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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33. 서원 규례에 담긴 신앙의 원리
2022-07-27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6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220727 수요 성경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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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30:1~16, 서원 규례에 담긴 신앙의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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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희가 지난주에는, 가나안 진격을 앞두고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말씀 중에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정규 제사에 관한 내용을 살펴봤습니다. 모든 제사의 가장 기본이 되는 상번제와 안식일 제사를 비롯해서, 한 달에 한 번 드리는 월삭이 있었고 또 유월절과 무교절, 초실절, 나팔절, (대)속죄일, 초막절까지, 각각의 명절과 절기에 드려야 하는 모든 주요 제사에 대해 함께 이야기했습니다.
이어지는 오늘 본문은, 겉으로는 서원에 대한 규례, 특히 여자의 서원에 관한 규례를 다루고 있습니다만, 큰 틀에서 보면,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규례의 범주에 들어가는 그런 내용입니다. 지난주 본문이 반드시 드려져야 하는 의무적인 제사에 관한 것이라면, 오늘은 스스로 원해서 드리는 그런 제사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지요. 지난 29장 39절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너희가 이 절기를 당하거든 여호와께 이같이 드릴지니, 이는 너희의 서원제나 낙헌제로 드리는 번제, 소제, 전제, 화목제 ‘외에’ 드릴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많은 절기 제사를 정리하면서, 이러한 제사들은 너희가 자원해서 드리는 서원제나 낙헌제와는 다르다, 이렇게 말씀하신 건데요, 그러고 나서 이제 오늘 본문에서, 그 대표적인 자원제사에 해당하는 서원에 관해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서원제와 낙헌제, 이렇게 표현은 되어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서원제는 낙헌제의 한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낙헌제’는, 말 그대로, 즐거운 마음(樂)으로 헌신하여, 자발적으로 드리는(獻) 제사를 총칭하는 말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자원하여 드리는 것이니, 내용은 거의 다 감사의 제사일 겁니다. 서원제도 마찬가지지요. 하나님께 내가 서원을 하여 기도했는데, 그 기도가 응답이 됐을 때, 자신의 서원을 갚으면서, 하나님께 감사로 드리는 제사가 서원제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30장은 그렇게 서원에 관한 규례로 시작합니다. 2절에 보면,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뜨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를 자세히 보면, 서원과 서약, 이 두 가지가 구별돼서 나오지요?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와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이라고, 구분되어 있습니다. 둘이 약간 다르다는 건데요, … 서원은 아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만일 이렇게 해주시면,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의 형식으로 된 기도입니다. 간절한 소망이 있을 때, 또는 어떤 위기의 순간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기를 바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서원을 했습니다. 주로 아이를 낳게 해달라는 서원기도가 많았고요, 또 전쟁에 나간 남편이나 아들을 위한 서원기도도 많았습니다. 이제 앞으로 장기간의 가나안 전쟁이 본격적으로 이어지겠습니다만, 가족이 무탈하게 돌아오기를 기도한 것이지요. 그래서 여자들의 서원이 많았을 것이고, 오늘 본문을 그런 관점에서 볼 수도 있겠습니다.
반면에 서약은, 주로 뭔가를 삼가기로, 하지 않기로 하는 약속을 가리킵니다. 본문 13절에도 보시면, ‘모든 서원과, 마음을 자제하기로 한 모든 서약,’ 이렇게 되어 있는데요, ‘서약’이라는 말 앞에, 마음을 자제하기로 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마음을 자제하기로 한 서약, 이걸 문자적으로 번역해보면, ‘마음을 괴롭게 하려는 서약’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표현이 주로 금식과 연관될 때가 많지요. 마음을 괴롭게 한다는 것을 유대인들은 금식으로 실천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의 서약은, 음식을 먹는다거나 술을 마시거나 하는, 일상의 가장 기본적인 즐거움들을 잠시 중단하겠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약속하는 어떤 기도나 고백, 이걸 가리켜 당시에는 ‘서약’이라고 한 겁니다. 서원이 뭔가 긍정적인 것을 내가 하나님께 해드리겠다는 약속이라면, 서약은 뭔가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에 더 가깝다고 이해하셔도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서원과 서약을 깨뜨리지 말고,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하라,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성경에 자주 나오는 말씀인데요, 신명기에도 보면, 서원을 했다면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반드시 하나님이 그것을 너에게 요구하시리니, 더기 갚으면 그것이 죄가 될 것이다(신 23:21~23), 말씀하고, 또 전도서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오는데요,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낫다, 나중에 실수였다고 말하지 말라. 왜 너는 네 말로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하느냐, 어찌하여 하나님이 네 손으로 이룩한 일들을 부수시게 하려고 하느냐, 엄히 경고하십니다. 함부로 서원하지 말라는 것이고, 서원을 했다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반드시 그 서원을 지키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오늘, 여자의 서원에 대해 자세히 말씀합니다. 본문의 긴 내용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여자의 서원은 그녀의 아버지나 남편의 동의가 반드시 수반될 때에만 그 효력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여성들이, 아버지와 남편에게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예속되어 있었던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지요. 여자 혼자 서원한다고 그것을 그대로 다 갚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 서원한 걸 지키려면, 거기에는 어떤 경제적인 책임이 뒤따라오고, 또 가족 전체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당시 여자 혼자서는 이걸 감당할 수 없으니,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의 동의와 허락이 필요하다, 이것이 이 규례의 내용입니다. 지금으로 보면 당연히 이해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고대 이스라엘에서 가진 여성의 위상이 그랬습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받지 못했지요. 오늘로 따지면 마치 미성년자의 서원처럼, 여자들의 서원은 아버지나 남편의 동의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서원은 그렇게 드려져야 맞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성인남녀라면 모를까, 어린아이가 서원을 한다면 부모의 허락이 필요할 것이고, 만약 결혼한 남녀가 서원을 한다면, 서로의 동의, 배우자의 동의가 필요할 겁니다. 그 서원을 지키는 과정에서, 상대방에게, 가족에게 영향이 없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당시 여성의 서원에 있어서 본문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나눠서 말씀하고 있는데요, 우선 여자가 어려서 아버지의 책임 아래 있을 땐, 이땐 남자도 마찬가지겠지요. 어린 나이에 서원할 땐, 아버지의 허락이 있어야만 그 서원이 유효하게 됩니다. 이때 특히 중요한 것이 아버지가 그 서원을 듣고 언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느냐의 문제인데요, 아버지가 서원을 들은 바로 그 날, 이건 안 되겠다, 허락할 수 없다는 의사표현을 해야만, 그 서원이 무효화됩니다. 듣고 처음엔 가만있다가 나중에 안 된다고 해봐야 소용이 없게 됩니다.
남편이 있을 때도 원칙은 동일합니다. 남편이 아내의 서원을 들은 그 날 아무 말이 없었다면 서원은 유효합니다. 당연히 아내는 남편에게 서원을 공개해야만 되겠지요. 당시 여자의 서원은 그냥 혼자 생각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반드시 남편에게 말을 해야 하고, 동의를 구해야 합니다. … 말씀드린 것처럼, 이것은 오늘날 서원할 때도 중요한 원리입니다. 예외가 아주 없진 않겠습니다만,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반드시 자신의 서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상대방의 동의를 구해야 합니다. 두 사람은 한 몸이고, 또한 삶의 모든 부분을 함께 책임져야 하는, 운명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서원은 반드시 상대방에게도 깊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거지요.
사실 단순히 서원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신앙의 거의 모든 부분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이런 걸 하고 싶다, 이렇게 헌신하고 싶고, 이렇게 섬기고 싶다, 그런 마음들이 생길 때, 그냥 혼자 결정하면 안 됩니다. 반드시 배우자와의 대화가 전제되어야 하지요.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어떤 감동으로 하는 일인지, 충분히 대화하고, 신중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특히 이런 것들은, 반드시 하나님께 해야만 하는 어떤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어떤 정해진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론 서로의 신앙과 헌신을 존중하고 공감해주되, 다른 한 편으로는 서로가 서로에게 깊이 구속되어 있는 한 몸이라는 사실을 늘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본문 6절을 보시면, “또 혹시 남편을 맞을 때에 서원이나 결심한 서약을 경솔하게 그의 입술로 말하였으면”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남편을 맞을 때에 서원이나 서약을 했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조금 애매한데요, 문자대로 직역해보면, ‘여자가 남자에게로, 남편에게로 향할 때’입니다. 여자가 남편에게 향할 때, 그게 언제일까요? 크게 보면 결혼을 의미할 텐데요, 그래서 어떤 성경은, 이것이 결혼 한참 전에 여자가 서원했던 내용, 그땐 아버지가 허락했겠지요? 그런 서원을 결혼할 남자가 들었을 때, 그런데 남편 될 사람이 그 서원에 동의하지 않았을 때, 그땐 비록 결혼 전에 했던 서원이라 할지라도 무효가 된다는 것으로 번역한 경우도 있고, … 또 ‘여자가 남자에게 향할 때’를 약혼 상태로 간주해서, 그때도 이미 결혼한 것과 동일하게, 정혼한 남자의 동의가 필요하다, 이렇게 번역한 경우도 있습니다. 어떻게 번역을 하든, 앞에서 말씀드린 원칙은 동일합니다. 그 서원을 남편이 듣고 말렸다면, 그 서원은 무효가 됩니다. 아울러 과부나 이혼한 여인은 당연히 아무 상관이 없겠지요. 헤어진 남편은 물론이고, 아버지도 더 이상 그녀의 서원에 왈가왈부할 수가 없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러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몇 가지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볼 부분은요, 여러분, 우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분명히 삶으로 고백해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서원 규례는, 그냥 단순히 하나님께 서원을 지켜야 한다는 차원도 있지만, 그걸 넘어서, 우리의 언어와 그에 대한 태도가, 우리를 세상과 구별시켜준다는 것에 대해 강조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언어생활에 있어서 특히 더 조심해야 합니다. 신중하게 말해야 하고, 일단 내뱉은 말은 나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어찌 하나님께서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앞서 발람이 했던 말처럼,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저와 여러분 또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담아내는, 그런 언행을 할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겁니다.
사실 우리가 자신의 서원에 충실할 수만 있다면, 이러한 서원의 기도 자체는 신앙적으로 대단히 유익한 면이 많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도 지금 오랜 시간 마음에 품고 있는 서원의 기도가 한 가지 있습니다만, 물론 아내와 잘 합의한 서원인데요, … 그런데 이런 서원의 기도, 하나님이 뭐 해주시면, 저는 이렇게 꼭 하겠습니다, 이게 일면 기복적인 면이 있어 보이고, 뭔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슨 거래의 파트너처럼 만드는 면도 없지 않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이러한 서원을 통해서 하나님을 조금 더 깊이 경험하고, 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왔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장 앞의 민수기 21장이었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서원하고, 전쟁에 나가 승리한 뒤에, 그 서원했던 것을 잘 지켜 행했던 일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요단강 동편으로 접근해가고 있을 때, 네겝에 거주하는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해서,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지요?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서원하여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그 가나안 백성들을 우리 손에 넘겨주셔서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면, 그 모든 전리품을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겠습니다, 그렇게 서원합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들으셨고, 가나안 사람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셨는데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원을 지켰고, 그래서 그곳 이름을 ‘호르마’라 했다,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스라엘의 다음 세대, 광야 세대가 하나님을 깊이 경험한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도 마차가집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또 신뢰하게 되는 과정에서, 그가 벧엘에서 했던 서원의 기도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신앙적 분기점이 됐지요. 또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한나의 서원으로 태어난 사무엘, 하나님은 그를 통해 새로운 사사 시대를 여시기도 했습니다. 누구보다 많은 고난을 겪은 다윗도, 여러 번의 서원 기도를 통해 그 고비를 다 이겨냈습니다. 시편 여러 곳에 그의 서원이 등장합니다(22편, 56편 등, 기타 116편 등). … 신약으로 넘어 와서도, 우리는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고 하는 바울의 서원을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서원은,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고, 동시에 하나님이 요구하는 온전한 삶을 훈련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어떤 역동적인 리듬을 준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서원한 본인에게도 그렇고, 나중에 그것을 함께 경험하는 공동체에게도, 좋은 ‘하나님 경험’이 되는 소중한 신앙의 유산인 것입니다.
물론 앞에서도 강조하고, 또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것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기 때문에, 대단히 신중하게 서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르게 해야 합니다. 서원을 바르게 해야 한다, 이것은 서원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 예컨대 성경의 가장 유명한 서원, 그러면 우리는 사사 입다의 서원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암몬 자손과 전쟁을 하러 나가면서, 이 입다라는 사사가 하나님께 서원하지요. 만일 하나님이 암몬을 제게 넘겨주시면, 제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를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서원합니다(삿 11:29~31). 그런데 정말 하나님이 암몬을 그에게 넘겨주셨고, 승리한 입다가 자기 집에 돌아왔을 때, 누가 나가서 그를 영접합니까? 네, 그의 무남독녀, 외동딸이 나와서 소고를 잡고 춤추며 그를 영접합니다. 결국 입다는 그 서원을 지키고야 말지요? 딸을 번제로 하나님께 바친 겁니다.
자신이 서원한 것을 반드시 지킨다는 차원에서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고, 또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했던 것처럼,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그렇게 하나님께 드린다는 차원에서도 입다를 이해해 볼 여지가 있겠습니다만, 사실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서원이지요. 너무 경솔하다거나, 너무 잔인한 서원이라는 것을 넘어서, 그 서원의 내용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절대 사람을 번제로 바치지 말라고, 인신제사를 엄히 금하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 아닙니까? 서원 자체가 이미 그 상위법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율법을 거스르고 있는 겁니다. 이런 식은 안 되는 겁니다. 서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도 볼 수 있지요. … 비록 이스라엘 백성의 최고리더인 사사로서, 그것이 너무나 중요한 국가적 전쟁이고, 또 서원을 이행하는 것에 대해서도 사사로이 결정할 수도 없었다는 점도 이해가 되고, 또 백성들에게 어떤 신앙의 본을 보여야 하는 자리이기에 더 더욱 그랬겠지만, 입다의 이런 모습은, 사실 결코 반복돼선 안 되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스라엘의 랍비들은, 일반 시민들이 한 서원을 무효화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됐다고도 하지요. 율법에 저촉되거나 또는 현실적으로 도저히 용납되기 어려운 서원들을 랍비가 분별해준 것입니다. 요즘에도 만약 아주 특별한 서원을 하게 된다면, 어떤 경우에는, 목사와 먼저 상의가 필요하지 않나, 그런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앞서 제가 서원이 많은 신앙적 유익이 있다고 말씀드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원은, 이미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앞설 순 없다는, 이 한계를 우리는 잘 이해해야 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서원은 우리의 의지로, 자발적으로 하는 것인데 반해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그보다 앞서 드러난 하나님의 의지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품은 어떤 좋은 뜻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설 순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서 민수기 28장과 29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제사, 반드시 드려야만 하는 의무적인 제사에 대해서 이미 확인했습니다. 여러분, 그 양이 엄청 많고 또 길지 않았습니까? 그 내용만 해도 71절에 해당합니다. 오늘 서원에 대한 본문의 규례가 16절이니까, 그 분량으로 봐도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에도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봅니다. 자원하여, 내 의지로 하나님께 뭔가를 하는 것보다, 신앙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게 중요할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이걸 깨닫는 것이 어쩌면 신앙의 본질일 수도 있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이 그런 뜻이지요. 내가 더 많은 것을 하나님께 헌신하고, 뭔가 더 열심히 해보자 하는 의지도 너무나 중요합니다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보다, 이미 밝혀주신 하나님의 뜻보다 더 중요하진 않습니다. 지금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음성을 분별하는 것보다, 이미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바가 과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그것을 우리는 먼저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학교 다닐 때 늘 듣는 얘기지만,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교과서와 학교 수업에 충실하다는 거 아닙니까? 무슨 과외도 받고, 학원도 가고, 이것저것 정말 많이 하지만, 그것도 학교에서 선생님이 가르쳐주시는 것에 대해 충실할 때 의미가 있는 겁니다. 해야 될 것을 잘 하는 게 실력이지, 그걸 무시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게 실력은 아닌 겁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게 잘 안 됩니다. 정해진 것, 해야만 하는 것, 어떤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 이런 것에 충실하기보다는, 내 의지와 내 생각, 내 자발적인 노력, 뭐 이런 것들에 사람은 더 흥미를 느끼고 더 큰 동기여부를 받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라 그렇습니다. 자아와 주권을 가진 하나의 인격체이기 때문에, 그 자발성에서 오는 만족감, 내가 뭔가를 결정하고 헌신한다는 그런 자기 의(義)를 인간은 결코 포기하지 못하는 겁니다. 순종의 기쁨보다 제사의 기쁨이 크고, 어떤 자기 헌신의 기쁨이 더 크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신앙은 믿음에서 시작해서 순종으로 끝납니다. 그걸 예수님이 직접 보여주십니다. …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지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 성경은, 그것이 예수님이 어떤 자원하신 희생이나 헌신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고, 복종하셨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렇지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십자가는 예수님의 복종의 열매라는 겁니다. …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고도 했습니다. … 심지어 히브리서에는 그런 말씀도 있지요.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말미암아)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다.”(히 5:8~9)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이 배우셔야 할 정도로, 순종과 복종은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 저를 포함한 많은 성도들이, 우리의 신앙이 많이 성숙했고, 그래서 어떤 의무나 책임에 대한 것들 대신, 자원하는 신앙에만 힘써도 될 만큼 충분히 성숙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적으로 가장 좋은 건 이런 거겠지요. 마땅히 해야 할 것을 기쁨으로, 자원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경이 말하는 성숙한 신앙입니다.
물론 자원하는 심령을 하나님은 너무나 귀히 여기십니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런 우리의 의지와 바람조차도,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뜻 안에서 분별되고, 이루어져야 한다는 얘깁니다.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바울 사도가 말하지요(빌 2:13). 우리에게 소원을 품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 그러나 그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뜻을 위한 것임을 우리가 잊지 않는다면,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바르고 견고하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은, 비록 우리 개인의 문제요, 내 의지와 노력의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는 일이요, 하나님의 의지에 내 의지를 복종시키는 것이요, … 동시에 내 옆에 있는 사람, 아내와 남편과 가족과 함께 지어져 가는 일이라는 것, … 그렇게 수직과 수평이 온전하게 만나고 어우러져야만 비로소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우리의 신앙이라는 사실을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 필요하다면 서원이나 서약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선하심을 깊이 경험하고, 또 우리 안에 주신 거룩한 소원들을 품고 기도하며,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어가는 그런 활기차고 역동적인 신앙을 가져야 하겠고, …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에 늘 기쁘게 순종하는 그런 겸비한 믿음의 방향성을 잃지 않는, 그런 균형 잡힌 신앙, 성숙한 신앙의 모습으로, 저와 여러분 모두가 자라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