는 것이 주님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증언은 단순한 소리를 넘어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는 말씀이 됩니다. 여여기 권능이라는 말, ‘뒤나미스’는 다 아시는 대로 ‘다이너마이트’의 어원이 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는 하나님나라 전파를 통한 성령의 강력한 임재와 언제나 함께 등장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권능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이미 보여주신바 된 성령의 권능과 동일합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약한 것이 회복되고, 귀신이 내어 쫓기며, 말씀의 강력한 능력이 나타납니다. 여기 세상적인 파워나 권세가 들어갈 여지는 전혀 없지만 이는 하나님나라에 가장 적합한 능력이며, 세상의 방법과 구별되는 성령의 방법이자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는 절대적인 힘입니다. 이 권능은 오직 증인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질문을 해 봅니다. 우리는 왜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임함을 보지 못하는지, 어째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살아가고 있지만, 진정한 하나님나라의 현존을 그토록 보기 힘든 것인지, 왜 하나님나라에 대해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여전히 그 나라는 멀게만 느껴지는 것인지, 어째서 그와 같은 성령의 권능이 우리의 삶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는지? 그 이유는 하나님나라를 말하는 이들의 마음과 삶 속에 경험된 하나님나라가 미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직접 만지고 보고 듣고 느낀 그 하나님나라가 너무나 어수룩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제대로 그 나라를 맛보지 못한 채 그 나라에 ‘관한’ 이야기만 늘어놓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 하나님나라를 여러분은 보고 듣고 느꼈습니까? 그리고 그 나라를 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가서 그대로 전하십시오. 여러분 안에 있는 바로 그 나라를 전하십시오. 하지만 혹 그 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할 뿐, 정작 그 나라는 여러분의 삶 속에, 여러분의 가슴 안에 그저 그림자처럼 희미할 뿐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나라를 말하기 전에 먼저 성령으로 채워지십시오. 하나님나라를 먼저 맛보고 누리고 이야기하십시오. 내가 누리는 진정한 기쁨의 그 나라가 있어야 제대로 전하든 말든 할 것 아닙니까? 전도는 그렇게 하는 겁니다. 내 안에 가득 채워진 성령, 그 성령의 임재 속에 경험되는 의와 평강과 희락의 하나님나라. 그것이 우리의 삶 가운데 스미고 저미어 마치 웃음이 전염되고 행복이 전염되듯, 그렇게 하나님나라도 내게서 누군가로 전염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표정과 웃음과 눈빛을 통해 어느 순간에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 안의 그 나라는 삶으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주님의 그 나라를 제대로 맛보고 느끼십시오. 더 깊이 경험하고 맛보십시오. 성령으로 더 가득 채워지십시오. 그래야 우리는 넉넉히 증인으로 살 수 있게 됩니다. 더불어서 오늘 본문 8절은 ‘오직’이라는 말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증인’의 정체성에 더 주목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7절의 내용과 연결하여 생각해보면, 이 ‘오직’이라는 부사는 단순히 ‘성령이 임하시면’이라는 말을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증인이 되리라’를 한정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즉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과 같은 것이 너희의 사명이 아니라, 오직 증인이 되는 것이 너희에게 주어진 사명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오직’이라는 말에 여러분 주목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며 이 땅에서 해야 하는 최우선의 사명, 그리고 단 하나의 사명은 바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성도가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증인 그 이상을 바라며 꿈꾸는 것도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담론이 많아지면서 한국 사회, 한국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나라에 있어 증인 이상의 역할을 하려는 이들을 참 많이 보게 됩니다. 마치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선행이나 사역이 하나님나라를 직접 어떻게 할 수 있을 듯이 그렇게 여기는 모습…. 하지만 하나님나라는 인간이 세우는 나라도 아니며, 인간이 바꿀 수 있는 나라도 아니며, 내가 오게 할 수 있는 나라도 아닙니다. 다만 그 나라의 통치를 온전히 받는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그 나라를 전하고 선포하고 살아내는 것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건축자도 아니며, 개혁가도 아니며, 하나님나라를 오게 하는 무슨 견인차 운전수도 아닙니다. 하나님나라에 가장 적합한 동사가 있다면 그것은 증거, 그리고 전파입니다. 성경에 하나님나라라는 단어가 나오는 본문을 다 찾아 읽어보십시오. 그 중 어디에도 우리 인간에 의해 주도되거나 이루어지거나 하는 식의 하나님나라는 없습니다. 오직 그 나라를 전하여 선포할 뿐이며 그 나라를 증언할 따름인 것이지요. 교회가 해야 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 어떤 목사님 책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만, (아마도 돌아가신 옥한음 목사님의 글이었던 것 같습니다) “성령이 교회에 오신 목적은 교회가 하나님나라가 되게 하는 것보다 하나님나라의 증인이 되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옳은 지적이라고 봅니다. 교회가 하나님나라가 되어야 함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초점은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만들거나 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하나님나라는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바 그 나라를 온전히 전함으로써 살아낼 수 있을 따름입니다. 증거 외에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나라는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이 부분을 놓치고 하나님나라를 이야기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세상의 유토피아와 같은 정치적 이상향으로 바라보게 되거나, 제자들이 오해했던 가시적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다시 돌아가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나라는 운동의 대상이 아닙니다. 운동, 사전적인 의미는,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힘쓰는 일. 또는 그런 활동.”입니다. 하나님나라를 ‘이룬다’는 것도 전혀 성경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그 어떤 성인도, 사도도, 하나님의 예언자도, 하나님나라 운동을 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운동가가 아닙니다. 하나님나라를 단 1mm도 오게 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닙니다. 다만 그 나라를 증언할 뿐입니다. 살아내며 버텨낼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나라를 구현한다고 하고, 그 나라를 오게 한다고 하고, 그 나라를 이루려는 모든 일체의 시도는 성령이 오시기도 전, 부활하신 주님, 이제 승천하실 주님을 앞에 두고 그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 이야기로 칭얼거리던 영적 유아기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성령은 우리로 증언케 하시는 이십니다. 권능을 공급하셔서 우리로 어떤 상황에도 악에게 굴복하지 않으며,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다만 증언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종종 증인의 사명에 대해 너무 가벼이 여깁니다. 어쩌면 너무 고루하다 여깁니다. 너무 예스럽고 구식이라 여깁니다. 구식일 수는 있겠으나, 그것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물론 증언의 방법이 다양하고, 증인의 사명이 오직 복음을 전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여러 다양한 노력들이 하나님나라에 대한 증언 이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믿음이 부족하고 영성이 부족하여 그저 증인의 사명에만 전념한 것이 아닙니다. 그 증언의 방법이 가장 온전하고 가장 빠른 길임을 십자가를 통해, 성령을 통해, 주신 권능의 힘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주님도 이 땅에서 하나님의 증인이셨다고 성경은 분명히 강조합니다. 계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예수님도 증인에 불과하셨다 기록하는데, 더 말하여 무엇 하겠습니까? 여러분, 가장 온전한 증인이셨던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나라는 세상의 이른바 이상적 나라들과 같이, 악과 부조리에 대해 싸워 승리하며 세워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수많은 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예수와 그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악을 이기고 굴복시킴으로써 세상을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악을 다 덮고도 남는 더 큰 선으로 그 악을 아예 질식시켜버리셨습니다. 악을 악이 아닌 선으로 이기는 방식의 이 싸움, 실상 싸움이라고 말하기조차 어렵습니다. 한 가지 예만 들어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살던 시대에 노예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주님은 그 문제를 어떻게 접근하셨습니까? 싸우셨습니까? 반대 세력을 구축하셨습니까? 노예폐지 운동을 하셨습니까? 정의를 구현하겠다고 시국선언을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바로 그 노예를 주님이 종으로 섬기셨습니다. 노예를 위해 맞으시고 침 뱉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한 편으로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며 동시에 누군가의 섬김을 받으려는 것 자체를 불의로 폭로하셨고, 다른 한 편으로는 세상의 악으로 하여금 더 그 실체가 드러나도록,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스스로를 끌고 가도록 주님은 하나님의 공의의 증인이 되셨습니다. 진리의 증인이 되셨습니다. 맞부딪혀 싸우지 않고 사탄이 스스로의 정체를 다 드러내고 예수를 죽일 때까지,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예수는 그렇게 증인으로만 계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제도로서의 노예제도가 여전히 이 땅 가운데 있었어도, 그 내적 구조와 모든 내면의 질서가 다 무너지는 놀라운 하나님나라가 마침내 드러났습니다. 성령이 임하자 모두가 종이 되어 서로를 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노예‘제도’가 있든 없든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있으나 없으나 모두가 서로의 종이요 노예라는데, 주인이었던 자가 노예를 섬기겠다는데 더 이상의 어떤 이념도, 체제도 제도도 무의미해졌습니다. 그렇게 세상이 바뀌었고, 그렇게 제도가 하나님나라를 뒤따라오게 했습니다. 주님의 사람들이 성령의 권능 아래 증언자가 되어 세상을, 제도를 이끌고 갑니다. 복음이 제도를 구원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나라였습니다. 부자가 있습니다. 그들의 돈을 빼앗아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것이 하나님나라였습니까? 아닙니다. 부자는 부자로 그냥 있어도 됩니다. 다만 그들은 가난한 자를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어린 양의 셈법입니다. 위와 아래가 same, same이 되는 식이 아니라, 위가 아래를 섬김으로 임하는 것이 하나님나라입니다. 그러니 그 나라는 이김이나 승리나 이런 것 하고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공산주의나 다른 진보적 이념들, 그리고 유토피아를 말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예수님의 이야기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여기입니다. 이념은 언제나 투쟁을 낳고 투쟁은 언제나 적을 만들지만, 십자가는 그 적 개념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가장 보수적일 수 있는 이 하나님나라 법은 그래서 가장 급진적인 진보와 만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다시 복음의 본질로 돌아갑시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대단한 일을 계획하고 꿈꾸고 이야기하고 애쓰려 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봅시다. 성령이 주시는 권능으로 하나님나라를 살아내어 봅시다. 고백교회가 할 일 역시 하나님나라를 오게 하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좀 더 힘 있는 교회, 큰 교회가 되고, 좀 더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의 관심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말씀에 따라 예루살렘에서도, 유대와 사마리아에서도, 땅 끝에서도 증인으로 살 뿐이며, 성령을 통해 주시는 권능을 덧입기를 사모할 뿐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권능의 크기는 교회의 크고 작음과 상관없음을 믿습니다. 오직 성령이 우리 고백교회를 사로잡으면, 그분이 우리를 통해 그분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다른 일로 분주해지지 맙시다. 오직 전하고 증거하는 일에만 전념합시다. 증인답게 고백하며 우리의 세월을 채워 가십시다. 삶의 모든 자리가 예수 복음의 증언대가 되게 합시다. 하나님나라 법정의 증인석이 되게 하십시다. 제대로 경험하고 제대로 전하는 오직 그 한 가지 사명에 집중하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고백교회 되기를, 온 마음과 의지를 다해 기도하며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 증인으로 족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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