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2022년 3월 20일 주일 설교)

2022-03-20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21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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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절 세 번째 주일 설교 ---------------------------------- 누가복음 3:1~17,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 ​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량으로 인해 도입부 음성은 없습니다. 원고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첨부파일 luke011(4)] .mp3 파일 다운로드 ​ (누가복음 강해 11) 본문 10절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을 삶으로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주까지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 이야기가 모두 끝나고, 이제는 예수님의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이 됐습니다. 그런데 그 시작은, 여러분이 다 아시는 것처럼, 세례요한의 등장부터지요. 요한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주의 사자가 그 아버지 사가랴에게 했던 말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고,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하게 할 거라고 했습니다. 그 준비가 어떤 것인지, 오늘 본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맨 앞부분인데요, 조금 장황하다 싶은 여러 역사적 인물에 대한 소개로 시작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1절부터 2절까지가 한 문장인데요, 로마의 황제는 물론 유대 총독과 여러 분봉 왕, 그러니까 하나의 왕국을 나눠서 통치하는 여러 왕들의 이름, 또 이스라엘의 대제사장 이름까지, 당시 나름 힘 좀 있다 하는 사람들이 꽤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긴 문장의 주어는 2절 중간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그리고 동사는 ‘요한에게 임했다’입니다. 나머지는 사실 다 배경설명에 불과하지요. 일종의 BGM 같은 겁니다. 그런데도 그 내용이 참 장황합니다. 배경이 장황하니 주어와 동사 찾는 게 쉽지 않을 정도지만, 우리는 찾고, 거기에 주목해야겠지요. 굳이 여기 나온 인물들에 대한 설명을 일일이 다 할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누가가 이렇게 자세히 기록한 이유에 대해서는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세례요한의 등장에 앞서, 왜 누가는 여러 통치자와 권력자들의 이름을 이렇게 먼저 길게 나열하고 있는 걸까요? 단순히 요한의 등장이 언제 시작됐는지, 그 시기만을 밝히고자 했다면 그냥 황제가 누구였는지 정도만 얘기해도 충분했겠지요. 앞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언급할 때 그것이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명을 따라 이루어졌다고 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누가는 이번엔 그러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는 디베료[티베리우스]라고 나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이은 두 번째 황제로, 그의 양아들이지요. 폭군에 공포정치로 유명하기도 했던 이 디베료는, 유대교 같은 이방인 종교에 특히 배타적인 입장이었고, 황제가 되고 얼마 되지 않아(주후 19년) 유대인들을 모두 로마에서 쫓아낸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당연히 유대 민족과는 긴장과 갈등 관계에 있었겠지요. 그리고 본디오 빌라도는 그런 유대인들의 반발을 억누르기에 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매우 잔인하고 난폭한 인물로서, 로마 입장에선 가장 까다로운 지역에 해당하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남쪽 지역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당시 로마 총독은 엄청난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지역의 군사, 사법, 종교를 두루 관장했고, 심지어 대제사장을 임명하고 해임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원래는 아론의 후손들만이 대를 이어 하도록 율법이 엄히 규정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말 그대로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얘깁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의 북쪽, 갈릴리 인근 지역은 분봉 왕들이 다스렸는데요, 우리가 잘 아는 헤롯 대왕,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의 그 헤롯왕의 아들들이 나눠서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 역시 로마 황제의 임명을 받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본문을 여는 이 긴 나열에 함축된 의미가 어느 정도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로마의 권세와 억압이 그 어느 때보다 기세등등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과 삶 전반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지요. 지난주 2장의 배경이 유대인의 유월절이었습니다만, 해방과 독립을 상징하는 그런 유월절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 참 무색한 상황입니다. 비록 자기 땅에서 살고는 있지만, 실상은 여전히 노예 상태인 거지요. 애굽이 아닌, 바벨론이 아닌, 자기 땅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겁니다. …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저항도 여기저기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더 극심한 로마의 억압을 견뎌야 했지요. 바로 그런 역사 속으로 예수가 오시고, 나타나신 겁니다. 로마의 통치와 힘이 가장 깊고 두드러지게 미치던 때, 그리고 메시아의 오심과 구원을 갈망하는 백성들의 염원이 또 그만큼 높아지고 있던 때 예수님이 등장하셨고, 그 시작은 다름 아니라, 빈들에 있던 세례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이었다고, 오늘 누가는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메시아의 오심이, 하나님의 구원이, 빈들에, 광야에 머물러 있던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는 오늘 이 말씀에 먼저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시작되는가, 그것은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것을 통해서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강력하게 들려온다는 것, 그건 결코 가벼운 사건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온다는 것은,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어떤 일이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말씀이신 예수께서 세상 가운데 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빈들, 광야는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그리고 그 말씀을 분별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잡다한 소리들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지요. 힘과 권력의 소리, 돈과 욕망의 소리, 인간과 미디어의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습니다. 대신 평소에는 들을 수 없던 소리들이 들립니다. 극도의 고독에 내몰린 내 내면에서 나오는 진짜 나의 소리, 자연과 생명의 소리, 바람과 성령의 소리, 온갖 소리가 들려옵니다. … 아울러 광야는 오직 생존 그 자체에 몰입하게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요한은 거기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낙타털 옷을 입고 살았다고 하지요. 뭔가를 소유하거나 미래를 준비하는 삶이 아니라, 지금 당장의 생존에 집중하고, 그것을 온전히 하나님께만 의존하는 그런 곳이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가장 예민하게 경험되는 곳이 바로 광야이고, 그래서 더 하나님과의 소통에 공을 들이게 되지요. 거기에 내 생존이 달렸다는 것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 히브리어로는 광야라는 명사와 말씀이라는 명사의 어원이 같다, 하는 얘기도 들어보셨을 겁니다. 말씀은 ‘다바르’이고, 광야는 ‘미드바르’이지요. 요한은 일찍부터 ‘미드바르’로 나가 살았고, 하나님의 ‘다바르’를 듣기 위한 영적인 에너지를 충분히 축적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랜 세월 동안 침묵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 요한이 먼저 세상으로 나옵니다. 요단강 근처로 와서 사람들에게 세례라는 의식을 선포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제 곧 메시아가 오시는데, 그분의 구원,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회개의 세례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강물 속에 집어넣었다 빼기를 반복했습니다. … 왜 굳이 사람을 물에 잠기게 했다가 다시 꺼내는 세례, 침례의 방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켰는가, 그 이유나 기원을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죄나 어떤 잘못을 물로 씻는다는 것은 고대 근동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문화권에 널리 퍼진 종교적 의식, 개념인데요, 세례는 그것과는 좀 다르지요. 아예 물 안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방식입니다. 더구나 내가 스스로 씻는 게 아니라, 세례를 ‘받는 것,’ ‘씻겨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침례의 형태를 초대교회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만, 그 이전까지는 사실 이런 전통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구약에도 세례에 대한 얘기는 전혀 없지요. 그래서 지금도 학자들이 그 기원과 의미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만, 여전히 그 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가 바로 이 요한의 세례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요한이 직접 답을 주고 있지요. 과연 이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지, 세례를 통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세례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향한 그의 메시지에서 우리는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 애써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이들에게, 요한은 오늘 아주 유명한 독설을 날리는데요, 우리 같이 7절부터 9절까지 함께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아멘. 이 부분에 대해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아주 실감나는 번역을 했습니다. “뱀의 자식들아! 이 강가에 슬그머니 내려와서 무엇을 하는 거냐? 너희의 뱀가죽에 물을 좀 묻힌다고 하나님의 심판을 비켜갈 것 같으냐? 바꿔야 할 것은, 너희 겉가죽이 아니라 너희 삶이다!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내세우면 다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다. 흔해 빠진 것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너희 삶이다. 너희의 삶은 (살아서) 푸르게 꽃피고 있느냐? 말라죽은 가지라면 땔감이 되고 말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정말 실감나는 이야기지요? 우리가 여기서 가장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은, 지금 세례를 통해 요한이 강조하는 것은 단지 구원과 회복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메시아가 오시는데, 그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시는 분일뿐만 아니라, 우리를 심판하러 오시는 분이라는 것, 이게 핵심입니다. … 그래서 세례 자체보다 중요한 게 회개의 열매를 맺는 것, 삶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메시아를 영접하는 이들이 해야 할 진짜 준비입니다. … 다시 말씀드립니다. 세례요한은 메시아의 오심을 심판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도끼에 찍혀 불에 던져진다는 말이 그 뜻이지요. 메시아는 심판하러 오신다는 겁니다. … 나는 그분의 신발 끈 풀기도 감당할 수 없다고 하면서, 그리스도가 오셔서 뭘 할 거라고 이야기합니까? 자기 타작마당에서 키질을 하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신다고 합니다. 심판이지요. 알곡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쭉정이는 심판입니다.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그런 구원을 위한 메시아는 없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요한의 메지지는 분명합니다. 메시아가 너희를 구원하러 오신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너희는 도리어 심판의 대상이라는 거지요. 피해자 코스프레는 그만 좀 해라. 로마가 망하는 게 아니라 너희가 먼저 망한다. 로마를 심판하러 오는 게 아니라 너희를 심판하러 메시아가 오신다. 너희는 독사의 자식이다. 너희를 향한 심판의 도끼날이 이미 나무뿌리 위에 놓여 있으니, 지금 당장 돌이켜야 한다. 거기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명함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다. 오직 너희의 삶이 중요할 뿐이다. … 이게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시키는 세례의 의미라고, 요한 스스로가 설명합니다. 참으로 충격적인 메시지이지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 역시 깊이 새겨들어야 할 메시지입니다. 주님의 오심이, 그의 구원이 과연 우리에게도 구원일지, 분명 심판인데, 그걸 우리는 구원이라고 착각한 채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아닌지, 정말 도끼날이 우리 삶에 잇대어 놓인 것은 아닌지, 저와 여러분 각자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일입니다. 요한의 이런 메시지 앞에서 사람들은 당황하며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여러분, 우리도 한 번 해 봅시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 사실 이건 참 답답한 질문이기도 하지요. 무엇을 돌이켜야 하는지, 어떤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지 모를 만큼, 깨어 있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모르면 물어봐야지요. 하나님, 도대체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면 주님의 오심이 저에게 구원이 될 수 있을까요? 임박한 하나님나라 앞에서 저는 무슨 준비를 해야 할까요? 물어봐야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요한이 그 답도 말해줍니다. 어떻게 하라고 하지요? 네, 11절 이하에 보니까,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주고,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이 답이 여러분에게는 어떻게 들리시는지요? 소망이 되십니까, 아니면 막막해지십니까? … 사실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하는 이 질문은,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던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 말라기가 선포한 말씀 앞에서도, 그들은 똑같이 질문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말 3:7) 그때는 말라기 선지자가 뭐라고 했냐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을 멈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십일조와 봉헌물을 너희가 다 도둑질했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한 번 시험해봐라, 하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요한은 전혀 다른 얘기를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세례를 받기 위해 요단강까지 나왔던 사람들의 문제는 그런 게 아니었던 거지요. 아마 그들은 나름 열심히 하나님께 드린다고 자부하는 삶을 살아왔을 겁니다. 실제로 나중에 예수님도 말씀하시잖아요? 너희는 정말 별의별 십일조도 다 하는구나, 박하, 회향, 근채처럼, 정말 사소한 향신료의 십일조까지 다 드리면서도, 공의와 사랑은 버렸다고 말입니다. 지금 요한도 비슷하지요. 옷 두 벌 있으면 없는 자에게 나눠주고, 먹을 것이 있다면 없는 자에게 나눠주라고 합니다. … 여러분 먹을 것에 부족함이 없으십니까? 그러면 나머지는 나눠주는 일에 힘쓰며 사십시오. 혹시 옷은 몇 벌 있으십니까? 사실 이게 지금 문제지요. 예전에도 한 번 말씀드린 것 같은데, 한 의류업체에서 조사해봤더니 평균적으로 남자는 120벌, 여자는 180벌 정도 가지고 있다는데요, 여러분 이거 어떻게 하지요? 좀 큰일 아닙니까?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여기서 말하는 옷은 겉옷이겠다, 근동 사람들이 거리나 들판에서 일종의 담요처럼, 간이천막처럼 사용하는 그런 큰 겉옷일 거다,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요, 만약 그렇다면 얘기가 좀 달라지겠지요. 보통 당시 서민들은 겉옷은 다 하나면 족하다고 생각했으니, 그 정도면 우리도 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요, … 그런데 제가 원문을 찾아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단어는 그런 겉옷[히마티온]이 아니에요. 안에 입는 속옷을 의미하는 [키톤]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렇다고 이게 우리가 입는 그런 underwear는 아니고, 바로 그 위에 입는 옷, 하얀색 원피스처럼 생겨서 무릎까지 내려오는 헐렁한 옷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그냥 일상복 정도인, 그런 기본적인 옷이지요. (성경에 속옷으로 번역된 단어 거의 대부분이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 옷이 하나로 족하다는 겁니다. 이건 어려운 얘기거든요.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옷 한 벌로 살지요? 여러분,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 중간에 열두 제자를 파송하시면서 뭐라고 하시냐면,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눅 9:3)고 하시는데요, 그때도 이 속옷 얘길 하십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지금, 마치 순례자처럼, 파송 받은 제자처럼, 옷은 한 벌로 족하니 나머지는 옷 없는 자에게 주라는 겁니다. 세상살이를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에겐 참 심각하지요. 말도 안 되는 말씀이란 생각까지 듭니다. … 그래서 이 본문을 가지고 만든 어떤 카툰, 짧은 만화가 있는데요, 어떤 무신론자가 하늘에 대고 크게 소리칩니다. “하나님, 거기 있으면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 좀 말해 주시오!”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립니다. “가난한 사람을 먹이고 집 없는 사람에게 집을 주고, 정의를 세워라.” 무신론자가 깜짝 놀라서 그랬다지요, “그냥 해 본 소린데요.” 그러자 하늘에서 다시 소리가 들립니다. “나도 그냥 해 본 소리다.” … 여러분, 요한의 이 메시지 앞에 우리는 얼마나 진지할 수 있을까요, 문제는 거기서부터일 겁니다. 그럼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삶의 목적, 어떤 태도를 가지면, 두 벌 옷이 있을 때, 그 중 하나를 옆에 있는 사람에게, 그 옷조차 없어서 벗고 있는 사람에게 나눠줄 수 있을까요? …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경우부터 생각해보면, 이런 거 아닐까요? 우리가 어디서 옷을 몇 벌 산 겁니다. 그런데 집에 가다가 노숙자 하나를 본 거예요. 옷은 다 찢어지고 금방 얼어 죽게 생긴 거지요. 그러면 여러분 나눠줄 수 있는 가능성이 좀 있겠지요? 나에게는 패션이지만, 그에게는 생존이니까요. … 그런 게 아니라면, 다른 경우도 좀 더 생각해보면 좋겠는데요, 여러분 만약 예수님이 정말 곧 다시 오신다고 하면, 오늘 본문처럼 이제 금방 주님이 오신다고 하면, 그러면 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내일 오시거나, 바로 오늘 밤 정말 주님이 오신다면 말입니다. 나의 종말과 우리의 종말이 그 정도로 임박한 걸 우리가 알고 살아간다면, 그리고 요한이 말한 것처럼, 이미 나무뿌리에 도끼날이 닿아 있는 걸 느낀다면, 그땐 아마 우리도 뭔가 비슷하게 할 수 있을 겁니다. 옷이 어떠냐,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요. 옷은 그냥 지금 당장 입을 것만 있으면 됩니다. 그게 얼마나 예쁜가, 그게 얼마나 나를 돋보이게 하는가, 그런 것도 상관없지요. 다만 오실 주님을 맞으러 나갈 옷 한 벌만 있으면 족할 겁니다. … 정말 그냥 유치한 얘기지만, 당장 우리가 내일 죽는다고 생각해보세요. 실제로 그럴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어떨까요? 옷은 얼마든지 나눠줄 수 있겠지요? 여러분, 이게 극단적인 얘기 같지만, 주님은 그 극단적인 얘기를 우리의 평범한 삶 속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면 그 극단적인 가정이 우리의 실제 현실이고, 우리는 모두 그 극단적 상황을 반드시 실제로 겪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며 살지 말라 하십니다. 그러면서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게 하라고 하시지요.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에 만족하고, 그것을 누리는 데 집중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옷이 두 벌 있다고 두 겹 겹쳐 입을 수는 없으니, 하나를 입는 것에 만족하고, 남은 것은 그것도 없는 사람에게 주고 살라는 겁니다. 내일의 삶에 대한 염려와 준비는 우리 몫이 아니라는 거지요. 하지만 우리는 내일과 모레, 다음 달, 내년, 10년 후, 30년 후, 50년 후, 그때 필요한 것까지 다 고민하고 준비하며 삽니다. 물론 그런 삶이 당연하고 또 지혜롭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소위 지혜로운 삶의 모습이 정말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지, 오히려 얼마나 하나님나라에서 멀어지게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게 하는지, … 얼마나 생명의 만족을 누리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불가능하게 만드는지, 우리는 또한 알고 있지 않습니까? … 우리는 내가 지금 당장 먹지 않아도 되는 음식을, 물질을, 이 다음에 먹기 위해 차곡차곡 쌓아둡니다. 나누지 못하고 저장해 두지요. 지금 당장 굶어 죽어가는 사람이 옆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나의 내일을 위해 쌓아두고 삽니다. 주님은 그게 믿음이 없어서, 들풀을 입히시고 까마귀를 먹이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주님의 심판이, 주님의 오심이 문 앞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요한도 마찬가지지요. 여기서부터 돌이켜야 한다는 겁니다. 요한이 무슨 다른 심각한 죄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게 아니지요. 우리의 믿음 없음과 깨어 있지 못함과 세상 정욕에 대해 돌이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요한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으려고 했던 사람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겠습니까? 그 먼 요단강까지 나와서, 율법에도 나와 있지 않은 세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세례까지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겠습니까, 아니면 아무 관심이 없는 세상적인 사람이겠습니까? 당연히 신앙에 깊은 관심이 있고, 나름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저와 여러분처럼 열심히 예배하고, 섬기고, 그랬을 거예요. 그런 그들이 오늘 이 요한의 메시지 앞에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우리와 비슷할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하는 질문이, “참으로 어찌할꼬?” 하는 탄식에 이르고 말았을 거예요. 정말 막다른 골목에 몰린 느낌이었겠지요. ‘세례만으로도 안 되는 거구나. 구원이 아니라 심판하러 오시는 메시아 앞에서, 우리는 정말 큰일 났구나. 삶을 돌이켜야 하는데, 돌이켜지지가 않으니, 우리가 가진 신앙이 다 헛것이구나, 너무나 두려워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세례를 받으러 나아 온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당시에 소위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들로 손가락질 당하던 부류지요. 세리와 군인, 둘 다 본문 맨 앞에 나왔던 그 로마의 권력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좋게 말하면 로마의 하수인이요, 심하게 말하면 로마의 개 노릇을 하던 그런 사람들, 정말 어디서부터 삶을 돌이켜야할지 막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포기하고 대신 세례를 택한 겁니다. 율법으로는 도저히 가망이 없으니까, 어떤 다른 대안이 있긴 할까,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요한에게 왔을 겁니다. 그리고 똑같이 물어보지요. “그러면 우리는,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 이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던 경건한 유대인들, 먼저 답을 들었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너네가 무슨 염치로 여길 오냐? 너네야말로 정말 큰일 났다.’ 그랬겠지요? 우리도 이렇게 탄식하게 됐는데 너희는 아예 소망도 없을 거다. 너흰 아예 독사라고, 당장 그 모든 삶을 그만두라는 얘기를 기대했을 겁니다. 그런데 요한이 뭐라고 하지요? 그런 얘기 일절 안 합니다. 그냥 계속 그렇게 살라고 해요. 군복 벗으라고도 안 하고, 세리 짓 때려치우라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세리에게는 그냥 세금 부과된 것만큼만 부과해라. 욕심 부리지 말고 부과된 것 외에는 착취하지 마라, 원칙대로 해서 먹고 살아라, 이야기합니다. … 군인에게도 똑같은 대답이지요. “군인이라고 힘으로 빼앗지 마라. 거짓으로 사람들 고발해서 뇌물 받지 말고, 너희가 받는 급료로 족한 줄 알고 그걸로 먹고 살아라.” 당시 군인들에게는 그만큼 힘이 있었다는 건데요, 예수님이 예를 드신 것처럼, 누구든지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십 리를 동행해라(마 5:41)고 하는, 그 억지로 가자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군인입니다. 아무나 붙잡고 이거 좀 들고 어디까지 가라고 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자신이 가진 힘을 가지고 누군가에게 갑질해서 뒤로 뭐 받지 말라는 거예요. 이건 전혀 뜻밖의 이야기입니다. 민족의 배반자요,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정말 당시로서는 그 직업 자체가 하나의 죄라고 여겨지던 그런 일인데, 그걸 그만두라고 요한은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처럼 메뚜기와 석청 먹으며 금욕적인 삶을 살라거나, 어디 성전에 가서 엄청난 속죄의 제사를 드리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일을 계속하되, 상식과 공의를 행하면 된다. 그게 전부입니다. … 물론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군인이나 세리나 힘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건, 단순히 그들이 악해서만은 아니지요. 법이 정한 그들의 급료가 지나치게 적고 비상식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비리를 저지르지 않는다면 정말 먹고살기 어려웠을 수도 있지요. 모자란 건 그들이 가진 힘을 통해서 적절하게 강탈해서 채우라는 거지요. 그러니 이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요. 하나님 앞에 완전히 자포자기했던 그들로선, 율법이나 전통의 기준에 맞추는 것보다는 훨씬 더 해볼 만한 요구입니다. 여러분, 요한은 각자에게 다른 답을 줍니다.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것, 지금 여기서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그런 회개의 열매를 요구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어떤 기계적인 답을 하는 게 아닙니다. 각자의 신앙과 삶 속에서, 어떻게 하면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 앞에 돌이킬 수 있는지, 각자에게 맞는 구원의 실마리를 던져 줍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앞의 4절에서 인용한 이사야 말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게 됐습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했었지요. … 여기서 높아진 산들은 스스로 경건하다 여긴 사람들의 마음일 겁니다. 나는 좀 남보다 괜찮다고, 메시아가 오시면 그래도 좀 칭찬도 받고 인정도 받을 거라고, 그렇게 높아진 마음들은 결국 낮아질 겁니다. 골짜기는 자포자기한 사람들의 마음이겠지요. 세리와 군인처럼 무너진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인데, 그들의 마음은 다시 돋우어져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릴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렇게 ‘모든 육체’가 주님의 구원을 보게 되는 것, 정말 ‘모든’ 육체가 돌이켜 심판의 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로 영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오늘 요한이 감당하고 있는 부르심이겠다, 저는 그렇게 이 구절을 이해해봅니다. 그럼 이제 저와 여러분이 묻고 답을 들어야 할 차례이겠지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앞에 직면해 있는 저와 여러분, 저 문 앞까지 다가와 있는 하나님나라와 종말 앞에서, 우리도 물어봐야 할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우리가 맺어야 할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무엇입니까?” 여쭤봐야 합니다. 요한은 없지만,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답을 해주시겠지요. 그건 저와 여러분 각자가 듣고 분별해야 할 겁니다. 남들이 들은 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오직 나에게 주시는 그 음성에 주목하고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 요한이 광야로 나가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는 것을 경험했듯이, 저와 여러분도 끊임없이 광야와 같은 순간들을 직면하며, 우리를 향한 주님의 메시지를 들어야 할 겁니다. 그 음성을 듣고 정말로 삶을 돌이켜야만, 우리에게도 하나님나라가, 주님의 오심이, 심판이 아닌 구원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교 서두에, 어떤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하면서,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됐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정말 그렇게 세상을 구원해내십니다. 기세등등했던 로마의 권세와 억압을 뒤엎어서, 또 다른 힘으로 그 권세를 꺾어서 세상을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나는 무엇을 하리이까?” 끊임없이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그들을 성령으로 새롭게 하심으로, 높아진 것은 낮추고, 낮아진 것은 높여서, 주의 오실 길을 예비하게 하심으로, 그렇게 하나님은 세상 권세와 세상 역사 속에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해 오셨습니다. 누가 황제가 되고, 누가 대통령이 되고, 누가 정권을 잡았고, 그 힘이 어디까지 미치고, 얼마나 기세등등한가, 여러분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핵심이 아닙니다. 다만 배경에 불과하고, 일종의 BGM 같은 거라고 했습니다. 그 배경 위에 연주될 메인 음악이 따로 있고, 그 바탕 위에 진짜 그림이 그려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무엇을 하리이까, 질문하고, 그 음성을 따라 삶을 고쳐서 주의 오심을 예비하는 삶, 그 하나하나의 삶들이 모인 것이, 바로 구원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 통치자가 바뀌고, 세상이 바뀌어서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삶이 바뀌어서 구원이 시작됩니다. 각자가 서 있는 삶의 자리에서, 욕심과 두려움에 이끌려 내일을 위해 열심히 쌓는 삶이 아니라, 그 내일을 친히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두려움 없이 정의와 사랑을 쌓는 거기서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믿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곧 오십니다. 반드시 그 날이 옵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싹 다 정돈하실 겁니다.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하여 심판하러 그가 오십니다. 그걸 정말로 믿는 저와 여러분이라면, 묻고 돌이켜야겠지요. “그러면 주님,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여쭤야 합니다. …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통해 그 답을 들으셨는지요? 부디 그러셨기를 바랄 뿐입니다. 알곡들이 모인 그 곳간에서, 저와 여러분이 함께 만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