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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죄인이로소이다 (2022년 6월 5일 주일 설교)

2022-06-05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8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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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강림주일 설교 ------------------------ 누가복음 5:1~11,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 * 설교 음성파일 : 오늘은 설교 음성이 없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리며, 원고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 ​ (누가복음 강해 19) 본문 8절의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를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참으로 우리의 삶으로 누려지고 고백되기를 바랍니다. 생명을 자유하게 하는 여러 사역들을 가버나움에서 감당하신 주님은, 그곳을 떠나 갈릴리 여러 회당을 돌며 말씀을 전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과 더 깊이 상관할 자들을 직접 찾아가 부르시는 일에 집중하시는데요, 그 처음이 우리가 잘 아는 오늘 시몬 베드로입니다. 주님이 시몬을 부르시고 거기에 시몬이 응답하는 이 내용은 아마 많은 분들에게 익숙하실 텐데요, 다들 그러시지요? 잘 아시는 말씀이겠습니다만, 다시 한 번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오자, 예수님은 한 가지 묘안을 떠올리시는데요, 호수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고, 그 중 하나를 빌려 호수에 띄우고, 주님은 그 배 위에 앉아서 말씀을 전하십니다. 사람들은 호숫가에 빙 둘러앉아서 호수를 바라보며 말씀을 들었지요. 호수 쪽에서 불어오는 해풍 덕분에, 마이크 없이도 호숫가 많은 사람들에게 소리가 잘 전달됐을 거라고 학자들은 얘기합니다. … 이때 주님이 오르신 배가 바로 시몬의 배였습니다. 다행히 그땐 조업이 다 끝난 아침이기도 했고, 또 예수님 덕분에 그의 장모가 열병에서 나은 일도 있어서 마음의 빚도 있고 하니, 아마 기꺼이 배를 내어드렸을 겁니다. … 당시 베드로와 그 일행은 밤샘 조업을 마치고 그물을 씻고 있었지요. 밤새 아무것도 잡은 게 없어서 더욱 힘든 날이었습니다. 우리도 가끔 그런 날이 있습니다. 열심히 수고했는데 열매는 없고, 일은 자꾸 꼬이기만 해서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는, 그런 실망스런 하루가 있지요. 저도 간혹 경험합니다만, 그 무거운 마음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날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아무 소득 없는 힘든 하루를 보냈고, 그저 내일을 기약하며, 지친 마음을 그물과 함께 씻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예수님이 자기 배를 빌려 말씀을 전하시는 게 차라리 작은 위안이 됐고, 또 주님의 말씀도 얼핏얼핏 들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래도 피곤한 몸과 마음으로 인해, 얼른 정리하고 가서 쉴 생각뿐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이 갑자기 시몬에게 말을 거신 겁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Re) (배 빌린 값이라도 치르실 참인지) 참 난감한 말입니다. 벌써 그물도 다 씻어놓았고, 이제 집에 들어가는 것만 남았는데, 깊은 데까지 가서 다시 그물을 내리라니. 여러분 같으면 어떨 것 같으신지요? … 저는 개인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하기 싫은 일이, 같은 일 두 번 하는 건데요, 이게 참 어려운 일이지요. 이 일이 베드로 혼자 하는 일도 아니고 일꾼들도 같이 하고 있거든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 중에, 깊은 데로 ‘가라’는 명령은 2인칭 단수형인데,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명령은 2인칭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배는 시몬이 몰지만, 조업은 여러 사람이 다 같이 해야 하는, 이만저만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던 겁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어부도 아니지요. 그냥 평생 목수였고, 말씀은 은혜스럽게 잘 전하실지 모르지만, 이건 전혀 다른 일입니다. 베드로야말로 이 일에 있어서 전문가지요. 다른 건 몰라도 갈릴리 호수에서만큼은 누구보다 잔뼈가 굵은 베테랑 어부거든요. 근데 지금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이건 정말 아니지요. 분명 시간 낭비, 힘 낭비, 인력 낭비, 가장 쓸 데 없는 일이 될 게 뻔했습니다. … 그런데 거기서 베드로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네, 유명한 얘기지요. “선생님, 우리가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5절) 이야기합니다. 참 엄청난 얘기지요. 자기 경험과 상식에 맞지 않지만 말씀에 따르겠고, 거기에 수반되는 모든 불편과 수고를 감내하겠다는, 정말 뜻밖의 반응입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이렇게 반응할 수 있었을까, … 저는 지금도 그게 너무 신기하고 놀랍게 다가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아직 온전히 알고 또 믿고 있다고 말하긴 어려운 상황입니다. 5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뭐라고 부릅니까? 네, ‘선생님’ 그럽니다. 선생님, … 그 말씀에 권위가 있고, 하시는 일이 놀랍기 때문에 ‘선생님’으로 인정은 합니다. 그래서 그 말을 깊이 존중했고, 그대로 했다는 얘깁니다. 요즘 학생들도 선생님 얘기를 이만큼 존중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말씀에 의지하여’라고 할 때, ‘의지하다’라는 말은, ‘받아들이다’(receive)라는 뜻입니다. 번역이 아주 멋지게 됐지만, 본래는 그냥 선생님의 말을 ‘받아들이겠다,’ 그런 뜻입니다. 이분이 그냥 헛말 하실 분은 아니니까, 결국 몇 마리 못 잡는다고 해도 뭔가 이유가 있긴 할 테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겁니다. 물론 이것도 참 대단한 거지요. … 어쩌면 자신이 처참하게 실패한 자리였기에 가능한 태도였을지도 모릅니다. 내 힘으로 도저히 안 될 때, 내 능력이 한계에 부딪혔을 때, 그래서 할 수 있는 반응이기도 하지요. 때론 그런 순간이 거룩함을 마주하는 결정적인 순간일 겁니다. 모든 게 순적하게 잘 진행돼서, 일치감치 만선의 기쁨을 안고 돌아왔다면 애초에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밤이 새도록 수고했지만 잡은 게 없고, 그만큼 마음이 가난하고 절박해져서, 그래서 주님의 음성이, 선생의 음성이 그나마 내 귀에 들립니다. 늘 듣던 익숙한 말씀도 낯설어지는 순간이고, 그것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그런 순간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차라리 여기가 복 된 순간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자, 고기가 잡히기 시작합니다. 밤새 없던 고기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이 잡힙니다. 얼마나 많은지, 베드로의 배만으로는 안 돼서 옆에 있던 야고보와 요한의 배를 부르지요. 잡고 또 잡고, 끝없이 몰려오는 물고기로 두 배가 다 잠길 지경이 됐습니다. … 여러분, 그림이 그려지시지요? 물고기로 가득 차서 배가 곧 전복될 지경입니다. 그냥 많이 잡았다, 이게 아닌 거지요. 지금껏 어부들도 경험해보지 못한, 정말 감당 안 되는 수준의 일이 벌어진 겁니다. 여러분, 이런 일을 당하면 가장 먼저 드는 감정이 뭐겠습니까? … 네, 두려움입니다. 물고기 많이 잡아서 좋은 건 둘째 치고, 너무 무섭지요. 많이 잡아서 좋은 것도 어느 정도일 땝니다.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곳에서, 갑자기 배가 잠길 정도가 되면, 당연히 두려워 말문이 막힐 겁니다. ‘어, 이게 뭐지? 이분 정말 뭐지?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되나?’ 가슴이 벌렁벌렁하고,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는, 그런 상태가 됐겠지요. 그래서 베드로가 어떻게 합니까? 네, 자기도 모르게 갑자기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립니다. 그리고 얘기하지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당신 정말 누구십니까? 저는 죄인이니 제발 저를 떠나 주십시오.” 그럽니다. “계속 제 옆에 계시면서, 더 많이 잡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가 아니지요. 마치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본 귀신의 반응처럼, 베드로는 주님이 자신을 떠나주시길 간청합니다. … 차이가 있다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르지요. 앞에서는 ‘선생님’이라고 했다가 여기서는 ‘주님’, ‘주인’[퀴리에]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처음부터 ‘주님’이었던 건 아닙니다. 이 놀라운 일을 겪고서 그리 부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해서 앞의 말씀에 순종했던 것도 아닙니다. 훌륭한 선생님으로 여기고 그의 말씀을 존중하여 받아들였고, 나중에 ‘주여’라고 부르게 되지요. 예수님을 그저 좋은 선생으로만 여겨도 그 말씀을 허투루 듣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그렇지요? 또한 ‘주님’이라는 말은 그런 겁니다. 단순히 그분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여 순종하는 것,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어떤 근원적인 두려움에 휩싸여서, 차라리 그분이 나를 떠나기를 바라게 되는 그런 차원으로 예수님을 경험할 때 나오는 표현이, 바로 ‘주님’이라는 말인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베드로는 그날 그 순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마주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설 때 가지게 되는, 이른바 ‘거룩한 두려움’에 휩싸인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호렙 산에서 불붙은 떨기나무, 그치만 타지는 않는 나무를 봤을 때처럼,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곤, “큰일 났구나. 내가 망하게 됐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들 속에 살고 있는데,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다니 …” 탄식한 것처럼, 거룩함을 마주한 부정한 존재의 고백이 나도 모르게 입에서 터져 나온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가 자신을 뭐라고 얘기합니까? 네,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죄인’이라는 말이, 누가복음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그 맥락이 놀랍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가리켜 죄인이라 하는지도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랬지만 사실 베드로가 무슨 특별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렇게 고백한 건 아닙니다. 사람들은 모르는 그런 죄가 생각나서 한 말도 아니겠지요. 말 그대로 생명의 ‘주님,’ 생명의 ‘주인’을 마주하고 나니, 내가 얼마나 생명 앞에 무능하며, 유한한 존재인지,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스스로 느껴지게 돼서, 나도 모르게 나왔던 표현이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부정함이 거룩함을 대할 때, 피조물이 창조주를 마주할 때 가지는 자연스러운 자기 발견의 고백이 ‘죄인’인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비슷한 느낌을 경험한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여러분의 실존이 너무나 무의미하고,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순간을 경험해보셨는지요? 보통은 아주 거대하고 장엄한 대자연 앞에 섰을 때, 우리가 그 비슷한 느낌을 받곤 하지요. 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만, 캐나다의 나이아가라 폭포나 미국의 그랜드캐니언 같은 걸 눈으로 직접 보게 되면, 어떤 경외감 같은 게 느껴진다고들 합니다. 우주로 높이 올라가서 지구를 보거나, 또 블랙홀이나 은하수를 보면 더 잘 느껴지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탄자니아 선교를 갔다가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마사이족이라고, 여러분 들어보셨는지요? 아프리카의 유명한 종족이지요. 큰 키에, 붉은 천을 두르고 긴 지팡이나 창을 들고 다니는, 그래서 마치 전사처럼 보이는 그런 종족인데요, 그 마사이족을 섬기는 여자 선교사님이 계셔서, 그분과 함께 마사이족의 집들을 돌면서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역이 며칠 이어지는 동안, 저희 팀은 마사이족이 사는 어느 산 중턱에 텐트를 치고 잠을 자게 됐습니다. 보통 마사이족이 고산지대의 초원에서 살거든요. 그때 저희 인원이 대략 40~50명 쯤 돼서, 텐트를 여러 개 치고, 산에서 잠을 잤습니다. 열 개도 넘는 전체 텐트를 한 번에 다 칠 수 있는 공간이 없으니까, 계단식으로 된 암반지형에다가, 층층이 나눠서 텐트를 쳤습니다. 그러고 자는데 밤에 바람이 엄청 심하게 부는 겁니다. 나중에는 비도 세차게 내리는데, 그 비바람이 얼마나 셌냐면, 서너 사람이 함께 자고 있는 텐트가 그냥 질질 끌려가는 거예요. 놀라서 텐트 밖으로 나와 보니까, 벌써 짐만 넣어 둔 텐트들은 다 아래쪽으로 굴러 내려가고 있는 거예요. 다들 저처럼 자다가 깨서, 소리를 지르면서 굴러가는 텐트를 붙잡고, 정말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고생한 끝에, 겨우 다시 텐트를 치고, 비도 좀 그치고 바람도 잦아 들어서, 겨우 다시 잠을 자려고 하는데, 잠이 잘 안 오는 거예요. 춥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 그래서 그냥 새벽에 혼자 텐트 밖으로 다시 나오게 됐어요. 언제 그랬냐는 듯 비는 다 그치고, 구름 사이로 달이 환하게 비치는데, 하늘을 보니까 별들이 까마득해요. 별똥별이 수도 없이 연이어 떨어지고, 주변에는 온통 비에 젖은 숲 냄새가 진동해요. 온통 너무나 고요한데, 바람소리와 짐승 소리, 벌레 소리까지 다 들리고, 마치 그곳이 이 세상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근데 여러분, 제가 그 순간 바닥에 무릎을 탁, 꿇게 되더라고요. 어떤 제 의지가 아니라, 그냥 저도 모르게 머리를 땅에 댄 채로 탄식하고 있는 거예요. ‘주여, 주여.’ 혼자 그러고 있어요. 인간이 먼지 같고 미물 같다는 게 이런 거구나, 내 존재와 내 생명이, 나에게 달린 게 아니구나, 그런데도 그렇게 여기고 사는구나, 싶었습니다. 베드로가 고백하는 ‘죄인’이라는 이 말은, 인간이 단순히 많은 죄를 지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나 자신에게 생명의 능력이 없고, 스스로 그 생명을 완성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능력이 있는 것처럼, 마치 내가 스스로 주인인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자기 발견의 고백이지요. 예수를 향해 ‘주여’라고 부를 수 있는 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진짜 주인을 만났을 때 터져 나오는 탄식이고, 그래서 두려운 겁니다. “주님 나와 함께 해 주십시오.”가 아니라, “주님, 나를 떠나소서.”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모든 윤리적, 실존적 죄가 그 잘못된 자기인식에서부터 나온다고 말씀합니다. 나에게 생명의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런 것처럼 여기는 교만과 집착에서 모든 죄가 나오게 됐다고 말씀하지요. 이러한 죄들은 인간 스스로 극복할 수 없습니다. 어떤 과정을 수료한다고 해서 죽음을 피할 수 없듯, 어떤 노력을 통해서나, 교육이나 교양을 쌓음으로써 이 집착에서 근본적으로 자유해질 수 없다는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환경이 바뀌고 문화가 바뀌면, 좀 더 세상이 진보하면, 인간이 언젠가 자유를 경험하게 되고, 그래서 인간도, 세상도 조금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적인 인간 이해는 그런 게 아닙니다. 인간은 깊은 영혼에서부터 병 들었고,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회복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인간이 수없이 다시 태어나도, 인간 스스로 온전히 자유해질 수 없다, 아무리 세상이 좋아지고, 제도가 발달해도, 결국 마찬가지다. 그런 노력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며 참 주인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고는 우리는 결코 자유해질 수 없다, 그렇게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주님이 오늘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진정으로 생명의 주님과 상관하는 삶, 생명의 충만함을 얻고 누리는 삶으로 초청하십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 “두려워할 것 없다. 이제부터 네가 이렇게 풍성한 생명으로 살 거다. 너를 통해 수많은 생명이 살아나고, 그렇게 너 또한 진정으로 살게 될 거다. 내가 너와 상관하여 너를 낚은 것처럼, 너도 그렇게 생명을 건져 올리며 살 거다. 나와 온전히 상관하자!” 주님 말씀합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하지요? 네, 베드로만이 아니라 옆에 있던 야고보와 요한도 배와 그물을 내려놓고, 배에 가득 찬 모든 물고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생명의 주인을 인정하고 그분과 상관하는 삶을 선택한 것이고, 주님이 제시하는 삶의 방식과 그 방식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 마치 어린아이가 그 아름답고 신나는 놀이동산에 처음으로 들어서는 것처럼, 그래서 아빠의 손을 꼭 잡고 떨리는 가슴으로 저 앞에 보이는 세상에 시선을 고정하는 것처럼, 지금 베드로는 주님의 손을 잡고 어떤 새로운 세상의 입구에 막 들어서고 있습니다. … 물고기 몇 마리 더 낚기 위해 주님을 따른 게 아니지요. 오히려 물고기에 집착하는 삶을 포기한다는 의미입니다. 소유가 아니라 생명에 집중하고, 남보다 많이 가진 자유가 아니라, 생명과 사랑 안에서 누리는 자유로 가득한 세상, 그걸 성경은 하나님나라라고 하지요. 주님과 함께 그 나라의 삶을 참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하는 회개이고, 구원인 것입니다. 그런 삶을 결단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오늘 이 베드로의 모습이 우리에겐 참으로 대단하게 보입니다. 어떻게 모든 걸 버리고 주님을 따를 수 있을까, 왜 나는 그게 잘 안 될까, 생각하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베드로의 결단과 순종을 주목하곤 합니다. 하지만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건 그런 베드로의 노력이나 의지가 아니지요. 오히려 베드로를 사로잡은 예수님의 택하심과 이루심에 누가는 주목하고 있어요. … 주님이 먼저 그의 장모의 집에 찾아가 그녀의 질병을 고치시고, 말씀을 전하실 때도 굳이 베드로의 배가 있는 곳에 오셔서 하시지요. 말씀을 전하시기 위해 호숫가에 서셨을 때에도, 주님은 시몬의 배를 주목하여 보고 계셨습니다. 주님이 계획하고, 찾아가고, 모든 것을 친히 주도하셨지요. 말 그대로 주님이 베드로를 낚으신 겁니다. …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네가 생명을 사로잡으리라, 이 말씀 역시 명령이 아니라 선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돼라, 이게 아니라, 너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다, 반드시 그런 삶을 살 것이다, 하는 주님의 선언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좇은 베드로의 이 모습이 대단해 보인다면, 우리는 먼저 정말 내가 예수님을 그렇게 만나고 경험했는가, 거기부터 생각해보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베드로는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모든 걸 버리고 주님을 따른 게 아니지요.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 만나는 경험이 있었고, 그 경험을 통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베드로의 이 결단과 순종은, 어떤 종교적 신념이나 인간적인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했느냐, 내가 예수를 누구로 경험했느냐, 거기에 달린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한 채 무작정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내려고만 한다면, 오히려 우리는 구원도, 자유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될 겁니다. 주님을 따르는 과정도, 생명과 기쁨이 아니라, 또 다른 매임과 부담이 되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누리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런 경험 없이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면 그 삶이 얼마나 피곤하고 고단하겠습니까? 내가 무엇을 버리고, 어떻게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그보다 훨씬 더 시급한 것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는 이 고백에 이르는, 그 거룩함의 경험이, 정말 우리 가운데 있는가, 그래서 정말 예수가 나의 ‘주님’으로 고백되는가,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걸 어떻게 하면 경험할 수 있는지, 그 구체적인 방법이 뭔지, 제가 다 설명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직접 찾아가신 것처럼, 주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 각자를 찾아오시는 일이고, 그 과정은 당연히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 무슨 특별한 방법이 있어서 그대로만 하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 이런 것도 아니기 때문이지요. … 다만 하나님은 이미 저와 여러분을 이곳에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듣게 하고 계시지요. 우리 또한 이미 예수님의 주목하여 보심과 낚으심 가운데 이미 들어와 있다는 얘깁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의지로 오게 된 것이 아니라, 실은 주님이 부르셨고, 여러분은 이미 거기에 반응하셨다는 것을, 믿음의 안목으로 보실 수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누군가를 부르시고, 다양한 방법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이들에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게 하시고, 그래서 그의 선생님이 되어 주시고, 또 예수를 아직 선생으로만 만나고 경험하는 이들에게는 다시 찾아가셔서, 저기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뭔가를 도전하고 말씀하셔서, 새로운 믿음의 지경으로 인도해 가십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그런 특별한 경험이나 사건 없이도, 예수님이 정말 내 생명의 주로 믿어지는 그런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건 정말 복이지요. 주님이 도마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정말 보지 않고도 그게 믿어지는 복된 분도 계실 텐데요, 그분은 이제 그 ‘믿음의 복’이 ‘따름과 누림의 복’으로 이어지기만 하면 됩니다. 보지 않고 믿는 믿음, 거기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 합당한 삶의 고백으로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을 구하셔야 됩니다. 이미 주님으로 믿어지는데, 선생님도 안 되는 정도로 주님과 상관하면 안 되겠지요. 조금 더 깊은 곳으로 삶의 그물을 던져서, 정말로 사람을 사로잡고 생명을 얻는 경험이 풍성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거룩함의 경험을 위해 그래도 제가 한 가지만 강조해서 얘기한다면,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여러분의 경험입니다. 오늘 베드로도 결국 주님의 ‘말씀’이 매개가 되어 ‘주님’을 경험하고 주님을 따르게 된 거지요. 그물을 씻으며 자기 배에서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또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말씀에도 어쨌든 겸손히 반응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주 되심을 경험한 거지요. … 여러분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하나님 경험이라는 것이 그저 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순종의 결실을 눈으로 보게 되기도 하고, 때로 진리가 나를 자유하게 하는 것을 경험하기도 하고, 때로는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의 마음이 그랬던 것처럼, 말씀으로 인해 내가 뜨거워지는 걸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에만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부단히 애를 쓰십니다. 주님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계속 몰려오고, 그러다 보니 도저히 말씀을 전하실 수 없는 지경이 되니까 주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네, 오늘처럼 바다에 뜬 배 위에 앉아 말씀을 전하시는 정말 진귀한 일까지 하십니다. 다른 어떤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거기서 하나님의 구원과 생명을 누려야만 온전한 하나님 경험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조금만 더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공부하고, 이해하고, 순종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말씀에 ‘익숙한’ 거기에 만족하지 마시고, 참으로 그것이 여러분의 하나님 경험이 되도록, 조금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생각하며 받아들여 보십시오. … 목사의 설교만으로는 많이 부족합니다. 수많은 무리 가운데 말씀을 전하셨지만 결국 베드로를 홀로 만나주신 것처럼, 설교는 하나의 계기일 뿐, 더 깊고 개인적인 만남이 되는, 그런 말씀의 경험이 여러분 가운데 꼭 있어야 합니다. “선생님, 제가 밤새 수고했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진실하게 반응한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요. 스스로 경험을 과장하거나 체면 때문에 없는 경험을 억지로 만들어 자신과 남을 속일 필요는 없습니다. 솔직하고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고 구하십시오. … 많은 분들이 나는 이미 충분히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본문에서도 베드로에게만 집중하게 되지만, 사실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정말 베드로처럼 주님을 만나고, 경험하고, 그래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라나선 게 아니라, 그냥 그날 호숫가에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던 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우리일 수도 있지요. 베드로의 모습을 구경한 사람 말입니다. 갈릴리에서 소문난 어부 시몬이 예수님을 만났다더라, 물고기 엄청 잡았고, 그래서 그 앞에 엎드려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고백했다더라, 그렇게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 전해들은 사람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주님을 따르지 못했던 그 많은 무리 가운데 우리가 아직 머물러 있는 상황은 아닌지 …, 그건 오직 우리 각자가 알 겁니다. 누가 대신 답해줄 수 없는 문제지요. 다만 한 가지는 기억하셔야 합니다. 정말 예수를 주님으로 경험했다면, 우리 또한 끊임없이 소유가 아닌 생명에 몰두하고, 그 생명을 충만하게, 풍성하게 누리기 위해 애쓸 것입니다. 찢어질 듯 가득 찬 그물처럼, 이미 그 마음이 다른 것으로 채워질 필요가 없는 생명 충만을, 수시로 경험할 수밖에 없겠지요. 내가 내 삶을 완성해야 한다는 집착에서 벗어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온전한 자유와 만족을 누리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 가능합니다. 그것이 어떤 사명이고 명령이기 이전에, 그것이 우리의 참 된 구원이요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 2천 년 전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일어났던 그 시몬의 하나님 경험과, 주님을 따르는 그 믿음의 고백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에도 늘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아멘. 기도합시다.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