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성령을 속이고" 2014년 7월 13일 주일 설교

2014-07-13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6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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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13 성령강림 제6주  ----------------------------------------------------- 사도행전 4장 36 ~ 5장 11절,  성령을 속이고 * 설교 음성파일 :  http://www.4shared.com/mp3/AT5XgQhyce/20140713__23___.html “성령을 속이고”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설교를 하기 전에 일단 먼저 5장 시작 부분에 여러분의 펜을 들고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적어 넣으시기 바랍니다. 성경 원문에 있는 단어니까 불편해 하지 않고 적으셔도 됩니다. 굳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이 본문이 철저하게 바로 앞 4장과 마치 하나의 본문처럼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는 장절의 구분이 사실 좀 잘못 되었다 싶은 상황인데요, 얼핏 보면 5장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관점에서 본문을 바라보지 않으면 아예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을 만큼, 뒤가 아닌 앞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실 연결은 된다고 하지만, 4장과 5장은 달라도 너무나 다른 분위기입니다. 마치 누가 일부러 연결된 하나의 몸통 사이에 억지로 다른 무언가를 가져다가 붙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 한 번 성경을 다시 보십시오. 5장 1절부터 11절을 통째로 떼어내고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그러니까 4장 37절 다음에 5장 12절이 바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 보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지요? 그만큼 이 본문의 이질감이 강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역으로 그 이질감이 바로 이 본문의 중요성을 대변해줍니다. 초대교회가 어떤 교회였는지, 그리고 그 교회가 이 일로 인하여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오늘 우리에게도 너무나 중요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들어 온 이야기이지만, 그럼에도 주의를 기울이고 두고두고 곱씹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내용은 매우 단순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이름의 부부가 지난 주 살펴본 바나바의 예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그 이전에 기록된 말씀에 나온 믿는 무리의 거룩한 행위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땅을 팔았고, 그 판 값의 일부를 가져다가 하나님께 드린다고 사도들 앞에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갑자기 아나니아에게 몇 마디의 말을 했고, 그 말을 듣자마자 아나니아가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뒤이어 조금 있다가 삽비라가 사도들에게 왔습니다. 이번엔 이게 전부냐고 삽비라에게 베드로가 물었는데, 삽비라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베드로의 책망이 있은 후 그녀 역시 엎드러져 혼이 떠나 죽게 됩니다. 너무나 놀랍고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혹시 헌금 떼먹은 일 있으십니까? 어릴 적이든 성인이 된 최근이든, 혹시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헌금, 떼먹은 일, 없습니까? (* 그런데도 용케 아직 살아 계시네요.) 언젠가 제가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만, 저도 어렸을 때 정말 많이 헌금을 ‘삥땅’해 먹었습니다. 제가 어릴 적 다니던 교회 바로 옆에 지하 오락실이 있었는데요, 그게 문제였습니다. 동네에 그렇게 아침 일찍 문을 여는 오락실이 많지 않았는데, 거기는 8시만 되면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니 늘 교회 가는 길이 행복했지요. 주님을 만나러 가는지, 오락실 주인아저씨를 만나러 가는지, 아무튼 그렇게 오락실을 들렸다가 교회를 가니 헌금이 제대로 남아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늘 주일 헌금의 십일조만 드리다가 한 번은 당시 주일학교 부장 선생님이셨던 아버지께 걸려 거반 죽도록 맞은 적이 있었습니다. 주일 헌금은 봉투 없이 드리니 확인이 불가했으나, 방학 때 시골에 다녀오며 친척 어르신들께 받은 돈의 십일조 때문에 꼬리를 잡힌 거지요. 매 앞에는 장사 없다고, 혹독한 매질 앞에서 그간의 모든 여죄를 다 자수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가혹한 피바람이 집안 전체에 불어 닥치고 말았습니다. 아마 제가 오늘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죽지 않고 아직 살아있는 것은, 돌아가신 저희 아버님께 그렇게 얻어맞았기에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까닭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저만의 문제는 아닐 겁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으시겠지요. 비단 어렸을 때만이 아니라, 지금도 혹시라도 그러신 분이 계실 수도 있는데, 물질의 문제에 관한 한 우리 모두 연약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말씀을 통해,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부디 정직함을 회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본질적으로 헌금의 정직성을 다루는 내용은 아닙니다. 겉은 분명 그 내용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단 저는 여러분이 이 본문을 가능하면 깊이, 오래 묵상하시기를 권합니다. 이것은 오래 전의 이야기로 끝나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론에 가서 말씀을 다시 드리겠습니다만, 다른 어떤 교회보다 이 문제는 우리 고백교회의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도 가능한 꼼꼼히 이 본문을 살펴 설교할 예정입니다. 왜 이것이 중요하고, 왜 이것이 우리 교회의 문제가 되는지, 부디 진지하고 심각하게 본문을 바라봐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살펴볼 것은 이 사건의 본질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부정직한 헌금은 겉모양이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성도들이 헌금을 당당히 도적질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그러한 도적질이 중요한 범죄가 아니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본질 상 오늘의 이야기와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가지 오해가 없기를 바라는 것은, 여러분이 이러한 사건이 오늘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극은 오늘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말한다면, 정말 조심스러운 부분이지만, 오늘날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더 큰 비극입니다.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되실 것입니다. 베드로의 아나니아를 향한 책망의 중심에는 3절 말씀처럼 성령을 속였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사실 그 방법은 매우 소극적인 것이었음을 먼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본문 2절에 보면 아나니아가 땅값의 일부를 감추고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 앞에 두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처음부터 아나니아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인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는 땅을 팔았고 일부만 드렸을 뿐, 그것이 땅값 전부라고 말한 적도 없습니다. 물론 나중에 사람들이 여러 모로 수군거리기는 했을 겁니다. “아나니아도 밭을 팔았대. 근데 액수가 좀 이상하다는 소문이 있어.” 이 정도였을 겁니다. 본문의 흐름으로 볼 때 아나니아가 밝히지 않는 한, 사건은 그냥 그렇게 지나갈 수도 있었습니다. 사실 오늘날 이렇게 헌금을 드린다면 정죄는커녕 칭찬을 받겠지요. 여러분 집이나 차를 팔아서 일부는 급한 데 쓰고 일부는 하나님께 드렸다면,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냥 그렇게 드리기만 했다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아나니아는 죽었습니다. 이 사건의 본질이 사람과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문제임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대목입니다. ‘감추다’라는 단어가 가지는 함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가지 주의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속일 수 있습니까?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우리가 속일 수 있습니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는 것처럼, 성령은 우리에게 속지 않으십니다. 그저 우리가 속일 수 있다고 착각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착각의 본질이 무엇이겠습니까? 속일 수 없음을 알면서도 속이려는 마음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일단 거기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 있습니다. 속을 수 없는 하나님을 인간 스스로 무시하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마치 우상처럼 대우하는 것이며, 거기에는 뿌리 깊은 교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3절 말씀에 이미 아나니아의 마음에 사탄이 가득하다고 기록하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속일 수 없는 하나님을 속이려는 행위는 본질 상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이며, 그것은 사탄이 그 사람 안에 들어가 그를 사로잡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교만은 여러 가지 악한 열매로 전이되고 확장되어 나타납니다. 그 중 하나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입니다. 본문 9절에 삽비라를 향해 베드로가 “왜 주의 영을 시험하려(‘페이라조’) 하느냐”고 말한 것에 주목해 주십시오. 사람이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것도 실은 말이 안 되지요. 같은 사람끼리도 시험해 본다고 하면 기분이 상합니다. 연인끼리 사랑을 시험한다? 그것도 불쾌합니다. 인격은 시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험은 주객이 엄격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학생이 교사를 시험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는 그것이 얼마나 큰일이냐, 작은 일이냐 와는 상관없이, 심각한 영적 문제를 야기합니다. 여러분, 지금 말씀드린 교만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 이것이 다름 아닌 죄의 본질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왜 넘어졌습니까? ‘반드시 죽는다’고 했는데 ‘설마’ ‘혹시’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신다고, 안 되는 거라고 분명히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눈 딱 감고 그냥 해버립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때문이며, 하나님을 테스트하는 겁니다. 이게 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닙니다. 시험의 대상이 아니며 그분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자기 말을 과장하기도 하고 허풍도 떱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홧김에 “너 이거 하면 죽어.”이렇게 협박하지만 사실 그거 해도 안 죽입니다. 못 죽입니다. 원래부터 그럴 마음이 없었지요. 그만큼 중요하고 심각하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과장이 없습니다. “너 이거 하면 죽어.” 하면 죽습니다. 이걸 오해해서 우리처럼 그냥 협박한 것이라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건 사탄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사람처럼 만들고, 마치 사람처럼 시험할 수 있고, 한 번쯤은 확인할 수 있다고 여기는 마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마음입니다. 그것은 나와 하나님 사이를 인정하지 않는, 그분이 나의 하나님이며, 나의 창조주이심을 인정하지 않는 근본적인 배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잘못한 것이 그것이지요. 그저 명령 하나 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한 것입니다. 이러면 큰일이 납니다. 연약하여 실수하고 넘어지는 것은 차라리 괜찮습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그것이 잘못이라고 회개하면 되는데, 마치 하나님이 그것을 죄도 아닌 것처럼, 그냥 넘어가실 것처럼 스스로 판단하고, 입을 싹 닦으면 안 됩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쪽으로 가면 안 됩니다. 이러면 내가 하나님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가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이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 된다고 여기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임을 인정하고 돌이켰으면 차라리 나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하나님을 시험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러면 다 끝입니다. 그런 신앙은 결국 사탄이 사로잡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함으로 받지 않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그는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로 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분을 두려워하는 신앙을 지키십시오. 그분의 말씀을 무겁게 받으십시오. 시험하지 말고 믿어 순종하십시오. 설사 실패하고 넘어지는 한이 있어도 그걸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는 죄악들을 나는 그저 하나의 실수요 착각이었다고 얼버무리지 마십시오. 그러면 사탄에게 놀아납니다. 아무리 죄를 범하고 아무리 못된 짓을 하더라도 오직 하나의 마음은 지키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으시며, 내가 범하는 죄가 예수를 죽인 바로 그 죄임을 인정하는 마음, 그 마음만은 지키십시오. 본문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두려워하면, 그러면 다시 기회가 있습니다. 부디 이 본질적인 신앙의 문제에서 실족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조금 더 이야기를 밀고 가 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시험했지만, 그것이 회개의 기회도 얻지 못하고 죽을 만큼의 일인지, 우리는 반문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을 시험하곤 합니다. 우리의 교만이, 우리의 완악함이 우리를 그렇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장 죽지는 않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안 되고 우리는 되는 그런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다른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었습니다. 오늘은 거기까지만 다루고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여러분, 인간이 짓는 죄 가운데 하나님께 용서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신 바가 있고,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히브리서의 말씀에도 그에 관한 언급이 있는데요, 혹시 여러분, 어떤 죄인지 기억하십니까? (*) 마가복음 3장으로 가봅니다. 20절부터 30절까지 읽습니다. “20.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21.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22.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23.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25.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26.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 27.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28.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29.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30.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아멘. 여기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영원히 사함 받지 못하는 죄’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29절은 그것을 요약하여, ‘성령을 모독하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여기 모독이라 번역된 헬라어 ‘블라스페메오’를 과거 개역 성경에서는 ‘훼방하다’로 번역해서,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옮겼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성령을 훼방하는 죄라는 이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간단히 마가복음 본문의 내용을 확인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한참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도 내어 쫓으시고 계셨습니다. 식사할 겨를도 없이 분주히 메시아로서의 사역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족과 친척들이 예수님이 혹시 미친 것은 아닌지, 정신이 나가서 이러고 다니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며 주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주님의 대적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예수가 바알세불, 그러니까 귀신의 왕에 사로잡혀서 그런 기적들을 행하고 다닌다. 예수가 미친 것이 맞다. 귀신 들려 있다. 그러니 얼른 데려가 정신 차리게 만들어라.” 이에 주님이 하신 말씀의 결론이 바로 29절입니다. 다른 죄는 다 용서가 되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죄, 성령을 훼방하여 정면으로 대적하는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이 말씀의 의미와 배경을 이해하시겠는지요? 그럼 이제 다시 사도행전 5장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수많은 성도들이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자신의 삶의 토대가 되는 경제적 원리를 뒤흔들어 하나님나라의 원리로 바꾸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일로, 말씀드린 것처럼, 안식년과 희년이라는 하나님의 가나안 땅의 경제 원리 안에 내포된 하나님나라의 원리이고, 이스라엘 역사상 지금까지 한 번도 이루어지지 못한, 그러한 하나님의 뜻이 비로소 이 땅에 성취된 극적인 순간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시며 하신 말씀, 누가복음 11: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는 말씀과 같은 상황입니다. 성령이 모든 인간의 죄의 현실을 꿰뚫고 들어오셔서, 인간의 공동체를 하나님의 나라로 전환시킨, 역사적인 상황인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하필이면 바로 이 때 이 부부가 사탄의 노리개가 되었습니다. 공동체 전부가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여 모든 사람이 하나님나라의 증인으로 서 있던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그렇게 밭도 팔고, 집도 팔 때, 옆에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교회의 대적자들이 뭐라고 말했을 것 같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사람들 완전히 미쳤다고, 완전히 똘아이들이라고 수군거리고 비난했을 것입니다. 주님이 미쳤다고, 귀신 들렸다고 이야기들은 것 그대로 말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바로 그 일을 주목하여 보고 있다가 결국 그 결정적인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정말 미친놈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지금 잠깐 정신 나간 사람들의 일이라는 것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거기 걸려든 것입니다. 이제 이 일이 그대로 간과되고 무시된다면, 수많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생기게 될 뿐만 아니라, 교회와 하나님나라 자체가 귀신의 일, 미친 짓이 되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나라와 성령이 싸잡아 모욕을 당하게 될 것이며, 교회를 통해 성취될 성령의 일들 역시 죄다 훼방되어,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어 버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겪으신 일과 오늘 초대교회가 겪은 성령을 훼방하는 일의 실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귀신들린 자로, 또 성령의 역사와 사악한 인간의 이기심을 한 패로 모는 일이 바로 그 일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이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부디 이와 같은 신앙의 문제에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반문하실 겁니다. 왜 그럼 오늘은 그런 하나님의 벌이 없느냐? 많은 분들이 이 본문을 과거의 이야기로 치부하며 그저 일벌백계의 징계였다고 말합니다. 어떤 분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통해 이제 막 세워져가는 교회의 순결성을 유지하시기 위해서 일벌백계로 삼으신 것입니다. 경고하신 거에요.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다워지기 위해서, 아니 교회가 교회다워지기 위해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거짓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밴스 헤브느 라는 나이든 어떤 미국 목사님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요즘도 교회 안에서 삽비라와 아나니아처럼 잘못한 사람들을 계속 심판하신다면, 교회마다 지하실에 영안실을 만들어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일벌백계라면 나는 예외일 수 있다는 것이고, 나는 좀 덜 할 수도 있다는 것인데, 이 문제는 그게 압니다. 하나님께서 일벌백계로 다스리는 경우가 물론 있지만, 정말 드문 경우입니다. 지난 주 새벽에 내내 말씀드린 것처럼 죄는 모두 죄이며 모든 것이 심판의 대상입니다. 어떤 것은 일벌백계 어떤 것은 눈가림, 불가합니다. 그 자체가 이미 인간의 교만이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영적 부패함입니다. 오늘도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가 발생하면 반드시 죽습니다. 하나님나라를 모욕하고 성령의 사역을 훼방하는 일이 다시 반복된다면 예외는 없습니다. 여러분, 실상 일벌백계라는 말을 하나님의 심판에 사용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와 직결될 수 있음에 유의하십시오. 그럼 오늘은 왜 이러지 않느냐?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이유, 그것은 오늘날 그 어떤 교회도 초대교회와 같은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나라를 경험하고 선포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교회와 성도가 초대교회와 같은 성령의 역사를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있기에, 모두가 이 이야기들을 먼 과거의 전설로 받아들인 채, 전혀 자신의 삶으로 인정하지 않기에, 다시 말해, 자신의 삶의 토대를 흔드는 이 하나님나라의 능력이 전혀 성취되지 않기에, 그 일을 훼방하는 일도 없으며, 그에 대한 합당한 심판은 더더욱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 거기 훼방도 있고, 또 훼방이 있어야 심판도 있는 겁니다. 강력한 하나님의 책망은 그 공동체의 수준을 반증하기도 합니다. 아예 포기한 백성에게 벌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졌는데, 성령이 거기 소멸되어 없는데, 무슨 성령 훼방이 가능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엄밀히 말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시험하고 성령을 속이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경제적 토대는 모두 사탄의 것으로 내버려둔 채 그게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나님을 속인 채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에게 이 본문이 더욱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진짜 이유인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은 물론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비극이지만, 이 일들이 그저 과거의 일벌백계로 남아 나와 무관한 것이라 치부되는 것보다는 덜 비극적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본문을 가벼이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러분의 마음, 하나님을 날마다 시험하는 여러분의 신앙의 근본적인 잘못을 회개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교만한 여러분의 마음을 돌이키십시오. 이 말씀이 앞으로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의 시금석과 같은 사건으로 남아,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을 속이거나, 시험하거나, 성령을 훼방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귀한 말씀이 되길 원합니다. 아울러 이 일이 일어나지 않는 우리 교회를 향해 여러분의 가슴을 치십시다. 만약 오늘날 어떤 교회와 어떤 성도들이 초대교회와 같은 일들을 꿈꾸고 기대하며 기도하고 그렇게 자신의 삶을 말씀 앞에 복종하기로 결단한다면, 저는 단언하건대 이와 같은 일들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부디 이 말씀을 우리 교회를 향해 주시는 경고의 메시지와 소망의 메시지로 동시에 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나라를 꿈꾸고 이 땅에서 이루어 감으로써 이 말씀이 우리에게 꼭 필요해져서, 언젠가 다시 이 본문으로 여러분께 설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디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그분의 나라를 이 땅에서 온전히 이루어가는 저와 여러분, 고백교회가 되십시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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