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민수기 강해 21. 소금 언약

2022-04-27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5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 20220427 수요 성경 강해 ----------------------------- 민수기 18:1~32, 소금 언약 ​ ​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 첨부파일 num21 .mp3 파일 다운로드 ​ ■ 저희는 지난 17장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민수기 11장부터 이어져 온 이스라엘 공동체의 위기, 그것은 모세의 리더십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발과, 또 아론과 그 후손의 제사장직에 대한 레위인들의 도전, 그 중심에 고라의 반역 사건이 있었는데요, … 그러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 심판과, 또 그 혼란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수습하시고 다시 질서를 바로 세우시는지 지난주까지 살펴봤습니다. 아론이 향로를 들고 뛰어다니면서,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발생한 염병을 멈추게 했고요, 하나님은 그런 아론의 지팡이에만 아몬드나무의 싹과 꽃과 열매가 맺히게 하심으로써, 거룩한 제사장의 택하심을 다시 한 번 굳게 확증하셨습니다. … 이어지는 오늘 18장의 말씀은, 그 이후 하나님께서 아론과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데요, 제사장과 레위인의 역할, 그리고 그들의 양식으로 돌려질 제물의 몫에 대한 설명이 주로 나옵니다. 레위인에 의한 심각한 반역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레위 지파의 소명도 유효하다, 하는 것이 먼저 인상 깊게 다가오는 그런 부분입니다. 사실 18장은 17장 마지막 부분에 나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 섞인 외침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처럼도 들립니다. 하나님의 성막에 가까이 가는 사람마다 다 죽게 될 텐데, 그런 성막이 우리 진영 한가운데 있으니 우리가 망한 것 아니냐, 토로했지요.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성막이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이제 명확하게 드러났고, 성막이 가까이 있는 것 자체를 백성들은 두려워하게 된 겁니다. 관계가 어그러지면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짐이 되지요.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의 심판으로 여길 수밖에 없도록 만듭니다. 오늘 본문은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지요. 백성들의 두려움을 진정시키면서, 제사장과 레위인이 왜 필요한지, 분명하게 정리해 주십니다. “두려워할 것 없다, 그래서 제사장과 레위인을 구별해 세운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주신 각자의 부르심을 따라, 서로를 귀히 여기며,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라, 하는 그런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내용이 좀 많은데요, 크게 보면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각각의 부분들은 모두 다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이르시되’라는 구절이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특징이 있어요. 1절에서 7절까지, 또 8절에서 19절까지, 20절에서 24절까지, 이 세 부분은 모두 다 아론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시작되고, 마지막 25절부터 32절은 모세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나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아론에게만 따로 말씀하시는 경우는 사실 성경에서 아주 극히 드문 경우이지요. 보통 항상 모세의 중재를 끼고 아론에게 말씀하셨는데요, 앞서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죽었을 때가 유일한 예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론이 대화의 주체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아론에게 말씀하셨다고 세 번 반복되고, 모세는 한 번이지요. 그만큼 오늘 본문은, 아론과 그 후손의 제사장 직분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과 존중이 담겨 있는 건데요, 그 속에 어떤 또 다른 더 깊은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는지, 오늘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의 전체적인 내용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먼저 1절부터 7절까지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감당할 각각의 책임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막과 관련된 죄, 그리고 제사장 직분과 관련된 죄를 책임지는 것이 아론과 그 후손 제사장들 몫입니다. 제사를 통해 죄를 처리해야 하는 거지요. 그리고 그 일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레위 지파를 따로 세워 그들을 돕게 하십니다. 제사장의 일을 돕고, 성소를 잘 지키고, 그럼으로 백성을 지키는 일이, 모두 다 레위인들의 몫입니다. 하나님은 제사장과 레위인의 이런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본문에 특별한 동사 하나를 반복해서 사용하고 계신데요, ‘함께 하다,’ ‘연합하다,’ 라는 의미를 가진 ‘라와’(문법적으로는 ‘라바’)라는 동삽니다. 2절에 보시면, “너는 네 형제 레위 지파, 곧 네 조상의 지파를 데려다가 너와 ‘함께 있게’ 하여”라고 되어 있는데요, 여기 ‘함께 있다’라는 동사가 바로 ‘라와’(라바)이고, 바로 이 동사로부터 ‘레위’라는 명사가 파생되어 나옵니다. ‘라와’에서 ‘레위’가 온 거지요. 그리고 이 동사는, 오늘 4절에도 다시 나오는데요, “레위인은 너와 합동하여”라고 할 때, ‘합동하다’도 바로 ‘라와’입니다. 여러분, 야곱의 셋째 아들 ‘레위’, 다 아시지요? 모세와 아론, 제사장, 레위인이 다 이 ‘레위’라는 사람의 후손, 그래서 레위 지파인데요, 이 ‘레위’라는 이름의 뜻이 뭐였는지 기억나시는지요? 네, ‘연합’이라고 했습니다. 본래는 그 남편 야곱의 사랑을 받아서 정말 남편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 싶었던 아내 레아의 바람이 담긴 이름이었지요. 하나님은 그 이름을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연합을 위한 부르심으로, 그 후손을 새롭게 구별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다른 의미의 연합이 나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 이 둘이 먼저 참으로 ‘레위’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너희 둘이 먼저 연합해라, 합동해라. 과거의 잘못은 기억하지 말고, 너희들은 연합해야 한다. 그 이름이 ‘연합’ 아니냐. 그래야 백성이 산다. 그래야 하나님과 백성들이 온전히 ‘레위’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5절 말씀이지요. “이와 같이 너희는 성소의 직무와 제단의 직무를 다하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미치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화목 된 관계가, 다름 아닌 제사장과 레위인의 연합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 단락에서 또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해야 할 표현은, 이어지는 6절과 7절에 반복해서 사용된 ‘선물’[마타나흐]이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아론에게, 그 제사장 직분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7절에서 말씀하고, 또한6절에서는, 그들을 도와 하나님의 일을 함께 감당하는 그 레위인을 향해서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말씀합니다. 직분도 선물이고, 동역자도 선물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뜻이고, 서로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온전히 연합하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 바로 이 ‘선물’이라는 단어가 이후에도 계속해서 본문에 등장하는데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린 헌물을 가리키는 명사로도 사용됩니다(29절). 바로 그 헌물 중 일부가 제사장과 레위인의 일용할 양식이 된다는 거 아닙니까?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이 공동체를 전체 하나로 연결하는 단어가 바로 ‘선물’인데요, 이 부분은 조금 있다가 다시 다루기로 하고요, 8절부터 19절까지, 두 번째 단락에서는, 아론과 그 후손 제사장들에게 돌려질 몫에 대해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 지금 광야에서도 그렇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아무런 기업도 받지 못하지요. 백성들이 삶의 터전으로 땅을 각자 분배받을 때, 레위 지파 사람들은 단 한 평의 땅도 가지질 못합니다. 사실 이건 대단한 일이지요. 자기 삶의 근거를 가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먹고 사는 데 필요한 모든 일용할 양식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해서 사는 것인데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 가운데 일부를 구별하여 그들에게 주게 됩니다. 여기에 대한 내용이 본문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본문에는 총 대여섯 가지 정도의, 제사장 몫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드린 제물, 소제, 속죄제, 속건제 등의 제사 제물 중에서, 번제단에서 태우지 않은 것들이 제사장 몫입니다. 아울러 거제물과 요제물이라고 해서, 아예 처음부터 태우지 않고 드리는 제사의 제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드렸는데 태우지 않으면, 제사장에게로 돌려집니다. … 또한 백성들이 드린 첫 소산의 예물도 제사장들에게 돌립니다. 본래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처음 난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그래서 그걸 구별하여 드림으로써, 생명의 주님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라고 하셨는데요, 그것이 곡식이든 열매든 가축이든 사람이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첫 생명은 무조건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들을 창조하시고 죽음에서 구원하신 분으로서,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하냐면, 하나님은 심지어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수 없는 부정한 짐승조차도, 그것이 첫 새끼를 낳으면,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십니다. 그건 너의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만 율법적으로 부정하여 직접 드릴 수가 없으니, 정결한 짐승으로 대신 드립니다. 그걸 ‘대속’이라고 하는 거지요.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첫 생명은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지요. 사람을 직접 드릴 수 없으니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각 집안의 장자를 드리는 대신에, 은 다섯 세겔로 대속해서 드려야 합니다. 생명은 결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며, 우리가 소유할 어떤 대상도 아니라는 것, 그것은 다만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총일 뿐이라는 것이 성경의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어쨌든 이것을 고백하여 드리는 첫 소산이 또한 제사장 몫입니다. … 아울러 백성들이 특별하게 하나님께 드린 것들, 어떤 규례나 의무의 차원에서 드린 게 아니라, 그냥 드리고 싶어서 자원하여 드린 특별한 제물도 제사장의 일용할 양식이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중에 다시 나오겠지만, 레위인들이 받은 몫의 십일조 역시 제사장의 몫입니다. … 어떻습니까, 여러분, 제사장의 몫이 꽤 많지요? 네, 땅이 없고, 철저하게 의존된 삶을 살아서 그렇지, 부족함이 있는 그런 삶은 아니었을 겁니다. 이어지는 21절부터 24절까지에는, 레위인의 기업이 되는 것은 무엇인지가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번엔 레위인들인데요, 그들 역시 제사장과 마찬가지로 가나안 땅에서 아무 기업이 없습니다. 그런 그들의 일용할 양식은 뭐라고 나옵니까? 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가, 이 레위 자손들의 양식이 됩니다.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로만 살아가야 하는 그들 역시도, 결국 하나님께 의존해서 사는 존재입니다. … 사실 레위인은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속물로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이지요? 여러분 기억나십니까?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들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데, 그 대속물로 레위인이 하나님께 구별되어 바쳐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당연히 레위인의 생명을, 생계를 담당할 책임이 생기는 거지요. 자기네 장식 대신 레위인들이 하나님께 바쳐져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십일조가 레위인들의 양식이고, 25절 이하 마지막 단락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레위인이 백성들로부터 받은 십일조 가운데, 다시 그 십분의 일은 제사장의 몫으로 드려집니다. 십일조의 십일조가 제사장 몫인 겁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 전체의 내용인데요, 말씀드린 것처럼 제사장과 레위인은 어떤 의미에선 부족함이 없는 삶을 약속받았습니다. 땅이 없어서 그렇지, 일용할 양식 자체는 특별히 모자람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잘 믿는다면 말입니다. … 물론 당시 다른 고대 사회에서의 제사장 지위를 생각하면, 성경의 제사장은 세상적으로 참 별 볼 일 없는 자립니다. 여러분, 영화나 드라마 같은 거 보셔서 다 아시겠습니다만, 고대사회에서의 제사장은 어떻습니까, 대부분 귀족이고, 왕족이지요. 특히 고대에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왕이 제사장을 겸하기도 했습니다. 말 그대로 가장 높은 계급에 속하지요. 더구나 모든 고대의 신전은 그 배후에 넓은 토지가 다 딸려 있습니다. 여호와의 성막처럼, 그냥 작은 신전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게 아니지요. 큰 토지와 많은 노동력을 소유하고, 그래서 엄청난 권력과 경제력을 가진 지배층이 바로 제사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제사장은 다릅니다. 그들은 영원히 땅을 가질 수 없고, 철저하게 백성들의 삶에 기대어 살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 백성들과 연합된 삶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백성들이 풍성하면 제사장도 풍성하고, 그들이 가난하면 제사장도 가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하나님 안에서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사느냐, 거기에 제사장의 운명도 달려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서로가 하나님 안에서 ‘레위’(연합)되어 있는 겁니다. 이런 제사장의 삶에 대해 오늘 본문은 이렇게 요약합니다. 본문 20절인데요,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너의 기업이니라.” 아멘.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라는 것은, 다시 말해 그들이 기대어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도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은혜요, 은총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사장의 기업이 하나님인데, 그 기업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고, 그들이 드린 예물입니다. … 제사장을 향한 이 언약, 이걸 19절에서는 소금 언약이라고 명명하셨는데요, 영원불변의 언약이라는 뜻입니다. 제사장의 일용할 양식을 채우시는 이 언약을 하나님이 지키시려면,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지키시고, 돌보실 수밖에 없지요. 단지 제사장과 레위인의 삶만 하나님께 달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요, 나의 분깃입니다.” 하는 이 고백은 단순히 제사장이나 레위인의 것으로만 한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하게 됩니다. 처음엔 제사장만 이렇게 고백했겠지요.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같은 고백을 하게 됐다는 것을, 시편이나 다른 예언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찬송가 435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도 있지요. 비단 제사장만이 아니라,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같은 고백을 하게 된 겁니다. 하나님이 내 기업이요, 분깃이다. 내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 달렸다. … 비록 제사장처럼 모든 일용할 양식을 오로지 하나님께만 의존해서 사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내 생명의 주님이 하나님이시고, 내가 누리는 이 하루하루의 삶과 일용할 양식과 내가 관계 맺고 사는 많은 사람들과 내게 주어진 일과 그 모든 것들이 오롯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 제사장은 이러한 삶의 일종의 거룩한 증거물이자 하나의 표상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님이시며, 우리의 기업이라는 사실을 맨 처음 보여준 어떤 원형, 살아있는 증거가 바로 제사장입니다. 백성들은 제사장을 보면서 자신들의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확인했고, 제사장이 성막에서 살아내는 삶을, 일상에서 살아내고자 노력했던 것이지요. 우리 성도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성도는 결국, 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는 존재입니다. 내 권리나 내 소유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이요, 은혜라는 차원에서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의 생명과, 내가 먹고 사는 일용할 양식과, 내가 감당하는 일과, 내가 만나는 사람,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러분은 아멘이십니까? 내가 마시는 공기와 물과, 내가 딛고 사는 땅과 흙이, 결코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고, 또한 모든 먹거리를 자라게 하는 햇빛과 비가 전부 다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 숨 쉬게 된 것이 결코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며, 또한 나의 생존에 필요한 가장 근본적인 것들이 다 내 노력과 무관하게 주어진 은혜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 그들이 곧 성도이며, 그것을 정말 마음 깊이 받아들여 삶으로 고백해내는 사람들이 다름 아닌 제사장의 삶, 하나님의 자녀 된 삶인 것입니다. 전도서에 보면 솔로몬이 이렇게 노래하지요.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알았다.”(전 3:13)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다.”(전 5:19) … 솔로몬은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에, 어느 순간 참으로 눈을 뜨게 됐습니다. 비록 만인을 다스리고, 만물의 주인처럼 가장 높은 곳에 올라앉았지만, 그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자신의 그러한 권세가 아니라는 것, 그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솔로몬의 고백 속에 아주 독특한 것이 이런 거지요. 비록 인생이 수고와 땀과 눈물로 얼룩진, 어떤 하나의 무거운 짐과 같은 것이지만, 솔로몬은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삶의 수고를 통해 어떤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고, 또 나의 그런 수고를 통해 누군가는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또 다른 은혜의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같은 고백이면 좋겠습니다. 내가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기쁨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내가 가진 재물과 부요함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게 진정으로 믿어지고 고백되기를 축복합니다. 여호와는 내 기업이요, 내 분깃입니다, 하는 이 고백의 밑바닥에는, 우리 자신의 삶을 나의 어떤 소유나 권리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그 선물 같은 일상을 어떻게 하면 빼앗기지 않고, 그저 무거운 짐으로만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선물로 온전히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는 고민하게 되는 겁니다. … 요즘 저는 아침마다 저도 모르게 항상 그런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선물로 주신 이 하루를 참으로 선물답게 누리고 싶습니다. 모든 것을 값없이 주신 하나님을 기뻐하고 신뢰하며, 순간순간을 감사로 채우게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선물에 넉넉하신 하나님을 닮아, 저도 모든 것을 나누며 살 수 있게 인도해 주십시오.” 그런 기도를 아침마다 매일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삶이 조금 더 깊어져가지 않나 싶기도 한데요,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요, 나의 분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로 가득합니다. 내 생명도, 일용할 양식도, 내 곁에 있는 사람들도, 또 내가 감당하는 일도 모두 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늘 기쁘게 경험되고 고백되시기를 바랍니다. … 내 삶이 온통 하나님의 선물임을 우리가 인정할 수 있다면, 그러면 우리도 세상과는 많이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겁니다. 삶을 내 소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구별되겠지요. 무엇보다 매순간을 더 깊이 누릴 수 있을 겁니다. 나중을 위해 많은 걸 쌓아놓는 삶이 아니라, 지금의 생명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겁니다. … 많이 식상한 얘기지만, ‘선물’이라는 영어 단어 ‘present’에는 ‘현재’라는 뜻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매순간을, 찰나와 같은 이 현재를, 항상 은총으로 여기고 누릴 수 있다면, 성경이 말하는 그 제사장의 어떤 삶에, 우리도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며, 거기에 담긴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의 헌신을 기뻐하며 살게 되겠지요.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그걸로 행복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게 문제구나, 하는 걸 요즘 개인적으로 많이 느낍니다. 작은 고구마 하나를 먹어도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은총과 사람들의 노고와 지구의 헌신을 기억하며 먹고 살 수 있다면, 아마 우리 삶이 조금은 더 깊어지겠지요? 돌을 떡으로 만드는 어떤 능력에 미혹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용할 양식이 우리에게 충분히 주어졌다는 사실 앞에 늘 놀라고,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다면, 우리는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넉넉함을 닮아갈 겁니다. 그게 다름 아닌 거룩한 제사장의 삶이라고 본문은 말하는 거지요. 그 거룩한 삶을 꼭 기쁘게 살아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