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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22. 붉은 암송아지
2022-05-04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6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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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된 설교 원문
20220504 수요 성경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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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19:1~22, 붉은 암송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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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희는 지난 18장까지, 고라의 반역 사건으로 인해 생긴 혼돈과 위기를 하나님께서 바로잡고, 다시 한 번 제사장과 레위인의 역할을 강조하시는 것에 대해 살펴봤는데요,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이 친히 기업이 되고 분깃이 되는 제사장의 삶을 통해서, 우리의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생명과 삶이 온전히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총이다, 이것을 인정하고 사는 삶이 다름 아닌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의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된다, 하는 얘기를 함께 나눴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그 말씀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그래서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선물로 인식하며 한 번 살아보셨는지요. … 네, 앞으로도 계속 그런 신앙의 자세를 우리가 함께 연습해나가 보기로 하십시다.
오늘 민수기 19장은, 하나님이 특별히 정하신 어떤 한 가지 정결 규례를 다루고 있는데요, 조금 갑작스럽게 등장한 것 같은 느낌도 있지만, 사실 전체 맥락에서 본다면 앞부분의 내용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그런 정결 규례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죽음으로 인해 생긴 부정함을 정결하게 하는, 그런 어떤 특별한 물에 대한 규례이지요. 지금의 이런 여러 혼란과 문제들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하면 정결하게 유지할 것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성막이 있는 이스라엘 진영을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보존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결국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이 동행이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그 진영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으로 본문이 강조하는 바는 말씀드린 것처럼 죽음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가 왜 여기서 다뤄져야 하는지, 조금만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지요. 고라의 반역사건으로 인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됐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이, 이러한 죽음에, 시신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고라의 반역에 참여했던 250명의 지휘관들을 포함하여, 염병으로 죽은 14,700명까지, 이것만 해도 벌써 15,0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전체 인구의 약 0.75%에 해당하는 엄청난 숫자인데요, (이게 얼마나 많은 숫자냐면, 이번에 코로나로 인해 사망한 우리나라 사람 숫자가 인구의 0.046%(약 2만 3천 명)이니까, 여기의 약 20배 가까이 사망자가 나온 겁니다.) 이스라엘 진영 전체가 마치 거대한 장례식장 같은 그런 분위기였을 겁니다.
레위기 강해를 통해 이미 알고 계신 것처럼,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부정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요인이 바로 죽음입니다. 본문도 이것을 강조하는데요, 이와 관련해서 13절과 20절을 우리는 주목하게 됩니다. 똑같은 표현이 두 번 반복해서 나오지요.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러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회중 가운데서 끊어질 것이라. 정결하게 하는 물로 뿌림을 받지 않으면 부정함이 그대로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지금 이스라엘 진영 전체가 부정함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거지요. 심각한 신앙적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본래 이런 부정함을 제거하려면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고 율법은 규정하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 당장 그런 속죄제를 전부 다 드릴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었고, 또 공동체 전체가 그 죽음에 노출됐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속죄제를 드리려고 하면 어마어마한 제물과 노동력이 필요했겠지요. 광야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 시점에 그 많은 제물을 준비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주신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는 잿물을 만들어 뿌림으로써 신속하게 정결함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다시 생명의 충만함을 누리며 살라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 ‘정결하게 하는 잿물’, 사실 잿물이라고 하는 건, 동서고금 어디서나, 뭔가를 깨끗하게 하는 용도로 사용되어 왔지요. 나무 같은 것을 태운 재가 물에 들어가게 되면 그 물을 알칼리성으로 만들어서 세탁에 효과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역시 1960년대까지만 해도, 다 이 잿물을 사용해서 빨래를 했다고 하지요. 직접 재를 만들어서 잿물을 사용한 건 아니고, 조선말에 개항을 하면서 가성소다라는 게 외국에서 들어왔고, 그때부턴 나무를 태운 재를 물에 섞는 게 아니라, 이 소다를 섞어 잿물을 만들었다고 해서, 서양에서 들어온 잿물, ‘양잿물’이라고 불렸습니다. 비누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다 이걸 사용해서 세탁을 했지요. 아마 본문의 이 잿물도 그런 세탁의 혀과 차원에서 정결함과 연관되는 부분이 분명 있을 겁니다.
그럼 이러한 ‘정결하게 하는 잿물’은 무엇으로, 어떻게 만드는가, 본문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우선 암송아지 한 마리,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그래서 온전히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될 수 있는, 그런 붉은 암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그걸 진영 밖으로 끌어내어 잡습니다. 일종의 속죄제물이 되는 셈인데요, ‘붉은 암송아지’라는 게 조금 특별합니다. 이렇게 짐승의 색을 구별한 경우는 여기가 처음인데요, 송아지 색이 붉다는 건 빨간색이라기보다는 아마도 붉은 갈색 종류일 겁니다. 붉은 색이 피와 생명을 상징하니까, 아마 그런 의미가 담긴 색깔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봅니다.
아울러 암송아지라는 것도 조금 특별합니다. 일반 속죄제물의 경우는 수컷만 사용하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보통의 속죄제물은 아니라는 얘깁니다. 더구나 그걸 이스라엘 진영 밖으로 끌고 가서 거기서 도살하는 것 역시, 이것이 특별한 제물임을 보여줍니다. 일반 제사였다면 당연히 성막에서 잡고, 번제단에서 태웠을 겁니다. 보통 기름만 번제단에서 태우고, 나머지는 진영 바깥 정해진 곳에서 태우는 게 속죄제인데요, 하지만 이번엔 진영 밖에서, 전부 다 한꺼번에 태웁니다. 기름만이 아니라, 가죽과 내장까지, 심지어 제물의 피도 함께 넣어 태우는데요, 일반적인 제사에서는 피를 태우지 않지요. 피는 그냥 제단 밑에 쏟아 붓도록 되어 있는데요, 이렇게 피를 함께 태운다는 것도 아주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아무래도 영적으로는, 이 잿물이 가진 정결하게 하는 힘이, 다름 아닌 이 피와 연관이 있겠다, 싶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보면 이번 규례는, 확실히 하나님이 정하신 어떤 특별한 속죄의 방식이다,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많은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발생한 대규모의 부정함을 해결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금 일상 속에서 정결함에 대한 인식을 분명하게 가지고 살아가길 원하시는, 그런 방편인 것이지요.
이렇게 진영 밖에서 붉은 암송아지를 잡아 태울 때, 제사장은 몇 가지 더 준비할 것이 있습니다.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 실을, 송아지 사르는 그 불속에 함께 던져야 하는데요(6절), 각각에 담긴 의미도 물론 있겠고, 또 이것이 같이 태워져야 충분한 재가 확보될 수 있기 때문으로도 생각됩니다. 백향목은 다 아시는 것처럼, 잘 썩지 않는 대표적인 나무여서, ‘생명의 힘’을 상징하지요. 또 우슬초는 오늘 본문에도 계속 등장하는 것처럼, 정결예식에서 피나 물을 뿌리는 일종의 브러시 역할을 합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시 51:7) 하는 시편 고백처럼, 죄를 씻는 하나의 상징물입니다. 홍색 실 역시 피와 생명을 상징하겠지요. 나병환자를 정결하게 하는 예식에도 이 홍색 실이 사용됩니다. 이런 세 가지 재료를 함께 태워서 재를 얻고요, 그 재를 다시 물에 희석하여 잿물을 만들고, 그걸 뿌림으로써, 부정해진 사람과 사물을 정결하게 하라고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런 속죄 예식을 전체적으로 주관하는 사람, 총책임자로서 하나님은 오늘 누구를 지명하여 부르시지요? … 얼핏 생각하면 당연히 대제사장 아론이 해야 할 것 같은데, 3절을 보면, 엘르아살이 책임지도록 말씀합니다. 엘르아살이 누군지는 아시지요? 아론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이 되는, 아론의 아들입니다. 그러고 보면 벌써 뭔가 세대교체가 되는 건가 싶기도 한데요, 그보다는 아마 대제사장은 이런 예식 자체에서 거리를 둬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긴 것 같습니다. 본문에 계속 강조되는 것처럼, 정결함을 가져오는 이 잿물을 만드는 것 자체가, 그 만든 사람을 또한 부정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음 장, 20장으로 넘어가면, 벌써 미리암과 아론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체 맥락으로 봐도, 이제 대제사장의 교체도 자연스럽게 암시되어 있는 거겠지요.
그럼 이 잿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 기본적으로 사람이 시신을 만지게 되면, 그 사람은 7일 동안 부정합니다. 그래서 그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이 잿물을 뿌려서 정결하게 하는 거지요. 장막에서 사람이 죽었을 때, 집에서 장례를 치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접 시신을 만지지 않았더라도, 그 가족은 물론 문상객도 모두 다 부정해져서, 동일하게 이 잿물을 뿌려 정결케 해야만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집 안에 있는 그릇도, 그것이 만약 뚜껑이 열린 채 보관되어 있었다면, 그것도 우슬초로 잿물을 뿌려 다시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부정하게 만드는 죽음의 힘인 거지요. … 들판이나 어디 바깥에서 시체와 접촉하게 됐을 때도 마찬가집니다. 그리고 심지어 죽은 지 오래 된 어떤 뼈나 무덤을 만졌을 때도 역시 동일한 결과를 낳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반드시 정결하게 해야만 하는 거지요. 무엇보다 회막도 정결하게 해야 한다고 본문은 말씀하는데요, 이건 엘르아살이 송아지를 태우기 전에 직접 해야 합니다. 손가락에 송아지의 피를 찍어서, 회막을 향해 일곱 번 뿌리고, 그 후에 송아지를 태웁니다. 죽음으로 인한 부정함이 하나님의 성막까지도 오염시킬 수 있다는, 중요한 얘깁니다.
이처럼 오늘 이 본문의 전체적인 내용은, 죽음이 가진 부정함과 그 강력한 영향력을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단지 사람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라, 물건에도, 또 성막에도, 깊고 넓은 영향을 끼칩니다. 시신을 만지면 7일 동안 부정하다고 했는데요, 이것은 나병이나 혈루병에 걸린 환자가 부정한 기간과 동일합니다. 직접 질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그냥 시신과 잠깐 접촉만 했을 뿐인데도 그렇습니다. … 더구나 나병의 경우엔 8일째 되는 날에 한 번만 속죄제를 드리면 정결해지는데, 여기서는 두 번이나 정결예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부정함을 정결하게 하려고 이 잿물을 만든 사람, 이것과 관련된 사람이 다 부정해진다는 사실이지요. 송아지를 잡은 제사장도 부정해지고요, 그 송아지를 불사른 사람도 부정해지고, 태운 재를 모은 사람까지 전부 다 부정해집니다. 또한 누군가를 정결하게 하려고 그 잿물을 뿌려준 사람도 역시 저녁까지 부정한 상태가 됩니다. 직접 죽음과 접촉한 사람만이 아니라, 죽음으로 인해 생긴 부정함에 맞설 때조차도 부정함이 발생한다는 뜻이고, 그만큼 죽음은, 하나님의 백성을 부정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이라고, 율법은 강조합니다.
죽음이 이렇게 강력한 부정함을 만들어내는 어떤 이유, 그 근거는 앞에서 레위기 강해를 할 때 충분히 설명을 드린 바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유일한 창조자로서, 하나님의 임재는 곧 생명을 창조하는 능력이지요. 죽음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인간의 어떤 당연한 운명인 것도 아닙니다. 다만 죄로 인해 들어온 죄의 삯이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진 결과요 상태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죽음 자체가 어떤 하나의 자연적 순리나 순환이라는 어떤 숙명론이나, 그것이 뭔가 더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식의 진화론적 관점을 성경은 단호히 거부합니다.
죽음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하고, 싸워 이겨야만 하는 대상입니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6)고 바울 사도가 얘기했지요. 우리의 이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는 그때, 죽음 자체가 삼켜지는 궁극적인 승리가 이루어질 겁니다. 그 결정적인 승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이루어졌지요.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 인간에게,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그것을 더 풍성히 누리게 하려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결코 인정되거나 받아들여질 수 없는 원수로서 죽음을 인식하는 것, 여러분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아울러 성경이 이 죽음의 힘을 결코 간과하지 않는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죽음은 결코 인간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닌 겁니다. 인간을 부정하게 하고, 또한 거기서 모든 죄의 능력과 유혹이 시작됩니다. 내가 완전히 소멸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인간의 모든 죄와 집착과 자기몰두가 시작됩니다. … 그래서 성경은, 죽음과 생명의 경계선을 함부로 넘나드는 어떤 종교적 행위를 철저하게 금합니다. 제사장이나 사제가 어느 망자를 부르고 위로하고 제사하고, 이런 얘기는 성경에서 들어본 적도 없으실 겁니다. 우상숭배의 여부를 떠나서, 그런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 죽음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고, 그런 어설픈 종교적 중재를 통해 결코 죽음이나 망자를 다룰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죽음에 관한 성경의 일관된 관점입니다.
오히려 제사장은 철저하게 죽음과 거리를 둬야 하고, 설사 접촉하더라도, 최대한 속히 그 부정함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본문은 말하지요. 오늘 본문에서도 정결하게 하는 잿물을 뿌리는 사람은, 제사장이 아닙니다. 그냥 정결한 일반 사람입니다. 만드는 데는 제사장이 관여하지만, 그걸 모으고 뿌리는 건 다 그냥 백성들 중에 정결한 사람이 하는 겁니다. 9절과 18절, 19절에 나오는 그 ‘정결한 자’, 이건 다 일반 백성입니다. 제사장은 거기에 직접 관여하지 않지요. 아무리 제사장이라도, 인간이 죽음에 대해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다거나, 함부로 죽음 자체를 다룰 수 있다고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죽은 사람을 섬기는 게 아니라, 다만 살아 있는 사람을 돕고 섬길 수 있을 따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잘 살펴보면, 죽은 자에 대한 어떤 종교적인 의식이 하나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걸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단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정결함만 문제될 뿐이지요. 우리의 신앙이 죽은 사람에게 뭔가 영향을 끼친다든가, 반대로 망자가 현실 세계에 영향을 끼친다든가, 그가 어딜 돌아다닌다든가, 이런 일은 근본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겁니다. 죽음 자체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지만, 죽은 사람은 아무런 힘이 없는 것이지요. … 삶과 죽음의 경계가 결코 흐려지거나 극복될 수 없다는 것, 제사장이든 뭐든, 인간이 그 경계선을 오고가며 무슨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죽음을 다루려고 하는 모든 행위가 인간의 허세일 뿐이라는 것, 죽음은 마지막까지 원수이고 반드시 폐하여질 원수이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 승리가 이루어진다는 것, 여러분 그것이 오늘 본문을 비롯한 성경의 중요한 메시지임을 우리는 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나는 생명이다. 내가 생명의 근원이며, 생명의 주다. 오직 내 안에 거할 때만 생명을 얻는다. 구원은 생명을 얻고 그것을 풍성히 누리는 것이다. 내 백성은 그가 누리는 생명으로 세상과 구별되며, 나를 섬기고 예배하는 백성만이 죽음을 이긴 영원한 생명을 이 땅에서 누린다. … 너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미 정결해졌고, 그 부활의 능력이 되시는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다. 그래서 죽음의 권세가 아닌 생명의 권세 안에 너희가 있다. 그것을 믿고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라. 그러면 사망을 이루는 세상 근심에서 자유 할 수 있다. … “암송아지의 재를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3~14) … 예수 믿는 너희는 이미 생명을 가졌고, 살아서 믿었으니 영원히 죽지 않는다. 이것을 온전히 믿고, 예수 안에 거하기를 힘써라. 생명의 영이신 성령을 항상 사모하고, 생명의 충만함을 누리며 살아라. 그것이 구원이며, 영생이다. 할렐루야!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직 예수만을 생명의 주님으로 여기며, 그분을 의지함으로 생명을 누립니다. 주님만이 죽음을 이기셨고, 영원하고 새로운 생명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만, 그에게 붙어 있고 성령을 통해 그의 생명을 공급받을 때만, 생명의 충만함을 누립니다.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이해하고, 그분을 신뢰하여 그분의 말씀 안에 거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와 생명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다 실질적으로 생각하고, 믿고 받아들이고, 더 실제적으로 그 주님을 가까이 하셔야 합니다. 그냥 그런가보다, 이게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믿고 그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 여러분 스스로 잘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과연 나는 지금 온전히 생명을 누리고 있는가? 주님 안에서 두려움 없이 지금 이 순간을 기쁘게 누리고 있는가? 단지 주변의 상황이 형통하고 만족스러워서가 아니라,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이 나를 붙잡고 계셔서, 끊임없이 생명의 능력을 공급하고 계신다는 사실이 믿어지고 경험돼서, 지금 이 순간을 하나님의 선물로 누리고 있는가? 무엇이 우리의 기쁨이고 능력인가,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어제 박정순 집사님께서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갑자기 쓰러져 몸져누운 남편을 24시간 돌보며 살아온 인생이 13년이라고, 정말 가시밭길을 걸어온 인생인데, 가시에 찔리지는 않았다고, 정말 물 위를 걸어온 인생인데, 물에 빠져 죽지는 않았다고. 그런 고백을 하시는 걸 제가 들었습니다. 저는 그저 말로 하는 그 생명의 삶을, 집사님은 이미 삶으로 살아내고 계셨던 것이지요. 다른 무엇을 의지한 삶이 아니라, 생명의 주 되신 하나님을 매순간 놓치지 않고 살았기에 가능한 삶의 고백입니다. 우리도 스스로에게 질문해봐야 합니다. 혹시 내가 누리는 만족이 하나님의 생명과 아무런 관계없는 것들이고, 그래서 마치 그것들이 내 생명을 주관할 수 있을 것처럼 여기며 거기에 매여 살지는 않는가, 늘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빠져서,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지금 이 순간의 생명을 빼앗기고 살아가진 않는가, 깨어 분별하는 믿음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밤새 수고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주님이 다가가서, 더 깊은 곳에 한 번만 더 그물을 내려 보라고 하십니다. 주님 말씀대로 그물을 던져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았지요. 여러분, 그 다음 얘기가 어떻게 됩니까? 베드로는 거기서 뭘 하게 되지요? 네, 그 그물과 배를 다 버려두고 주님을 따릅니다. 그 많은 물고기를 소유하는 데서가 아니라, 주님 안에, 주님을 따르는 그것 안에 생명이 있음을 베드로는 깨달았고, 그 사실을 보는 눈이 그 순간 열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물고기가 아닌 주님을 좇은 것이지요. … 여러분, 만약 우리가 같은 경험을 한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 같습니까? 오랜 수고 끝에 아무것도 얻지 못한 자리에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다면, 여러분은 그 다음에 어떻게 하겠습니까? … 혹시 우리는 베드로처럼 물고기와 그물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잡은 물고기 숫자를 세고, 기뻐하며, 그것을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좀 더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내일도 다시 주님 말씀하셨던 그곳, 그물이 찢어진 바로 그곳에 여전히 그물을 내리고 있는, 그런 모습으로 우리는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여러분,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실 겁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일상 가운데 여러 놀라운 은총들을 베풀어 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거기에 매몰되어 또 다시 염려와 욕심에 매여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거기에 생명이 없고, 주님 안에 생명이 있으니, 주님을 영접하고, 따르며, 그의 말씀 안에 거하여 살라는 것이지요. … 제자들은 그 믿음으로 주님을 진정으로 따랐습니다. 그냥 ‘믿습니다,’ 하고만 산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들의 모든 운명을 부활하신 주님께 다 걸었다는 뜻입니다. 내 생명과 내 삶과 내 소망과 모든 것이, 오직 주님과의 관계에 달렸다는 사실에 집중하면서, 생명을 얻는 근심, 성경은 그것을 회개라고 하지요, 그 근심으로 세상 근심을 대신하며, 하루하루 살아냈다는 뜻입니다.
과연 인간이 그런 삶을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냐, 이 바쁘고 힘든 세상 속에서 도대체 그런 삶이 가능이나 하다는 말이냐, 혹시 저에게 반문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저도 그게 얼마나 힘든 싸움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당연히 저 역시도 항상 그렇게 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 싸움을 포기할 수는 없지요. 모두의 인생이 단 한 번뿐이고, 오직 나만이 생명을 선택할 수 있을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그 선택을 대신해 줄 수 없지요. 제 설교의 역할도 여기까지입니다. 오늘 말씀을 여러분이 충분히 이해하고 깨달아졌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생명의 주님께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십시오. 뭔가를 조금 더 소유하는 삶이 아니라, 죽음 이긴 생명을 이 땅에서 풍성히 누리는 일에, 지금 이 순간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 누리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사십시오. 우리가 영생을 살아낼 수 있는 그 길을,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친히 말씀해주실 것입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