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2022년 2월 6일 주일 설교)
2022-02-06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7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주현절 후 다섯 번째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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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46~56,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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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강해 5) 본문 48절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삶으로 고백되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이던 시절, 제가 몹시 부러워하고, 또 시샘하기까지 했던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늘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던 어떤 똑똑한 친구도 아니었고, 항상 많은 친구들에 둘러싸여 대장 노릇을 하던 제 짝, 반장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때 부반장이었는데요, 그 사교성 좋은 반장의 그늘 아래서, 관계의 부스러기를 잘도 받아먹었던 기억이 납니다만, 아무튼) 제가 가장 부러워했던 친구는, 학교에서 시를 잘 쓰기로 유명했던 한 친구였습니다. 지금은 이름조차 기억이 희미하지만, 여전히 그의 얼굴과 모습은 또렷이 기억나는데요, 작은 키에 조금 통통한 체구, 그리고 조금은 말이 많고 행동이 부산했던, 그래서 시인이나 문학 소년의 전형적인 이미지와는 너무 거리가 먼 그런 아이였습니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학교에서 열리는 거의 모든 백일장의 1등을, 언제나 그 친구가 도맡아 했습니다. 국어 선생님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여서, 가끔씩 수업시간에 그의 시를 감탄하며 읽어주시던 그런 기억도 납니다. 처음엔 그 친구가 그런 시를 썼다는 게 너무 신기해 하다가, 나중엔 아마 다른 사람이, 엄마나 아빠가, 누나가 대신 써 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생각도 했습니다. 그만큼 시샘이 났고, 또 화도 나고 그랬습니다. 저도 좀 시를 잘 써봤으면 좋겠다, 싶어서 문학 선생님을 따로 찾아가보고 이래저래 여러 노력도 해봤는데요, 저는 1등은커녕 입상 한 번 해보지를 못했습니다. … 그런데 제가 상을 못 받은 것보다 더 답답하고 화가 났던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아무리 읽어보고 또 생각해봐도, 제가 쓴 시와 그 친구가 쓴 시의 차이를 저는 도통 모르겠는 겁니다. 뭐가 좋은 시인지조차 이해를 못하고 있었으니까, 좋은 시를 쓸 수 없는 건 당연했겠지요. 참 답답한 노릇이었지만, 그때부터 생각을 고쳐먹게 됐습니다. ‘아, 내가 좋은 시를 쓰는 건 어렵겠구나. 우선은 그냥 시를 좋아하고, 또 좋은 시를 분별하고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실력을 좀 키워야겠다.’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실 저는 오늘 이 마리아의 노래를 보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낍니다. 아마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던 그 시인 친구와 오늘 마리아가 거의 동년배일 텐데요, 그래서인지 마치 그때 느낀 여러 감정이 되살아나는 듯한 그런 경험도 하게 됩니다. ‘이거 정말 마리아가 쓴 거 맞아? 누가 대신 써 준 거 아니야? 마리아가 노래하는 이 하나님을 과연 나도 지금 동일하게 경험하고 있고, 정말 그런 하나님을 나도 믿고 있나? … 이렇게 쓸 수는 없더라도 다만 공감하고, 좋아하고, 즐겁게 이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을까?’ 등등 여러 질문이 뒤따라오는데요,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시라는 게 원래 공부하고 나면 오히려 그 감동이 덜해지는 경우도 있는데요, 부디 이번엔 그러지 않기를 바라면서, 함께 본문 안으로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마리아는 노래를 시작하면서,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고, 내 마음이 하나님을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 46절에서는 ‘영혼’[프쉬케]이 노래하고, 47절에는 ‘마음’[프뉴마]이 기뻐하는데요, 내 영혼과 마음 전부가, 그러니까 자신의 모든 존재가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한다는 뜻입니다. 그냥 입술만 움직여 노래하는 게 아니라, 그냥 별 생각 없이 흥얼거리는 게 아니라, 전심을 다해, 온 마음과 정성으로 하나님을 노래한다는 거지요. 아마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찬송, 황소를 제물로 바치는 것보다 더 귀한 찬송이 바로 이런 걸 겁니다. 자신의 삶을 통해 경험한 하나님을 진실하게, 실존적으로, 전 존재로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이지요. 저와 여러분의 예배가, 모든 찬송이 꼭 이러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고백하는 것이,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하나님이 돌보셨다고 말합니다. 여종의 비천함을 하나님이 돌보셨다, … 아마 이때의 비천함은, 자신의 삶과 신앙, 두 가지 차원 모두에 해당되는 이야기일 겁니다. 나사렛, 그 이름 없는 시골에 사는 지극히 작은 소녀의 비천함, 그래서 당시엔 사람 숫자를 셀 때조차 포함되지도 않았던 그런 존재의 비천함이지요. 오늘 우리는 공감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데요, 흙수저 중의 흙수저인 거지요? 미래에 뭐가 될 수도 없고, 꿈을 꿀 수도 없는 그런 단단한 유리천장 밑에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비천함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어떤 영향력도 끼칠 수 없고, 뭔가 좋은 기여를 할 가능성도 아예 배제된,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그런 비천함. 지난주 심 목사님의 설교 본문의 다말처럼,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것 외에는 스스로의 삶조차 지탱할 수 없는 그런 실존적인 비천함에 대해 마리아는 이야기합니다. … 아울러 이것은 동시에, 자신을 하나님의 여종이라고 고백한 어떤 신앙적 비천함과도 관련이 있겠지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했던 것, … ‘여종’이라고 표현했지만, 실은 이 [둘레]라는 헬라어는 결국 ‘여자 노예’라는 뜻이지요. 주인의 말에 전적으로 순종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모든 운명과 생사화복이 그 주인에게 달려 있는, 그런 비천함. 물론 이것은 자발적인 비천함이기에, 앞의 실존적인 비천함과는 좀 다르겠습니다만, 어쨌든 마리아는 그런 비천한 자신을 하나님이 돌보셨다고[에피블레포] 노래합니다. 돌보셨다, 이 단어는 본래 누군가에게로 눈을 돌려서 주목하여 본다는 뜻인데요,
그렇게 하나님이 자신을 주목하여 보신 결과가, 자신에게 큰일을 행하신 것이지요. 49절 이하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그녀에게 큰일을 행하심으로써,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친히 사용하시고 만세에 복이 되게 하셨다고, 마리아는 노래합니다. 세상의 부와 권력과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처럼 비천한 자를 돌보심으로써, 그렇게 세상을 구원하셨고,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은이 거룩하시다, 49절에서 말합니다. 여러분, 마리아가 이해한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낮은 자를 높이시고, 겸비한 자를 존귀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함이라고, 그것이 자신이 직접 경험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라는 겁니다. …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하나님도 그런 분이 맞습니까? 여러분도 그런 하나님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아직 경험은 못했지만, 적어도 믿고 공감하실 수는 있으십니까?
그런데 50절부터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게 흘러갑니다. 여러분, 49절까지의 내용과 50절 이후의 내용 사이에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인지 한 번 찾아보시겠습니까? … 네, 문장의 대명사가 바뀝니다. 앞에서는 ‘나’에게 초점이 맞춰진 1인칭의 이야기라면, 뒤에서는 ‘어떠어떠한 사람들’ 즉 3인칭의 이야기입니다. 앞에서는 ‘나’에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찬송한다면, 뒤에서는 ‘나’를 넘어서, 나와 비슷한 사람들, 나처럼 비천한 자들, 그들을 높이시는 하나님, 반대로 교만하고 권세 있고 부자들은 낮추시는 그런 하나님을 찬송하는 거지요. 이런 걸 보통 ‘일반화’라고 얘기합니다. 나에게만 그런 게 아니라, 모두에게 해당되는 그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나중에 54절 이하, 노래의 마지막 부분으로 가면,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이야기로까지 확장됩니다. 이스라엘도 나처럼 비천하다. 수백 년간 나라 없이 종살이하는 비천한 민족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종이다. 그러니 이스라엘에게도 나에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돌보실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대로, 하나님의 성품대로, 반드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좋은 것으로 배불리 먹이시고, 반드시 높여주실 것이다. 나를 보니까 이제 알겠다, 마리아는 지금 그렇게 노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실로 대단한 고백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것이 열다섯 살 소녀의 노래라는 것이 솔직히 좀 놀랍지 않습니까? 이거 정말 마리아가 다 쓴 게 맞을까요? 혹시 엘리사벳이 대신 써준 거 아닐까요? 아직 경험도 일천하고, 제대로 성경이나 글을 배울 기회도 없었을 텐데, 과연 이걸 마리아가 직접 썼다고 여길 수 있을까요? … 실제로 많은 학자들이 이것은 마리아가 직접 쓴 노래가 아닐 거라고 얘기합니다.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이 마리아를 생각하며 지어 부른 노래에, 마리아의 이름만 가져다 붙였다, 도저히 마리아 혼자 썼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야기하는데요,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런데 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리아가 썼을 것 같습니다. 앞서 제 고등학교 친구의 이야기도 했습니다만, 열다섯 시인이 왜 불가능하겠습니까? 더구나 성령으로 충만했던 마리아이고, 또 천사의 말에 대해서 깊이 숙고하던 마리아가 아닙니까? 자기 자신과 엘리사벳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주목하고, 성령의 감동으로 그것을 해석한 결과가 바로 이 노래, 이 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마리아의 노래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말씀드린 것처럼, 마리아는 단지 자기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어떤 큰일, 그것만을 노래하는 데 머무르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만 갇혀 계신 그런 하나님이 아닌 거지요. … 여러분, 내가 하나님을 기뻐하고 노래하는 것과, 그것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고, 누구나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차원의 신앙입니다. 단지 1인칭에 불과한 신앙고백, 여러분 그것은 때론 위험하지요. 성경이 말씀하는 진짜 하나님의 모습이 아닐 수도 있고, 때론 자칫 우상으로 빠질 수 있습니다. 참 된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 내가 원하고, 내가 만든 어떤 다른 하나님을 믿고 노래하는 거지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그런 찬양 좀 그만 하라고 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기뻐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도 기뻐하시는 그런 신앙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하고, … 그래서 우리의 1인칭 고백을 우리 모두 인정할 수 있는 3인칭의 고백으로 바꿀 수 있느냐, 이게 대단히 중요한, 신앙적으로 성숙한 성도의 고민인 것입니다. 나에게 좋은 것을 주셨으니 하나님은 좋은 분이다, 이건 온전한 게 아니지요. 그것이 신앙의 한 출발점은 될 수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그 지평을 넘어서, 하나님이 본래 이런 분이시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이러하시다, 그 하나님을 나는 기뻐하고 찬송한다, 여기까지 갈 수 있어야만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요즘 아이들은 좋은 말을 듣는 게 아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의 말을 듣는다.” 아이들이니까 그게 한편으로는 당연한 얘기인데, 다른 한편으로 보면 대단히 위험한 일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결국 아이들은, 자기 귀에 즐겁고 자기가 원하는 얘기만 듣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신앙적으로도 똑같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 내가 원하는 하나님, 나에게 익숙하고 편안한 그런 말씀, 여기에만 늘 마음을 두고, 거기에만 집중된 신앙은, 결국 아직 성숙하지 못한 신앙일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자칫하면, 그냥 내가 만든 하나님, 나의 우상을 섬기는 신앙으로 전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큰 연약함이 그런 거지요. 신앙의 열정과 열심은 특별하지만, 좋은 말,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아니라, 단지 자신이 좋아하는 하나님을 향해 열심을 내고, 그렇게 자신들이 원하고 바라는 하나님을 만들어 찬송하고 경배한 세월이 너무 오래됐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떻게 세상을 구원하시고, 어떻게 일하시는지, 거기엔 별로 관심이 없고, 오직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해 주시는가, 무슨 좋은 걸 주시는가, 그것만이 신앙의 전부가 되어버린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마치 자기 집 신주단지 모시듯, 자기만의 하나님을 믿고 노래하는 겁니다. … 여러분, 일본에 가면 집집마다 다 자기들이 믿는 신이 따로 있고, 그 신을 모신 작은 제단들이 집안에 있지 않습니까? 형태만 다를 뿐 우리도 그런 식인 거지요. 나와 내 가족의 우상으로, 우리 교회의 우상으로, 나에게만 잘해 주시면 그냥 좋은 하나님이고, 나에게만 잘해 주시면 그냥 그게 성경의 하나님이라고 착각하는 우(愚)를, 저와 여러분도 얼마든지 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열다섯 소녀의 눈에 비친 하나님. 마리아가 경험한 하나님, 1인칭을 넘어 3인칭으로 고백하는 마리아의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은 흩어버리시고, 권세 있는 자는 위에서 내리치시고, 부자는 빈손으로 되돌려 보내시는 분, … 가난하고 비천하고 아프고 상한 사람들을 편 들어 주시고, 그들을 찾아가 위로하시고, 회복시키시고, 바로 그들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심으로써, 그들을 존귀하게 하시는 분, 그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그것이 참 하나님의 진면목이라고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고 보면, 앞서 엘리사벳도 비슷한 차원의 이야기를 했던 겁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바로 앞에는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축복한 내용이 있는데요, 45절을 잠깐 다시 보시고, 우리 함께 읽어봅시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아멘) 여러분, 여기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가 누굽니까? 네, 당연히 마리아를 가리키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엘리사벳은 ‘마리아’라고도 안 하고, ‘네가 복이 있다’라고도 안 하고,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라고 좀 이상하게 표현합니다. 2인칭이 아니라, 역시 3인칭이지요. 단지 마리아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게 믿고 있는 모든 자들이 복 되다, 이렇게 축복한 겁니다. 그저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서로를 치켜세워준 게 아닌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축복하는 초점이 어디 있는가, 그것도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마리아가 왜 복되다는 것입니까? 그녀가 믿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녀가 단지 ‘주의 어머니’로 택하심을 입었으니 복 되다, 하나님이 너를 높여주시고 존귀하게 하시니, 너 참 좋겠다, 이게 아니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믿음이 참으로 복되다고, 마리아의 ‘믿음’을 정확하게 축복합니다. … 적어도 우리가 교회에서 나누는 축복이 이래야 되는 거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다른 게 복이 아니라, 건강하고, 돈 많이 벌고, 잘 나가고, 뭐 이런 게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참으로 신뢰하고, 그래서 그 말씀을 좇아 순종하며 살아가는 당신! 당신은 정말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반드시 그 믿음대로 당신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축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저 하나님이 건강 주시고, 물질 주시고, 높여주셔서, 그래서 참 복 되다, 여러분 적어도 교회에서는 그런 말, 잘 가려서 하셔야 합니다. 그게 진짜 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것들이니까, 잘했다, 애썼다, 좋겠다, 이렇게 말해주면 그걸로 족합니다. 그게 정말 하나님의 복이냐, 그건 모르는 일이지요. 성경은 다른 복에 대해서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지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자, 그들이 복되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런 축복의 말은 없고, 그저 세상이 하는 얘기들만 반복한다면,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 모여 있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박노해라는 시인이 쓴 시 하나를 제가 잠시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새벽녘 팔순 어머니가 흐느끼신다. 젊어서 홀몸이 되어 온갖 노동을 하며, 다섯 자녀를 키워낸 장하신 어머니. 눈도 귀도 어두워져 홀로 사는 어머니가, 새벽기도 중에 나직이 흐느끼신다. / 나는 한평생 기도로 살아왔느니라. 낯선 서울 땅에 올라와 노점상으로 쫒기고, 여자 몸으로 공사판을 뛰어다니면서도, 남보다 도와주는 사람이 많았음에, 늘 감사하며 기도했느니라. 아비도 없이 가난 속에 연좌제에 묶인 내 새끼들. 환경에 좌절하지 않고 경우 바르게 자라나서, 큰아들과 막내는 성직자로 하느님께 바치고, 너희 내외는 민주 운동가로 나라에 바치고, 나는 감사기도를 바치며 살아왔느니라./ 내 나이 팔십이 넘으니 오늘에야, 내 숨은 죄가 보이기 시작하는구나. 거리에서 리어카 노점상을 하다 잡혀온, 내 처지를 아는 단속반들이 나를 많이 봐주고, 공사판 십장들이 몸 약한 나를 많이 배려해주고, 파출부 일자리도 나는 끊이지 않았느니라. 나는 어리석게도 그것에 감사만하면서, 긴 세월을 다 보내고 말았구나./ 다른 사람들이 단속반에 끌려가 벌금을 물고, 일거리를 못 얻어 힘없이 돌아설 때도, 민주화 운동 하던 다른 어머니 아들딸들은, 정권 교체가 돼서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어도, 사형을 받고도 몸 성히 살아서 돌아온, 불쌍하고 장한 내 새끼 내 새끼 하면서, 나는 바보처럼 감사기도만 바치고 살아왔구나. 나는 감사한 죄를 짓고 살아왔구나./ 새벽녘 팔순 어머니가 흐느끼신다. 묵주를 손에 쥐고 흐느끼신다. 감사한 죄. 감사한 죄. 아아 감사한 죄.”
팔순 노모의 이 고백이, 오늘 어린 마리아의 고백과 잇대어 울리지 않습니까? 이 시의 제목이 ‘감사한 죄’인데요, 여러분 우리도 이 감사한 죄를 늘 짓고 살지 않습니까? 나는 괜찮고, 나는 넉넉하고, 나만은 살아있는, 그런 현실에 대한 감사. 물론 그런 감사조차 잊고 살 때가 있어서 더 문제긴 합니다만, 정작 우리는 그런 감사에만 안주한 채, 그렇게 나만의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송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 우리 교회도 마찬가질 겁니다. 자칫하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엉뚱한 고백들을 서로 나누고, 그래서 점점 더 하나의 확신처럼 그 고백이 굳어져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늘 경계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진짜 하나님의 모습은 무엇인가, 늘 하나님의 말씀 앞에 깨어 있고자 힘써야 할 겁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진지하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마리아의 시에 대해 얼마나 공감하고, 또 그녀가 말한 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얼마나 신뢰하고 계신지, 정말 이런 하나님을 여러분은 믿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비천한 자를 돌보시고 세상의 복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는 하나님. 마음이 교만한 자를 흩어버리시고, 권세 있는 자는 내려치시고, 주리는 자는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시는 그런 하나님. 여러분은 그 하나님을 정말 실제적으로 믿고 살아가십니까?
어떤 분은 이것이 종말에 이루어질 구원의 모습일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때,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힘없고, 배고팠던 사람들이, 주님 앞에서는 부요하고, 존귀하고, 배부른 자들로 설 겁니다. 이 땅에서 높았던 사람들의 낮아짐을 우리는 보게 되겠지요. 종말에 가서는 우리 모두가 그런 하나님을 경험할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 땅에서, 현실적으로 그러하냐, 그걸 경험하고 노래하고 있느냐, 이것은 다른 문제일 겁니다. … 혹시 여러분은 이런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아니야, 세상은 그렇지 않아. 내가 살아보니까, 비천한 자는 끝까지 비천하고, 권세 있는 자는 끝까지 높은 곳에 있어.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부자는 더 부자가 되는 게 세상 이치야. 교만한 자들은 흩어지지 않고 잘 살더라. 이건 그저 종말에나 오는 세상에 불과하다.’ 혹시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저도 때로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 게 맞나? 그렇다면 세상이 왜 이럴까, 그런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너무 크고 하나님의 인내를 도저히 인간이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아마 여기서부터는 믿음의 문제가 되겠지요. 과연 믿고 살아내어 경험할 수 있느냐, … 오늘 새벽에 묵상한 QT 본문이 나사로의 소생 이야기더라고요. 무덤에 묻힌 나사로를 주님이 살리시기 전에, 옆에 있던 마르다에게 말씀하지요.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대답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그때에는 오라비가)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다시 묻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우리에게도 부디 그 믿음이 있어서, 그 믿음의 현실을 경험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엘리사벳이 했던 그 축복의 말을 해줘야 합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 그 믿음을 가지고, 그 말씀대로 사는 자에게 복이 있으며, 그런 사람들을 통해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은 이 땅을 구원하고 계신다, 우리 자신에게도, 또 서로에게도, 끊임없이 고백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여러분, 이 편지를 받아서 읽었을 데오빌로를 잠깐 생각해봅시다. 이 노래를 듣고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꽤 큰 충격을 받았겠지요? 누가가 ‘각하’라고 치켜세운 데오빌로 아니었습니까? 분명 꽤나 큰 권력을 가진 자였을 겁니다. 로마의 중요한 인물이었겠지요. 그런데 마리아는 그 권세가 그리 오래 못 갈 거라고, 권세 있는 자를 하나님이 내리칠 거라고, 그렇게 노래하고 있으니, 이거 참 심각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닌 거지요. 권세 가졌다는 당신, 부요하고 배부른 당신, 이제 어떻게 할래? 임박한 하나님나라 앞에서, 어떻게 살아갈래? 대놓고 도전하는 노래입니다. 만약 데오빌로가, 그의 이름처럼,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자였다면,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겁니다. 교만하면 안 되겠구나, 권세 있다고 함부로 까불면 안 되겠구나, 이 땅에서만 부자로 살면 안 되겠구나, … 그랬다간 정말 큰일 나겠구나, 두려운 마음이 들었을 겁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여러분도 이 노래 앞에, 어떤 비슷한 두려움이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 혹시 여러분, 이 노래를 기쁘게 부르실 수도 있겠는지요? 여러분의 하나님이 이런 분이셔서 정말 기쁘고 감사하십니까? 그렇다면 더 다행입니다. 이 노래는 결코 누구나 좋아할 노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호불호가 명확히 갈리는 노래이지요. 원래 하나님이 누구나 좋아할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게나 인기가 많던 예수님이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신 걸 보면 알 수 있지요. 이 노래를 기뻐하고, 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은총입니다. 더 나아가 이 노래가 믿어진다면, 금상첨화이겠지요. 현실을 바라보고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이렇게 큰일을 이루고 계신다고 믿는다면, 그는 분명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시인이 되어, 누구나 다 좋은 시, 아름다운 시를 직접 쓸 수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을 겁니다. 다만 적어도 그런 시를 알아볼 수 있고, 공감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안목이 있다면, 그의 삶은 훨씬 더 풍요롭겠지요. 이왕 예수 믿고, 예수를 노래하며 사는 인생, 부디 저와 여러분의 삶도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우리의 노래를 누군가 함께 따라 부르게 될 날도 오겠지요. … 나의 노래가 아닌 우리의 노래, 다른 모든 마리아들이 함께 부를 수 있는 그런 노래를, 우리의 영혼과 마음으로 부르며 사는 그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https://www.youtube.com/watch?v=EocPmKwkzMA