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사자가 소처럼" 2014년 8월 20일 새벽 설교
2014-08-20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6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40820 수요일 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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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1장 6~9절, 이사야 강해112 사자가 소처럼
* 설교 음성 : https://www.4shared.com/mp3/OTgzUnlrce/20140820_.html
이사야서 백열두 번째 말씀으로, ‘사자가 소처럼’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통치자, 그가 공의와 성실로 다스리는 나라, 본문 1절부터 5절까지는 그 나라의 통치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오늘 본문은 그 나라의 실질적인 모습과 상황에 대한 묘사로 그 초점이 옮겨져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 나라의 모습이 어떠한지, 오늘 본문은, 한 편으로는 상징적으로,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실질적이고 가시적으로 그려내고 있는데요, 아마 많은 분들이 한 번 쯤은 들어보셨을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사실 우리가 이 구절을 친숙하게 여기는 것은, 성경 말씀 속에서 듣고 배워서라기보다는, 어릴 적 주일학교에서 부르던 찬송,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는 곡의 가사 때문일 겁니다. 저도 유치부나 주일학교에서 자주 부르던 기억이 나는데요, 많이 익숙한 곡이지만, 본래 이 찬송이 히브리 민요로 우리로 말하면 아리랑 같은 그런 노래라는 사실을 아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서 한 번 그 찬양을 불러보실까요? 악보가 조금 흐릿하게 보이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렵지 않은 곡이니까 충분히 부르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럼 함께 찬양 부르시고 계속 말씀을 이어가겠습니다. 1절과 2절 사이에 간주가 있습니다.
히브리 민요,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
어떠신지요. 과거에 부르던 기억이 나시는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어릴 적 당시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불렀던 것 같습니다. 그저 멜로디가 왠지 친숙하고 가사도 다른 찬송에 비해 신기한 표현들이 많아서 씩씩하게 불렀던 것 같은데요, 가사의 내용에 대해 생각해보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또 선생님들이나 전도사님께서도 그런 부분에 대해 잘 설명해 주시지도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저 에덴동산의 이야기인줄로만 알고 있었는데요, 물론 다 말씀해 주셨는데, 제가 기억을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사실 오늘날에는 이러한 가사의 찬송을 찾아보기가 더 어려워진 것 같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확실히 하나님나라를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그려내는 가사가 너무 적어졌습니다. 너무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시대여서 그런지, 이런 환상 같은 나라에 대해서 말하는 것 일종의 사치처럼 느껴지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울러 이 말씀을 가장 먼저 듣고 전했을 이사야의 마음도 그러했을지, 과연 그는 어떤 마음으로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을 대언했을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살았던 이사야였기에, 처음 이 말씀을 듣고, 또 전해야 했을 때, 지금 저희의 생각과는 비교할 수 없는 당혹감을 느꼈을 것도 같습니다. 더구나 이것은 단지 인간의 역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피조물 전체에까지 확장된 모습의 평화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표범과 어린 염소가,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암소와 곰이 함께 눕고 일어나며, 심지어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고 장난치는 이러한 세상은 분명 우리 인간이 이룰 수 있는 평화 너머의 모습임에 분명해 보입니다.
물론 이러한 이상적인 세계는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그때에 완성될 나라입니다. 단지 인간 세상만이 아니라 자연 전체를 아우르는 피조 세계 전부가 이렇게 하나님의 샬롬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은 주님의 재림 때에야 완전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그저 인류의 종말을 그려내는 모습으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저 동물의 왕국에 실현될 하나님 나라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약육강식의 정글과도 같이 타락한 인간 사회와 역사를 상징적으로 그려내는 것 또한 이사야의 주된 예언 방식임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메시아의 나라를 소망 가운데 기다리고 바라보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내고, 또 주님의 대리자로서 다스리는 우리의 삶의 자리들 가운데 적용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즉, 우리가 사는 세상을 어떻게 하나님나라로 변혁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중요한 답을 본문 속에서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하나님나라의 새 땅의 모습은 한 마디로 힘 있는 자와 힘없는 자의 평화로운 공존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본문 6절부터 8절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면, 바로 ‘함께’라는 부사인데요, ‘함께’라는 말을 사이에 둔 양쪽의 존재는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대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포식자와 그 먹잇감, 힘없는 자와 공격자, 가진 자와 없는 자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함께 눕고 살기까지 하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세계가 되려면 과연 무엇이 필요할까 여러 가지로 생각해 봅니다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른바 포식자로 분류할 수 있는 힘의 세력이 그 폭력성을 포기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겠지요. 이미 자신들의 본능으로 자리 잡은 공격성과 폭력성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7절 말미에 묘사된 사자의 모습처럼, 육식동물인 사자가 풀을 뜯는 초식동물의 모습이 되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가진 자의 자발적인 자기 포기가 없이는 하나님나라는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국가이든, 교회이든, 가정이든 간에, 힘을 가진 누군가가 스스로 그 힘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평화는 그곳에 임하지 않습니다. 내가 즐겨 먹는 주식이 누군가의 생명이요 삶이라면, 내가 취하는 부와 평안이 누군가의 땀과 수고, 눈물의 대가여야 한다면, 거기 아무리 많은 풍요와 넉넉함이 있다 하여도 하나님의 샬롬에는 다다를 수 없을 것입니다. 사자가 단지 한두 번 사냥을 포기하고 폭력 본능을 참는 것만으로 사바나에 평화가 오지는 않습니다. 피와 살이 아닌 풀을 먹는 사자, 소처럼 거듭난 사자가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평화가 임하는 것이지요.
여러분, 주님의 영이 임하여 다스려지는 나라를 소망하고 꿈꾸고 계신다면, 부디 오늘 말씀을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루어갈 주님의 공동체, 그리고 우리가 빚어갈 우리의 가정과 이웃 안에 주님의 이 샬롬이 넘치기를 원하신다면, 누가 먼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지, 오늘 이 본문의 모습을 여러분의 마음속에 잘 새겨두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지금 당장 우리가 사는 세계 전부가 이런 주님의 나라가 될 수 없을 것 같아도, 가장 가까운 우리 삶의 지경에서부터 이 나라를 꿈꾸고 세워가는 마음을 우리가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마음, 우리의 가정, 우리의 교회 안에서 먼저 이 말씀을 함께 이루어가 보길 원합니다. 저는 우리 공동체가 충분히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이 그 일을 온전히 이루실 것이라 확신합니다.
본문에 묘사된 주님의 나라를 이루는 데 있어서, 가진 자, 힘 있는 자, 포식자만이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일은 소가 사자와 함께 살기 위해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반대편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이 말씀들을 나누면서 저와 여러분 안에 하나님나라의 귀한 소망이 함께 채워지고 견고해져 가길 소원합니다. 잠깐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